또. 벌써 세 번째다.
유진은 술자리에서 벌써 세 번째 마주친 원영의 눈을 슬쩍 피했다. 이번엔 또 어떤 게 문제야, 내 주변에 남자도 없는데. 아, 조금 전에 앞에 앉은 남자 동기하나가 제 앞으로 콘치즈를 밀어준 게 문제인가? 그래 이거 같다. 먹지 말까. 괜히 먹었다가 또 네 번째 눈 마주치면 어떡하지. 아니 뭐 그러던지 말던지 내가 장원영 기분도 신경 써야 하나? 그냥 맥주를 원샷 때리고는 숟가락으로 콘치즈를 마구 퍼먹었다.
대각선으로 떨어져 있는 테이블에서 이 자리까지 레이더를 돌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 보이는데, 남미새는 다르긴 다른가보다. 유진은 세 번이나 눈총을 주는 원영에 혀를 내둘렀다. 우리 과에 유명한 남미새라더니 그동안은 팀플이나 여타 전공과목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어서 뭐 남미새라고 해봐야 얼마나 남미새겠냐 하고 애들이 씹는 얘길 한 귀로 흘렸었다. 복학하고 나서 주워들은 귀동냥 얘기밖에 없고 어차피 학번도 다르니까 딱히 마주칠 일은 없어서 애들이 과장한 거겠거니 했는데 과장이 아니었다. 고작 한 시간 남짓 앉아있는 동안에 남자 관련으로 세 번이나 눈총을 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든 남자의 관심을 지가 다 가져야 하는 관종 오브 관종에 여왕벌이라더니 뭐 저렇게까지.
처음 이 치킨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차림이 보통은 아니다 했다. 맨날 애들이 아주 생긴 거부터가 셀럽 납셨다고 수군거리는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는데도, 보자마자 쟤가 장원영이구나 하고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누가 학교 앞 치킨집에 저런 오프숄더를 입고 오는지 원영을 보고는 흡사 파리 패션위크인 줄 알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혹시 신촌에서 패션위크라도 열리는 줄. 아주 그냥 치마 길이가 한 뼘인 게 저 정도면 대학교에서도 선도부 제도를 도입해서 치마 길이를 단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남사스러웠다. 획기적인 저 스쿨룩이 임팩트가 어찌나 강했는지 술을 마시면서 자꾸만 다 드러난 어깨랑 내놓은 다리를 눈으로 고나리했다. 여자인 내가 이 정도로 시선이 갈 정도면 남자애들은 진짜 보통 아닐 텐데. 내가 학주였으면 30센치 자를 들고 다니면서 벌을 세웠을 거다. 이건 내가 너무 유교걸이라서 그런가. 저런 치마 길이도 남자애들한테 다 보기좋으라고 입고 다니는 거라는 다른 애들 말에 그래 뭐 그런 가치관의 소유자인가 보다 하고 말았다.
역시나 등장부터 원영은 전 방향으로 남자애들을 끼고 앉았다. 오빠가-오빠가- 하는 시커먼 남자애들 사이에서 적당히 잘 웃고 깍듯한 멘트도 잘 치는 것 같은 게 그래 너 남자 선배들이 좋아하겠다. 저런 생각을 하면서 앞에 앉은 진우 선배한테 술을 몇 잔 받아마셨더니 그걸로 첫 번째 눈총을 받았다. 아니 그럼 지가 여기 앉아서 진우 선배 술 마시던지. 누군 뭐 주는 술이 땡큐베리머치라서 받아마시냐? 어이가 없어서 슬쩍 째려보고 다시 쭉쭉 술을 마시니까 빤히 보면서 지도 쭉 원샷을 했다. 아이돌 뺨치게 그려진 아이라인이 날카롭다 못해 시선도 날카로워서 아주 그냥 베이는 줄 알았다. 예쁘면 다냐. 남자애들한텐 예쁘면 단 거 같긴 하다만.
" 유진이는 순살이랑 뼈 있는 거 중에 뭐 좋아해? "
" 어... 순살이요. 뼈가 더 맛있긴 한데 발라먹기 귀찮아요. "
" 나랑 완전 똑같네. 이 정도면 통한 거 아니냐? "
시덥잖은 스몰톡을 던지는 진우 선배 말에 어물쩍 웃어주고는 마저 소주를 한 잔 받아마셨다. 유진이 좋아하니까 오빠가 순살로 시켜주겠다고 하는 거를 그냥 네네 하고 치킨을 먹는데 눈총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또 왜?? 순살치킨 먹는 게 뭐! 어이가 없어서 같이 노려보려다가 아뿔싸 이것도 남미새 촉에 내가 지금 눈총 받는 건가 생각했다. 진우 선배가 그거 뭐 순살이니 뼈니 물어본 거 아무것도 아닌 그걸로 째려볼 일인가. 정말 남미새의 마인드는 남다르구나. 진짜 저 정도면 지가 진우 선배랑 얘기하면 될 거 같은데, 또 저 대각선 테이블에서 전 방향으로 남자 선배들을 끼고는 꼼짝을 안 했다. 자기한테 남자들이 알아서 걸어오라는 것도 아니고 뭐야.
" 저는 뼈 있는 거 좋아해요- "
저 멀리서 여기까지 다 들리게 하는 저 말에 경악했다. 살살 웃으면서 말하는 끼부림이 미쳤다. 진우 선배가 일어서서는 원영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슝 하고 바람같이 날아갔다. 정말 남자들이 엉덩이 가볍게 잘도 알아서 장원영 옆으로 꼬여 들었다. 덕분에 마주 앉아있던 느끼한 면상을 치웠으니까 땡큐라 해야 하나. 쟤는 저런 남자 선배들을 어떻게 끼고 노는 거야. 비위도 좋지.
" 언니, 제가 뭐랬어요. 장원영 장난 아니랬죠. "
귀에 대고 학과 후배 여자애가 소곤소곤 얘길 했다. 쟤 원래 술자리 안 나오는데 오늘 남자애들 많이 나와서 그런가. 암튼 보통 아니죠 진짜. 그래, 보통은 아니다. 일단 비위가 좋다 쟤가. 유진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남자 선배들이 다 비워지자마자 원영에게서 오던 시선은 뚝 끊겼다. 역시 테이블에 남자가 사라지니까 더 이상 여기에 가질 관심이 없나. 어느새 유진이 앉은 테이블은 유진이랑 얘길 나누고 싶은 여자애들만 가득해졌다. 언니 알바 어디에서해요, 언니 무슨 강의 들어요. 술 마시러 왔다가 인터뷰하고 있는 꼴이다. 옆에 앉은 후배 하나가 자기 전 남친 얘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복학하는 유진한테 이런저런 학교 돌아가는 거 알려주는 후배인 지현이었다.
" 저 장원영 때문에 전 남친이랑 헤어졌잖아요. "
비가 어마어마하게 오는 날에 전 남친이 우산 없는 자기는 신경도 안 썼으면서 십 분 거리 전공관에 있는 장원영한테는 우산을 갖다줬단다.
" 그건 그냥 네 전 남자 친구가 이상한 애 아니야? "
장원영이 갖다 달라고 한 건 아닐 거 같은데. 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 걔랑 저랑 과 CC로 유명했는데 그걸 거절해야지 넙죽 받는 여자가 이상한 거죠. "
대충봐도 눈치 백단인 것 같은 원영이 그 우산을 넙죽 받았으면 뭐, 지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래도 걍 그 남자애가 백배는 더 이상한데. 씩씩 거리는데다 뭐라 더 말하기도 뭐 했다.
" 제 전 남친이 쟤한테 우산 갖다준 날 우산을 거의 다섯개? 받은 걸 저 아는 애가 봤대요. "
장원영은 남자애들한테 우산 가져다 달라고 하려고 우산을 일부러 안 들고 다닌단다. 머릿속에서 잘 상황이 그려지질 않았다. 우산을 다섯 개?
" 난 우산 다섯 개 받으면 극혐일 거 같은데. 버릴 수도 없고. "
남자애들은 하여튼 자기들만 좋으면 장땡이라니까. 받는 사람 생각도 안 하고 자기들 감정만 배설해. 머리는 하나고 손도 달랑 두 갠데 우산 다섯 개 주면 뭐 어쩌라고. 일단 나는 줬으니까 됐다? 이런 거냐 열등한 새끼들. 그래놓고 거절하면 싸가지없다고 씹었을걸. 수준 빤한데.
" 남자들이 다 그렇죠 뭐. 언니는 일반인이니까 그런거고, 쟨 남미새잖아요. 암튼 여자애들이 쟤 다 싫어해요. "
그런가. 남미새는 또 그렇게 사고방식이 다른가. 하긴 뭐 좀 전까지 내내 테이블에 남자애들 하나하나 다 신경 쓰는 거 보면 완전 다른 구조의 인간형인 것 같기도. 속으로 갸웃거리다가, 여기 테이블에서 하는 말이 저기까지 안 들리려나 옆에 앉은 지현의 목소리가 작진 않았다. 슬쩍 원영쪽을 보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지금 이 테이블에 남자애 없는데... 그럼 말을 다 들은 거 아닌가. 민망해서 금방 시선을 피했다.
유진이 아이스크림 사러 나간다는 말에 남자 선배들 몇몇이 따라나섰다. 딱 보니까 담배 피우러 나가려는 것 같은데 딱히 담배가 땡기지는 않아서 대충 얼버무려서 담배 무리와 거리를 벌렸다. 편의점에서 스크류바 하나 사서 입에 물고는 슬슬 돌리면서 먹었다. 술만 들어가면 하드가 땡기는거는 술버릇인가. 춥춥 빨수록 입안이 시원하고 달달했다. 내가 좋아하는 딸기 맛 사과 맛. 냠, 스크류바를 입에 물고는 편의점 앞에 서서 다시 술자리로 돌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다시 들어갈까 말까. 더 취하기 전에 슬쩍 도망가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스크류바 하나를 다 먹을 때까지 결정을 못하고 땡기지 않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요거 딱 한대만 태우고 걍 들어가야지. 담배를 끊겠다고 마음 먹은 거는 다음 주로 미뤄야겠다.
" 선배, 담배 있어요? "
나른한 목소리에 돌아보니까 장원영이었다. 언제 나왔대. 아까 남자 선배들 나올 때 따라 나왔나. 뭐, 그럴 만도 하지. 원영은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서는 유진이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빤히 보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줬다.
" 불은요? "
담배 주니까 불도 내놓으라 하네. 말도 싹수없는 말투로하고.
" 너 나한테 담배 맡겨놨냐. "
황당해하면서 쳐다보는데 빤히 유진을 쳐다본다. 얼굴 뚫어지는 줄. 참 안 어울리게도 새빨간 립에 하얀 담배를 물고 있는 원영을 보니 이런 건 또 어떤 맛으로 남자애들이 좋아하나. 아까 멀리서 볼 때는 볼 때문인가 귀여운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또 반쯤 나른하게 눈이 풀려서 담배를 물고 있는 게 다른 느낌의 끼부림이다. 여기 근처 어디에 남자 선배들이 있나 쓱 주위를 둘러보니까 맞은편 골목 안에 둘셋 모여서 담배 피는 게 보인다. 그럼 그렇지. 저 무리를 따라 나왔나 보구만.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뒤져서 건네는 것보다 더 빠르게 가까이 얼굴이 다가왔다. 유진의 담배 끝에서 원영의 담배 끝으로 빨간 점이 닿았다. 놀라서 살짝 물러나려는데 뒤로 물러날 수도 없게 유진의 뒷목을 살짝 잡는다. 맨살에 닿는 차가운 손 때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훅- 하고 장미 향 같은 게 들이쳤다. 흙을 털어내지 않은 마른 장미 향 같은 거. 얼떨떨하게 코 앞에 눈을 쳐다봤다. 느리게 깜박거리는 눈이 마주해왔다. 매캐한 연기로 눈앞이 흐렸다가 잡혔던 걸 떨쳐내고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 깜짝아. "
" 뭘 놀래요. "
뭘 놀래냐니. 이름만 겨우 아는 사이에 누가 담뱃불을 이런 식으로 붙여. 하도 일상이 끼부림이라 그런 감이 없는 애인가. 남자애들한테나 이럴 것이지. 뭐라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원영은 맞은편 골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느새 남자 선배들 사이에 뒤섞여서 웃음을 주고받고 있었다. 우리 과에 장원영 말에 5분 대기조인 남자애들이 한 트럭이라던데. 꺄항- 하는 원영의 웃음소리에 맞춰서 남자애 하나가 원영에게 아이스크림 같은 걸 내밀었다. 생김새가 멀리서 봐도 대충 하겐다즈 그런 거다. 입맛도 패션만큼이나 고급이네. 원영이 먹고 싶었던 게 이거야? 능구렁이 같은 남자애들 목소리를 들으니까 정말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뭔가 기분 탓인지 원영이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수강신청 정정 기간에 겨우 자리가 비어서 한 주 늦게 강의에 들어왔더니 이미 팀플 조는 다 정해져 있고 유진만 애매해졌다. 이미 다 조는 정해진 것 같고 이러다 혼자 하는 거 아닌가. 아, 드랍하면 졸업이 애매해서 드랍 할 수도 없는데 2인 1조로 팀플하는 걸 또 혼자 하면 빡셀 거 같고 머리만 긁적였다. 뭐 어떻게 조교님한테 얘기해볼 수도 없이 강의는 끝나고, 유진은 주섬주섬 가방을 쌌다.
" 팀플 조 없죠? "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가방을 싸던 유진 앞에 원영이 앉았다. 원영이 이 강의 듣는 줄은 몰랐어서 끔벅끔벅 너 이거 들어? 하고 얼버무렸다.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 원영은 의상이 패션위크였다. 이 계절에 블라우스에 단추를 두 번째 칸까지 풀고 다니는 게 정말 보통이 아니네. 치마도 여전히 한 뼘 길이만 한 게, 도대체 학교에 저런 치마를 왜? 란 생각만 들었다. 학교에는 카고에 대충 후드 걸치고 오는 게 국룰아닌가. 이건 내가 복학생이라 그런 거 같기도. 유교걸 센스가 또 발휘되서 진짜 쟤는 안 춥나 싶어진다. 지금 셔츠 안으로 속이 다 보일 거 같은 데 후배 애들 말마따나 남자애들이 저런 거 좋아하나. 참 알 수가 없다. 친한 사이였으면 옷 고나리를 톡톡히 했을걸. 괜히 시선으로만 셔츠며 치마며 고나리를 하고있는데 시선이 단추 어디쯤 머물렀을 때 갑자기 손을 들어올려서 단추를 하나 더 푼다. 벌어진 셔츠 틈으로 안이 훤히 보여서 깜짝아 하고 입 밖으로 뱉을 뻔했는데 겨우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더위를 타나 왜 저래.
" 뭐...정정 기간에 와서 별수 없지. 그냥 혼자 해야지. "
" 저랑해요. 저도 조 없어요. "
" 너도 정정 기간에 신청했어? "
" 아뇨. "
" 근데 조가 왜 없어. 지난주에 다 정했다던데. "
" 저랑 하기 싫어요? "
톡 쏘는 말에 흠칫했다. 아니 뭐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다 이미 조가 있다는데 왜 너는 조가 없냐... 그냥 단순한 궁금증이랄까. 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굴리면서 변명을 했다. 원영의 말투가 자꾸 톡 쏘는 탄산수 같은 게 딱딱했다.
" 애들이 저랑 하기 싫은가 보죠. 선배도 싫으시면 말구요. "
각자해요 그럼. 하고는 유진을 쌩 지나쳐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야. 하기 싫다고 한 것도 아닌데 엄청 찬 바람 부네. 여자들한테는 원래 저렇게 대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유진은 가방이나 마저 쌌다. 가방 지퍼가 고장 났는지 끌어올려도 잘 잠가지지 않는걸 고개를 처박고 끙끙대고 있었다. 이게 왜 이래. 가방 바꿀 때가 됐나. 학교 나오는 거에 돈 쓰는 게 제일 싫은데 극혐. 몇분간 가방 지퍼랑 씨름하고 있는데 누가 옆에 다시 와서 서는 걸 올려다보니까 또 장원영이다.
" 안 나오고 뭐해요? "
쌀쌀맞게 말하는걸 다시 한 귀로 흘리는데 저 아까 그렇게 가는데 나오지도 않고- 옹알이 하는 게 퍽 웃겼다. 남자애들은 너 그러고 가면 잡으러 따라 나가냐. 여자 선배한테 그런걸 왜 기대하는 거야 진짜 웃긴 애네. 입은 옷이나 뿌린 마른 장미향 향수에선 어른스럽게 굴고 싶은 티가 풀풀 나는데 틱틱대는 말투나 방금은 또 조금 어린애 같다.
적당히 가방을 수습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다음 강의가 뭔지 원영이 옆에서 나란히 걸어 내려왔다. 공강인 유진은 그냥 적당히 점심은 스킵하고 동방에서 낮잠이나 때릴 생각이었다. 한숨 자고 오후 강의 들으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은데. 수강 신청을 망해서 중간에 시간이 엄청 떴다. 복학하면서 느려터진 손가락으로 한 수강 신청이 만들어낸 극악의 시간표였다.
" 점심 안 먹어요? "
" 어, 나 공강이라 시간 많이 떠서 동방 가서 자려고. "
" 그럼 저는요? "
응? 너 뭐? 유진은 갸웃했다.
" 전 배고파요. "
" 그럼 넌 점심 먹어. "
" 선배는 안 먹는다면서요. "
" 나랑 같이 먹게? "
하- 됐어요. 원영은 아까 강의실에서 처럼 톡 쏘게 말을 하고는 휙 돌아서 저만치 앞서 걸어갔다. 정말 밥도 혼자 못 먹는 스타일인가. 저것도 오죽 남자애들이 같이 밥 먹자 커피 마시자 그랬으면 습관이 돼서 저러냐. 원영은 학관에서 볼 때도 주변에 남자애들을 우르르 달고 밥을 먹고 있다거나 걸을 때도 반경 3미터 안에 남자가 열 명이라거나 아주 주변이 남자로 화려한 여자애였다. 지현이가 그 사이 늘어놓은 장원영의 전적이 세상 엄청났다. 여지는 여지대로 주면서 또 확실하게 사귀거나 그러진 않아서 애타는 남자애들이 8톤 트럭이라던데. 누구 하나 남친으로 끼고 살면 수 많은 남자애들 시선 받는 거 챙김 받는 거 놓아야 해서 저러는 것 같다고 지현이 어제도 그제도 내내 원영을 씹었다. 그니까 이 대학교 캠퍼스가 거대한 장원영의 가두리양식장이라는 거다. 체력도 좋지, 양식장이 이렇게 크면은 진 빠지겠네. 장원영은 타고난 끼쟁이라 어장관리도 쉬울 거라는 말도 수두룩하게 들었다.
' 저렇게 끼 부릴 거면 그냥 아이돌 같은걸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아이돌은 끼 잘 부리면 천년돌 소리 듣기라도 하지. '
지현은 유독 원영 얘기할 때만 분노 게이지가 우상향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전 남친 이슈 탓이었다. 지현이의 전 남친이란 그 작자는 그렇게 지현이랑 헤어져 놓고 원영이랑은 잘 안됐는지 다시 와서는 걔가 꼬신 거다 나는 억울하다 꼬리치면 안 넘어갈 남자가 어딨냐 그 지랄을 했단다. 그건 지현의 전 남친이 이상한 놈인 것 같은데 이미 다 헤어진 마당에 아직까지 지현이 저렇게 화가 나 있는 건 또 잘 이해되진 않았다.
남의 남친 꼬시는 여자가 문제라고 하는걸 듣는데 장원영이 꼬신 게 맞긴 한가. 지현의 전 남친은 인스타에서 우연히 사진을 보니까 장원영이 꼬실 의지도 없게 생겼던데... 장원영이 눈이 바닥에 붙어있는 게 아니라면 뭐 그렇단 얘기다. 지현이는 전 남친이 다정하고 잘해주고 올바른 그런 사람이라고 했었지만, 올바른 사람이 딴 여자한테 10분이나 고생해가면서 우산은 왜 갖다줘? 그냥 예쁜 애가 예의상 웃어주는 거에 스스로 꼬여지는 이상한 놈 아냐? 란 말이 목 끝까지 찼다. 누가 봐도 전 남친에 미련이 철철 같은 지현한테 또 그 말을 하긴 뭐 했다.
그래도 뭐 지난번에 원영이 담뱃불 붙이는 걸 보니까 끼 부리는 게 적정 레벨은 훅 넘어서긴 했다. 다른 남자애들한테도 그럴 거 아니야. 남자애들은 그럼 그냥 홀라당 넘어갈 걸. 예쁜 애가 코앞에 얼굴 들이밀고 눈도 막 그렇게 나른하게 뜨고 그러면 일타쌍피정도는 되겠지. 여자인 나도 순간 흠칫했으니까 남자애들은 오죽하겠어. 그때 원영에게 잡혔던 뒷목에 손을 댔다. 엄청 소름이 막 돋았었는데 원영의 손이 차가워서 그랬었나.
혹시 점심 안 먹는 게 자기랑 먹기 싫어서 그런다고 원영이 오해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오해하면 곤란한데. 아까 은근 애 같던데. 내가 그래도 선배고 언닌데 체면이 있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원영을 따라잡으려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갔다. 키가 커서 그런가 엄청 걸음이 빠른지 순식간에 시야에서 없어졌다.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원영을 찾는데, 저 앞에 원영이 남자애들한테 둘러싸여 있었다. 지현이 말대로 점심 먹으러 가는 와중에 반경 3미터 내에 남자애들을 여러 명 달고는 식당 쪽으로 걸어갔다. 괜한 생각을 한 스스로가 머쓱해져서 그냥 동방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말썽이던 가방 지퍼가 또 말썽을 일으켰다.
열린 가방 문으로 우르르 책이랑 필기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정말 곤란하구만. 아침에 비가 좀 와있던 땅에 조금 전 강의 프린트물이 푹 젖었다. 종이가 엉망이 돼서 뭐라고 쓰여 있던 프린트물인지 알아볼 수도 없어졌다. 아, 과제 관련된 거 인데 진짜 망... 완전 지퍼가 떨어진 게 이따 집에 갈 때가 더 걱정이었다. 대충 지금은 싸매고 동방 올라간다 쳐도 이따 집 갈 때 어떡하냐. 진짜 완전 망했네.
각자 알아서 솔플하자고 했는데, 딱 둘만 비었는지 조교님이 원영과 유진을 한 조로 묶어 놓으셨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게 장원영이랑 나란히 앉아서 강의를 듣게 됐다. 그 며칠 새에 날씨는 금방 풀려서 하루가 갈수록 따듯해지고 있었다. 따듯한 날씨가 얹어진 지루한 강의에 하품을 하면서 시간 가길 기다렸다. 다리를 탁탁 떨었는데 갑자기 허벅지 위에 원영의 손이 얹어져서 깜짝 놀랐다. 다리를 그렇게 심하게 떨었나. 무의식중에 시선이 제 허벅지 위에 손에서 원영의 다 드러난 허벅지 위까지 갔다가 또 너무 맨살이라서 유교걸은 더 놀라 흠칫했다. 허벅지에 올려진 손 때문에 이게 뭔가 민망해하고 있을 때쯤 프린트물 끄트머리에 원영이 작게 뭔가를 끄적여서 유진에게 내밀었다.
[ 오늘도 점심 안 먹을 거에요? ]
[ ㄴㄴ 먹을거임 ]
내 허벅지에 손 좀 치워줄래 하고 추가로 적으려는 사이에 원영이 먼저 슥슥 적었다. 적으려고 몸을 유진 쪽으로 기울일 때마다 허벅지 위에 얹어진 손이 무게감 있게 눌러와서 자꾸 흠칫했다. 원래 허벅지 피부 신경이 이렇게 예민한 건지 원영이 손가락을 꼼지락댈 때마다 소름이 자꾸 돋았다.
[ 그럼 저랑 같이 먹어요. ]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써진 저 문장을 보고는 원영을 슬쩍 한번 쳐다봤다. 유진 쪽은 보지도 않고 정면에 교수님만 보고 있었다. 어쩌지 약속이 있는데. 약속 있단 말을 먼저 쓸걸 그랬나. 또 손이 꼼지락대서 발끝에 힘을 줬다. 다리 다신 안 떨어야지.
[ 제가 맛있는거 사줄게요. 같은 조도 됐으니까. ]
유진이 답을 쓰기도 전에 허벅지 위에 무게가 느껴지더니 원영이 먼저 쓱 하고 적었다. 성격 급하네. 지난번에도 점심을 피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그랬는데, 지금도 그렇게 보이면 어쩌지.
[ 미안. 선약있어. ]
저 문장 뒤에 피하는 거 아니고 원래 약속이 있던 건데 아까 처음에 못 썼다고 마저 쓰기도 전에 원영이 종이를 휙 가져갔다. 허벅지 위에 얹어져 있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강의가 끝나고 조별 과제 하려면 연락처도 필요하고 해서 원영에게 연락처를 물어보려는데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원영은 유진 앞에 프린트물 하나 툭 놓고는 찬바람 쌩 하고 나가버렸다. 파일로 깔끔하게 철이 된 거를 들춰보니 지난번에 가방 사태 때 떨어트려서 젖은 그 프린트물 같은데. 자기 걸 복사해서 준 건가. 내 프린트물 젖은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아... 이거 맛있는 건 내가 사야겠는데.
봄이 완연한 캠퍼스에 봄비가 내렸다. 젖은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고르지 못한 인도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낡은 전공관 건물 누리끼리한 외벽을 따라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진은 전공관 1층에 서서 비 오는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꽤 많이 오네. 우산 안 가져왔는데. 하필 신발도 잘 젖는 컨버스를 신고 왔는데 완전 낭패였다. 대충 쭈그려 앉아서 청바지 끝을 살살 접어 올렸다. 바지라도 좀 덜 젖어야 하니까. 우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리는 게 앞으로 더 거세게 내릴 것 같았다. 정문에서 고작 한 블록 떨어진 자취방이라서 어떻게 뛰어가면 생쥐 꼴은 피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리는 굵기가 보통이 아니어서 선뜻 내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담배나 한 대 태울까. 바로 옆에 휴지통을 끼고 섰다. 상황이 딱 담배 한 대 피우면서 기다리다가 뛰어야 할 것 같았다. 끊으려고 마음 먹었어서 더 사질 않았는데 가방을 뒤지니까 한 대 남아있었다. 이거 불을 붙여 말어.
" 불 줘요? "
소리소문 없이 옆에 온 원영이 유진에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하얀 손에 쥐어진 라이터가 꽤나 이질적이었다.
" 아니야. 끊으려고. "
" 제가 불 준다고 해서 갑자기 끊고 싶어진 건 아니구요? "
" 아닌데? 담배 냄새 나는 거 싫어져서 끊으려는 건데. "
그냥 쓰레기통에 담배를 던져넣고는 가방이랑 후드집업만 추스려입었다.
" 같이 써요. "
원영이 우산을 펼쳐 유진 옆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 우산 있어? "
" 전 원래 우산 매일 가지고 다녀요. "
남자애들이 우산 가지고 치근덕거리는 거 싫어서요. 전에 지현이가 원영이 우산 일부러 안 들고 다닌다고 했던 건 완전 잘못 된 정보였다.
" 아, 우산 다섯 개? "
유진은 무의식중에 얘기해놓고 흠칫했다. 원영의 눈치를 살피니 크게 신경 쓰진 않는 표정이었다.
" 다섯 개 아니고, 일곱 개에요. "
" 굉장하네. 그걸 다 어떻게 했어. "
" 뭘 어떻게 해요. 그러던지 말던지 그냥 두고 갔죠. 어차피 제 우산 있는데. "
앞에서 들고 서 있는 거 그냥 지나가면 되는 거라 어렵지도 않은데요. 그걸 생각하니까 그 상황이 적잖이 원영에게는 짜증 나는 상황이었을 것 같았다. 비 오는 날에 이미 자기 우산 있는 원영한테 남자애 일곱명이 우르르 뛰어와서는 앞에 둘러싸고 내 우산 쓸래? 한명 골라봐! 내꺼써 내꺼써- 이 지랄 했다는 거 아니야. 극혐이었겠네. 그걸 또 저 우산 있어서 알아서 갈게요. 이랬을 걸 생각하니까 퍽 웃겼다.
" 우산은 같이 쓸 거죠? "
밥도 같이 안 먹으면서 우산도 같이 안 쓸 거예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감사합니다 하고 쓰지 무슨 소리야. 너스레를 떨어놓고는 원영의 작은 우산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비가 내리는 게 추적추적도 아니고 아예 주룩주룩 이 되어서 완전 젖을 것 같았는데, 은근히 뽀송뽀송한 상태로 정문까지 걸었다. 오래된 캠퍼스 인도에 생긴 작은 물웅덩이를 긴 다리로 둘이 휙휙 넘었다. 예스- 나이스 타이밍. 키가 비슷해서 보폭이 비슷한 게 타이밍 딱딱 맞았다. 옆에서 원영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 치킨 먹을래? 지난주 프린트물 건도 있고, 우산도 고마우니까 내가 저녁 사줄게. "
정문 앞 버스정류장 근처 치킨집 앞에서 슬쩍 말을 꺼냈는데 곧바로 좋아요- 하곤 유진을 끌어당겼다. 원영에게 반쯤 끌려서 정문 앞에 치킨집으로 들어갔다. 고작 테이블 네개짜리 학교 앞 치킨집에서 마주 앉아서 이 어색함을 어쩌지 괜히 치킨 먹자고 한 거 아닌가 눈만 굴렸다. 저는 뽀송뽀송한데 원영의 가디건 왼쪽 어깨는 축축하게 젖어있어서 괜히 더 민망해졌다. 우산이 어째 둘이 쓰긴 좀 작다 했는데 저렇게 다 맞고 있는 줄은 몰랐다.
" 뼈있는 걸로 시킬까. 맥주도 시킨다? "
" 순살 먹어도 돼요. "
유진은 원영의 젖은 어깨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뼈 있는 치킨이랑 맥주로 그건 퉁 치자.
" 그거론 퉁치기 좀 그런데요? "
치킨무를 아삭아삭 먹다가 멈칫해서 원영을 쳐다봤다. 좀 그럴 건 또 뭐야.
" 다음 주에 강의 끝나고 저랑 점심 먹어요. 매일. "
" 매일? "
" 저랑 점심 먹기 싫어요? "
" 아니, 근데 나랑 점심 먹어도 돼? "
" 왜요? "
" 같이 먹는 애들 있는 거 아니야? 맨날 우글우글 학관 가던데. "
" 없어요. "
같이 먹자고 달려드는 애들은 있어도. 하고 원영은 말끝을 흐렸다. 아, 남자애들이 귀찮게 하나.
" 일종에 그럼 내가 구해주는 거네. 저 유진 선배랑 선약 있어서요- 이러고 날 써먹을 거야? "
" 뭐- 비슷해요. "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갓 튀겨나온 프라이드치킨이 앞에 놓였다. 원영은 한 조각 가져가서는 포크로 쓱쓱 살을 발랐다. 유진이 원영 앞으로 물티슈랑 휴지 같은 걸 놓아줬다. 손으로 잡고 먹으면 더 편하지 않아? 손에 묻는 게 싫어요. 하긴, 나도 묻는 건 싫어해.
" 저랑 밥 먹기 싫어하더니, 왜 마음 바뀌었어요? "
빤히 보는 눈이 이상하게 목이 타서 맥주부터 순식간에 마셨다.
" 그건 오해야. 너랑 밥 먹기 싫었던 게 아니고... 그냥 상황이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
첫 번째는 원래 동방에서 자려고 계획했었고, 두 번째는 네가 물어보기 전에 이미 선약이 있었는데 그걸 먼저 말한다는 게 못 말한 게 제 실수였다고, 유진은 앞에 놓인 뻥튀기를 집어 먹으면서 요목조목 짚어서 말했다. 아무튼 속상하게 만들었을 테니 그건 정말 미안해. 눈치를 슬쩍 보니까 원영의 표정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조금 웃는 낯이었던 것도 같다. 수강 신청이 망해서 뒤에 3시간 막 이렇게 시간이 비는 상황에 금요일은 무려 오후 6시 강의가 있다고 까지 말하고 있는데 원영이 유진의 앞으로 앞접시를 내밀었다. 조금 전까지 원영이 포크로 살을 발라내고 있던 그 앞접시였다.
" 알겠으니까. 얼른 먹어요. "
" 뭐야...? "
" 뭐가요? "
왜 살을 발라줘? 의아하게 쳐다봤더니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는 듯 오히려 원영은 담담하게 유진을 쳐다봤다.
" 뼈있는 치킨 맛있는데 먹기 귀찮아서 순살 먹는 거라면서요, 손에 묻는 건 싫어하고. "
" 그렇긴 한데... "
표정하나 안 바꾸고 말하는데 의아해한 제가 오히려 이상한 것 같았다. 보통 후배들은 제가 챙겨줘야 하는데 역으로 챙김을 받고 있자니 진짜 뭔 이질적이고 낯선 상황이지 이게.
" 대신 다다음주에도 강의 끝나고 저랑 점심 먹어요. "
" 뇌물이야? "
" 비슷해요. "
앞접시에 소복하게 발라진 살코기를 포크로 콕 찍어 먹었다. 다리랑 가슴 중에 뭐가 좋아요? 음...다리. 저 말에 원영이 바로 다리 살을 발라서 또 앞에 놓아줬다. 뇌물은 원래 이런 건가. 남미새가 왜 이래, 여자 사람 설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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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까 자꾸 뇌물을 받아먹어서 한 달이 넘게 원영과 점심을 먹고 있었다. 지현에게 들었던 것처럼 남미새인지는 잘 체감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원영은 자기한테 관심을 가지는 남자애들에게 일말의 관심이 없는 쪽에 더 가까워 보였다. 학관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면 남자애들이 하나, 둘 어슬렁 거리더니 원영에게 말 붙이는 게 그냥 평상시 일과였는데 그럴 때마다 원영은 대충 네네- 하고 마는 수준이었다. 교내 식당 말고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면 감사한데 유진 선배랑 먹기로 해서요 , 술 사준다고 하면 죄송한데 유진 선배랑 선약 있어요 하곤 저하고 치킨을 먹었다. 그것도 선약은 아니었고 저렇게 대답했으니 거짓말 한 게 안되려면 치킨 먹어야 해요 하고 절 끌고 가서 치킨을 사줬다. 선배 이름 팔았으니까 이건 뇌물. 매번 앞접시에 다리 살을 놓아줘서 냠냠 먹으면서 이거 뭐 이러다가는 앞으로 스스로 치킨도 못 발라 먹게 되는 거 아닌가 싶어졌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의지의 남자애들이 밖에 비 오는데 우산주냐고하면 감사한데 우산 있어요, 두바이 초콜릿 구했는데 줄까? 하면 감사한데 괜찮아요 했다.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감사한데 죄송한데를 붙이는 예의는 바른 애였다. 저렇게 웃으면서 거절을 하니까 남자애들이 착각을 하지. 멀리서 보면 남자애들이랑 웃으면서 말 섞는 것 처럼 보일 것 같았다. 흡사 남미새보다는 그 누구보다 남자에 관심 없어 보여서 제가 사전에 가진 정보가 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점심으로 계란이 풀어진 라면을 호록호록 먹는데, 원영이 돈가스를 쓱쓱 썰어서는 유진 앞으로 밀어놓았다. 라면 먹으면서 집어먹어요. 지금도 저는 남자도 아닌데 원영은 그냥 잘해준다. 유진이 겪은 원영은 그냥 친절한 애였다. 방금처럼 돈가스를 썰어서 앞으로 밀어놓기도 했지만, 도서관 열람실에서도 유진의 자리를 미리 맡아 놓는다거나, 유진이 잊어버린 레포트 일정 같은 걸 알람처럼 알려준다거나, 아침마다 유진 몫의 라떼를 사 온다거나, 심지어 두통이 심했던 날은 약을 사다주기도했다. 저럴 때마다 대신 다음 주에도 저랑 점심 먹어요- 뇌물이에요 이따 저녁 같이 먹어요- 이런 조건을 꼭 걸어서 이제 저렇게 뇌물을 안 줘도 같이 먹을 거였는데 매번 뇌물이랍시고 뭘 사주고 해주는 게 꽤 귀엽고 웃겼다.
원영이 주는 뇌물이 착착 유진의 몸에 쌓였다. 그중에도 특히 저 약을 사다 준 날에는 이거 흡사 남친이 여친 챙기는 것 같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혼자 생각해놓고도 뭔 여자끼리 말도 안 되는 생각인가 싶어서 속으로 웃고 말았다. 장원영이 진짜 자꾸 왜 이래.
" 애들이 널 많이 오해하고 있나 보다. "
" 아- 남미새라고 하는 거요? "
바로 툭 하고 던지는 말이, 원영도 그런 소문에 대해선 익히는 아는 건가.
" 선배가 보기엔 어떤데요? 저 남미새 같아요? "
" 전혀... "
일단 내가 남자는 아니잖아. 여자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남미새는 존재 할 수가 없어. 대체 왜 그렇게 소문이 났지. 유진은 원영이 썰어놓은 돈가스를 집어먹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지현이 전 남친 때문인가.
" 크게 신경 안 써요. 치근대는 거 쎄게 거절하면 흔히 생기는 일이에요. "
중고등학교때도 자주 있었던 일이라고. 원영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남자애들 중에는 못 먹는 감 찔러보다가 영 안 되겠다 싶으면 꼬리를 쳤네 뭐 그러면서 자기 합리화해대는 선수들이 있으니까. 그걸 또 그대로 믿어나르는 일부 여자애들도 문제였다. 따지고 보면 현 상황에서 진정 남미새는 지현이가 아닌가. 수준 낮은 전 남친 말만 믿고 아무 잘못 없는 여자애 그냥 남미새 만들어서 말 지어나르는 꼴인데. 이게 바로 찐따남과 남미새의 콜라보 뭐 그런 건가. 심지어 인싸라서 소문 속도는 무진장 빨랐다. 어쨌든 저도 은근히 그 말을 믿었던지라 유진은 원영에게 미안해졌다. 원영이한테 더 잘해줘야지. 그래도 지난번 학기 초 술자리에서 유진에게 계속 눈총을 주던 거는 풀리지 않는 실타래였다. 굳이 그럼 그날은 왜 그런 거야.
" 제가 선배한테 잘해주는 거 알았어요? "
" 난 원래 후배 애들이 잘해줘. 만인의 호감 선배 상이야 내가. "
으스대면서 말하는 걸 보고 원영이 삐죽거렸다.
" 다른 애들도 저 처럼 선배한테 해줘요? "
압도적으로 제가 잘해주는 건 줄 알았는데 더 분발해야겠다 나. 하는 표정이 금세 진지해져서 뭐 저렇게 심각한 일인지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하여튼 후배 애들한테 내가 인기가 너무 많네.
" 나도 너한테 잘해주잖아. "
" 저한테 잘해주는 거에요? "
" 나 다른 후배 애들한테 너한테 하는 것 만큼 안 해줘. "
" 저한테 특별히 해주는 게 뭔데요. "
턱을 괴고 어디 한번 말해보라고 하는 표정이 은근 승부욕을 불러일으킨다. 얘 봐라. 내가 너 막차 타는 거 버스 다 기다려주고 맨날 너랑 밥 같이 먹고 다른 애들 디엠은 열에 아홉 읽씹하는 데 네꺼는 디엠 답장도 꼬박꼬박하고 나 원래 휴대폰 왜 들고 다니냐고 할 정도로 연락 두절 되는 스타일 어쩌고저쩌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하려다가, 또 막상 말하려니까 한 살 더 먹고 그걸 뭐 또 잘해주는 거라고 말하나 싶어서 그냥 그런 게 있어- 하고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해보니까 원영이 저한테 해주는 거에 비하면 잘 해준다고 할 만한 정도도 안 됐다.
" 근데 원영이 너는 왜 나한테 선배라고 해. "
" 왜요...? 그렇게 부르는 거 별로예요? "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다른 애들 다 언니라 하는데 너만 나한테 선배라고 해서. "
" 아, 그냥요. 선배라고 하는 게 더 편해요. "
후배 여자애들은 친해지면 다 언니라 하던데. 언니라고 해도 되냐고 바로 물어보고 그러던데 원영인 아닌가? 지금은 더 편하다는 게 무슨 말이지. 유진은 혼자 갸웃했다. 원영이 눈을 좀 피하면서 말하는 게 아직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래서 그런 거면 좀 서운한 거 같기도. 괜히 원영이 앞에서 깨작 거리는 것 같아서 주제 전환이나 해야겠다 싶다.
" 너 향수 바꿨어? 전에 약간 장미향? 이었던 거 같은데... "
분위기가 괜히 어색해질까 봐 유진은 얼른 주제를 바꿨다. 어떻게 알았어요? 원영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웃는다. 매일 같이 밥 먹는데 그걸 못 알아채면 내가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그냥 주제 전환이나 할 요량으로 말한 건데 생각 이상으로 리액션이 커서 머쓱한 눈을 굴린다.
" 선배, 그런 거 못 알아채는 사람도 엄청 많아요. 그리고 선배 다른 사람한테 관심 별로 없잖아요. 지난번에 정현이 머리 자른 건 못 알아봤잖아요. "
" 아니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너랑은 매일 같이 밥 먹는데 그 정도는 나도 알지. "
내가 뭐 코가 막힌 줄 알어. 같이 전공을 듣는 정현이가 중단발을 하고 왔는데 전혀 못 알아봤던 적이 있긴 했다. 허리까지 오던 걸 잘랐는데 어떻게 못 알아볼 수가 있냐고 언니 진짜 그 정도면 시각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는 서운함을 맞닥뜨렸었는데 유진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어떻게 흑발에서 금발 됐는데 모를 수 있어요, 한 학기 강의 같이 듣고 있는데 제가 같은 강의 듣는지 몰랐다고요? 저런 말을 들은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도 원영이 뭘 입고 왔는지 무슨 치킨을 좋아한다고 했었는지 그런 건 꽤나 내가 잘 기억했던 거 같은데. 아마 지현이가 하도 남미새라고 뒷담을 까서 그거 때문에 신경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걸지도. 나중에 자기한테 뭘 더 잘해주냐고 하면 저것도 기억했다 말해야지. 아무튼 뭐가 그렇게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원영이 전에 향이랑 비교해서 이번 꺼는 어떠냐고 연신 쫑알쫑알 묻는다.
" 둘 다 좋아. 다른 스타일로 잘 어울려. "
" 이런 달달한 향을 원래 더 좋아해요. 전엔 담배 때문에 독한 거 썼던 거구. "
원영도 담배를 안 피운다고 한지 좀 됐던 거 같았다. 담뱃값을 아껴서 커피를 마시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 같대나. 그동안 하루에 한 갑 피웠다는데 대신 담배를 끊었으니까 그 돈으로 매일 선배 라떼를 사주겠다는 얘길 해서 진짜 골때린다고 웃었었다. 얘는 맨날 뭘 사준다고 하네. 후배들은 말은 꼬박꼬박 살갑게 잘 들어도 보통 뭘 사달라고 하지 사준다고 하진 않는데. 하여튼 이상한 애였다. 선배 뜯어먹는 후배는 있어도 선배 먹이는 후배는 잘 없는데.
하루 한 갑 피웠다면서 원영은 담배를 금방 끊어버렸다. 담배 대신 사탕도 몇 개 들고 다니는지 슬슬 올라오는 금단증상으로 유진이 입안을 깨물 때 사탕도 재깍재깍 내밀었다. 종종 다리를 떨 때도 허벅지 위에 종종 원영이 손을 올려놓고는 했다. 원영이 담배 피는 걸 제가 본 적이 있던가. 지난번 술자리 때 외에는 본 적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빨간 입술에 담배를 물고 있는 원영을 상상했다. 겪어보니 은근 모범생인 구석이 있어서 담배 피는 게 굉장히 이질적인데 또 그 입술 새로 연기가 들락날락하는 걸 그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서 마주했던 나른한 눈이 떠올랐다.
과팅 자리 채워주라 제발 플리즈. 동기 여자애한테 온 문자를 보고 유진은 떨떠름하게 라떼를 쪽쪽 빨았다. 오늘 저녁에 정문 앞에서 과팅을 한다는데 한명이 펑크를 냈다고 제발 나와서 엉덩이만 붙이고 있으라고 애원했다. 학기 다 끝나가는데 과팅은 무슨. 오늘이면 종강인 팀플과제 제출을 하려고 원영과 카페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다가 괜히 인상만 썼다. 넌 그냥 와서 밥 먹고 바로 가도 된다는 말에 공짜 밥이나 먹어야겠다 싶었다.
" 왜 그렇게 심각해요? "
" 어- 서연이 알지? 과팅을 한다고 자리 좀 채워달라고 하네. "
대충 공짜 밥이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하고는 원영이랑 들여다보던 팀플 과제나 마저 들여다봤다. 이제 막 제출 버튼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 저 선배한테 저녁에 밥 먹자고 하려고 했는데. 할 말 있어서. "
" 어쩌지. 이미 서연이한테 과팅 간다고 해버려서... 다음에 먹자. "
치- 지금 제가 사주는 라떼 마시면서 저는 다음이에요? 제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하고 좀 칭얼거리는데 이미 과팅에 간다고 해놓은 거라 무를 수가 없었다.
" 미리 말을 했어야지. 선입선출이야. 라떼도 그리고 내가 사달라고 안 했다. 내가 산다는데 네가 맨날 사놓고 선수 치는 거지. "
" 저 할 말 있다구요... "
" 다음에 하자. 알겠지? "
선배, 너무해- 하고 좀 어깨가 처지는 거에 나 맨날 너랑 밥 먹으니까 오늘 하루만 서연이 한테 양보하라고 했는데 확 인상을 쓰고 양보 같은 거 하기 싫거든요? 해서 퍽 웃겼다. 원영아,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다. 뭐가 그렇게까지 싫어.
" 동방에서 한숨 자고 바로 갈 거예요? 동방 같이 가도 돼요? "
" 아니, 자취방 갔다가. 이 옷을 입고 과팅을 어떻게 가. "
TPO라는 게 있잖니. 지금 청바지에 흰 반팔티 입고 있는데 이 차림으로 과팅은 좀 무리수지. 카페 에어컨이 시원찮은지 더워진 유진이 티셔츠를 펄럭펄럭 부쳤다.
" 괜찮은데... "
" 괜찮다고? 이게? "
" 선배 스포티한거 잘 어울려서 괜찮아요. 예뻐요. "
" 내 전 남친도 이런 차림엔 괜찮다고 안 해줬는데, 원영이 네가 내 전 남친들보다 낫다. "
콩깍지가 낀 사람도 이 차림에 괜찮다는 말을 안 해주던데 하여튼 원영은 저한테 칭찬이 후했다. 제가 선배 전 남친들보다 더 콩깍지 꼈나보죠 모. 삐죽거리면서 말하는 입이 귀엽다. 선배한테 콩깍지는 무슨, 못 하는 말이 없어요. 저는 더워 죽겠는데 마주 보고 앉은 원영은 어깨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추운가. 아무리 여름이어도 냉방병 창궐하는 시기에 어깨를 다 내놓고 다니는 게 가당치도 않았다. 나름 에어컨 때문에 춥다고 목에 뭔 천으로 된 끈 같은걸 둘렀는데 그게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 너 진짜 안 춥냐. 에어컨 바람도 있는데 어깨를 다 내놓고. "
" 추워요. 추위 많이 타요. "
근데 왜 그렇게 입고 다녀. 추위를 많이 타면 싸매고 다녀야지. 타박 아닌 타박을 하다가 원영의 자리에 에어컨 바람이 어디로 나오나 손을 들어봤다. 유진이 앉아있는 자리보다 원영이 앉은 자리 쪽으로 에어컨이 더 세게 나오는 것 같았다.
" 자리 바꿔 앉을래? 난 더워. "
유진은 몸을 일으켜서 원영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제출 버튼 누르는 것만 남은 과제를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훑었다.
" 이런 옷이 예쁘지 않아요? "
다들 이런 옷 예쁘다고 하던데 선배한테는 그렇지 않은가. 원영이 입을 삐죽거린다.
" 그래? 난 노출 많은 옷을 별로 안 좋아해서. 나 좀 유교걸이야. "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안 입을게요. 옹알거리는 저 말이 웃겨서 프린트를 정리하던 유진이 웃었다.
" 너 입고 싶은 대로 입으면 되지. 나한테 옷을 맞춰 입을 거야? 헐, 나 이제 가야겠다. "
" ...벌써요? "
" 옷 갈아입고 뭐 화장하고 그러려면 지금 가야지. 나중에 연락해. "
언제요? 하면서 티셔츠 끝을 급히 잡는 원영을 잠시 돌아봤다. 원영과 듣는 강의는 마지막 팀플 과제만 제출하면 종강이었다. 걍- 나중에 나한테 연락해 알겠지?
종강도 했겠다, 주점에 학과 애들이 우글우글 모였다. 기다란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맥주니 소주니 다들 착착 말아 마셨다. 유진도 앞에 앉은 선배들이 내미는 술을 별수 없이 받아마셨다. 받아마신 게 벌써 소주 한 병은 되는데, 술이 그렇게 쎄진 않아서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한동안 원영이랑 연락을 안 해서 원영은 혹시 안 왔나 하고 저 안쪽 테이블을 기웃거렸다. 팀플도 끝나고 강의도 종강하니까 막상 또 연락할 일이 없어서 따로 연락 안 한 지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자취하는 저야 학교 근처에 늘 있지만 한 시간이 넘게 통학하는 원영은 종강하면 학교 근처에 올 일도 없을 테니까 굳이 또 불러내기도 뭐 했다. 맨날 같이 점심 먹고 시시콜콜하게 놀다가 연락이 끊어지니까 내심 보고 싶은 거 같기도. 대각선 방향 테이블에 원영이 앉아있는걸 보니 주변에 역시나 남자애들이 우글우글. 지윤언니랑 태연언니는 언제 오신대요? 집 멀어서 오늘 안 온대. 원영이랑 남자애들이 하는 말이 드문드문 저 멀리서 들렸다. 뭐야 지윤이랑 태연이한테는 언니라고 하네.
테이블에선 또 지현이가 원영이 남미새니 꼬리를 치니 어쩌니 뒷담화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고 기분도 축축 처지는데 술자리 안 나오던 애가 올해부터 꼬박 나오는 게 혈중 남자 농도 부족한 거 아니냐 하는 게 슬슬 거슬렸다.
" 난 원영이 남미새인거 모르겠던데. "
유진의 말에 테이블의 시선이 유진 쪽으로 돌아왔다. 후배들 사이에서 유진이 꽤나 호감인 덕에 여자애들 몇몇이 자기도 유진언니 같이 생각한다 이런 맞장구를 슬슬 쳤다.
" 걍, 네 전 남친이 이상한 걸 왜 자꾸 엄한 여자애한테 뒤집어씌우냐. "
술김에 이상하게 원영의 뒷담화에 열이 받아서 말을 기어이 뱉었더니 지현의 표정이 잔뜩 구겨졌다.
" 언니, 장원영이랑 밥 먹고 같은 강의 듣더니 친하다고 편드는 거에요? "
" 친하고 말고에 문제가 아니고 네 사고방식이 그냥 이상하다고. 전 남친이 한눈 판 걸 왜 엄한 사람한테 꼬리 쳤다고 남 탓을 하냐는 거야. "
이제 지현은 아예 씩씩거리다 못해 표정 관리가 안됐다. 근데 나도 열받았다고. 앉아있는 테이블부터 인접 테이블까지 기분이 다운된 유진의 눈치를 봤다.
" 야, 막말로. 너 전 남친을 누가 꼬시고 싶어 하냐?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
오징어 지킴이도 아니고. 굳이 말 안 해서 그렇지 다 나 처럼 생각할걸. 괜히 장원영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그 오징어 탓이나 해. 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현은 가방을 가지고 욕을 하면서 나가버렸다. 전 남친한테는 찍소리도 못하는 게. 진짜 누구한테 남미새니 꼬리를 치니 짜증 나게 하고 있어. 테이블 분위기가 흡사 시궁창인데 그걸 또 풀어보겠다고 남자 선배들이 개차반 같은 농을 자꾸 던졌다. 술이 주량보다 많이 들어가고 있어서 정신도 깜박깜박한데 앞에 앉아서 시답잖은 농을 하는 걸 상대해주려니 좀 인내심에 한계였다. 슬쩍 시선을 돌릴 때마다 대각선 테이블에 앉은 원영이랑 계속 눈이 마주쳤다. 드문드문 들리는 원영의 목소리가 무슨 언니 무슨 언니 하는 게 술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여자 선배들한테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번 저걸 인지하고 나니까 저 소리만 자꾸 귀에 들어오고 입이 자꾸만 써졌다.
자꾸 기분이 처지고 뭔지도 모르겠고 아무래도 술 때문인 것 같다. 그냥 빨리 가야겠다. 대충 집에 간다고 하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편의점에서 스크류바 하나를 사서 입에 물고 아삭아삭 씹었다. 스크류바 먹으면 그래도 술이 좀 깼었는데 오늘은 효과도 없고 입안만 얼얼했다. 진짜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네. 편의점 앞에 잠깐 주저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데 달달한 향 같은 게 나서 슥 돌아보니까 원영이 옆에 앉아있었다. 술이 쎈지 멀끔한 상태였다.
" 선배 술 많이 마셨어요? "
또 나한테만 선배라고 하네. 모두에게 선배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꼭 나한테만.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다. 이미 끊었던 담배가 확 당겨서 그냥 하나 사서 피울 생각으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순간 휘청였는지 원영이 바로 반쯤 유진을 끌어안았다.
" 선배 괜찮아요? "
" ...그 선배 소리 좀 그만해. "
술김이란건 미친 짓을 한 다는 말일까. 이 기분이 왜 인지도 모르면서 원영에게 괜한 짜증을 내고는 그냥 뿌리치고 자취방으로 걸었다. 비척비척 걷는 뒤로 원영이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중간중간 주저앉으려고 할 때마다 원영이 끌어안아서 저를 일으켜 세웠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저렇게 따라오기만 하는데 진짜 이상하게 더 머리가 아프고 화가 났다. 시야는 자꾸 흐리고 비밀번호를 눌러도 잘못 누르는지 띠띠- 하고 오류를 냈다. 선배 자취방 비밀번호 뭐에요 제가 누를게요. 제대로 발음도 되지 않는 웅얼대는 발음으로 겨우 비밀번호를 뱉고는 원영이 비밀번호를 누르자마자 확 문을 열고 혼자 들어갔다. 무릎이 제대로 지탱을 못해서 반쯤 기다가 바닥에 드러누웠는데 원영이 원룸에 놓인 침대 위로 유진을 올려 앉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바지도 탁탁 털어줬다. 고개를 제대로 못 가누고 앉아서 제 앞에 앉아 절 올려보는 원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 너... 술 쎄냐? "
" 선배보다는요. "
" ...가라. 나 자게. "
" 기분 왜 안 좋아요. "
유진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천장이 까맣게 높았다.
" 몰라. 생각하기 싫어. "
생각하면 더 기분이 나빠질 것 같다. 그냥 모두에게 선배라고 하는 건 줄 알았는데 나한테만 그러고 있었다고. 그래도 나랑은 한 학기를 강의를 같이 들었는데. 조금 전에 언니라고 부른 태연이나 지윤이랑은 강의도 같이 안 들으면서. 난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도 주에 세 번은 같이 먹었는데. 가끔 내가 술도 사주고. 팀플하러 간 거긴 하지만 같이 미술관도 갔는데. 내가 우리 동방에서 공강 때 낮잠도 재워주고 아무한테도 안 알려준 교양관 지름길도 알려줬는데. 그런데도 꼭 집어서 나한테만 선배라고 한다고.
" 뭔데요. 왜 그러는데요. "
제 속도 모르면서 아래 앉은 원영과 더 말을 하기 싫었다. 생각하기 싫다고. 그만 가라고. 언성이 좀 높아진 것 같았다. 원영이 조금 놀란 숨을 낸 것도 같아서 흠칫했다가 그냥 이불을 끌어올려 뒤집어썼다. 정말 생각하기가 싫다. 이게 뭔지 모르겠거든.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프다. 지금 원영이 다른 애들은 다 언니라고 부르고 나만 선배라고 불러서 기분이 바닥에 눌어붙은 상황인 게 맞나. 이게 무슨 씨발 좆같은 기분이야. 선배 포비아가 된 거 같네. 이불 안이 술 냄새로 가득할 것 처럼 온 몸으로 술이 뿜어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취해서 그런 거겠지.
" 선배가 왜 화가 났어요...? "
이불 밖에서 원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낮고 눅눅했다.
" 제가 화내야 하는 상황 아니에요...? 지금 왜 저한테 화내는 거예요? "
유진은 이불을 확 젖히고는 몸을 일으켰다. 원영은 아까랑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술이 오를 만큼 올랐는데 이상하게 말을 더 또렷하게 낼 수 있었다.
" 네가 나한테 화낼 상황인 건 또 뭔데. "
" ...왜 저한테 연락 안 했어요? "
" 너도 나한테 연락 안 했잖아. "
하... 원영이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였다가 유진을 다시 올려다봤다. 빤히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할 말을 고른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서 격앙되어있는 유진을 자극하고 싶지 않으면서 또 지금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는 않은 원영이 마침내 겨우 입을 뗐다.
" 맨날 제가 먼저 연락하는 거 알죠. 선배는 단 한 번도 저한테 먼저 연락 안 하고. 어디냐고 언제 오냐고 매번 제가 먼저 연락하고, 선배는 한 번을 먼저 연락을 안 해요. 제가 연락 안 하면 선배는 저한테 연락 안 할 거예요? "
따박따박 따지는 톤이 아닌 조곤조곤하고 차분한 말투가 뭐라 변명이란 걸 낼 수도 없게 만든다. 빨갛게 눈을 붉혀서 올려다보는 얼굴이 유진의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들었다. 저렇게까지 연락하는 거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질 않았었다. 학기 중에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니까. 연락 그게 뭐 그렇게 누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유진이 뭐라 변명을 하기도 전에 원영의 다음 말이 더 빨랐다.
" 한 번쯤은 선배가 먼저 해줄 순 없어요...? 맨날 나만 선배 찾아요? 선배는 왜 한 번도 먼저 날 안 찾아요. 어떻게 단 한 번도 날 먼저 궁금해 하질 않아요. "
일주일만에 얼굴 봤는데 술 마시고 갑자기 나한테 화내고. 나한테 너무해 진짜. 원영의 목소리가 계속 축축해져서 덩달아 목소리가 축축해졌다.
" 네가 더 너무해. "
" 제가 뭘요. "
유치하게 이걸 말할까 말까. 술김이어도 가오가 있지. 유진은 차마 말은 못 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 ...됐다. 걍 가라. "
" 뭐가 됐어요. 제가 뭘 어쨌는데요. "
말은 더 못하고 그냥 원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말을 채근하는 눈동자가 기다리다 못해, 원영은 기어이 손을 들어 유진의 옷을 붙잡고 잘게 흔들었다. 말해요, 뭔데요.
" ...너 다른 애들한텐 다 언니라고 하면서 왜 나한테만 선배라고 해. "
" ...지금 그거 때문에 나한테 화낸 거에요? "
" 왜냐고. "
답을 기다리는데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답이 오지 않아서 인내심이 한계였다. 술에 몸을 담근 것처럼 진동하는 술 냄새가 스스로 역해지게 만든다. 됐다 그냥 가라 너. 유진은 다시 침대로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뭔지 모르게 울 것 같아진다. 진짜 유치한 꼴 보이기 싫은데. 취기 때문인지 감정이 저 깊은 어딘가에서 보글보글 끓다가 입 밖으로 끝내 넘친다.
그 언니 소리가 뭐라고 넌 사람을 이렇게 서럽게 만드냐. 그거 뭐 어려워? 다 언니라고 부르잖아. 나 빼고 모두를 언니라고 부르잖아. 나는 뭐 그냥 선배냐. 됐어 나도 너한테 언니 안 하고 그냥 선배 할 거야. 가라고 빨리. 한살이나 더 먹고 꼴사나운 말을 했는데 원영이 이불을 확 젖히더니 냅다 안겨서 허리를 꽉 끌어안는다.
" 그냥 선배 아니에요. "
" 놔. "
원영이 끌어안은 허리춤을 빼내려고 몸을 비틀었다. 손을 잡고 풀어내려는데 안간힘을 써서 안고 있는지 쉽게 풀어지지가 않는다.
" 그냥 선배가 아니라구요. "
목 언저리에 얼굴을 묻은 새빨간 귀가 눈에 들어온다. 뿌리치려던 손은 이제 그냥 잡고 있었다. 그냥 선배가 아니면 내가 대체 뭐야. 언니도 아닌데 이젠 선배도 아니냐.
" ...눈치가 왜 이렇게 없어요. 제가 대놓고 꼬셨는데 대놓고 잘해주고. "
이건 무슨 말일까.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 누가 그냥 선배한테 그렇게 잘해주는데요. 누가 그냥 선배가 연락 좀 안 한다고 이렇게 안달 나 하는데요. 왜 이렇게 바보야 진짜. 사람 속 뒤집어지게 과팅이나 가고... 연락도 안 하고... "
있는대로 목소리가 눅눅하다 못해 축축한데 막상 얼굴을 강제로 들게 해서 눈을 마주 보니까 빨갛기만 하고 울진 않는다. 혼란스러운 이 상황에서 퍼즐이 잘 맞춰지지도 않는데 어지러운 머릿속 정리를 다 하기도 전에 원영이 다시 말로 머릿속을 아니 맘속을 헤집어놓는다.
" 왜 선배라고 부르냐구요? "
원영의 얼굴이 다가오다가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져서 정신은 반대로 멀어지고 있었다. 달달한 향이 정신을 계속 빼놓는다. 닿을 듯 말듯 한 거리에 옅은 술 냄새가 나는 입술이 있다. 하얀 연기를 뱉을 때 소름 돋게 했다가 마른 장미향이 섹시했다가 달달한 향이 어울리는 그런 입술.
" 언니라고 부르는 건... 너무 야하잖아요. "
싫으면...피해요. 저 말을 끝으로 원영이 유진의 입술에 천천히 입술을 붙였다. 그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기 싫었다. 닿은 곳이 뜨거운 것 같았다가 심장이 입술에서 뛰었다. 달달한 향이 코끝에 맺히고 촉촉한 것과 함께 그 향도 입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러워서 들어오는 대로 머금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겨우 뜨고는 아쉬워서 춥하고 빨아들였다. 말캉한 게 입안으로 빨아들여졌다. 왜 이렇게 달아. 전에 담뱃불 붙이던 장면이 머릿속으로 들어찼다. 오소소 온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여자랑 키스는 처음해보는데 또 그렇게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과하게 좋았다. 여자라서 혀가 더 부드럽고 달디단건지 원영이 부드럽고 단 건지 뒷목이 얼얼한데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손을 들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얇은 몸이 한 품에 안겨드는 것이 또 척추를 타고 소름이 돋게 한다. 뭐가 이렇게 모든 곳이 아찔하고 짜릿하고 소름이 돋는 거니 넌. 입술이 촉촉하고 말랑말랑했다. 혀도 미끈미끈 달짝지근하게 달았다. 머리가 핑핑 돌다가 눈도 빙글빙글 도는 기분.
가늘게 늘어진 실 같은 타액이 가까이 붙은 두 입술 새에 늘어졌다. 어느새 떨어져 나간 그 입술이 아쉬워서 입맛을 다셨다. 몸이 달아서 조금 가까이 입술을 댔는데 닿을락 말락 할 때쯤 원영이 뒤로 슬며시 물러난다.
" 아쉬워요...? "
아니. 그 정도 말로는 모자라다. 머리에서 뛰는 심장이 입안에서 뛰었다. 뭐라 말을 내지도 못하고 술 냄새가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
마주한 눈이 나른했다. 찬찬히 훑던 얼굴 아래로 시선을 내려 빨간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 야하다며. "
" 그러니까요. "
그 빨간 입술에서 나오는 야한 소리가 어떨지 상상 되지 않았다. 가늠이 되지 않아서 물러나던 입술에 닿을 듯 말듯 귀가 아닌 입술을 붙이고 제대로 듣고 싶었다.
" 불러봐. 선배 말고 언니. "
조금 떨리는, 달싹이던 입술 새로 떨리는 목소리.
" ...언니. "
" 다시 불러봐. "
" 유진 언니..."
원영이 왜 야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순식간에 몸을 떨게 만든다. 원영의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저 말을 자꾸 듣고 싶어진다. 언니라는 단어가 이렇게 온 몸이 저리게 야한 말이었는지. 수 많은 애들의 입에서 수도 없이 들었는데 원영의 입 밖으로 나올 때는 전혀 다른 말이 되었다. 생경한 감각에 몸도 마음도 집어삼켜진다. 네 입에서 저 야한 말을 자꾸 듣고 싶어지면 내가 지금 이상한 걸까. 저 말 말고도 다른 야한 소리도 듣고 싶어지면 내가 지금 미친 걸까. 뭐가 뭔지 모르는데도, 내 머리는 모르는 걸 내 몸은 아는 것 처럼 움직였다.
달달하고 촉촉한 원영의 입술에 다시 입술을 붙였다. 이번에는 원영이 뒤로 물러나지 못하게 머리를 받친 채였다. 입안으로 속삭이는 건지 들릴 듯 말듯 한 소리가 맞붙은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계속 불러봐. 계속 듣고 싶어. 더운 자취방에 꿉꿉한 공기 눅눅한 습기 축축한 마음. 그다음 언니 소리를 들었을 때는 원영을 벽 쪽으로 붙였다. 원영이 언니라고 부르는 대로 끊임없이 그 부름에 착실히 몸으로 마음으로 응답했다.
" 저 담배 원래 안 폈는데. 언니 진짜 눈치 없구나? "
유진은 앞접시에 원영이 놓아준 치킨을 오물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원래 담배 안 폈어? "
저 일평생 비흡연자예요. 언니가 담배 피우니까 피우는 척 한 거지. 언니 담배 피우고 그럴 때 따라 나가려고.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려고 라이터를 들고 다닌 비흡연자의 짝사랑 일대기를 들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본 건 있어가지고 담배 끝으로 그렇게 불붙이는 건 따라 해봤단다. 그때 너무 떨려서 심장 뱉을 뻔했어요. 어쩐지 담배 한 갑 피웠다면서 금방 끊은 게 말이 안된다. 그럼 사탕 같은 것도 다 나 때문에 들고 다닌거네.
" 담배 값 아껴서 사준다던 라떼는 그럼...? "
" 그냥 사주고싶어서 사줬어요. "
원래 뭘 먹이는 게 진짜 야한거에요. 저런 엉뚱한 소릴해서 갸웃했다.
" 내가 먹인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다 언니를 하나하나 구성하는 건데 그게 야한거지 뭐야. "
" 별게 다 야하다. 그래서 그렇게 맨날 뭘 먹이셨어요? 라떼 마시는 거 보면서 야한 생각하는 건 너뿐일 걸. "
지금도 원영이 앞접시에 소복하게 살코기를 발라 놓은 걸 포크로 콕 집어 먹었다. 제가 촉이 진짜 별로인 거 있죠. 옷도 그렇구. 치킨집에서 하도 여기저기 뜯어보길래 오프숄더 같은 거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 단추도 풀었던 거 알아요? 저 원래 그런 짓 진짜 안 해요. 하, 근데 유교걸일 줄이야? 앞에 오프숄더랑 거리가 먼 원피스를 입고는 귀가 새빨개져서 말하는 원영을 보는데 푸스스 웃음이 났다. 그거는 그냥 눈으로 고나리한건데. 너도 진짜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그랬어.
" 첫 눈에 반했는데 어떡해요 그럼. "
" 아이구야. 날 어디서 봤다고. "
" 그날 치킨집에서요. "
첫 눈에 반한 장소가 치킨집인 게 뭐야. 뭐 그럴듯하게 어디 캠퍼스 도서관 앞에서 바람에 머리가 흩날리는데 예뻐서 반했어요 아니고. 막 머리에 종이쳐서 반했습니다 이래야지 반한 장소가 치킨집이라니. 구시렁댔더니 치킨집이 어때서요 들어올 때 부터 반했는데. 그날 남자 여자 할 거 없이 언니 있는 테이블에 자꾸 들락거리고. 대각선에 앉아있는데 눈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옹알거리면서 계속 유진의 앞접시로 살코기를 발라낸 치킨을 놓아준다.
" 너가 자꾸 치킨 이렇게 발라줘서 나 혼자 치킨도 못 먹게 되면 어떡해. "
" 그러라고 해주는 건데요? 나 없이 치킨도 못 먹으라고. "
와, 큰일이네. 진짜 원영이 없으면 치킨도 못 먹게 생겼네. 호들갑 떨다가 버스 타는 데 데려다줘? 하면 자고갈래요 한다.
" 너 지금 일주일째 내 자취방에서 자고 있는데. 방학이라고 매일 이렇게 외박하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 "
" 치. 나 없이 치킨은 못 먹을 거면서 잠은 잘 잘건가 봐. "
삐죽거리는 게 귀여우면 갑자기 중증 된 기분. 사귀고 나서는 이틀에 한 번은 옆에 끼고 자서 없으면 이제 못 잘 것도 같은데.
손을 잡고 원룸촌에 가로등이 군데군데 나간 골목을 걸었다. 나 궁금한 거 있어요. 잡고 있는 손이 축축해도 놓을 생각이 없는지 아예 손을 그대로 깍지 껴서 잡고는 몸을 바짝 붙였다.
" 다른 후배들이랑 다르게, 나한테 잘해줬단 거 뭐예요? "
전에 말 하려다 말았잖아요. 이젠 나 후배 아니고 여친이니까 말해줘도 되잖아. 이렇게 또 훅 들어오면 말해주기 부끄러운데. 모른 척 저 골목 끝에 가로등만 봤다. 골목이 어둡네. 말을 돌려보려고 해도 뭔데요- 빨리요- 자꾸 볼에 입술을 대고 칭얼거려서 질질 자취방으로 끌려가다시피 하는 몸처럼 마음이 끌려다녔다.
뭐부터 말하지. 버스 기다려준 거 디엠 안 씹은 거 매일 같이 밥 먹은 거 향수 바꾼 거 알아본 거... 좀 시시콜콜한 것들 같은데. 막상 말하자니 좀 별것도 아니라서 머쓱해 하다가. 딱히 없구나? 흐응- 실망한 투라 바짝 끌어안았다. 자취방 복도 앞에 등이 둘의 움직임에 번뜩 들어온다.
" 다른 후배들이랑 다르게 이런 걸 잘 해주지. "
끌어안고, 입 맞추고 이런 거. 가만히 속닥 거렸더니 원영이 금세 입술 끝을 물었다. 입술을 서로 붙들고 이미 제 집처럼 비밀번호를 아는 원영의 손이 급하게 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둘이 같은 보폭으로 앞 뒷걸음 치다가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 언니 그럼 그다음은요? "
언니, 다음도 나랑만 하는 거죠? 다른 후배랑은 안 하고.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다 너랑만 할 건데. 근데 너 자꾸 이렇게 침대에서 언니라고 부르는 거 반칙이야. 사뭇 굳은 표정으로 말 했더니 목을 끌어안고서는 흐흣- 웃는다.
" 왜요? "
" ...야하니까.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