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니, 혹시 총 구하는 법은 모르지? "




퇴근하자마자 맥주를 까서 벌컥벌컥 마시는 입술을 빤히 봤다. 막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을 세팅하던 와중이라 자세가 적잖이 어정쩡했다. 크- 하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원영이 젖은 입술을 쓱 닦는다. 언니 컴퓨터 잘하니까 인터넷으로 총기 구매 루트 좀 찾아봐봐. 씩씩 거리는게 또 회사에서 뭔 일 있었구만. 넌 뭐 개발자가 영화에 나오는 해커처럼 그런 건 줄 아냐. 콧방귀 뀌고는 식탁에 꺼내놓은 밑반찬 옆으로 전자레인지에서 방금 꺼낸 햇반을 올려놨다.



" 총을 사서 어디다 쓰려고. "

" 부장 새끼 쏴 죽여버리게. "


빙고. 역시는 역시다. 같이 보고자란 세월, 같이 산 세월을 꽉꽉 눌러 담아놓아서 원영의 행동 패턴이 뻔했다. 헤아려보면 어릴 때부터 앞집 뒷집하고 알고 지내서 같은 초중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때부터 자취를 같이 시작했던 게 지금 취직 다 하고도 이어지고 있으니까 가만보자... 대충 7년 정도는 같이 산 거 같은데. 같이 산 게 7년 알고 지낸 게 15년이 넘어가는 언니 동생으로서 오늘 처럼 저렇게 우악스럽게 현관문 열고 들어와서 맥주부터 깐다? 백퍼 부장 새끼가 뭔 지랄을 한 거였다. 







유진의 엄마가 보내준 깻잎전이랑 버섯 무침, 두부조림들을 띄엄띄엄 입으로 가져가면서 원영이 계속 부장을 같이 입에 넣고 씹었다.



" 내가 퇴근이 6시잖아. 근데 부장 미친놈이 5시 50분에 메일을 띡 보내서 일을 주는 거야? "

" 네가 저번에 말한 그 대머리? "



어- 내가 지난번에 말한 거북이같이 생긴 대머리 부장. 몇 개월 전부터 원영이 씩씩 대면서 이젠 거북이를 넘어서 포켓몬에 꼬부기랑 거북왕도 싫어지려고 한다고 욕한 그 부장이 틀림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야. 내가 싹 무시하고 퇴근할랬거든? 근데 갑자기 메신으로 퇴근 전까지 부탁합니다. 이럼. "


6시가 퇴근인데 5시 50분에 일 주면서 퇴근 전까지 부탁합니다 이러면 나더러 그냥 야근하라는 거잖아. 야근비 주는 회사면 내가 말도 안 해. 포괄임금제라서 야근하는 대로 나만 손해인데 느려터진 거북이가 지는 맨날 점심 먹고 와서 책상에 배 올려놓고 쳐 자면서 일 안 하고 농땡이 치고 어? 와이프한테 바가지 긁히기 싫다고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괜히 사원 대리들한테 야근 시키고. 나중에 번개로 맥주나 하러 가자고 하려고 아주 수가 뻔해. 밥은 채 두 숟가락도 안 먹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거에 유진이 알았으니까 일단 밥이나 먹으라고 달랬다. 지금 시간이 벌써 9시인데 얼른 먹어 그렇지 않으면 이따 잘 때 속 부대낀다. 




" 내가 대머리거북이랑 맥주 안 마실려고 회신 하자마자 바로 튀어왔잖아. 극혐. "


" 등딱지를 꼬막 까듯이 까버리지 그랬어. "


꼬막 잘까는 내가 까줘? 숟가락으로 슉슉 까는 시늉을 했더니 앞에서 인상 쓰던 표정을 풀고 원영이 깔깔 댄다. 꼬막은 먹을 수라도 있지 걔는 지방이 뒤룩뒤룩해서 못 먹어. 꼬막 얘기하니까 꼬막 먹으러 가고 싶다. 하다가 바로 눈썹을 팔자를 하고선 맞다 언니 진짜 미안해 오늘 내가 집안일 하는 날인데 늦게 퇴근해가지고 못 해서 주말에 다 해놓을게 하는데 야 됐어 아무나 하면 어떠냐 하고는 같이 맥주를 마셨다.



원영은 집에서 1시간이나 떨어진 회사로 9-6제 따박따박하는 회사를 다녔는데 유진은 프리랜서 개발자라 집에서 엉덩이를 붙이고 일했다. 유진이 일어나는 시간이 출근 시간이니까 아무래도 원영이 하는 집안일보다 유진이 하는 집안일이 더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소래포구 또 가자. 언니가 꼬막 얘기해서 꼬막 먹고 싶어. "

" 언제? "

" 이번 주는 나 금토로 부산 출장 가서 어렵고, 다다음주? 언니 시간 될 때 아무 때나. "

" 우리 가던데 거기 아직 영업하나. "


유진은 갸웃했다. 전에 할머님이 하시던 집이라 문 곧 닫을 거 같지 않았냐며.


" 아냐. 엄청 정정하셔. 우리 대학 때부터 갔었는데 여전히 하실걸? 꼬막이 근데 철이 아니라 좀 그러려나? "

" 니가 제철 음식 얘기할 때마다 웃겨. "


뭐래. 언니 때문이잖아. 언니가 맨날 제철 타령하니까. 삐죽거리는걸 보다가 요즘 제철 음식은 뭔가 휴대폰을 쓱쓱 굴렸다. 






" 언니 소개팅한 남자는 어때? 이번 주말에 만나? "

" 응...? "

" 지난번에 소개팅했던 사람 있잖아. 언니 막 가죽자켓 골라 입고 나가서 내가 소개팅에 가죽자켓은 좀 별로 아니냐고 했던 날. " 

"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사귀기로 했는데. "

" 사귀기로 했어? 그런 말 안 했는데? "


뭐야. 언니 자꾸 정보를 빼먹네 나한테. 눈을 좀 흘기는걸 보다가 그거 뭐 맨날 너한테 다 보고하듯이 말하냐? 콧방귀를 뀌었다. 순간 남자라고 해서 약간 무슨 말인지 헷갈렸었다. 사실은 남자는 아니니까. 주구장창 여자만 만나고 있는데 원영이랑은 15년을 알고 지냈으면서도 아직 커밍아웃을 못했다. 지금 같이 사는 마당에 여자 좋아한다고 하면 불편할 수도 있고, 좀 애매했다. 엄마 귀에 들어갈 것도 쪼금 걱정이라면 걱정. 우리 엄마는 나 보다 원영이랑 더 친하니까. 




" 언니는 한 번도 남친을 안 보여주더라. "


또 저 얘기. 남친 얘기만 했다 하면 튀어나오는 장원영의 구시렁이다.


" 너도 안 보여주잖아. "

" 언니가 안 보여주니까 심술 나서 그러는 거거든? 내 남친 보고 싶으면 언니가 먼저 보여주던가. 장유유서야. "


장유유서면 장이 먼저니까 장원영 선. 하고 척 손으로 가리켰더니 어이없다고 원영이 실실 웃었다.


" 장유유서가 그 장유유서야? 장이 장원영이면 유는 뭔데. "

" 유진? "

" 아으. 증말. 부장님 안녕하세요? "


온 몸으로 진저리 치면서도 또 배꼽인사로 은근 받아준다. 오늘도 두부조림 너무 맛있다. 원영의 입맛을 줄줄 꿰는 엄마가 보내오는 밑반찬에 원영이 또 호평 일색이었다. 제가 아무리 갈비찜이 맛있다고 해도 원영이 두부를 찾으면 두부 반찬을 보내주는 우리 엄마. 내가 엄마 딸인지 원영이 엄마 딸인지. 보통 유진의 엄마가 밑반찬을 보내서 냉장고를 채우고, 원영의 엄마가 솜씨가 없으시다면서 그냥 뭉텅이로 고기를 보내셨다. 안 그래도 낮에 원영의 집에서 온 소고기가 2kg가량 되었는데 적당히 소분해서 냉동실에 착착 넣어놨다. 대충 내일 저녁은 살치살 구워 먹을까? 물으면 원영이 좋아서 발을 동동 구른다. 



" 너 주말에 출장 말고 다른 일정 없어? "


식탁에 세워놓은 탁상 달력을 훑었다. 일종의 스무살 때부터 같이 한 동거 룰이라면 룰이었다. 각자의 스케줄을 식탁 위 탁상 달력에 기재해놨다. 너 어디냐 주말에 뭐하냐 이런 거 하나하나 일일이 묻기 귀찮아서 도입한 시스템으로 언제 회식이다, 주말에 남친 만나러 갔다가 저녁 먹고 온다 그런 것들을 달력에 적어두었다. 저런 스케줄을 달력에 기재해놓으면 그걸 보고 원영이 저녁에 회식 있구나 혹은 주말에 어딜 가서 저녁 먹고 오는구나 아는 것이고, 원영도 유진이 데이트를 갔구나 클라이언트 만나러 갔구나 아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 저녁 먹고 오겠다고 적어둔 유진과 달리 원영의 주말은 텅 비어있었다.



" 밀린 집안일 한다고 했잖아. "

" 데이트는? "



매주 남친이랑 데이트가 있는 게 원영인데 이번 주말은 무슨 일로 비어있담. 맥주를 호록호록 거리다가 물었다.


" 헤어졌어. "

" 야, 나한테 말 안 하는 게 많다더니 네가 더 말 안 하는 게 많네. 언제 헤어졌는데. "

" 한 달 전쯤에? "


헐. 한 달 전에 헤어졌는데 말을 안 하다니 좀 서운. 하다고 하려다가 생각해보니까 나도 여자랑 사귄다는 거 말 안 했으니까 퉁쳐준다. 아무래도 비밀은 제가 더 클 테니. 근데 주말에 매번 약속이 있다고 적혀있었는데 그럼 그게 데이트가 아니고 그냥 친구 만나러 간 거였나.











원영이 씻는 동안에 유진이 다 먹은 식기를 정리하고 요즘 뭐 유행하는 드라마 없나 OTT를 뒤지다 보면 씻고 나온 원영이 소파에 붙어 앉아서 뭐 볼 건데? 하고 물었다. 손에서 리모컨을 뺏어가 혼자 검색을 하고 뒤적뒤적 거리더니 처음 듣는 드라마를 튼다고 묻는다. 언니, 이거 청춘물인가봐 나 이런 청량한 느낌의 영상미 있는 드라마 보고 싶었어. 나 상견니도 진짜 좋아하는 거 알지? 쫑알거리는 걸 들으면서 대충 훑어보는 소개 멘트가 이거 딱 GL 인 거 같은데 얘는 이게 뭔 줄 알고 보겠다는 건가. 원영은 맥주캔을 홀짝이고 유진도 전자레인지에 2분 돌린 팝콘을 먹었다. 주섬주섬 먹다 보니까 슬슬 바닥을 보이는 팝콘을 뒤적 거리는데 으이그- 소리를 내면서 원영이 유진의 긴팔 소매를 걷어 올렸다.  


" 팝콘 기름 다 묻고. "


대충 집어먹었더니 팝콘통 입구에 묻었던 기름이 소매에 군데군데 누렇게 묻어있었다. 


" 아, 나 이거 어제 세탁한 건데. "

" 언니 이따 세탁 통에 벗어놔. 주말에 내가 흰옷 빨면서 빨아줄게. 언니는 흰색이랑 색깔 있는 거 자꾸 섞어 빨아서 내가 해야지 안 되겠어. "

" 압도적 감사. "


고맙습니다. 키운 보람이 있군. 90도 인사를 하고는 바로 벗어서 세탁 통에 농구하듯 슝 던졌다. 세탁 통에 안착해서 나이스 3점 했더니, 노노 거기서 던지면 2점이야. 내 불꽃슛을 원영이 후려친다. 







" 자꾸 언니는 나를 키웠다고하더라. 난 혼자 알아서 잘 컸는데. "


삐죽거리는 옆에 안에 받쳐입었던 민소매만 하나 달랑 걸치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 너 내가 다 키웠는데. "

" 꼴랑 한살 차이면서 도대체 뭘 키웠는지 말해봐. 난 알아서 컸다니까? "



어디 말해보시지 한 살 차이면서 뭐 자꾸 키웠다고 그래. 하고 허전하게 드러난 팔뚝을 콕콕 찌른다. 한 손으로 맥주캔을 하나 더 까면서 옛날 얘길 끄집어냈다. 내가 너 맛있는 것도 많이 사 주고 무거운 거도 들어주고 학원 앞에 데리러 가고 어? 매점에 하나 달랑 남은 삼각커피우유도 양보해주고. 그거 양보하면 거의 모성애야. 양보할 때마다 산통을 느꼈어. 저런 말을 하다 보면 열여덟 때 쯤인가 뻔질나게 원영이 다니던 학원 앞에 데리러 가고 여기저기 둘이 놀러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퐁퐁 솟아났다. 



" 너 대학교 때도 내가 엠티 때 술 게임 다 빼주고. 야 이런 빽이 어딨냐? 너 나 아니었으면 게임도 못하는 게 백퍼 벌 주마시다가 기절했지. "


시체 되가지고 흑역사로 떠돌았을걸. 내가 CC 하지 말라고 충고도 해주고. 으스대면서 어깨를 추켜세워봐도 어이없단 시선만 돌아온다.


" 술 마시고 싶었는데 언니가 오히려 못 마시게 훼방 놓은 거야. 나 술 잘해. "

" 좋기도 하겠다 술 잘해서. "

" 그리고 난 CC는 오히려 못 해봐서 아쉽거든? 언니만 해보고. 언니가 엉망으로 쫑냈다고 나까지 그러란 법 있어? "

CC라는 그 남친을 나한테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내가 열이라도 안 받지. 훈수는 두면서 남친은 코빼기도 안 보여주는 건 놀리는 거야 뭐야. 슬슬 원영이 열을 올린다.


" 야, 내가 해봤으니까 구린 걸 아는 거 아니야. 너 뭐 그럼 CC 해서 결혼까지 골인할 거냐? "

" 언니랑 사는데 결혼을 어떻게 해. "

" 뭔소리야. 나랑 사는 게 무슨 상관. 결혼 할 사람 생기면 하는 거지. 빨리해라 좀. "



투닥거리는 와중에 TV에선 여자 둘이 오래 친구였다가 슬슬 마음을 깨닫는 로맨틱 드라마가 한창인데 원영의 눈치가 보인다. 여주 둘이 살짝 입술을 붙이는 장면에서 괜히 리모컨을 들어서 다른 거 본다? 하고 물었다. 원영도 영 내키지 않았는지 인상을 찌푸리다가 바로 금요일에 1박으로 출장을 간다고 금세 주제를 바꿨다. 부산에서 뭐 행사가 열리는데 거기에 차출되어 가게 되었단다. 금요일 아침 7시 기차 타고 갔다가 토요일 저녁 기차 타고 오는데 부산에서 혼자 1박 하는 게 너무 짜증이 난다고 원영이 구시렁거린다.







갑자기 원영이 팔짱을 끼고 붙어선 언니 부탁하나 있어 하고 얼굴을 붙였다. 이런 거는 백퍼 난감한 걸 들어달라고 하는 거라서 안들어안들어- 안들어줄거야- 하고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동안 이런 식으로 한 부탁들을 곱씹어보면, 여친이랑(원영은 남친으로 알고있는) 여행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지가 남친한테 차여서 슬프다고 청승을 떨면서 놀아달라질 않나, 가족여행을 가는데 자기도 가고 싶다고 껴달라고 하질 않나. 안하무인인 저 부탁을 듣기 싫어서 귀를 막는 시늉을 했더니 그 손을 치워내고 아예 귀에 입을 붙였다.




" 언니 부산오면 안되나? "


혼잣말처럼 작게 말하는데 귀에다 대고 대놓고 속삭인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백퍼 난감한 부탁이지.


" 내가 회도 사주고, 기차비도 내고 술도 사줄게. "


부산 간지 오래됐잖아. 겸사겸사 1박 2일 여행이라고 생각해. 나 일하는 동안 언니는 그냥 놀고 있어. 내가 카드도 줄게. 부산역 앞에 본전국밥도 사주고 수육도 사줄게. 본인이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말 같은지 꼬심이 구구절절이다. 귀가 간질간질, 몸에 소름이 돋아서 원영을 저리 밀어낸다.


" 네가 출장 가는데 내가 왜 같이 가. 너 일하는 동안 나 뭐 하라고."

" 아니이- 회사에서 어차피 숙박비가 나오니까 겸사겸사 1박 여행이라고 생각하라 이거지. 맨날 언니가 집안일 더 많이 하니까 내가 미안하니까, 숙박비 돈 굳잖아. 응? "

" 안돼, 나 주말에 데이트 있어. "

" 일요일에만 적어놨던데? 뭐 남친 만나기 하루 전부터 마음의 준비해야 해? 일요일 점심에 데이트라며 토요일 저녁에 올라오면 되잖아. "

" 싫어. 기차 타고 왕복 6시간인데 귀찮아. "



아- 진짜. 팔을 잡고 늘어지는 칭얼거림이 거세진다. 싫다고. 짐짓 목소리를 눌렀더니 치- 하고는 저만치 떨어진다. 



" 진짜 안 갈 거야? 호텔 하얏트인데? 공짜 호캉스인데? "

" 안 간다니까. 그리고 너는 내가 무슨 하루종일 그냥 집에서 노는 사람인 줄 아냐. 나도 금요일이랑 토요일에 생각해놓은 일과가 있는데 갑자기 부산 가자 그럼 되겠냐고. "

"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해. "



내가 언니 백수 취급한 거 처럼 되게 말 좀 그렇게 한다? 가지 마 그럼. 뾰족하게 말해놓고는 금세 일어나서 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백수 취급 당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지레 찔려서 저러는 거야 뭐야. 













일요일에 성수에 뭐 먹으러 갈까. 이런 여친 문자에 간단하게 알아본 식당들이랑 팝업스토어 같은 걸 찍었다. 지금 이 여친이 원영이랑 살면서 만나는 여섯 번째 여친인데, 그동안 여친 사귀는데 큰 걸림돌인 장원영이 있어서 긴 연애는 못하고 짧게 짧게만 만나다가 이번에는 웬일로 좀 길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원영을 걸림돌이라고 표현하면 좀 미안한가 싶으면서도 그게 사실인걸. 아무래도 여친도 여자고 같이 사는 원영도 여자다 보니까 여자 좋아한다는 애가 아무리 친한 동생이어도 여자랑 동거한다는 걸 개뿔 아무도 이해를 안 해줬다. 그래서 원영이랑 동거한다는 걸 숨기고 연애도 해봤는데 그게 나중에 들키면은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서 두어번은 뺨을 맞았다. 


그냥 동생이라고, 원영은 저를 헤테로로 알고 있고 원영도 헤테로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믿어주고. 장원영이 남자한테 고백 주기로 받는 애다 줄 선 남자가 8톤 트럭이라고 여자가 지 좋다 하면 나를? 왜? 할 애라고 해도 아무도 안 믿었다. 나는 원영이랑 그냥 언니 동생 사이라고 해도 전 여친들은 하나같이 백퍼 스무번은 잤겠다면서 저를 마구쳤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초등학교 때 부터 보고 자란 애한테 그런 마음 들고 그러면 그냥 변태 아니냐고. 여전히 볼 때마다 초딩 같은 장원영인걸 모르고 저런 소릴 하는 거다. 쟤가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데. 내가 아주 업어 키웠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찐으로 업어 키웠다. 오르막 저 끄트머리에 있는 학교를 다닌 덕에 체육이라도 한 날이면 하교하면서 힘들다고 업어 달라고 매번 칭얼거렸었으니까. 지금와 생각해보면 키는 멀대 같이 커서 어찌나 애처럼 엥기는지 달고 다니기도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키도 똑같이 산만한 게 자꾸 칭얼거리면은 나더러 진짜 뭐 어떡하란 말임. 저런 슈퍼칭얼쟁이 장원영이랑 7년 동거를 하는 탓에 연애가 아주 고행길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이번 여친은 아예 만날 때 바로 다 오픈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낫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는지 구세주 등장이었달까.





휴대폰을 붙들고 웅웅 알아쪄- 하고 있는데 퇴근한 원영이 집으로 쉭쉭 거리면서 들어왔다. 또 대머리거북이가 열받게 했나보구만. 통화 하고 있는걸 보고는 남친? 하고 입 모양으로 묻는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녁 먹고 다시 전화하께- 하곤 서둘러 전화 끊고 프라이팬에 올리브오일 둘러놨던 소고기를 한덩이 턱 올렸다. 고기는 원영이가 잘 굽는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쯤이면 옷을 갈아입은 원영이 내가 구울 거야- 하고는 바로 와서 바톤을 이어받아 집게를 들었다. 





어제 밤에 백수 타령이니 뭐니하고 투닥거렸는데, 어차피 우리 사이에 그런 건 싸움 축에도 못 꼈다. 그냥 화해란걸 안 해도 저절로 없던 일이 됐다. 원영이 솜씨 좋게 미디엄 레어로 구운 소고기가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아졌다. 



" 언니, 진짜 부산 안 가? "

" 어제 이미 얘기 끝난 거 아니야? "

" 다시 한번 생각해봐. 언니 진짜 안 간다고 하면 그냥 혼자 가야지 모. "


하얏트 진짜 좋다고 해서 아까워서 그래. 언니 없으면 나 외롭고 쓸쓸하고 휴. 옆구리가 시려서 따듯한 부산에서 동사하면 어쩌나. 일부러 저렇게 불쌍한 표정을 있는 대로 팔자 눈썹을 해가지고 짓는 거 누가 모를까 봐. 유진은 그냥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언니는 한 번 정하면 땡이지? 삐죽한 원영이 마저 고기를 먹었다.



" 금토에 일정 뭔데? "

" 방콕. "

" 방콕가? "

" 아니 방에 콕 박혀있을 거야. 못 본 웹툰도 좀 보고. "


부산에서도 볼 수 있는걸 지금 일정이라고 부산을 안 간다는 거냐고. 어이없어하는 원영의 표정이 더 어이없었다. 부산 왕복 6시간은 뭐 그럼 누가 책임져주냐? 귀찮아서 싫어. 난 딱 귀찮은 건 질색이야. 귀찮아서 연애는 어떻게 한대. 



" 연애는 안 귀찮은데. "

" 난 남친들 다 귀찮던데. 언니는 안 그래? "

" 전혀. "

" 연애가 천성인가 보다. "

" 너도 연애 빨리해서 결혼해. "

" 왜 어제부터 결혼 타령이야. 언니 결혼하게? "


결혼이라. 난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뭘 알고 물어보나 모르겠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요즘 부쩍 결혼 얘길 꺼내서인지 원영과의 대화도 자꾸 그런 쪽으로만 물꼬가 터진다. 너 걱정되서 그런다 어떤 남자가 너 데려가냐. 


" 뭐야. 자꾸 애 취급을 해 짜증 나게. "


네가 애지 그럼. 흘겨보는 게 영락없이 열두살인데. 언니 혹시 만난 지 얼마 안 된 현남친이랑 결혼 생각해서 그런 말 하는 거면 나한테 그 남자 보여줘야 해. 청첩장 줄 때서야 보여주면 울 거야. 나한테 허락을 받아야지. 그래 안 그래? 하고 턱을 치켜든다.


" 너가 뭐 내 엄마야? "

" 동생이다 왜. "


분명 난 외동인데 어디서 이런 동생이 생겼나. 씁, 말을 쥐뿔도 안 들으면서 꼬박꼬박 동생이래요. 














쌓인 이메일에 회신을 하고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모니터에 코 박고 있었더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른 터라 하루종일 공복에 배꼽시계가 울렸다. 시간이 벌써 저녁 먹을 때가 다 됐네. 야근한다는 말이 없어서 슬슬 원영이 퇴근할 즈음인데 내다본 창밖에는 빗방울이 맺혀있었다. 원영이 우산 가져갔나. 휴대폰을 들어서 너 우산 가져갔냐? 하고 문자를 보냈다. 빠르게 읽음으로 바뀌질 않는 거 보면 아직 퇴근 못 했나. 지하철이었으면 금방 읽었을 텐데. 조금씩 더 굵어지는 것 같은 빗줄기에 우산을 두 개 들고는 집을 나서려다가 그냥 조금 커다란 장우산만 하나 챙겼다.



백퍼 우산을 안 가져갔을 거다. 예전에 초중고등학교 때도 안 가지고 다녔으니까. 어제 일기예보에 비 온다고 했다고 아침부터 문자로 미리 귀띔을 줘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게 원영의 컨셉이고 버릇이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통틀어 유진만 우산을 들고 다녔다. 어차피 집도 앞집 사는데 둘 다 우산 들고 다녀야 해? 언니가 어차피 씌워주잖아. 당당한 얼굴로 제 우산에 쏙 몸을 들이밀었다. 자기만 가방 가벼우면 다야 아주. 비가 오는 날이면 하교하고 유진이 가려던 떡볶이집이고 노래방이고 모든 스케줄은 너무도 당연하게 취소됐다. 비 내음이 솔솔 날 때 저 모든 스케줄이 취소된 자리에 번뜩하고 장원영의 우산 미션이 추가되었습니다 하고 등이 들어왔다. 장원영의 우산이 되. 이건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웃긴 말로 원영이 나 우산 갖고 다니기 싫어서 언니랑 같은 학교 왔어 할 지경이었다.




지하철역 6번 출구 앞 노점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원영을 기다렸다. 문자는 읽음으로 바뀌었는데 통 답이 없네. 자다가 내리는 역 놓치는 거 아니야? 나참. 머리만 대면 자는 애가 지하철에서 어디 좋은 자리에라도 앉았나. 심드렁하게 빨대로 쪽쪽 빨던 삼각커피우유를 대충 가판 어디쯤 내려놨다. 어묵꼬치 하나 먹는 동안만 기다렸다가 안 오면 가야지. 했는데 어묵꼬치를 두 개 먹고 추가로 순대까지 시켰다. 내장은 간 말고 허파만 많이 주세요. 어느새 지하철역까지 온 지 30분은 족히 지났다. 전화를 걸어도 휴대폰이 꺼져있다 하고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무슨 일 있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가 앞에 놓이고 막 지하철이 도착했는지 출구에서 우르르 인파가 쏟아져 나온다. 






" 언니, 오래 기다렸어? "


원영이 옆에 팔을 붙들고 섰다. 깜짝아 언제 왔냐. 



" 휴대폰 배터리가 나갔엉. "


보조배터리 안 챙겼어? 챙겨 다녀야지 대중교통 한 시간씩 타면서.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또 잔소리를 기어이 하게 만든다. 보조배터리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데 오늘 하필 딱 안 가져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었지 모야. 나 연락 안돼서 걱정했어? 눈썹을 축 늘어트린 얼굴이 더 가까이 온다. 아니 안 했거든. 웅 걱정 안 했구나앙? 사장님 떡볶이도 1인분만 주세요. 하는 표정이 웃는 낯이다.



"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냐. "

" 우산 가져갔냐고 하길래 마중 나오나보다 했지. 언니 여기 순대 좋아하잖아. "



오래기다렸구나? 어묵 두 개나 먹었넹. 엉 그러니까 니가 사. 가판대 천막 아래로 물이 뚝뚝 떨어져 원영을 이만치 당겼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유진의 순대 접시에서 원영은 허파만 쏙쏙 건져 먹다가 커피우유 마신다? 하고 유진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옆에 놓아둔 삼각커피우유 빨대를 쪽 빨았다. 절반쯤 남아있던 커피우유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 보조배터리를 놓고 가는 건 목숨을 놓고 가는 거야. 아침에 절대 안 까먹게 현관에 딱 놓고 자. 그리고 우산도 작은 거 갖고 다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다이소에서 5천원짜리 작은 거 사줬잖아 지난번에. "


엄청 경량이라서 가볍더만 그거 들고 다니는 것도 싫으면 어떡해. 잔소리를 줄줄하고 나 같은 언니가 어딨냐고 으스댔는데 카운터 펀치처럼 나 우산 갖고왔는데? 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 너 오늘 우산 갖고 갔다고? 영 안 믿기는데. "

" 갖고 다니라며. "


가방에서 제가 지난번에 다이소에서 사준 경량 우산을 꺼내 보인다. 중고등학교 때는 가지고 다니라고 귀에 딱지가 앉게 말해도 안 가지고 다니더니 그리고 대학생 때도 맨날 언니 나 우산없떠 하고 혀짧은 소리 내고 그랬는데 갑자기 뭔 바람이 불었대. 커피우유 빨대를 슬슬 씹고 있는 걸 에이 빨대 씹지 마 하고 원영의 입에서 빼냈다. 꼭 다 마신 거 빨대를 씹더라.



" 언니는 뭐 내가 아직도 애 같은가 봐. 나 이제 우산 잘 갖고 다녀. "


나 이제 스물일곱이거든, 내일모레 서른이다. 하고 떡볶이를 입안으로 쏙 넣는 얼굴이 순간 좀 여자얼굴이었다. 하는 짓은 열둘 같은 데 다 컸네- 다 큰 김에 빨대도 그만 씹지? 하고 순대를 마저 집어 먹었다. 언니 대신 씹는건데? 어쭈- 언니한테 못하는 말이없어.




오래 살고 볼일이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는데 스물 일곱 만에 고쳤다. 우산을 십년을 넘게 가지고 마중을 나갔는데 이젠 안 그래도 되려나. 우산 셔틀 간판을 내려야겠다. 비 오는 날마다 신규로 갱신되던 장원영의 우산 미션은 이제 쫑. 셔틀 은퇴라는 생각이 드니까 시원섭섭하다. 후련한 듯 후련하지 않은 듯 후련한 마음으로 질겅질겅 찹쌀순대를 씹었다. 조만간에 빨대도 이제 안 씹는 리얼 어른으로 성장하는 거 아닌가.




가판을 나설 때는 이미 비가 그쳤다. 손에 들고 온 장우산을 곱게 들고는 빗물이 가득한 인도를 띄엄띄엄 걸었다. 집까지 반도 못 갔는데 다시 한 두방울씩 떨어져서 우산 하나를 급히 펼쳤다. 원영도 따라서 우산을 펼 줄 알았는데 곧이곧대로 제 우산 안으로 늘 그랬듯이 머리를 들이민다. 



" 뭐야, 네 우산 써. "

" 우산 들기 귀찮아. "

" 참내. 결국 내 우산 쓸 거면서 뭔 우산 가져갔다고... "

" 나 오늘 타자 많이 쳐서 손목 아파. "

" 나도 하루종일 코딩해서 손목 아프거든? 넌 사무직이지만 난 개발자다. "

" 그럼 내가 들어줄게. "


호기롭게 들어주겠다고 손을 뻗더니, 우산을 드는 척만 하고 쏙 팔짱을 낀다. 이게 우산을 드는 거냐 내 팔에 매달리는 거지. 언니 우산 들 때 힘 내라고 응원 중. 우산 들 때 힘 들라고 아니고?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황당해서 웃었더니 히히 따라 웃는다. 내가 순대랑 어묵 사줬으니까 밥값 해. 와- 진짜 우산 셔틀 시키네. 엉, 원래 언니는 내 우산이야. 듣는 우산 기분 나쁘다. 진짜로? 아니 장난이지.




" 남친이랑 일요일에 데이트 어디로 가? "

" 홀리워터. "

" 그건 또 뭔데. "


부장님 개그를 짐작했는지 원영의 목소리 톤이 확 낮아졌다. 성수. 아으- 언니 진짜 남친한테도 그런 개그 하는거 아니지? 하고 질색팔색하는 표정을 보고 키킥 웃었다. 어차피 너한테 아니면 이런 개그 하지도 않거든?  





















벌써 부산에 도착했나. 새벽부터 기차 타러 나간 것 같더니 부산역 앞이라고 원영한테서 셀카가 도착했다. 일하러 갔는데 안색이 좋네. 원영이 식탁에 씻어서 놓아둔 방울토마토를 집어먹다가 슥 확대해서 보니까 웃는 낯이 진짜 환하다. 미뤄뒀던 웹툰을 쓱쓱 눈으로 굴렸다. 언니언니, 본전 돼지국밥 완전 맛있어. 언니 안 온 거 완전 후회 할 맛이야. 다음에 들어온 사진은 돼지국밥 사진이다. 수육도 먹고 싶었는데 혼자라서 못 시켰어. 언니가 안 와서 다 언니 때문이야. 메뉴판 사진도 연달아 들어온다. 누가 보면 일하러 간 게 아니라 여행 간 줄 알겠어. 


웹툰을 완결까지 독파하고 저녁으로 라면을 하나 끓여 먹었다. 평소에 원영이랑 식사를 하면 라면을 절대 못 먹기 때문에 없을 때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라면이 무슨 인간들의 일대기에 제일 불량식품 인 것처럼 굴어서 절대 먹자고 얘기도 못 꺼냈다. 호록호록 라면을 먹고 그릇을 정리하려는 타이밍에 갑자기 영상통화가 들어와서 호다닥 식탁에서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입가에 라면 국물 흔적이라도 있을까 봐 거울도 한 번 봤다.




" 뭔 영통이야? "

' 뭐 했는데 그렇게 당황해. 집에 나 없다고 남친이라도 불렀어? '

" 아니 나 밥 먹고 있었어. "

' 뭐 먹었는데? '

" 밥 먹었는데. "

' 뻥치네. 라면 먹었지. '

" 아닌데. "

' 식탁 봐봐 그럼. '


뭐냐 나 감시하냐 네가 엄마야 뭐야. 구시렁거리고는 용건이나 말해 하고 윽박질렀다.



' 여기 호텔 뷰가 너무 좋아. 언니 보여주려고. '


화면에 꽉 차게 보여주는 게 반짝거리는 무슨 다리 같다. 광안대교야? 응, 여기 광안대교 뷰라서 너무 좋아. 예쁘지. 아까 저녁으론 밑에 횟집에서 회덮밥 먹었어. 호텔 카페에서 아까 차도 내려 마셨다? 올- 혼자 잘 먹고 다니네, 알았으니까 이제 끊어.


' 왜 끊으래. '

" 맨날 얼굴 보는데 뭘 영통을 해. 먹은 거 사진이나 보내. 뭐 먹었나 보게. " 

' 언니 얼굴 보려고 영통한 거 아니거든? '

" 맞는 거 같은데. 너 무슨 분리불안 그런 거 있는 거 아니야? "

' 하, 끊어. '



하고 뚝 영통이 끊어졌다. 분리불안이라고 했더니 삐졌나 봄. 내가 너무 뼈 때렸나. 근데 저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제법 분리불안처럼 구니까. 꼭 이렇게 하루 넘게 떨어질 거 같다 싶으면 전화를 하던 문자를 보내던 하루종일 연락을 하는 게 중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대학교 때도 그랬다. 심지어 신입사원 그룹 연수를 가서도 언니 나 방 배정이 혼자래 너무 무서워 하고 전화를 했고, 연수원 3주짜리 합숙에 반찬을 갖다주면 안되냐고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입맛에 안 맞아서 밥을 못 먹어, 나 살 빠지는 거 같아. 언니가 반찬 좀 갖다줭. 안 그래도 한 줌인데 살 빠지면 안 되지, 내가 엄마 딸인지 원영이 엄마 딸인지 헷갈리는 엄마가 싸준 두부조림을 들고 가면서 진짜 애 키우는 헬리콥터 맘이 된 줄 알았다. 이게 바로 치맛바람인가. 다시 몸을 일으켜서 화장실 까지 몇 걸음 가지도 못 했는데 또 영상통화가 들어온다. 



" 이봐이봐. 너 분리불안 맞지. "

' 심심해서 그래. '

" 나 이 닦을 거야. " 

' 나랑 통화하면서 닦아 그럼. '

" 변태야? "

' 이를 뭐 옷 벗고 닦을 거야? 옷 벗고 이 닦는 사람이 변태지 그럼. '



한 마디를 안 져 하여튼. 나 이 닦을 거니까 혼자 쫑알거려 그럼. 이를 닦는 데 굴하지 않고 원영이 쫑알거린다. 있잖아 언니 내가 아까 바이어 미팅을 들어갔는데 완전 아저씨들만 있는 거 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대머리거북이가 와야 하는 출장인 거 같은데 나한테 넘긴 거 같아. 어떻게 복수하지. 그 대머리 등딱지 따버려. 고춧가루에 버무리자. 그럼 거북손무침. 하고 거품을 가득 물고 웅얼거렸더니 킥킥 웃는다. 


가글을 하고 다시 방 안에 모니터 앞에 앉을 때까지 쉴새 없이 원영의 부산 하루 일과를 들었다. 혼자 있으니까 심심했어, 언니는 뭐 했어. 웹툰 엔딩까지 다 봤어? 엉 재밌더라. 아까 내가 차 세트 사진 보낸 거엔 답도 안 하고 안유진 이 배신자야. 눈썹만 들었다 놓아도 리액션이라는 듯이 쫑알쫑알. 박찬호보다 더한 투머치토커. 



" 나 이제 일해야 하는데 너 언제 끊을 거야. "

' 언니가 나 분리불안이라며. '

" 나 휴대폰 들고 못 있어. 타자 쳐야 된다고. "

' 분리불안의 진수를 내가 보여주려고 지금. '


괜히 아까 분리불안이라고 해가지고 원영의 심기를 제대로 긁었나보다. 야, 그럼 1분만 이따가 다시 걸어. 싫어 언니 안 받을 거잖아. 눈을 냅다 흘긴다. 화면을 뚫고 나오네 아주. 








옆으로 노트북을 세워놓고 새로 들어오는 영상통화를 받았다. 살다 살다 노트북 옆에다 갖다 놓고 영상통화 하면서 일해보는 건 또 처음이네. 



' 언니 이거 구도가 구려. '

" 뭐. 왜. "

' 언니 지금 완전 옆모습만 보이는데. '

" 너 내 얼굴 몰라? "

' 안유진 선생님. 제가 분리불안이 있어가지구요. '


옆 모습만 보려니까 분리불안까진 아닌데 분리가 오려고 그러네요? 진짜 아주 놀리려고 작정을 했지. 어이없는 웃음이 난다. 말 한마디 잘못 꺼낸 내가 상등신이지. 노트북을 조금 당겨다가 45도쯤 보이게 갖다놨다. 흘끗 본 영통화면에 원영의 룸이 다 보인다. 끊으면 또 걸려 올게 뻔해서 다시 일하던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동안 화면에 얼굴이 안 비추더니 씻고 나왔는지 샤워가운 걸치고 돌아다니는 것도 보인다. 이게 영통이야 뭔 CCTV야 뭐야. 괜히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건조해? 가습기 틀었어? 화면 건너편에서 차라도 타 마시라는 원영의 말소리가 들린다. 틈틈이 슬쩍 볼 때마다 화면에 책을 보는 것 같은 원영이 보였다가 눈이 또 마주쳤다. 원영인 렌즈를 본 거일 테니까 눈이 마주친 건 아닐 텐데 무슨 생각을. 머리칼이 젖은 게 감기 걸릴 거 같은데. 하얏트 룸의 등은 원래 저렇게 여리여리한가. 쓸어 넘기는 손이 꽤 여자 손이어서 손등에 저절로 시선이 붙었다. 언제 저렇게 또 손이 여자 손이 됐대. 어릴 땐 잡으면 말랑말랑해서 아기 손이었는데. 제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가 살풋 쥐었다 폈다.  




' 언니 왜 나 훔쳐봐. '


정곡을 찔려서 흠칫해놓고는 태연한 척 시선을 돌렸다.


" 뭘 또 훔쳐본대. 영통 하자고 한 거 너거든. 안 보면 될 거 아니야. 너도 그만 봐 그럼. "


하고 노트북 카메라 덮개를 덮었더니 아아- 취소취소 하고 칭얼거린다. 웃겨 진짜. 초딩이 아주. 힐끔 볼 때마다 가까이 오려고 원영이 몸을 숙이는 걸 자꾸 고나리했다. 야, 해킹 당할 수도 있는데 샤워가운 그렇게 입고 영통하면 쓰냐. 안에 속옷은 입었어? 잔소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고 언제 책은 덮었는지 와인이나 홀짝인다. 



' 아니 나 샤워가운 안에 속옷 안 입는데? '

" 얼씨구? 자랑이다. 빅토리아 시크릿 납셨네. "

' 스물 일곱씩이나 먹고 그럼 가운 안에 속옷 입어? '

" 그게 나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런 쓸데없는 걸 어디서 보고 따라 하는 거 자체가 더 애 거든. "

' 자꾸 애 취급하지 마. 이렇게 큰 애가 어디써. "


술 기운 때문에 얼굴은 지가 와인이 된 거 마냥 발그레해져서는 화면 가까이 코를 콕 박았다가 다시 턱을 괴었다. 발음도 슬슬 웅엥 거리기 시작. 느리게 끔벅거리는 눈꺼풀에 졸음이 스멀스멀 오르는 게 취기가 도나보다. 휘익- 바람 빠지는 소리에 화면을 들여다봤더니 휘파람을 불건지 입술을 쭉 내밀고있다. 휘익- 바람이 새는 휘파람 소리가 났다 멈췄다. 휘파람 잘 불지도 못하면서. 술버릇인지 꼭 취기가 오르면 휘파람을 불었다. 어릴 때부터 휘파람 잘 불고 싶어 하더니 지금까지 한 번을 제대로 못 불면서도 왜 저런 술버릇이 쟤한테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 휘파람 잘 불고 싶어. '


언니 나 휘파람 부는 거 알려줘. 언니는 잘 불잖아. 쉬익- 후욱 하고 아예 바람이 통으로 빠지는 소리를 내는 입술을 아예 턱을 괴고 봤다. 통통한 입술을 오물대다가 잘 안되는지 눈썹이 쳐진다. 매번 알려줘도 못 불면서. 내가 볼 때 그냥 타고나길 휘파람을 잘 부는 사람이 있고 못 부는 사람이 있는데 넌 후자야.



" 바람 나오는 곳이 삼각형 모양이 된다고 생각해. "


새 소리 같은 휘파람을 유진이 불었다. 매끄럽고 청아한 음으로 어두컴컴한 방안에 울린다. 언니언니 한 번 더. 그럼 또 원영의 여리여리하게 흐린 룸 안으로 새 소리가 날아들었다. 


' 예전에 나 학원 끝나고 내려가면 언니가 학원 앞에서 휘파람 불고 있었는데. '

" 그랬나? 아마 심심해서 그랬을걸. "

' 그때 학원 뒤에 골목이 엄청 어두웠잖아. 거기 왜 게임존있고 그랬던 뒷골목. '

" 맞다. 거기 약간 일진들도 있고 그랬지. "

' 웅. 밤엔 둘이 걸어도 완전 무섭고. 그래도 언니가 휘파람 불면 좀 덜 무서웠어. '


난 휘파람 불면 뱀 처럼 일진이 스물스물 기어 나올까봐 무서웠는데. 하는 말에 원영이 푸스스 웃는다. 아니 진짜로.


' 일진 나오면 뭐 난 언니 뒤에 숨어야지. '

" 난 너 두고 도망칠건데? "

' 흥, 안 그럴거면서. '




 샐쭉거려놓고는 바로 휘파람 부는 걸 따라 하려는 듯 입술을 오물거리는 게 귀엽다. 휘익- 바람빠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크흡 하고 웃었다가 언니 나 휘파람 못 분다고 비웃는 거야? 웃지 마. 하고 원영에게 책망을 들었다.




' 언니, 나 졸려. 언니는 몇시에 잘 거야. '

" 난 밤새지. 끊어. "

' 아니아니이? 그냥 이렇게 두고 잘래. '



영상통화 하면서 잔다고? 황당해 죽겠다. 


' 룸이 너무 커서 무섭단 말이야. 이게 다 언니가 같이 안 와서 그런 거 잖아. '

" ...알았어. "


침대로 풀썩 뛰어들더니 언니 나 잘 지켜보고 있어야 해 혼자 있으면 무서우니까 휘파람도 불어 여긴 일진 안 나와 하고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잔다. 쌔액쌔액하는 고른 숨소리. 휘파람 부는 게 더 무섭지 않냐고 대꾸를 하기도 전에 잠에 드는 건 반칙이야. 스물 일곱인데 애 취급 한다고 뭐라 하더니 혼자 있으면 무섭다는 게 애지 뭐. 그래도 옅게 나는 숨소리는 꽤 귀엽다. 머리 닿자마자 자는 건 복이라던데. 

ASMR마냥 들리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이메일을 찬찬히 회신하고 중간중간에 피드백 온 것들 수정해주다가 흘끗 보면 아까랑 똑같은 자세로 자고 있다. 저렇게 전혀 안 움직이고 조용히 자는 것도 참 신기해. 어릴 때부터 저러던데. 예전에는 베개를 끌어안고 자고 그랬었다. 안고 자는 베개 없으면 못 잔다고 수학여행 가서도 베개 개수가 모자라서 서럽다고 전화하고 그랬는데. 베개 높이가 너무 높아도 짜증 난다고 전화하고. 이제 그러지는 않나 보네. 그런 거 보면 다 큰 건가. 



새카만 룸 안에 숨소리만 가득하다가 동이 트는 새벽이 되자 화면 안에 옅은 햇빛이 든다. 커튼을 좀 치고 자지. 눈 부시면 바로 깰 거면서. 예상한 대로 으응- 하고 원영이 뒤척거린다. 하얀 이불 아래로 발끝이 쏙 나온다. 여린 허벅지 위로 겨우 이불이 얹어져 있다. 아무리 노려봐도 화면 건너에 떨어질락말락한 이불을 제대로 덮을 수 없어서 엄마 모드를 포기하곤 눈에 힘을 풀었다. 영상통화 시간은 어느새 8시간을 넘어가고 있다. 쟤 완전히 깨서 또 칭얼거리기 전에 나도 잘까. 새벽 6시면 슬슬 나도 잘 시간인데. 밤낮이 완전 뒤바뀌어 있는 동지들로부터 마무리가 아직 멀었냐고 메신저가 계속 들어왔다. 30분? 그 정도면 마무리 가능. 슬슬 바닥을 보이는 차를 마저 끝까지 마시고 기지개를 켰다. 



' 언니, 굿모닝. '

" 깜짝아. "


언제 일어났는지 화면에 커다란 눈을 들이밀고 있다. 눈만 보여서 식겁했다. 잠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얼굴이 뿅 나왔다가 다시 눈만 가까이 온다. 화면 끝 구석구석 훑어보는 느낌인 게 흡사 사우론의 눈이다.


' 혼자야? 밤 샜어? '

" 혼자지 그럼 집에 누가와. 일이 많았어. "

' 언제 잘 거야? '

" 이제 자려고. "



어수선한 책상을 정리했다. 뭘 기다리는지 화면에서 빤히 원영이 쳐다보고 있다.


" 왜? "

' 이제 내가 언니 자는 거 보려고. '

" ...원영아. 나 이제 좀 무서워지려고 해. "



왜- 언니는 나 자는 거 다 봤잖아. 나 잘 때 어때? 킥킥 화면 안에서 원영이 웃는다. 




" 너 코 골더라. "



악! 거짓말! 화면에 입을 틀어막은 경악한 눈을 보고 큭큭 웃었다. 장원영 완전 타격감 좋구요. 


" 거짓말 아닌데? 완전 크게 골아서 깜짝놀랐는데. 부산에 지진경보났어. "

" 아- 거짓말... "


이젠 아예 얼굴을 감싸고는 폭 무릎을 안고있다. 귀 끝이 새빨갛다. 뭐 그렇게까지 민망할 일인가. 농담이라고 쏘리쏘리 너 완전 숨소리도 안 내고 잤어 하자마자 화면 앞에다 작은 주먹으로 주먹질을 한다. 어쭈 어딜 언니한테 주먹질이야. 진짜 나 서울 가기만해봐 언니 때려줄거야. 




" 얼른 가서 조식 먹어 이제. 벌써 일곱시야. 나 잘거야. "

' 웅... 언니 굿나잇. 아니 굿모닝. 잘자. '

" 오냐. 너랑 놀아주느라 피곤해 죽겠다. " 



따끈따끈해진 노트북이 드릉드릉 소릴 낸다. 고생했다 너도.














성수 성수 하더니 보통 아니네. 인스타를 뒤져서 찾아낸 성수 핫플에서 유진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친이랑 소품 샵을 구경하고 두 번째 코스로 그럴듯한 파스타 집에 마주 앉았다. 그 다이어리 살걸 그랬나? 아까 살까 말까 망설이던 다이어리가 맘에 걸리는지 여친이 아쉬운 소릴 낸다. 알람이 하나 없는 휴대폰을 슥 들여다봤다. 원영에게서 연락이 뜸했다. 어제 저녁 늦게 ' 부산에 남친 와서 일정 변경됨, 하루 더 있다 올라가. ' 하고 문자 하나, 오늘 아침에 ' 홀리워터 갔어? ' 하고 물어본 게 전부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자꾸 휴대폰을 들여다보니까 여친이 불퉁하게 묻는다.



" 연락 올 데 있어? "

" 아니 그냥, 원영이 부산 갔는데 연락이 없어서. "



여기 알리오 올리오 맛있다고 하던데 그걸로 시킬까? 간단히 하우스 와인을 곁들였다. 통 자리에 집중이 안 된다. 남친이랑은 헤어졌다고 했는데 다시 남친이 부산에 내려왔다는 게 뭔 소리지. 전 남친이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하나. 일전에 원영의 전 남친 중에 스토커 기질이 있는 놈이 있긴 했었다. 원영이 발신자표시제한으로 전화 오는 거 소름 끼친다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게 한 놈. 집 앞으로 찾아오기까지 하진 않았는데 이번에는 출장 간 곳도 쫓아다니는 놈일 수도. 알리오 올리오 맛집이랬는데 입맛에 안 맞냐고 묻는 여친에 말에 맛있다고 어물쩍 대꾸하고는 잘 넘어가지 않는 파스타 면만 뒤적거렸다. 





신경이 온통 이리저리 휘둘리니 데이트가 잘 될 리가. 컨디션 난조로 해가 떨어지자마자 데이트는 파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묻는 여친에 말에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며칠 밤을 새워서 그런 거 같다고 했다. 실제로 요 며칠 낮과 밤이 너무 오락가락해서 없는 정신에 완전 거짓말도 아니었다. 원영에게 별 다른 연락이 없는 걸 보면 그냥 무소식이 희소식인가. 스토커 같은 전 남친이 찾아온 거 였으면 바로 연락을 했을 텐데. 그냥 하루 더 있다 올라온 다는 거 보면 화해하고 재회의 부산 여행인 거로 생각하면 되나.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우산을 들고 오길 잘했지. 우산을 받쳐 쓰고 지하철역부터 집까지 슬렁슬렁 걸었다. 부슬부슬 떨어지는 게 장마도 아닌데 요 며칠 부쩍 비가 잦았다. 남친이랑 부산 여행 재밌냐. 그저께는 온종일 국밥이 어쩌고 호텔 뷰가 어쩌고 연락하더니, 영통도 8시간을 넘게 했는데 어제오늘은 연락도 하나도 안 하고. 룸이 커서 무섭다고 자는 거 봐달라더니 어젯밤엔 하나도 안 무서웠나 보네. 괜히 서운한 마음으로 도착한 아파트 1층 공동현관엔 부산에 있는 줄 알았던 원영이 서 있었다. 아마도 그 남친인 것 같은 사람과.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사람들 다 오가는 공동현관에서 저렇게 입술을 맞대고 있으면 누구라도 쳐다봤을 거다. 무슨 영화처럼 진득하게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르는 그 두 입술새로 가로등이 쏟아졌다. 그 아래서 오가는 숨이 그대로 다 드러난다. 옅게 하늘거리는 가로등 빛 때문인지 목을 끌어안았다가 몸을 붙이는 게 그 어느 영화에서 봤던 키스신보다 자극적이고 야했다. 반쯤 감았다 뜨는 눈도 입술 사이에 선홍빛 무언가도 아찔해진다. 덜컥 심장이 떨어져서 그냥 못 본 체하고는 뒤를 돌아 빠르게 걸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맞닥뜨리면 좀 이상하지. 남친이랑 키스하는 걸 아는 언니가 보는 게 썩 유쾌하지 않을 테니까. 무작정 급히 걷다 보니까 지하철역까지 와버렸는데 우산은 어디다 흘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지하철 출구 어디쯤 주저앉아서 숨을 골랐다. 다 컸다 다 컸다 했어도, 남친이랑 키스 하는 것 까지 내가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열두살짜리 애였는데 뭐지 이게. 급한 걸음 때문에 숨이 찬 건지 미치게 뛰는 심장을 겨우 붙잡았다. 분명 덜컥하고 떨어진 건 심장이었다. 정말 어디 떨어트렸을까 봐 그럴 리도 없는데 괜히 주변 바닥만 훑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야. 안 그래도 없는 정신에 휴대폰에 들어온 여친의 문자는 시간을 좀 갖자는 말이다.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밖으로 두어시간 돌다가 들어온 현관엔 아까 어디서 흘린 줄 알았던 우산이 곱게 접어져 있었다. 아, 공동현관 근처에 떨어트렸나. 



" 어디 갔다 와? 비도 다 맞았네. "


머리에 톡 수건을 얹어주는데 얼굴이 가까워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원영이 머리칼을 털어주다가 멈칫한 손을 거두고는 얼른 씻어- 하고 방으로 쏙 들어간다. 닫힌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아까 공동현관에서 본 엇갈려 맞물렸다 떨어지는 젖은 입술이 아른거린다. 정말 다 컸나. 맨날 너 언제 크냐 그 나이에 이것도 못하면 어떡하냐 잔소리를 해댔는데 막상 진짜 다 커서 스스로 우산도 들고 다니고 남친이랑 키스도 하고 그런걸 목도하니까 괜히 이상한 기분. 남친이랑 있으면 나한테 혼자 자서 무섭다고 칭얼대지도 않으니까 진짜 미션이 완전 컴플리트 됐다. 초등학생 때부터 하던 각종 미션이 차근차근 종료되더니 조금 전에 완전히 셧다운 되었다. 이제 제가 하던 건 곧 원영의 남친이 다 하지 않을까. 첫 남친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직접 마주한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 그동안은 한 번도 원영의 남친을 본 적은 없었다. 못 보여주는 저랑 다르게 보여줄 수 있으면서도 한 번을 안 보여줘서 서운했었는데. 오히려 다행이었네. 더 예전에 봤으면 더 끔찍했을 거 같아. 










더운 기운을 뿜는 샤워한 몸을 겨우 부엌 식탁 의자에 구겨 앉았다. 펄펄 끓는 물에 넣었다 빼면 좀 씻겨나갈 줄 알았건만 아까 본 장면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만 한다. 옅은 숨을 내쉬고는 어두운 부엌에 앉아 소주나 한잔 마셨다. 자꾸 키스하는 원영의 얼굴이 머릿속을 돌아다녀서 입으로 술이 땡겼다. 술이 다 해결해주는 것도 아닌데. 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 하나 키스한 것 좀 봤다고 아주 지랄이 따로 없다. 누가 보면 동생이 아니라 애인이 키스한 거 본 줄 알겠어. 


원영이가 스물 일곱이니까 보통 이 나이대쯤 만나는 남자랑은 결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안 헤어지고 몇 년 만난다고 하면 그 남자 이름이 박힌 청첩장을 받게 될지도. 불과 며칠 전에 빨리하라고 농담 반 채근했던 입술을 깨문다. 말이 씨가 된댔는데 괜한 소릴 해서는.


소주잔을 두어번 비우다 보니 금세 한 병이 되었다. 나 지금 서운한가 아니면 심란한가. 원영이 남친 좋은 사람인가. 제 연애사를 말한 적이 없으니 원영에게서 돌아오는 연애사도 없었다. 이 말은 제가 원영의 남친에 대해 긍정적인 면이든 부정적인 면이든 아는 게 하나 없단 말이다. 최악이네. 그냥 덮어놓고 좋은 사람이길 빌어야 되는 수준 아니냐고. 소주는 쫑내고 팬트리에 넣어놨던 위스키로 갈아탔다. 주량을 넘어서는지 속에서 진물처럼 신물이 기어오른다. 주량의 끄트머리를 넘기면 눈으로도 그게 기어오르나보다. 눈가가 따끔따끔 해진다. 왜 이래 진짜. 청승맞네 갑자기. 뭐 친동생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우울해지고 난리. 따끔따끔하던 눈가를 벅벅 닦다가 더 시큰시큰해진 가슴께를 잠시 잡았다. 건강검진도 받으러 가야 하나 진짜 왜 이러냐. 정신도 깜박깜박 해진다.














' 원영아... 천천히 자라주라... '

' ...언니한테 애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


품에 안겨 오는 가는 몸통이 따듯했다. 목 언저리에 닿는 촉촉한 감촉에 번뜩 눈을 떴다. 꿈인가. 어젯밤에 되도않게 들이부은 술 때문에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힘겹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다가 몸뚱이가 말을 안 들어서 그냥 침대 안으로 깊게 눌어붙었다. 방엔 어떻게 기어 왔는지 기억도 안 난다. 저 꿈에서 가까이 다가와 품 안으로 파고드는 원영을 끌어안았었다. 술 마시고 별 꿈을 다 꾸네. 아프다고 아래서 흔들리는 원영이 살풋 떠올라 토할 것 같은 신물이 올라온다. 술 때문인지 저런 꿈을 꾼 제가 역겨워선지. 울컥하고 올라오는 걸 참지 못하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를 부여잡았다. 눈가가 시릴 만큼 역겨운 게 저 안에서 끓어 넘쳐서 속을 연신 게워냈다. 미친. 진짜 미친.

















며칠 내내 팔자에 없던 이력서부터 넣었다. 근무지가 서울 아닌 곳으로. 새삼 생각해보니 둘 다 이제 다 컸고 오히려 같이 살아서 더 이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거 같기도 해서 좀 따로 살면 어떨까 싶다. 언제까지 애같이 끼고 살 수도 없고. 괜히 또 키스하는 걸 봤다간 진짜 이번엔 정신 줄 못 잡을 것 같은 기분. 그리고 그 망할 꿈도. 

서울이 아닌 곳으로 입사하게 되면, 뭔가 입사를 핑계로 따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일이 많아서 회사 근처에 방 구해야 할 것 같아. 이것만큼 아무 의심 사지 않을 핑계는 없을 테니까. 스크롤을 굴리다가 마른세수를 벅벅했다. 하, 도무지 머릿속에서 그 입술이 사라지질 않는다. 자연스럽게 엇갈려무는 입술부터 목을 끌어안는 팔도 다 무한히 머릿속을 뛰어다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친년이지 이게 무슨. 동생한테 이게 진짜 무슨. 그냥 너무나도 모르는 새 커버려서, 마냥 걔가 어린 애인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자라버려서, 그냥 그런 이질감을 맞닥뜨린 걸 거다. 그런 걸 거야. 진짜 따로 사는 게 좋겠다. 한 번만 더 키스하는 걸 봤다가는 까무러칠 거 같으니까. 














"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아. "

" 어디로? 이거 전세 아직 1년도 더 남았는데. "


원영이 밥을 먹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 너 말고 나. 넌 여기 계속 있어. "

" ...갑자기 무슨 말이야? "

" 판교에 회사 다니게 됐어. 아직 여기 전세 기간 남았으니까 옮기기도 애매하고. 그냥 나만 판교 오피스텔로 가려고. "


회사를 언제 지원했는데? 그런 말 없었잖아. 팔자로 눈썹이 쳐졌다.


" 그럼 그냥 수서 이런 데로 옮길까? 전세 기간 남은 거는 그냥 부동산에 내놓으면 되잖아. "


수서에서 판교는 출퇴근 가능하지 않아? 내 회사가 잠실이니까 둘 다 다니려면 수서로 이사하면 돼. 원영이 바로 휴대폰을 들어 부동산 앱을 뒤적거린다. 수서 GTX 뚫려서 판교까지 20분밖에 안 걸린다. 나도 수서에선 20분도 안 걸려서 수서가 훨씬 좋아. 



" 회사 오랜만에 다니는 거라. 적응하고 뭐 그러려면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밤낮도 바뀌고 그러는데 그냥 걸어 다니는 거리에 살고 싶어서 아예 판교에 잡으려고. 넌 그냥 여기 전세 남은 기간 채워서 살아. "


" 그럼 판교로 같이 가. 판교에서 다니는 것도 괜찮아 난. 판교에서도 30분도 안 걸려. 여기보다 판교가 훨씬 좋다니까 나도. "


지리를 잘 몰라서 합격도 전에 IT 회사들 많은 판교라고 대충 뻥친 건데, 저보다 저런 걸 훨씬 잘 아는 원영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다. 오히려 판교로 이사하면 더 좋아 이런다. 별수 없이 더 크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다.



" 이미 판교에 월세로 오피스텔 하나 구했어... 6평짜리라 둘이 살긴 좁아. "


저 말에는 기어이 원영이 젓가락을 놓고 미간을 좁혔다.


" 통보야? "

" 내가 너한테 뭐 허락 받아야 되냐. "


눈도 못 마주하고는 그냥 다 먹은 그릇만 괜히 뒤적거렸다. 


" 나한테 화난 거 있어? "

" 아니. "

" 내가 집안일 자꾸 빼먹어서 그래? "

" 아니라고. "

" 난 언니랑 사는 거 좋아. 언니는 나랑 사는 거 별로야? 막 힘 들어? "


어 막 힘 들다. 말이 목 끝까지 찼다. 원래 너랑 사는 거 너무 좋았는데 막 힘 들어 질 것 같아. 서로 힘들어질 것 같다고. 난 너랑 그러기 싫어. 차마 말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 회사 지원한 것도 말 안 하고. 따로 살자고 하고. "

" 너한테 어떻게 다 말하고 살아. 집 이미 계약했어."

" 나한테 회사 어디 붙었다 그런 것도 말 안 해줘? 집 이사하는 것도 그래. 계약하기 전에 나한테 말했어야지. "



차분하게 요목조목 말하는 원영은 맞는 말만 한다. 제가 지금 안하무인격으로 굴고있는게 또박또박 말 하는 원영의 눈에 얼마나 황당해 보일까. 아닌 밤 중에 홍두깨 마냥 갑자기 왜이러나 싶겠지.




" 넌 뭐 나한테 비밀 없어? 내가 뭐 다 말해야 해? "




비밀이라는 단어에 고운 미간에 깊고 굵게 그림자가 진다. 



" ...이게 비밀이라고 해야 할 일이야? 언니는 나한테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데. "

" 너도 이제 다 컸고. 겸사겸사 따로 살자. 언제까지 내가 너 데리고 살아. "

" ... 날 키우는 것처럼 말 하지 좀 마. 애 같다고 뭐라 하더니 이젠 다 컸으니까 따로 살자고? 차라리 그냥 내가 귀찮고 지겹다고 해. "



의자를 시끄럽게 빼고는 쾅- 문을 닫고 들어간다. 가만히 닫힌 방문을 보다가 이내 식기들이 널브러진 식탁에 이마를 댔다. 네 말 처럼 이게 비밀이라고 해야 할 일인가 싶겠지만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너 하나도 안 귀찮고 하나도 안 지겨워. 그래도 나랑 사는 거 좋다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너랑 사는 거 좋다고 평생 살자고 하면 어쩌려고. 나도 모르게 그럴까 봐 내가 무섭단 말이야. 













뻥친 걸 축하드립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판교에 그 회사에서 덜컥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생각도 안 했는데. 밤낮없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올빼미족이니까 뽑아주세요. 지금은 정신이 없고 싶은 1인입니다. 하고 되지도 않는 화상 면접을 봤는데도 오히려 저게 맘에 들었는지 바로 붙어버렸다. 기왕 저지른 거 바로 부동산에 전화해서 비싸디 비싼 월세 90만원을 주고 근처에 오피스텔을 계약했다. 원영이랑은 2주가 넘게 찬바람이 불고 있는데 섣불리 뭐라 말도 못 붙였다. 그동안 15년을 알고 지내면서 이렇게 오래 찬바람인 적도 없었건만. 길어봐야 3일이 꼴랑이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고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이음새가 벌어진 마음처럼 벌어진 사이가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그냥 사실 잘 모르겠다. 스스로 뭘 하고 싶은 건지. 좋은 언니를 하고 싶은 건지 그러면서도 원영의 남친한테 뺏기기 싫은 게 그 좋은 언니 자리인지 뭔지. 고등학생 때 내 친구가 더 친한 친구가 생기면 짜증 나는 그런 기분인가? 싶으면서도 묘하게 뭔가 다른 그런 찝찝함. 이런 건 누가 좀 알려줬음 하다가도 그냥 정답을 모르고 싶었다. 받아서 들어본 봉투 안에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단어가 들어있을까봐. 그냥 못 본 척 해야지. 난 모르는 거야. 씁쓸한 숨을 삼켰다. 












몇주만에 휴대폰으로 번뜩이는 여친의 문자를 받았다.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가니 저 주차장 어디쯤 발을 톡톡 찍으며 서 있다. 시간을 좀 갖자고 했는데 제정신이 아니어서 눈꼽만큼도 신경을 못 썼다. 내가 제일 나쁜년이네. 여친한테 새로 문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시간 갖자던 그 문자를 새카맣게 까먹었다. 아무래도 헤어지자고 해야 할 것 같아. 내가 지금 내 마음을 모르겠거든. 뺨 한 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마주하니까 딱히 책망하는 눈빛이라기보다 한심해하는 눈빛에 가까워 보인다.



" 유진아, 우린 헤어지는 게 맞는 거 같은데. 헤어지기 전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 "



그 확인이란 게 이렇게 입술을 붙이는 건 줄은 예상을 못 했는데. 닿자마자 밀어내려다가 언뜻 차량 뒤에 보이는 낯익은 실루엣이 원영인 것 같아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여자 좋아하는 거 알면 네가 나랑 안 살고 싶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집에 여자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는 거 아무리 친한 언니여도 껄끄러울 수 있으니까. 전에 같이 소파에 앉아서 보던 드라마에 여자들끼리 입을 맞추던 장면을 원영이 불편해하지 않았던가. 붙었다 떨어지려는 입술을 깊게 붙들었다. 어정쩡하게 거리를 벌리고 선 몸을 더 가까이 당겨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비가 오던 그날. 가로등이 쏟아지던 공동현관에서. 꼬옥 눈을 감은 채 그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원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엇갈려 물고 있던 그 젖은 입술도. 옅은 숨을 내는 그 입술새로 혀를 밀어 넣어 그 안을 헤집었다. 살짝 도망가는 허리에서 손을 끌어올려 뒷목을 붙든다. 조금만 더. 있는 힘껏 깊게 숨을 빨아들여 말캉한 걸 가득 입안으로 머금었다. 원영아 조금만. 



순식간에 밀쳐져서는 뺨을 맞았다. 얼얼하게 왼뺨이 빨갛게 오른다. 눈물을 달고 있는 그녀의 입술새로 욕이 샌다.미안. 정말 미안해.


" 너...지금 나랑 키스한 거 아니구나. "


한 대로는 끝날 것 같지않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 가늘게 눈을 떴다. 한심하게 보는 것같기도 경멸하는 것 같기도한 시선을 온 몸으로 받았다.



" ...장원영 좋아하지. "



그럴 거 같았어. 명치 끝을 헤집는 말. 뾰족한 말이 나오는 시작점을 멍하니 바라봤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뺨은 얼얼하고 맘은 더 얼얼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고개를 저었다. 너랑 만나면서 늘 생각했던 거야. 네 삶이 그 애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거 같다고. 넌 몰랐던 거 같지만. 그녀는 자꾸만 날카로운 말을 뱉었다.




" 뭐랄까... 약간 분리불안 같았달까. 아니다 과잉보호? 넌 그 아이 일엔 늘 안절부절못했거든. "



계속 모르고 살다가 등신같이 질질 짜고 주저앉길 바랬던 것도 같은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코웃음을 쳤다. 너 나랑 키스할 거 다 하면서도 빨대 한 번을 안 섞어 썼던 거 알아? 나한테는 그랬으면서 밤 새고 잠결에 그 애 칫솔을 썼다고 에피소드 마냥 말하던 게 어찌나 웃기던지. 비웃던 웃음은 이내 허탈한 웃음이 되었다.



" 네가 불쌍해서 말해주는 거 아니고. 깨닫고 아프라고 말해주는 거야. 너 장원영 좋아해. "

 



유진아, 어때? 맨날 동생이라고 싸고돌던 애를 그렇게 보는 심정은? 니가 그러는 거 알면 그 애는 어떨 거 같애? 저 말을 듣는 것 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 난 초등학생때부터 친자매처럼 자란 언니가 나한테 그런 생각하면 좀... 역겨울 거 같은데. 장원영은 좀 다를까? "



성대를 잃은 것 처럼 말은 거녕 비명 같은 소리 조차 못 냈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하늘하게 멀어졌다. 아까 원영이 서 있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사실 그게 원영이었는지도 확신이 없었다. 



' 너 장원영 좋아해. '



내가? 그건 그녀가 잘못 생각 한 거다. 우린 그럴 수 없어. 특히 더더욱이 난 그럴 수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느즈막히 들어온 집안에 어둡다 못해 칠흑 같은 적막이 마중을 나왔다. 차라리 환했으면 그 조명에 숨어 들어볼까 했는데 뭐 하나 뜻처럼 되질 않는다. 겨우 눈으로 쫒은 원영의 자취는 복도를 건너 현관까지 옅게 넘어오는 부엌등으로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냥 계약한 오피스텔로 가서 잘걸. 짐이고 나발이고 신경 쓸 여력도 없으면서 회귀하는 연어처럼 이 집으로 왔다. 최악이다. 진정 스스로 최악이었다. 방까지 걸음을 디딜 기력조차 없어 현관에 그냥 털썩 앉았다. 차가운 바닥 타일이 엉덩이를 시큰하게 했다. 아니 마음을 시큰하게. 

아까 분명 그녀와 키스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그랬다. 최악을 넘어 이건 죄악이었다. 그때 내가 묵음으로 부른 이름이 원영이면 안 되는 것이었다. 무의식중이어도 그러면 절대 안 되는 것이었다. 다른 이름은 다 돼도 그 이름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돼. 

그녀의 말을 단번에 부정했으면서도 사실은 알아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붙들고는 무릎에 파묻었다. 숨을 쉬기가 너무 어렵다. 자꾸만 목을 졸라오는 건 빛 한점 없는 이 공간인지 아니면 그 이름인지. 자꾸 생각나는 이름 때문에 스스로 목을 조르고 싶어진다. 어쩌면 작고 하얀 그 손에 목이 졸리게 될 지도 몰라. 역겨워하는 눈빛에 목이 졸리거나. 경멸이나 힐난에 파묻혀 질식하게 될지도 모른다. 무엇이 됐든 지금 제 숨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만큼이나 위험하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이제 언제 원영의 삶에서 사라져도 이상하지않아진다. 무릎에 파묻은 머리를 거세게 흔들 때마다 현관등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깜빡깜빡. 저 깜빡이는 등 처럼 정신도 나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럴 수가 없어.




 







" 여기 와서 앉아봐. "



원영의 목소리가 이렇게 낮았던가. 저런 톤이면 아까 본 게 원영이 맞는 걸까. 언니, 와서 앉아보라고. 저 목소리에 겨우 비척이는 몸을 일으켰다. 모르는 척하고 식탁 앞에 의자를 끌어다 태연하게 앉았다. 엉망으로 늘어진 소주병이 세 개. 주량이 쎄다고만 들었지 실제로 얼마나 주량이 쎈지 몰랐는데.



" 언니... 여자 만나? "



취하긴 취했는지 묻는 문장 구사가 완전 돌직구다. 쿠션어 일절 없이 냅다 문장으로 들이 받는다. 얼마나 네가 놀랐고 당황했는지 저 문장이 그대로 알려준다. 흡사 노려보는 것 같은 원영의 눈을 마주했다.




" 어, 말을 못 했어 그동안. "

" 여자 만난다고? 레즈비언이야? "


답을 듣고 싶은 게 맞니, 물어 놓고 듣는 척도 안 하고 술부터 마신다. 저 물음에 답을 하기 전에 타는 목을 저도 술로 축였다. 



" 문제 되냐. "


문제지. 아주 큰 문제. 읊조리는 입술은 무언가 평소랑 많이 다르다. 


" 언니 니가 말한 비밀이 이거야? 여자 좋아하는 거? "



이번에도 대답을 하기 전에 술 부터 찾았다. 맨정신으로 어떻게 대답할까. 지금 우리의 알코올 농도가 형평이 맞지 않아. 내가 너무 불리하거든. 주량이 그리 쎄지도 않은데 잔도 아닌 병으로 들이키는 술이 홧홧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홧홧한 게 식도인지 그냥 속이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 ...어차피 나 판교로 이사하니까. 너 불편한 일 없게 할게. "


아까 그녀의 말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 니가 그러는 거 알면 그 애는 어떨 거 같애? ' 그 답이 지금 바로 앞에 있다. 본 적 없던 날이 선 문장과 말투 그리고 이질적인 표정을 하고. 그냥 여자를 좋아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이렇게 여러곳에 균열이 생긴다. 우리가 서로 마주 쥔 관계가 이렇게 하찮고 깨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아주 작은 파열로도 이렇게 좌악 금이 갈 만큼.





" ...안유진, 진짜 지랄 좀 하지 마. "




노려보는 눈이 울 것 같다. 발갛게 충혈된 눈동자. 저러면 보통 원영은 눈물을 참는 중인 거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그 눈동자를 바라본다. 너무 배신감이 드니. 그렇게까지. 그럼 내가 기어코 숨겨야 하는 것이 더 많아지겠구나. 그냥 내가 너보다 더 취해있었으면 나았을 걸. 소릴 하나 못 내고 앞에 반쯤 차 있던 병을 마저 비웠다. 후- 숨을 뱉어도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아진다. 갑갑한 건 속이 아니라 마음이다. 




" 불편해도 며칠만 참아. 이사 날짜 금방 잡을 거야. "



조금 흐트러지는 몸뚱이의 끝을 겨우 정신으로 붙잡아 일어섰다. 방을 향해 돌아서면서 목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게 울음인지 뭔지 꽉 깨문 치아가 다 시리다. 너랑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 뒤 돌지 마. 나한테 등 보인 적 없잖아. 나 아직 말 안 끝났어. "





난 아니야? 저 물음엔 의아한 얼굴을 숨기지도 못한 채 뒤를 돌아봤다. 울 것 같던 눈동자는 그 껍질 안에 사뭇 원망이 묻었다. 어느새 일어나 코 앞에까지 원영이 다가와 섰다.



" 언니가 여자를 좋아하는데, 그게 난 아니냐고. "

" ...무슨 말이야. 널 왜 좋아해. 레즈비언이라고 모든 여자를 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야. "

" ...그러니까 날 좋아하는 건 아니란 거야? 확실해? 그런...감정으로는 조금도 나한테 감정없어? "




머리가 핑핑 돈다. 술 때문인지 말 때문인지. 주저앉을 뻔한 몸을 겨우 다리에 힘을 줬다. 원영이 모른다면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게 진짜 아닐지도 몰라. 그녀가 틀린 걸지도 모른다. 이런 바람은 부질 없는 걸 안다. 이미 집 공동현관에서 원영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부터 그녀의 말의 시발점이 저라는 걸 알았다. 그녀의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노라고. 알면서 그냥 발버둥 치는 거다. 지금 이 순간 이 공간 너의 앞에서 들키고 싶지 않아서.




" 누가 동생을 그런 식으로 좋아해. 사람을 뭘로 보고. "



넌 그냥 동생이야. 동생한테 그런 마음 들면 제 정신 아닌거지. 그러니까 걱정 할 거 없어. 담담한 척 낼 수 있는 제일 담백한 목소리를 냈다. 조금은 기분이 상한 것 같은 가면을 쓰고 난 그런적 없어 하는 가면을 쓰고.






" 장난해?...너 나랑 피 섞였어? "




 원영의 통통한 입술에서 연이어 쏟아지는 말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만 같다. 옅게 숨을 내쉬는 입술도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도 지금은 이상하게 낯설다. 동생은 진짜 지랄...동생 같은 소리 하고있네. 격한 표현이 원영의 입에서 연거푸 쏟아진다. 원영아 그러지 말지. 이렇게 내가 발버둥 치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러지 말지. 







" 하...난 언니 남친들이 싫었어. 니가 한 번도 보여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진짜 진짜 그 새끼들이 죄다 싫었어. "


원영은 이를 악물었다. 피가 날듯 깨물었다 놓는 그 입술 사이로 모든 걸 불 싸지를 것만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내렸다. 종잇장 처럼 유진이 붙들고 있던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기세로.  



"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대학생 때 CC로 만났다는 놈도 그리고 지금 만난다는 놈도 전부 다. 전부 다 싫었어. 언니 니가 사귄다는 남자들은 전부 다 싫었다고. 근데 그래도 남자라서 그게 좀 덜 싫어했던 거였네... " 



그게 다 여자였다고 생각하니까 지금 머리가 터질 거 같애. 숨을 뱉으며 씩씩대는 원영으로부터 유진이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물러선 거리만큼 더 성큼 다가서는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 벌어진 거리를 기어이 원영이 다시 좁힌다.






" 야 안유진, 나 남자 안 좋아해. " 


네가 본 키스한 걔랑도 진작 쫑냈어. 남친? 솔직히 그딴 거 만들기도 싫었어. 근데 다 너 때문이잖아. 니가 너무 좋아서 널 안 좋아하려고 내가 그런 거잖아. 너는 맨날 남친이 있었으니까. 아, 나도 남자 만나야 하는 거구나 남친 같은 거 끼고 살다 보면 괜찮아지겠구나 그랬단말이야. 근데 너는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고? 너 진짜 장난해?! 이젠 거의 악을 쓰는 원영의 말이 아찔해서 유진은 겨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 너 아까 그 여자랑 헤어져. 그리고 나랑 만나. "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하는 유진의 어깨를 붙들고 흔들다가 아예 내려쳤다. 대답하라고. 그 여자랑 헤어지기 싫어? 그 여자 엄청 사랑해?! 거의 반쯤 소리를 지르는 거에 아니라고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대답 안 해. 아니면 나랑 만나는 거 싫어? 나 아직도 애 같아? 열두살 때 봐서 아직도 계속 동생 같기만 하고 그래? 언니 너 고집쎄서 한번 정하면 땡인 거 아는데, 나 동생이라고 정했어도 지금부터 다시 생각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벌써 15년 지났으니까 언니 너도 생각 바꿔. 바득바득 우기다가 아예 엉엉 우는 원영을 유진이 품에 끌어안았다. 동그랗고 작은 얼굴을 타고 눈가에서 퐁퐁 솟은 게 흐른다. 



" 너... 아직도 애 처럼 우는데 뭐가 다 컸다는 거야. "

" 나 애 아니야. 니 동생 이제 안 할 거야. "




나 이제 우산도 잘 갖고 다닐 수 있어. 밤에 무서워도 너한테 전화 안 하고 참을 수 있어. 애 아니란 말이야. 너 어떤 여자 좋아하는데. 왜 난 아닌데. 엉엉 울어서 목소리까지 퉁퉁 부은 원영의 목소리가 아득하다.



" 난 휘파람 잘 부는 사람 좋아해. 순대에 내장 먹지도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니까 허파만 골라서 시키는 사람 좋아하고, 말도 안 되게 억지 부리면서 전화해도 다 받아주는 사람 좋아하고. "



중간에 숨이 차는지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다. 아직 덜 그친 울음이 계속 말과 같이 새는 걸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지 마. 너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도 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다. 두어번 좌우로 흔들리는 얼굴을 원영이 붙든다. 바로 마주한 얼굴은 이제 둘 다 울고 있다.



" ...맥주캔 한 손으로 따는 사람 좋아하고. 꼬막 잘 까는 사람 좋아하고. 밤새 일하면서도 나랑 8시간씩 영통 해주는 사람 좋아하고. 후...그냥 난 널 좋아해 안유진 이 멍청아. 언니 니가 흰색 옷이랑 색깔 옷 엉망으로 섞어서 세탁해놓고 미안하다고 하는 것도 귀여워서 꿈에 나올 만큼. "



하얀 내 옷이 거무튀튀해졌어도 그걸 볼 때마다 머쓱하게 웃는 언니 니가 생각나서 그 옷도 다 좋을 만큼 널 좋아한단 말이야. 언니 너한테 좋아한다고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그래도 되는 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했지. 그 여자보다 내가 먼저야. 억울해. 너 그 여자랑 뭐 하다 왔어. 왜 이제서야 집에 왔는데. 너무 억울하다고 하도 울어서 헐떡이느라 뒤에 어디쯤은 뭐라고 하는 건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자꾸 언니한테 너너 하네. 언니한테 멍청이라고 하고. 끌어안아 마주닿은 심장에서 쿵쿵거리는 심박이 그대로 전이된다. 같은 박자로 뛰는 걸 보니 너랑 내가 같은가봐. 말로 못 할 거였으면 한 번 안아보기라도 할 걸. 그럼 말 없이도 알 수 있었을 지 모르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면 분리불안 그건 나 아닐까. 니가 자라는 만큼 불안했던 것 같아서. 같이 우산을 쓰던 비 오는 날이나 멀리 가면 밤에 무섭다고 걸던 칭얼거리는 전화들이 사라지는 게 싫었던 것 같아서. 귀찮다 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귀찮은 적 없어서. 사실은 그냥 니가 옆에 없는 게 싫어서. 차마 말은 못하고 가만히 손을 들어 원영의 눈가를 꾹꾹 닦아줬다. 비밀 같은 거 만들지 말걸. 너한테 그런 거 만들지 말걸. 내가 여자 좋아한다고 터놨으면 우리 좀 달랐을 수도 있는데. 그럼 지금 내가 좀 덜 등신 같고 넌 조금 덜 울었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널 울리던 높은 베개, 어둡고 커다란 호텔 방, 맛 대가리 없는 연수원 반찬 기타 등등보다 지금 내가 제일 최악 같다. 무슨 말을 하라고 채근하는 눈을 가만히 쳐다본다. 차마 죄악 같아서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건 죄일지도 몰라. 가득 때려 부은 술 냄새가 폴폴 나는 입술 위로 입술을 가까이해 망설였다. 마지막까지 그 앞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멈추어 선다. 이 문턱을 넘어서기가 이렇게 두렵고 어렵다. 벌 받는 거 아닐까. 나 진짜 너한테 이래도 되나. 죄짓는 거 같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말이 넘쳐 새어 나온다.




" 안유진, 나한테 얼마든지 그래도 돼. "


나 이제 동생하기 싫어. 망설이는 얼굴을 붙잡아 원영이 먼저 입을 맞췄다. 춥하고 빨아들이는 대로 옅은 숨이랑 달달한게 빨아들여진다. 가는 허리를 끌어안아 당기면 더 가까이 몸을 붙여 안긴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부피감에 몸이 닳는다.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 제 손을 오히려 몸 구석구석으로 끌어 당기는 건 원영이었다. 손을 당기는 대로 마냥 끌려다녔다. 마음도 몸도 원영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겨우 입술을 붙들던 부엌에서 원영의 침대 위 까지. 칠흑 같던 밤 부터 동이 트는 새벽까지. 언니 이번엔 안 아프게 해줘. 



이번엔? 원영의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래포구역에서 불과 5분 거리 꼬막 집에 그득히 쌓아진 꼬막 껍질을 원영은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마주 앉은 유진이 대박 나 완전 잘 까네 실력 안 죽었다- 하는걸 보고 킥킥댄다. 제철은 아닌데도 이 집은 꼬막 잘하는 집이라 그런지 꼬막 상태가 좋은 거 같애. 제철 음식 도사라고 또 유진이 꼬막을 까다가 으스댔다.




" 난 통꼬막이 더 맛있는 거 같은데. 언니는 양념을 더 좋아하더라. "

" 양념이 뭔가 한식 느낌이야. 통은 쫌... 까는 거만 귀찮지. "



말은 귀찮다 귀찮다 세상에서 제일 귀찮은 일이다 하는 중인데 원영 앞으로 숟가락으로 깐 통꼬막을 계속 밀어줬다. 말과 행동이 너무 달라서 그걸 보는 내내 원영의 낯이 웃는 낯이다. 빨간 플라스틱 전문도구가 없어도 유진은 밥숟가락으로도 잘만 통꼬막을 탁탁 깠다. 통통한 꼬막을 쏙 입으로 빼다 먹으면서 원영이 푸스스 웃는다.



" 왜 자꾸 웃어? "


내 손이 너무 현란해? 장비없어도 엄청 잘 까지. 이정도면 꼬막까기 국가대표...까진 어렵고 판교 5등 정도는 될걸. 시답잖은 소릴 하는 거에 또 원영이 더 크게 웃는다. 


" 나한텐 1등이야. 언니 지금 웃겨. 좀 귀엽구. "

" 뭐가? "


언니 원래 꼬막 까다가 내가 쏙쏙 빼먹으면 ' 야, 까는 사람 따고 있고 먹는 사람 따로 있냐. ' 막 목소리 깔고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냥 막 잘 까지 않냐구 자랑하면서 계속 까준다? 저 말에 괜히 머쓱해져서 유진은 꼬막 까는 거에 정신 없는 척 했다. 



" 진작할걸. "


오물거리다가 갑자기 진지해진 표정 때문에 뭘? 하고 유진은 물었다.



" 언니 여자친구. "



동생 하지 말고 진작 여자친구 할 걸. 배 아파 죽겠어. 내가 진작부터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무조건 일빠인데 완전 내가 제일 늦었어. 손해도 이런 손해가 없다 진짜. 다 언니 때문이야. 몇주 전까지만 해도 눈을 흘기는 저런 원영의 말에는 기가 죽었는데 금세 적응이 되어서 받아쳤다.



" 그러니까 용기를 냈어야지. 그건 니 탓이야. "


용기있는 여자가 미인을 쟁취한다 이런 말이 있다- 나 같은 미인을 쉽게 가질 순 없어 하고 농을 쳤더니 농으로 들리지 않는지 인상을 쓴다.



" 괜히 동생도 못 할까 봐 쫄아가지고 다른 여자들 좋은 일만 시켰네. "

    


데이트 어디 어디 다녀봤어? 나랑도 가. 전에 여자친구들이랑 했던 거 나랑도 다 해. 그 여자들도 꼬막 까줬어? 영통도 막 밤새서 했어? 반찬도 갖다주고 그랬어? 비오면 데리러가고 막? 입안에 꼬막을 오물대면서 하는 뾰로통한 말들이 귀여워서 자꾸만 광대가 아팠다. 고등학교때 여친한테는? 그때 여친한테도 삼각커피우유 양보해줬어? 언니 대학교때 CC도 여자였지? 점점 눈이 세모가 된다. 


아니 꼬막 안 까줬어. 영통도 밤 새서 안 했어. 애초에 너 같은 여자가 내 인생에 너 말곤 없었어. 그리고 우리도 얼추 CC 아니야? 같은 대학 나왔는데. 또 뭐였지 삼각커피우유? 그것도 양보 안 해줬어 됐지? 더이상 세모나지 않은 눈을 보니 차고도 넘쳤다.











 







‘ 언니, 이거 구도가 구려. ’



1시 방향에 45도로 놓인 노트북 화면에 커다란 눈이 끔벅인다. 나 일해야 해서 정면은 안돼. 뾰로통했다가 알았엉 하고 금방 턱을 괴고 바짝 붙여 앉는다. 맨날 출장이 뭔 부산이야 구시렁거리는 쫑알 거림이 낯설지 않다. CCTV를 방불케 하는 영통화면에 원영이 내뿜는 습한 열기가 화면 건너까지 넘어온다. 샤워 빨리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렸지. 아니 괜찮아. 언니는 혼자 있으면 안 무서워? 응, 하나도. 너 맨날 무서워서 나한테 전화했던 거야? 집에서도 왜 그러나 했네. 삐삐- 하고 틀렸다는 버저음을 낸다.



” 왜? 뭐가 문젠데. “

’ 무서워서 아니구, 언니가 좋아서 전화했던 거야. ‘



무섭기도 했는데 그보다도 더 언니 목소리가 듣고싶어서. 화면으로 눈을 마주 봤다. 노트북을 통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순간 또 마음이 덜커덕거렸다. 미등이 들어온 호텔 방에 그보다 더 옅은 마음이 일렁인다. 자꾸만 힐끔 거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자꾸 눈이 마주치는 듯 화면에 시선이 겹치는 걸 모른 척 하면서 모니터로 괜히 시선을 가져다 붙였다. 볼 때마다 이렇게 마주하는 기분이 들면 너무 속이 간지럽다. 흐흣- 하고 웃는 원영의 얼굴에 시선을 떼려다 다시 붙였다. 


" ..왜..? 왜 웃어. "

' 언니 자꾸 힐끔거리는 게 귀여워서. '

" ...내가 언제? 아닌데? "

' 맞는데? '


난 언니 계속 보고 있었어. 아니긴 뭐가 아니야. 당당하게 코앞에 있는 것처럼 얼굴을 가득 들이민다. 저 눈동자는 속을 꿰뚫다 못해 마음도 이제 꿰뚫어서 방문을 아무리 닫아도 원영 앞에 속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진다. 




" 들켰네. "

' 완전 들켰지. '


발그레해져서 웃는 얼굴은 왜 보고있어도 보고 싶어질까? 이런 의문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사귀기 전에도 떨어지면 늘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이걸 이제야 알았다.



' 귀엽다 방금. '



응? 영문을 몰라서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 언니 방금 귀엽다구. 갸웃하는 거. '



니가 더 귀엽다. 민망해서 말로 차마 하진 못하고 못 들은 척 얼굴만 돌렸다. 언니 오른쪽 얼굴이 더 자신 있어? 보조개 때문에 자꾸 오른쪽 얼굴 보여주는 거야? 저 말은 끝내 유진을 참지 못하고 웃게 만든다. 자꾸 날 웃게 하고 자꾸 간지럽게 하네. 원래 이랬던가. 이렇게 계속 보고있어도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 ...언니야. '

" 왜에. "



무슨 말을 하려고 언니 뒤에 야를 붙였대.


' 보고 싶엉. '


나도. 그렇지만 또 언니의 체면이 있으니까 괜히 다른 답을 한다. 늘 하는 말이라 별 다른 말도 아닌데 야는 뭐하러 붙인거야. 조금 망설였던 것도 같은데 꺼낸 말이 새삼스럽지않다.



" 지금 보고 있잖아. "

' 그래도 보고 싶다고. '


그러니까 나 보러와. 빨리. 부산까지 지금. 지난번에 같이 못 온 그 하얏트니까 빨리. 응? 화면에 코를 콕 대는 게 기어이 얼굴을 돌려 빤히 보게 만든다. 토끼 같이 복슬거리는 분홍 잠옷을 입고 있는게 퍽 애 같다. 저런 귀여운 잠옷은 또 어디서 났어. 새삼 왤케 어려졌지. 화면 뒤로 조금 얼굴을 물렀다.




나 혼자 자면 무서울 거 같아. 와서 안아주고 휘파람도 불어줘. 혹시 언니가 또 나한테 애 같다구 할까 봐 미리 얘기하는 건데, 애 처럼 칭얼거리는 거 아니구. 여친으로 칭얼거리는 거니까 빨리 와. 같이 본전국밥도 먹고싶어. 저 칭얼거리는 얼굴을 마주해서 수육 추가? 하고 느긋하게 마치 난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받으면 응응! 수육 추가해서- 하고 예상한 그대로 성격급한 네가 빠르게 답한다.




'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애 처럼 구는 거 아니구. 여친으로 말하는거다아. 그러니까 내 여친 안유진씨 빨리 오실게요. '




꼭 자기가 애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게 꽤 웃기고 귀여워서, 그 와중에 꼬박꼬박 지 여친이라고 집는 게 더 귀여워서. 화면 구석구석 제 1사분면부터 제 4사분면까지 모든 시선을 원영에게 준다. 



" 갈까 말까. "


너 보러 갈까 말까아. 원래 이런 애교있는 목소리로 말 잘 안 하는데 자꾸 애교가 비집고 나오네. 하고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했다가 또 뒤로 이 만큼 물러나려는데. 자기야 빨리와. 하고는 꺅! 원영이 얼굴을 감싼다. 얼굴은 두 손으로 다 가렸는데 귀는 새빨갛게 터질듯 한게 화면에 다 보인다. 자기...야...? 와씨 예상도 못한 말이라 나도 지금 얼굴 터질 거 같은데.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슥슥 긁다가 그...무슨 자긴데? 전자기? 도자기? 아님 뭐 보자기? 스스로 말 하면서도 세상 어이없다. 화면 바깥으로 원영이 도망쳤다가 몰라! 나 끊을거야! 하고 뚝 영통이 끊어진다.





아니 이럼 어떡해. 이렇게 그냥 영통 끊는게 어딨어. 안 그래도 일렁이는 내 맘에 자기라는 돌을 던져놓고 쏙 빠져나가네. 그러니까 무슨 자기인데? 혼자 부끄러워서 침대에 뛰어들어서 발길질 하다가 퍼뜩 빨리 가야지 원영이 기다리니까. 주섬주섬 자동차 키를 챙겼다. 언니 올거야...? 하고 들어온 문자를 본다. 이번엔 또 언니네. 전자기도 도자기도 보자기도 아닌 언니. 


당연히 가지. 누가 오라고 하는데. 나도 니가 애 같아서 가는 거 아니고. 챙겨야 하는 동생한테 가는 거 아니고. 내 여친한테 가는 거라고 나도. 



지금 가. 자기...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