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장개석의 중화민국을 대만으로 축출해 낸 모택동은 북경을 새로운 공산중국의 수도로 정했음.


제정러시아가 집중적으로 개발한 하얼빈

청나라의 시작을 알린 곳이자 일본제국의 입김이 들어갔던 심양(선양, 당시에는 봉천이란 이름으로도 불렸음).

북경은 낙후되기 시작한 도시였음. 20세기 초반엔 중국의 역사를 주도하는 역할을 상실하기까지 이르렀고.
열강들에게는 바다 근처에 있는 상해, 남경, 광주같은 도시가 있었고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자신의 영향권인 하얼빈과 봉천에 투자를 했지. 근데 북경은 전조의 수도라 정치적으로 껄끄러움+은근히 내륙+교통편도 별로란 삼박자가 안좋은 의미로 시너지를 일으켰거든.
설상가상, 1928년 장개석의 북벌이 완수되자 영락제이후 유지해오던 수도의 지위, 그리고 이름조차도 빼았겼지
북방을 평정했다하여 북평(北平, 베이핑)으로 강제개명당했거든.
민국시절, 인구는 많지만 열강의 투자는 커녕 민국정부의 투자조차도 후순위로 밀린 북경은 쇠락하기 시작했음.
장개석시절 "남경 10년"이라 일컬어지는 발전은 직할지였던 장강이남에 집중되었지. 반대로 국민당의 통치력이 잘 미치지도 않던 북평은 인구만 많고 경제력과 도시 역량은 떨어지는, 농업위주의 성장동력을 잃은 대도시가 되고 말았음.
그런데 이러한 쇠락성이 오히려 공산중국의 신수도로서는 적합하다는 평가가 있었다고 함.
모택동과 중공입장에선 부르주아와 서방의 나쁜물(?)이 제대로 들어있고 중화민국의 입김이 강하던 남경, 상해보다는 농민계층이 많은 북경이 새로운 수도론 더 적합하다고 보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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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주의운동의 원류라 불리는 5.4 운동이 북경에서 시작된 것도 요인이 될 수 있을듯
그래서 유독 북경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최대한 전투를 피하고(실제 도시 접수도 화북토비 총사령관이었던 부작의에게 항복을 받아서 전투 한 번 없었음. 이때 부작의가 장개석을 배신하고 정예군 50만을 넘겨준 것이 화북에서 중화민국의 지배력을 소멸시키는데 결정타였다고 해. 항복권유는 부작의의 딸이 공산당원이라서 가능했다고) 시가지와 유물을 보존했음.
물론 이렇게 지킨 문화재는 홍위병빔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