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로 조용하다 했어.
나는 단비의 휴대폰을 뺏어 쥐고 눈초리를 세웠다. 너 지금 누구한테 카톡 하는 거야? 미운 일곱 살은 우리 집에서 통용되지 않는 말, 단비는 정말로 미운 아홉 살이다. 입에 거품을 머금고 칫솔질을 하던 나는 단비의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다 그대로 나자빠질 뻔했다. 언니 뭐해. 언니 나 스마트폰 샀어. 보고싶다. 프사 짱 예뻐. 대화창 중앙 맨 위로 박힌 정직한 세 글자. 정진솔.
"야!!"
소리부터 빽 질러놓고 욕실로 달려가 입을 헹구고 부랴부랴 나왔다. 다시 제 폰을 뺏어들고 달아난 단비는 그새 코빼기도 안 보였다. 지도 잘못인 걸 알아 도망간 것이다. 아, 정말로 아찔하다. 꼬박 열일곱 차이 나는 늦둥이 동생이 전여친에게 연락할 확률. 모르긴 몰라도 전세계에서 나만 겪을 법한 일이다.
오후 여덟시가 되어서야 꼬질한 낯으로 귀가한 단비는 헤실 헤실 웃고 있었다. 진솔 언니가 나 빙수 사준대. 언니네 동네에 엄청 맛있는 빙수집이 있대. 나는 지끈지끈한 이마를 붙잡고 거실 벽에 기대섰다. 진솔이? 뭐하고 산대니 오랜만이다. 그치 엄마, 엄마도 잘 있다고 전해줬어. 으이구 잘했네에? 남의 속도 모르고 쿵짝이 잘 맞는 모녀다.
단비는 아따아따의 단비를 닮아 우리 가족이 붙여준 별명이다. 생긴 것만 단비고 행동은 어릴 때 지 언니 닮아 얌전하다는 소리도 듣고 자란 내 동생인데, 최근 2년의 말썽 스케일로 보면 다른 집 애들보다 시기가 좀 늦었다 뿐 확실히 미운 아홉 살이다. 그런 막둥이라도 부모 눈엔 그저 사랑스러워 죽겠는 터라 안 좋은 소리는 꼭 언니인 내가 도맡아야 했다. 김단비. 너 내가 진솔 언니한테 연락하지 말랬지. 벽에 기대 머리를 콩콩 박던 나는 울상으로 말을 뗐다.
"언니는 보기 싫음 보지 말라고."
"야."
"난 보고 싶다고 진솔 언니가! 왜 못 보게 하는데!"
누가 자기한테 연락 해달랬나. 새침하게 툴툴거리던 단비가 제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왜 이래, 너네. 엄마는 빨래를 마저 개며 보지도 않는 눈치 보는 척을 했다. 아아 정말 괴로운 하루다. 하루종일 과장한테 개털리고 왔는데 집에서 마저 영혼 탈곡 되는 중.
모른 척 있으려니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했다. 진솔 입장에서도 전여친의 어린 동생에게서 오는 연락이 얼마나 난처하겠는가. 나는 사약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아주 오랜만에 진솔과의 대화창에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주고 받은 카톡이 2년 전에 멈춰 있었다. 나는 2년 새에 취직도 하고, 이사도 하고 이래저래 일이 많았어서였을까. 침묵으로 굳어버린 시간이 5년 정도는 되는 거 같았다.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며 몇 십분 고민하던 나는 결국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단비가 카톡 보낸 거 대신 사과할게. 얼마 전에 휴대폰 바꾸고 연락처에 있는 사람마다 말을 걸고 다니더라고.. 단비한테는 내가 잘 얘기해서 달랠 테니까 단비 프로필 그냥 차단해줘. 정신 없게 해서 미안. 이것도 그냥 읽고 넘겨줘.]
진솔은 벌써 잠에 든 건지 답이 없었다.
*
진솔과는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만났다. 학점 후한 걸로 명성이 자자한 심리학과 교양이었고 피 튀기는 수강신청 끝에 얻어낸 꿀강이었다. 그러나 인생에 거저 먹는 건 없더랬다. 자잘하게 주어진 과제들을 처리 하느라 매주 진땀을 뺐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건 중간 과제인 타인 관찰일지 작성. 누군가에겐 아주 흥미롭고 누군가에겐 아주 성가시고 민망한 커리큘럼이다. 수업의 목표는 타인이 보는 나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말처럼 취지는 뻔했다. 우리 조는 5명이었고, 거기에는 진솔이 포함되었다. 제비뽑기 형식으로 관찰 대상을 뽑은 뒤 중간시험이 끝나는 주에 관찰 대상에게 일지를 주며 자신을 밝히는 방식이었다. 때문에 매 수업마다 10분 간의 잡담 시간이 주어졌다. 사적인 만남에서 주고 받은 정보 또는 서로의 개인 SNS 염탐 절대 금지! 오로지 주어진 시간 동안 느끼는 상대방에 대한 인상을 글로 작성할 것. 학교 생활, 취업, 취미, 요리, 음악, 반려동물, 친구, 연애, 사랑, 사람, 관계. 날이 후텁해져 올 수록 잡담의 주제는 심오해져 갔다. 나로서는 고역도 그런 고역이 없었다.
나의 관찰 대상은 컴공과 4학년 남자였다. 3월 17일 체크셔츠를 자주 입으시는 거 같습니다. 3월 28일 좋은 향수를 쓰시는 거 같아요(할 말이 없어서 지어냈다.) 4월 4일 웃음 소리가 호탕하십니다. 4월 11일 여자친구가 생기면 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다고 하시는 걸로 보아 사랑하는 분 앞에서는 헌신적인 타입이신 것 같네요 ...응원합니다. 나의 관찰 일지는 후에 주고 받는 날을 대비하여 조금의 아련한 문장도 허용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일기보다 두서 없는 일지를 건네 받은 컴공남은 그것마저 좋다며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받아요."
컴공남과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던 내 앞으로 까만 활자 꽉꽉 채워진 에이포 용지 4장이 주어졌다. 컴공남 옆에 앉아있던 까만 볼캡을 눌러쓴 진솔이었다. 두 달 간 봐온 진솔은 딱히 수다스러운 스타일도 아니었으며 리액션도 거창하지 않았건만. 대화 시간에도 필요한 말만 대충 얹는 걸 보며 나는 아, 저 사람도 지금 집에 가고 싶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글자가 꽉꽉 채워진 종이 네 장을 보면서도 나는
아, 저 사람 정말로 학점이 간절하구나
싶었다.
다른 조원들에 비해 압도적인 분량에 상당히 민망했던 나는 머리만 긁었다. 그 자리에서는 눈으로 훑기에도 벅찬 분량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조심히 포개어 전공책 사이에 끼워 두었다. 집에 가서 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난 주말의 기쁨을 술로 적시느라 바빴던 나는 월요일 공강 시간에 카페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문득 책에 끼워 둔 나의 관찰 일지가 떠올랐다.
3월 14일
잠이 많으신 거 같아요. 그래도 고개는 절대로 숙이시지 않네요. 졸릴 때 미간에 힘을 주는 편이신 거 같습니다. 오늘은 내내 미간에 힘이 들어가 있네요. 피곤하신가요? •••
"뭔.."
의자에 등을 기대 앉아있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리를 곧게 폈다.
3월 17일
옷을 잘 입으십니다. 오늘 바지도 너무 예쁩니다 •••근데 오늘 입으신 청바지 위에는 저번 주에 입으셨던 밝은색 자켓이 어울릴 거 같아요! 목걸이도 아주 굿입니다. 안목이 좋으셔요. 저도 가지고 있는 목걸이거든요. 커플 목걸이네요.
3월 28일
평소에 노래 듣는 걸 좋아하시는 거 같아요. 저랑 좋아하는 가수도 비슷하시네요. 그 사람을 어떻게 아냐고 큰 소리를 내시는데 이제껏 들은 목소리 중에 가장 크네요.•••혼자 코인 노래방도 자주 가신다는 걸 보니 저와 취미가 비슷한 거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노래를 들어보고 싶네요^^
3월 31일
웃다가 제 손목을 치셨네요. 친한 사람들한테 하시는 버릇이 나온 거 같아요. 귀엽습니다 ••• 다른 조원 분들에 비해 저를 좀 더 편해 하시는 거 같습니다. 저도 정은님이 제일 편해요.
4월 4일
늦둥이 동생이 있다고 하시는데 동생 분을 아끼시는 게 저한테까지 느껴집니다. 정은님을 닮았다면 예쁘고 귀여운 동생일 거 같아요. 왠지 좋은 언니이실 것 같네요.
4월 11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몇 억도 그냥 줄 수 있다는 말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별로 연애에 목매는 스타일은 아닌 걸로 보였는데.. 되게 멋있고 의외네요. 두 살 많은 제가 감히 충고를 하자면.. 돈 거래는 가족끼리도 하지 않는 게 좋죠. 그나저나 몇 억이나 있으세요? ㅎㅎ죄송합니다 나중에 보고 웃으시라고 장난쳐 봤어요.
".. 뭐야.."
4월 18일
수지 닮으셨어요. 이런 소리 자주 들어 보셨을 거 같네요•••1학년이신데 저보다 더 열심히 시험을 준비하시는 거 같아 괜스레 반성하게 되네요. 모든 시험 화이팅입니다!
한참 정지 상태로 앉아 눈만 굴렸다. 마지막 장의 끝 문단 끝 줄까지 몽땅 읽고 나서야 실소를 했다. 성의가 있어 보이기도, 없어 보이기도 하는 희한한 글솜씨에 집중이 홀라당 뺏긴 채였다.
나는 진솔의 관찰일지를 받기 전까진 내가 노래 얘기에 눈을 반짝인다는 것도, 금요일마다 청바지를 입었다는 것도, 웃을 때 남의 손목을 치는 것도 몰랐다. 그것도 모르고 박장대소할 땐 내 등을 퍽퍽 치는 김지우의 버릇을 평생 욕하고 살아왔는데. 수업의 취지에 백퍼센트 부응하는 수강생이 된 기분은 좀 신선했다. 아, 수지를 닮았다는 것도.
시험이 끝나고 첫 수업이 있는 화요일엔 강의실에 발을 딛자마자 진솔을 찾았다. 시험 기간이 끝난 진솔은 머리에 펌을 넣고 강의실에서 가장 요란스러운 차림새로 앉아 쿠키런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조원끼리 앉아 듣던 수업이라, 나는 평소처럼 컴공남 옆에 앉는 대신 한 칸 밑으로 내려가 진솔의 옆 자리에 책을 올려 두었다.
"어? 안녕하세요."
내려다본 진솔이 꼭 기다린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짧은 미소로 화답한 나는 그 옆으로 의자를 빼며 물었다.
"그거 진심이세요?"
"네?"
"수지 닮았다는 거."
"예?"
아아. 잠깐 눈을 위로 치켜뜬 진솔이 금세 입을 찢어 웃었다. 네, 평소에 그런 소리 안 들어요? 네 처음 들어봐요. 엥 다들 눈이 삐었네. 모자 그늘에 가려진 얼굴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다들 눈이 삐었다고 했던 건 날 꼬시려 했던 말이랬다. 난 그것도 모른 채 김지우를 며칠 붙잡고 내가 정말 수지를 닮았냐고 성가시게 굴었다. 지우는 대꾸할 가치도 없는 듯 내 말을 씹었다.
"되게 잘 읽었어요, 감사해요 진짜. 정성 대박. 근데 그 바지 원래 어두운 자켓이 잘 받거든요?"
강의가 시작 되기 전 5분 동안 진솔이 쓴 일지에 대한 간단한 피드백을 줬다. 말이 피드백이지 이건 아니거든요, 이건 잘못 보신 거거든요, 졸려서 그런 거 아니거든요. 대부분 투정 섞인 어리광이었다. 진솔은 그것 또한 재밌게 들어주었다. 쓸 일지가 없으니 기억을 해둘 것만 같았다.
오월이 시작됐다. 우리는 교양 수업 옆자리에 앉는 사이가 됐다. 조별 과제 하면서 친구 만들어 오는 거 김지우 같은 애들이나 가능한 건 줄 알았는데. 진솔과 나는 꽤 좋은 교양 메이트가 됐다. 번호를 교환하고, 가끔 컴공남을 씹고, 대리출석을 한 두 번 맡아주면서.
조별과제빌런 또한 인터넷 상에서나 떠도는 괴담인 줄로만 알았다. 컴공남은 갑자기 취업을 했다며 과제 단톡방을 쌩 나갔다. 진솔과 나를 제외한 두 명은 물리학과였는데, 이 수업을 같이 들으며 가까워져 사귀게 됐다고 했다. 넷이 모여 발표 주제를 정하던 와중 폭탄발언이었다. 미쳤네. 속으로 중얼대던 나는 묘한 불안감에 헛기침을 했다. 옆에 앉아있던 진솔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잠깐의 눈빛교환이 스쳤다.
[영우씨 소현씨 오늘까지 보내주시기로 한 자료 언제쯤 될까요?]
[시간 맞춰서 주셔야 저희도 준비를 하죠.]
손가락 마디에 힘을 실어 꾹꾹 키패드를 눌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가관이었다.
[죄송합니다ㅜㅜ저희 할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지금 소현이랑 같이 병원에 와있거든요. 모레까지 보내드려도 될까요?]
너희 할아버지가 편찮으신데 소현이는 거기 왜 있니. 사귄지 한 달 만에 상견례라도 했어? 속일 성의조차 없는 개씹구라 카톡을 보며 분노 하려던 참에 먼저 선수를 친 건 내가 아닌 진솔이었다. 이것 또한 가관이었다.
[아니 프사라도 내리고 쑈를 하세요. 에버랜드 재밌으세요?]
[??;]
[??이러고 있네 ㅆㅂ저기요 발표 당장 다음주거든요? 벌써 몇 번이나 사정 봐드렸죠 저희가? 이거 그냥 과제도 아니고 기말 대체 발표인 거 모르시나요? 아니대체••]
방구석에 드러누워 폰을 붙잡고 있던 나는 용수철 튕겨나듯 벌떡 일어났다. 진솔이 1,2학년 때 죽 쒀 놓은 학점 수습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리 속시원하게 말로 사람을 줘패놓을 줄은 몰랐기 때문에. 와우 화끈하시네요. 혼잣말로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려는 찰나에도 마지막 한 방을 날리는 진솔이다.
[그냥 이름 뺄게요 솔직히 할 말 없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조별과제 단톡방은 기말 발표를 5일 앞두고 진솔과 나의 갠톡이 됐다. 다음날 학교 앞 카페에서 만난 진솔은 결연한 낯으로 노트북 전원을 켜고 말했다. 그 새끼들 딱 안 할 거 같길래 내가 자료 대충 찾아놓긴 했거든요? 오늘 종일 바짝 해서 추려 놓고 내일까지 내가 피피티 만들테니까 주말에 만나서 같이 대본 짜요 오키? 나 역시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물러날 곳 없었던 우리의 테이블엔 6시간이 넘도록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났다.
다행히 발표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진솔과 내가 격일로 돌아가며 날밤을 깠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질문 받는 시간엔 손에 땀이 얼마나 나던지. 피피티 정진솔, 발표 김정은. 우리는 환상의 짝꿍이자 서로가 없으면 죽는 조금은 절박한 2인조 어벤져스였다. 우리 꼭 에이플 받자구용. 발표 전 날 진솔이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몇 주 뒤 현실이 되었다.
와 진짜 수고했다 우리, 언니 종강하고 술이라도 한잔해요. 인사치레처럼 하는 말에도 진솔은 구체적인 날짜와 시간을 물어오며 약속을 잡았다. 내가 하루 먼저 종강을 하고 진솔의 마지막 시험까지 끝난 유월의 어느 날, 우리는 계란말이가 맛있기로 소문난 학교 앞 룸술집을 찾았다. 그 때쯤 난 어설프게 말을 놓고 있었고 진솔은 나를 정은이라고 불렀다. 일방적으로 완전히 말을 깠다는 거다. 우리는 각각 소주를 한 병씩 마셨고 술집을 나오면서 뒷골목에서 키스했다. 그리고 진솔의 집으로 가서 잤다. 섹스 말고 정말 손 잡고 잠만 잤다.
아침이 되고 눈을 뜬 나는 알림 창에 찍힌 부재중 전화 28통을 보고 눈앞이 새까매졌다. 통화 버튼을 누른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진솔은 내가 엄마 딸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휴대폰 너머로 있는 욕 없는 욕 다 처먹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부끄러워서 땅 밑으로 꺼지고 싶었다. 엄마한테 혼나는 소리 말고도,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서. 한동안 이불을 부스럭대며 가만히 있던 진솔이 마른 세수를 하며 입을 뗐다.
"너 어제 기억나?"
"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마디도 없이 씻고 나갈 채비를 했다. 밖으로 나온 우리는 해장국 집에 갔다. 진솔은 순대국밥에 간을 맞추고 내 앞으로 깍두기 접시를 내밀며 사귀자고 했다. 기가 막혀서 순대가 목구멍에 걸릴 뻔 했던 나는 대답 없이 밥 한 숟갈을 뜨고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실수라도 이해하니까 괜히 미안해서 하는 말이면 취소해도 돼요. 전 괜찮아요. 그 순간 진솔이 탁 소리 나게 수저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꼰대 같았다.
"야 넌 뭔 말을..."
"아니 그게.."
"사귀자고."
사귀자고. 싫냐고.
누가 들을세라 기겁한 나는 제발 조용히 말하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사귈 거니까 제발 닥쳐요 예? 긴 연애는 그렇게 순대국밥과 함께 시작되었다.
얼렁뚱땅 사귀기로 한 진솔과 나의 첫 데이트 장소는 우리집이었다. 너 오늘 찍히면 다음부터 외박 못 한다? 확실히 안심을 시켜 드려야징. 조별과제 발표를 5일 앞둔 날만큼 비장한 표정의 진솔이 엘리베이터 거울 앞에서 얼굴을 점검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11층에 다가올수록 소심해지는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무단 외박 다음 날, 엄마는 현관문 앞에 뻣뻣하게 서있던 날 잠시 흘겨봤다. 그러나 옆에 서있던 진솔 때문이었는지 대놓고 노발대발하진 못했다. 수법이 통한 거 같았다. 진솔은 우리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정은이.. 그니까 선배! 정진솔이라고 합니다. 저희가 시험은 다 끝났는데 과제가 하나 남았어가지그용. 그걸 한다고 밤을 새웠어요. 와 눈을 뜨니까 아침이라서 저희도 얼마나 놀랐는지. 정은이가 절대로! 막 술 마시고 외박하고 그런 애가 아니라서 제가 다 억울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용.."
그야말로 쌩쑈였다. 엄마는 절대 모른다. 앞에서 무릎 꿇기 직전이었던 진솔이 어젯밤에 나랑 술도 먹고 키스도 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마치 남의 일처럼 한 발짝 떨어져 진솔의 쌩쑈를 관전했다. 절절한 거짓말이 통했는지, 아님 진솔이 여자라 그랬는지. 엄마는 금세 풀어진 표정을 했다. 히히. 그리고 얼굴을 붉히며 웃던 진솔이 나보다 더 우리집 딸 같았다. 다음 번 방문에는 나보다 더 단비의 언니 같았다. 내가 외박 못 할까 봐 걱정하더니 지가 우리집에서 더 많이 자고 갔다. 아주 웃긴 사람이었다.
사귄 첫 날부터 상견례 비스무리한 것까지 마친 진솔과 나는 집 앞 놀이터로 걸어 나왔다. 야, 여자친구. 벤치에 앉은 진솔이 대뜸 그렇게 나를 불렀다. 어이가 없고 좀 좋아서, 사실 많이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찾아온 정체 모를 사랑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만 같았다.
진솔은 단비와도 친구처럼 지냈다. 여기서 친구처럼 지냈다는 것의 의미는 잘 놀아줬다는 게 아니라, 진짜 정말 친구처럼 잘 놀았다. 쪼그만 게 언니 닮아 고집이 세다며 레고 블록을 잡고 대여섯 살짜리와 씩씩대는 것도 잘했다. 이럴 거 같으면 저렇고, 저럴 거 같으면 이런, 그런 정진솔과의 연애는 마냥 즐겁다가도 울고 싶어질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웃겼다. 애틋해진 마음이 가끔 가슴 한 구석을 쿡쿡 찔렀다. 진솔이 분명 내 옆에 누워 있음에도 그랬다.
돌아보니 모든 순간이 그랬다.
싸우고 등을 돌린 진솔이 10분 만에 돌아 누워 뽀뽀 귀신 들린 것마냥 내 손가락 마디마다 쪽쪽거리는 것도, 목덜미에 바람 냄새를 묻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던 어느 겨울의 새벽도.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손장난을 치며 내 손가락에 끼워진 모든 반지를 빼고, 다시 끼우는 버릇도. 그런 진솔에게 왼손을 맡긴 채로 과제를 하던 나도. 고소공포증을 가진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 가 한나절을 재밌게 놀았던 경험도.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던 순간이 없었다. 헤어지고 나서는 더욱 선명해졌다. 이런 걸 추억보정이라 하나. 그렇게 나의 호시절은, 진솔은 언제나 떠오르진 않아도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
[이제 봤네]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벌써 단비랑 약속을 해버려서 무르기가 좀 그렇네]
[금요일 6시 반까지 우리 동네에 온다고 했어. 잠깐 시간 보내다 9시 전에 꼭 들여보낼게]
눈 뜨자마자 알림창을 확인한 나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지금 정진솔이랑 연락했네. 잠결에 꿈과 현실 사이를 잠시 혼동했다. 무릇 그렇듯 내용과 관계없이 전여친과의 뜬금없는 연락은 보통 아찔함을 수반하니까. 알았어. 또 다시 사약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세 글자를 적어 보냈다. 읽음 확인 표시 1이 바로 사라지더니 더이상 연락이 없었다.
"내일 진솔 언니 만나면 언니 얘기 하지마. 약속했어."
"치. 내 맘이지."
"말했잖아. 언니 진솔 언니랑.."
"......"
"싸워서 사이 안 좋다고. 이 배신자야."
기어코 단비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아픈 시늉도 안 내는 게 아주 얄미워 죽겠다. 그리고 뭐 사달라고 하지마. 밥 먹고 빙수 먹고 딱 오는 거야. 알았어? 잔소리가 길어지자 단비가 미간에 힘을 팍 준다. 이럴 때면 정말 아따아따의 단비다. 안다고! 내가 무슨 애야? 얼씨구. 아연실색한 표정의 나를 매섭게 쏘아보는 단비를 두고 거실에 있는 아빠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금요일 저녁 8시 30분 쯤에 집을 나섰다. 단비가 내리는 정류장 앞까지 마중을 나갈 작정이었다. 집을 벗어나 삼 분쯤 걸었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뭐 한다고 아직 지우지도 못한 연락처가 떴다. 정진솔, 세 글자로. 잠시 길에 멈춰 선 채로 초록색 수신 버튼을 눌렀다.
...
...
"여보세요?"
목소리 같은 거야 안 들으면 금방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 응."
"지금 버스 태워 보냈어."
"어, .. 안 그래도 마중 나왔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
"저기."
"응?"
"미안해.. 난감할 거 같아 엄청."
".. 아니야, 됐어."
단비 많이 컸더라. 남의 집 애들은 빨리 커서 그런가. 진솔의 말 끝으로 웃음기가 따라 붙었다. 그렇지 뭐, 들어가. 상황이 너무 이상해서 급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왠지 모르게 숨이 가빴다. 아 정말 미운 아홉 살. 단비야.
손에 힙색을 쥐고 달랑거리는 단비가 버스에서 내렸다. 팔짱을 끼고 흘겨보는 눈에 힘을 더 줬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이 나서 폴짝 폴짝 걷는다. 언니! 대따 맛있는 거 먹었다. 어느새 따라붙어서는 제 휴대폰 사진첩에 들어가 음식 사진 몇 장과 빙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진솔과 함께 찍은 인생네컷도. 골치가 아팠다. 흘겨보는 것도 잊은 채 그것만 내려다 봤다. 헤어질 때쯤에 앞머리를 덮었었는데 다시 없앴나 보다. 하긴 2년이면 없애고 한 번 더 만들고도 없앨 시간이다. 어렵사리 정신을 차린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됐지? 진솔이 언니한테 연락하지마 더이상.
"다음주에 또 보기로 했어. 영화 볼 거야. 언니도 가고 싶음 같이 가든.."
"야!!"
단비는 이미 저만치 달아났다. 나는 약간 황망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정진솔이랑 헤어지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우리를 상상한 적이야 많지만, 사실 정말로 많았는데 이런 식의 폼 빠지는 재회는 예상에 없었다. 지나간 과거의 업보. 아무리 진솔이 좋아서 미칠 거 같아도 가족들까지 끼어 노는 건 아니었는데 말이다.
*
우리가 왜 헤어졌지. 잠든 단비 얼굴에 달빛이 내려앉았다. 가슴께까지 이불을 덮어주고는 동그란 이마를 몇 번이고 쓸어 넘겼다. 이 말썽꾸러기 때문에 며칠 밤을 상념으로 지새우는지 모르겠다. 혹여나 새어나갈세라, 아니면 잘 살아가는 내가 기꺼이 스스로 발목이 잡혀줄세라, 꽁꽁 싸매 둔 지난날 연애 조각들이 며칠 새 매분 매초 내 신경을 거스르고 있다.
사귄 지 2년쯤 지났을 때였다. 우리는 학교 공학관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진솔의 마지막 학기였고, 청명한 가을 바람이 불었다. 나 건축 일 못 해. 높고 푸른 하늘을 배경삼아 때를 기다린 것처럼, 진솔은 내게 아주 소중한 비밀을 꺼내놓듯 고백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위태롭다고 했다. 그러고는 웃으며 내 앞으로 제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공단기 프리패스! 합격 시 전액 환급! 그런 진솔을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오늘 왜 이렇게 예뻐. 혹여나 민망해할까 봐 그랬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꼭 잡았다.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나라도 빨리 내 밥벌이 해야 돼. 안 그럼 우리 가족들 다 같이 죽어. 반쯤 장난스러운 말에 반쯤은 장난이라고 여겼던 게 나의 과오였다. 과오는 오해를 되풀이한다.
진솔은 내 생각보다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들어가는 새벽 통화에도, 간만에 나온 데이트 중에도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매일 틀어박혀 공부하고 알바만 하는 것도 힘들 텐데. 나는 내 여자친구가 정말로 씩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힘든 건 공부나 알바가 아니었던 걸 모르고 말이다.
어린 나의 무지였다. 세상에 어른스러운 사람이란 건 없다. 어른이 되어야 하기에 말을 아끼는 사람은 있다. 그 점에서 진솔은 완벽하게도 어른이었다. 나는 너랑 노는 게 제일 재밌어. 니가 제일 예뻐. 보고싶다 공주. 그 어느 대화에도 지친다는 내색은 없었다. 그 언제에도 짊어진 무게가 버거워, 나를 보는 것조차 극한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린 적 없었다. 결국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났다는 것도, 이사를 했다는 것도, 오빠가 집을 나갔다는 것도, 어릴 적부터 길러주신 할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것 모두. 매일 같이 연락을 하면서도 몰랐다. 그러면서 둔하게 언니가 보고싶고 아직도 좋아서 신기하다고 했다. 일상이 뒤집히고 있는 언니를 눈앞에 두고도 매일 멍청하게 사랑을 말했다. 눈에 보이지도, 밥 먹여주지도 않는 그것을. 꼴에 마음이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는 타이틀로 곁에 있으면서, 보고싶다고 징징거리기나 하는 철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처음으로 단둘이 만난 하수영이 너 다 몰랐냐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걸 보고 나는 정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단 하나도 모르고 진솔을 보챘었다. 보고싶다고. 다음 주에 좀 쉴 겸 놀러 가자고. 애도 그런 애가 없었다. 나는 그냥 애도 아니고, 아주 나쁜 애가 되어 있었다.
너한테 난 뭐니. 내 입에서 그런 신파극 대사가 나올 줄은 몰랐다. 미안하단 말조차 않는 진솔이 미웠다. 동시에 미안해서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미안해 할 수 있는 감정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4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있는 근심 다 끌어안은 얼굴로 앞에 서있는 진솔을 두고, 나는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의 홍수에 침수되어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정은아. 팔을 뻗어 안으려 다가오는 걸 밀어냈다. 나 필기 붙었어. 헛웃음이 나와 눈을 감는데 눈물이 삐져나왔다. 어린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다지도 나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잘 됐네. 잘 먹고 잘 살아 이제. 그리고 밭은 숨이 섞인, 앞날의 축복을 빌었다.
"어차피 난 너랑 노는 거나 하는 사람인데, 같이 시시덕거리다가 돌아서면 그만이지. 꼴리면 잠이나 자고, 맞지?"
"김정은."
"두 달 전에 할머니 돌아가셨다며. 언니 장례식장에 있는 그 3일 동안, 나 뭐했었는지 찾아봤거든?"
"......."
"애들이랑 포항 놀러 갔더라?"
"정은아 그건,"
"언니 알아?"
난 지금.. 내가 너무 싫어서 견딜 수가 없어
언니가 그렇게 만든 거야
급하게 쭈그려 앉은 나는 진솔의 바짓단을 우악스럽게 끌어올렸다. 종아리에 화상 붕대가 감겨 있었다. 너 걔 일하다 다친 건 알아? 눈치 보며 운을 떼던 수영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에. 진솔은 포기한 듯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고작 다리에 커피 쏟은 것도 얘기 안 하는 언니를,"
"......"
"그런 널 뭘 믿고 만나."
재빠르게 짐을 챙겨 진솔의 집을 나왔다. 뒤통수가 싸늘했다. 단전이 뜨거웠다. 정신없이 계단을 내려와서는 골목의 어귀에 쭈그려 앉았다.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줄 알고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겐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보이며 괜찮으니 가시라고 손짓했다. 그중에 진솔은 없었다. 손짓으로 보낸 어떤 여자는 다시 돌아와 커피우유를 하나 쥐여 주고 갔다. 아구, 그만 울고 조심히 들어가세요. 술이 아닌 진솔에게서 내팽개쳐진 나에게 하는 말이었다.
진솔이 싫어서 미칠 것 같았다. 난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울 수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도 울지 말라며 내 손에 커피 우유를 쥐여 주는데. 내 앞에서 네가 한 번이라도 울었다면, 이런 커피 우유 말고 나의 품을 내어줬을 거라고. 어쩌면 나의 전부를 주고 또 입을 맞췄을 거라고. 너는 언제나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으니까. 책망하고 싶은 말이 하나 같이 뜨겁고 아팠다. 진솔만 가득 차있던 가슴 한 구석이 태워지는 듯했다. 그곳엔 붕대를 감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렁뚱땅 헤어졌다.
그제야 사귀는 내내 나의 의식 깊숙한 곳 어딘가를 긁어내던 애틋한 마음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너무 좋아서, 다 좋고 행복하게만 느껴져서 데일 것 같은 연애에도 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린 너무 뜨겁고 싶어서 끝을 빨리 당겨왔고, 그게 너와 내가 사랑으로 만난 죄라고.
나쁜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나는 나 대신 진솔을 나쁜 사람으로 두기로 결심했다. 이기적이고 지밖에 모르는 정진솔이랑 헤어진 거, 그거 아주 잘된 일이라고. 너만큼이나 나도 어른답게 잘 살아볼게. 이별과 함께 나의 낭만은 죽었다. 연애는 사치, 모든 건 시간문제. 세상 또한 그랬다. 갑자기 온 지구에 웬 역병이 창궐하더니 사람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자신을 위해 사는 걸 최고의 가치로 두었다.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는 세상이라 좀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는 풍조가 만연했다. 사실 그렇게 살아도 먹고살기 각박한 시대라, 사랑과 낭만조차 오락이더랬다.
또 다시 길고 깊은 잡념에 빠진 나는 색색거리는 단비를 옆에 두고 진솔과의 카톡창을 다시 열었다. 다음주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비를 말리겠다고 할 심산이었다.
[다 왔어?]
대화창엔 2년 전에 멈춰버린 카톡이 유물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검지를 들어 천천히 스크롤을 올렸다. 연애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저장기간이 만료된 몇 천장의 사진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어린 우리의 얼굴은 까만 엑스 너머로 멀리, 저 멀리. 백 개가 넘어가는 선물 내역에는 수십 가지의 간식거리와 음료 기프티콘, 고가의 향수와 핸드크림, 종합비타민 같은 것들도 있었다. 와중에 헤어진 날짜와 가까운 시기에 주고 받은 것들은 죄다 환불완료 도장이 찍혀있었다. 그중엔 진솔이 좋아하는 버블티도 있다. 어딘가 씁쓸했다. 텍스트로 남아있는 둘만의 숲, 그 속에서 나는 언제는 공주였다가, 애기도 됐다가, 자기였다. 대체로는 그냥 정은이였다. 정은이, 우리 정은이. 어디선가 굼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스크롤을 올린 곳에서 마주친 새벽 3시 경 진솔의 한 마디. 자기 잘자. 결혼하고싶다. 기가 막힌 말이었다. 정말 결혼이라도 했으면 나한테 다 말해줬을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게 털었다. 끝난 일에 잠식되는 건 좋지 않다. 그때 갑자기 화면 하단으로 알림이 번쩍거렸다.
아..
[단비가 다음 주에도 영화 보자고 하길래 일단 알겠다고는 했는데 너 편한 대로 해. 너도 나한테 단비 보내는 거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하필 이 시간에 카톡할 게 뭐람. 잠도 안 자나. 진솔이 보낸 메시지에 1이 바로 사라졌다. 갑자기 귀끝이 더웠다. 쪽팔리고 민망하다는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 되는 일이 없다 정말.
답장을 고민하고 있던 찰나에 진솔에게서 전화가 왔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 곧장 단비의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기대 섰다. 숨을 한 번 고르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늦은 시간에 미안. 너 안 자는 거 같길래.. 단비랑 한 약속 어떻게 할지 얘기하고 나도 주말에 일정 조정 좀 하게."
"......"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여보세요 한 마디를 못하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시간을 끌었다. 말문이 막혔다는 게 맞다.
"언니 진짜 미안한데.."
"응."
"이번 주말까지만 단비 만나주면 안 돼?.. 영화 본다고 엄청 기대하는 거 같아서.."
나도 같이 갈게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잠시 숨을 죽이던 진솔은 알겠다고, 잘자라며 전화를 끊었다. 너 같으면 잘 자겠냐. 상황이 거짓말 같아서, 다음날 나는 세 시간 밖에 못 자고 출근했다.
*
오랜만의 주말 외출이었다. 단비는 신이 난 듯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치고 거실 중앙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향수까지 뿌린 내가 손을 내밀자 좋다고 달려 들어 잡는다.
진솔은 티켓박스 앞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마스크 위로 긴 속눈썹이 깜빡 깜빡. 몸에 붙은 반팔 티에 청바지를 입고, 반대편 손에는 티켓 영수증을 쥐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예전 같아서, 태가 좋아서,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제일 내 스타일이라. 순식간에 몇 년 전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목을 가다듬었다. 단비의 손을 잡고 그 앞으로 가 섰다. 시야 아래로 먼저 두 사람의 신발을 봤는지, 진솔은 잠시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안녕. 내 밑에서 흐흐 웃는 정진솔이 조금 꿈 같아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안면 근육이 뻣뻣했다.
단비를 중간에 둔 우리는 셋이 나란히 앉아 마블 영화를 봤다. 신난 건 단비뿐이었다. 상영관이 밝아질 때 힐끗 본 진솔의 옆 얼굴이, 사귈 때 내가 좋아하던 지루한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볼 때와 같아서 조금 웃겼다.
"엄마가 왜 와."
"뭐 어때, 단비도 있다며. 복날인데 진솔이한테 아줌마가 백숙 사준다고 해. 엄마 이제 미용실에서 나와서 10분 뒤에 도착."
상영관에서 나온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엄마 목소리 덕에 진솔이 머쓱한 표정을 했다. 다 들은 거 같았다. 난 괜찮아. 그건 다시 만난 진솔이 내게 처음 건넨 말이다.
"그래 요새는 공무원 해야 돼. 젊은 애들이 워낙 불안하니? 연금 나오지. 연봉 좀 적어도 따박따박 오르지. 쉬는 것도 눈치 덜 보고 쉴 수 있잖어. 하긴 뭐 안 힘든 일이 있겠어. 아무튼 고생이다 진솔아. 잘 됐구. 아줌마는 정은이 얘가 얘기를 안 해서 몰랐어."
엄마는 진솔 앞으로 백숙 다리 하나를 얹어주며 웃었다. 전여친이랑 다시 만나고 처음 하는 식사가 전복능이백숙. 게다가 이렇게 온 가족을 매달고. 실시간으로 황당했던 나는 내 몫의 부추만 깨작깨작 씹어 먹었다.
둘이 왜 싸웠어, 어? 엄마가 능구렁이 같은 표정으로 내 배를 쿡쿡 찔렀다. 나름 어색한 분위기 풀고자 한 말이었겠으나 무슨 초등학생이 된 거 같았다. 진솔 또한 인상 좋게 웃더니 금방 입을 뗐다. 제가 정은이한테 잘못한 게 많아서요.
나는 먹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놨다. 세 사람이 시선이 내게로 꽂혔다. 화장실 갔다 올게. 진짜 싫다. 나쁜 사람으로 남겨둔 네가 자꾸만 착한 척을 하는 게. 나는 복날 대낮에 백숙집에서 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거울을 보며 뺨을 살짝 때렸다. 돌아오니 분위기는 이미 환기되어 있었다. 세 사람은 요즘 인기 있는 이혼 관련 예능 프로그램 얘기를 하고 있었다. 단비 저거는 쪼그만 게 뭘 안다고 말을 얹고 있는지.
엄마와 진솔이 반주로 막걸리를 한 잔 마셨기 때문에, 식당에서 나온 나는 엄마 대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엄마와 단비가 뒷좌석에 앉고 진솔이 조수석에 탔다. 넷이 함께 강변 공원으로 향했다. 니가 운전을 다 하네. 난 아직 면허도 없는데. 신호 대기 중 잠시 훔쳐본 진솔의 옆 얼굴이 웃고있었다. 천천히 핸들을 꺾으며 헛기침을 했다. 애기네 아직. 할 말이 그 뿐이었다. 진솔이 다시 웃은 거 같기도 했다. 웬일로 뒤에 앉은 엄마와 단비가 조용했다.
분수대 앞에서 반 친구를 만난 단비는 보드를 가져와 탔다. 엄마는 음료수를 사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떴다. 신이 나서 질끈 묶은 머리를 이리저리 휘날리는 단비다. 그래도 단비 덕에 나 웃으면서 봐주네. 눈으로 단비를 쫓던 진솔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러게, 안 될 줄 알았는데. 내리쬐는 볕에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혼한 부부들이 애 때문에 계속 만나다 다시 재혼하고 그런다잖아."
아.
웃자고 한 말에 진솔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뱉자마자 말실수였다는 걸 알아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솔과 나는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많이 더웠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잘 지냈냐고 물었다간 얹힌 말이 한도 끝도 없이 터져 나올까 봐 그랬다. 사실 잘 못 지냈단 말을 들을까 봐. 혹은 내가 그렇게 말할까 봐. 진솔도 그런 걱정을 했나. 생뚱맞은 소리를 한다. 정은아. 아픈 덴 없지. 시선은 분수대 너머 단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없지. 언니는?"
"나도."
".. 다음부턴 오늘 같은 일 없게 할게."
역시나 대꾸는 없었고 여전히 시선은 저 멀리, 다른 세상을. 입이 무거워 별뜻없는 수다를 떨지도 못했다. 진솔도 그랬을까. 소란스러운 주변과 유리된 채 진솔과 나의 반경만이 고요했다. 시간이 지나고 금방 해가 졌다. 근처에 약속이 있다던 진솔은 우리 가족과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가기 위해 다시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버거운 여름이고, 피곤한 주말이다. 단비는 놀다 지쳤는지 차에 타자마자 잠에 들었다.
"정은아. 엄마는 자식이 어떻게 살든 후회만 안 했으면 한다?"
"뭔 소리야, 갑자기."
동네로 들어와 신호를 받고 대기 중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뜬금없이 희한한 소릴 했다.
"살아보니까 그래. 타이밍이 다야. 사람 사이 관계도 다 그래."
"그니까 갑자기 왜."
"진솔이 얘기 하는 거야."
초조한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씹었다.
"걔가 너한테 그냥 친구는 아닐 거고."
"......"
"넌 자식 없어 봐서 모르지? 알기 싫은 것도 다 보인다."
그렇게 말하던 엄마가 활짝 웃었다. 뒤차가 그새를 못 참고 빵빵 경적을 울렸다. 이렇게 급하면 어제 나오지 그랬냐. 나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주차브레이크를 내렸다.
바로 집에 들어온 나는 그날 밤, 잠이 안 와 몸을 뒤척이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답답해서 그랬다. 아픈 덴 없냐는 늦어버린 사과가 원망스러워 그랬다. 그 때 물어주지. 너 때문에 나 아플 때, 그 때 물어주지. 이제 나 때문에 아프지 말라는 듯 착한 척이 싫다. 이제 와 내가 너 때문에 아프다 한들 어쩌겠나 싶어서. 엄마 눈에도 보이는 사랑이 한낱 종이 쪼가리가 된 게 견딜 수가 없어서. 팔자 좋게 타이밍 얘기하는 엄마까지 모든 게 피곤하고 미웠다. 그리고 말이야, 언니는 안 아팠어? 어떻게 견뎠어 그걸 다. 결국 나도 없어졌는데. 코끝이 시큰해졌다. 미련하게 울까 봐 얼른 눈을 감고 양을 삼백 마리나 셌다.
일요일 저녁, 잠든 동생의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진솔의 연락처도, 카톡도, 문자메시지도, 최근 통화 목록도 모두 삭제했다. 연락이 닿을 만한 통로는 모두 차단해 두었다.
이틀 뒤에 그 사실을 알아챈 단비가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언니지. 언니가 지웠지. 일에 지쳐 피곤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쪼그만 게 곧 나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할 듯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쉰다.
"은솔아."
침대에서 내려와 식식대는 은솔이의 양손을 잡고 쭈그려앉았다.
"언니, 진솔 언니랑 싸웠어. 진짜 많이 싸워서, 사실 얼굴도 못 보는 사이야. 근데 너가 진솔 언니랑 자꾸 만나면, 언니가 속상하지 않겠어?"
"거짓말. 유치해."
"은솔아."
"난 진솔 언니가 보고 싶다고!"
"세상에는.. 보고싶어도 참아야 될 때가 많아. 은솔이도 크면 알 거야."
"보고싶은 걸 어떻게 참아?"
"......"
"보고싶은데, 볼 수 있는데, 왜 참아야 돼? 언니는 내가 아는 어른 중에 제일 유치해. 진솔언니는 나한테 언니 보고 싶다고 했어. 근데 봐. 언니는 보고 싶다고 말도 못 하지? 초등학생 동생 휴대폰이나 마음대로 만지고. 언니 싫어."
은솔이가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나는 예전의 어느 날처럼 손바닥에 얼굴을 다 묻은 채로 누군가의 커피 우유를 기다리고 싶었다. 그리고 자꾸 그 사람이 정진솔일 것만 같은 헛된 상상도 했다. 나는 또 나쁜데다가 유치한 사람이라,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
은솔이와의 냉전이 계속되었다. 물론 일방적이었고 내가 매달리는 꼴이었다. 자기와 다시 말하고 싶다면 진솔 언니의 번호를 주거나, 둘이 같이 만나 사진을 찍어오랬다. 늦둥이 동생 키우는 거 정말 고난이도다. 나는 또 꼴에 언니 위신 세우고 싶어서 굽히지 않았다. 번호나 사진이나 말도 안되니까.
나 또한 진솔의 번호를 지웠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있는데, 그래도 참아야 할 때가 있으니까. 우린 이미 상처를 주고 받았고•• 우리의 어린 날은 그날 그 자리었기에 가장 빛이 났으며, 이젠 무얼 해도 어제와 같을 순 없으며. 사람은 숨이 붙어있는 한 내일을 봐야 한다. 지난 일에 함몰되지 않고 다가올 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안녕을 바라며 살면 된 것이다.
주말을 앞두고 야근이 길어졌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업무 통화가 이어졌다. 오후 10시가 되어서야 단지 내 주차장에 주차를 마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울리는 벨소리. 번호를 확인 하지도 않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김정은입니다. 상대는 응답이 없었다. 그제야 화면을 밝히고 발신인을 확인했다. 지워봤자 잊지도 못하는 번호 밑으로 7초, 8초, 9초.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안젠벨트를 풀려던 손이 멈췄다. 정적을 깨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 주먹을 쥔 손에 땀이 났다. 진솔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처음으로. 또 한 번 입이 틀어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미간이 좁혀지고 심장만 쿵쿵 뛰었다. 정은아. 한동안 말 없이 울던 진솔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사이의 적막에 나 또한 무너지고 싶었다.
"와주면 안 돼?"
이번엔 또 다시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아니면 엄마의 눈에까지 다 보인다는 나의 후회가 떠올랐다거나. 다시 시동을 걸었다. 다른 말도 못 하고, 아직 거기 살어? 한 마디를 끝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진솔은 뭔데 이 야밤에 도로를 달리게 만드는 걸까
인연은 뭐길래 나의 오늘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녀.
현관문 앞에 서서 몇 번이나 고민하던 나는 결국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금방 열렸다. 얼마 전보다 핼쑥해진 진솔이 정면에 있었다. 아직 울고 있었는지 눈 주위가 시뻘겋다. 뒤로 천천히 문이 닫혔다. 다 거짓말 같다. 네가 아직 여기 살고 있는 것도, 내가 이 곳에 다시 발을 디딘 것 모두. 시선도 맞추지 못 하는 진솔이 몸을 얕게 떨고 있었다.
난 진짜,
난 진짜 니가 싫어.
진솔의 앞에 선 내가 말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 네가 한 번이라도 내 앞에서 무너져 줬다면, 우리 이렇게 힘들게 돌아올 일은 없었을 거다. 너 없는 밤을 네 걱정으로, 나의 건조한 일상으로 우리 기억을 절박하게 덧칠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그랬다면 우린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이제 와서 내가 아쉬워? 왜, 다시 보니까 마음이 싱숭생숭 해?"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왜 울어. 나보고 어쩌라고."
훌쩍임이 멎었다. 눈을 맞춰 왔다. 정신이 아찔하니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다. 나만 힘들면 괜찮을 줄 알았어.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 우습다. 내가 너를 만났던 건 힘들지 않고 싶어서가 아니다. 힘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서였지. 네가 옆에 있으면 난 살 거 같아서.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 법한 유치한 사랑이 내겐 모두 지독하게도 진심이라서. 정은아. 그리고 때늦은 변명을 말하는, 너무나도 늦게 날 부르는 얼굴이 아직까지도 눈이 부셨다.
"매일 생각했어.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다시 너를 알고 싶다고."
"......"
"우리 다시는 안 될까. 서로 다 말해주고, 싫은 거, 좋은 거 다."
서툰 고백을 건네며 얼굴이 일그러진 진솔이 시선을 피했다. 어른은 어른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진솔은 이제 내 앞에서 애가 되든 뭐가 되든 상관 없는 듯 운다. 그렇게 진솔이 진짜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사실 아니라도 좋다. 가만히 서서 눈초리에 힘을 더 줬다. 진솔은 애처럼 소매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더니 축축한 눈을 접고 웃었다.
"너 매일 아직도 내가 좋아서 신기하다고 했잖아. 더 신기한 거 말해줄까."
"......"
"난 아직도 네가 좋아."
지금도.
진솔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어깨에 팔을 매달아 끌어당기고도 더 붙고 싶어 정신이 없었다. 마음대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내려와 입을 맞췄다. 속수무책으로, 미친 사람처럼 진솔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던 나는 한참 만에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그땐 내가 더 많이 울고있었다. 울상으로 달려들어 진솔의 팔만 퍽 퍽 쳐냈다. 진솔은 그런 나의 머리를 끌어안아주었다. 그제야 나의 몸부림이 서서히 멎었다. 완전히 몸을 맡기고 울었다. 나쁜 사람으로 남겨둔 진솔로 인해 다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어제도, 오늘도. 어쩌면 내일도. 다시 나를 알고 싶다는 언니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다. 나도 다시 언니를 안고 싶었다고. 우리는 이만큼 커서야 서로를 마주 보고 울 수 있었다.
이젠 무얼 하든 그때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면 나는 또 다시 오늘과 같을 수 없는 오늘을 매번 만들어낼 것이다. 이 황무지 같은 세상에서도 낭만을 찾을 것이다. 나만큼 너를 생각하며 이기적이지 않을 것이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후회하는 것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진솔은 이렇게 나의 모든 과거에, 오늘과 내일에 참견해 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너를 잃지 않는 내가 되어서, 나를 잃지 않는 네가 되어서. 우리 같이 내일 또 보자.
*****
"언니. 나 안 보고 싶었어?"
진솔 앞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은솔 앞에는 거대한 초코빙수가 놓여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얼굴도 쏙 빼닮아서는 어떻게 저렇게 말 한 마디, 한 마디 지 언니랑 똑같을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진솔이 웃었다. 은솔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은솔이는 초등학교 생활은 어떤지, 친구들 중에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지, 언제 이렇게 컸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지 같은 진솔의 말을 죄다 언.니.꼰.대.같.아 하고 쐐기를 박았다. 꼰대 욕은 오늘 아침에도 하고 온 진솔인데, 애한테 꼰대 소리 듣는 건 또 신선한 충격이라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은솔이는 동물의 숲 얘기 잠깐 할 때 빼고는 밥 먹는 내내, 빙수 먹는 내내 김정은 얘기만 했다.
언니. 나 안 보고 싶었어?
정은은 얼굴을 이틀만 안 봐도 그랬다. 제 입으로 자기는 애교 없다면서 숨 쉬는 것 빼고는 죄다 애교였다. 가끔 숨 쉬는 것도 그랬다. 피곤하면 우우웅. 뭐 이런 소리를 잘 냈다. 뭐라고 대답했더라. 장난하냐? 보고싶어 죽을 거 같아서 진도리 지금 응급실 갔다와떵. 이러면 인상 팍 쓰고 오바하지 말라면서도 눈은 생글생글 웃는 게 귀여웠다.
"보고싶어 죽는 줄 알았지."
검지를 뻗어 은솔이의 볼을 콕 찔렀다. 예전의 정은에게 그랬던 것처럼. 근데 왜 안 보러 왔어. 빙수 위에 놓인 과자를 꼭꼭 씹어 먹는 은솔이 자신보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진솔이다.
"음, 글쎄."
"유치해."
"응?"
우리 언니랑 언니. 유치하다고. 그렇게 말하던 은솔은 곧장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제 친구랑 카톡을 했다. 진솔은 다시 커피를 들이켰다. 맞아, 정말로 유치하다. 잠깐 심호흡을 했다. 더이상 유치한 바보짓 못할 거 같아서 그랬다. 앞에 앉아 있는 뽀얀 김정은 미니미 보니까 더. 우리 단비도 보고싶었고,
정은이도 보고 싶었지.
휴대폰 화면에서 천천히 눈을 떼는 은솔이다. 지금도 그래? 언제 이렇게 커서는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사람 마음 쑤셔 놓는 질문도 하는 걸까. 그런 김정은 미니미를 보고 있자니 진솔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응, 지금도 보고싶어
많이.
다시 너를 안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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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제나 어려운 것들, 어려울 것들
내일 말고 오늘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 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