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장본으로 발매된 윤정한 네버 다이(윤네다)의 유료공개 포스팅입니다.

본편 / 외전 고인의 명복, 사진기의 기억 / 소장본 특전 정한의 일기장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망소재 주의

*포스타입 통합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재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구매자 분들께서는 보관함에서 사본 열람이 가능하시니 사본 열람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은 20x3년 5월 24일이고,

윤정한은 20x3년 2월 7일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나의 불행에 대한 비망록.

 

윤정한 네버 다이



 

0.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도 천적이 있는데, 날카로운 어금니나 발톱을 가진 맹수가 아니라 현미경으로나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작은 미생물이다.

1년병이라는 병이 있다. 정식적인 명칭이 따로 있기는 한데 아주 길고 별로 와 닿지도 않는 이름이라 의사들도 그냥 1년병이라 부른다. 발견된 지 대충 40년쯤 흐른 이 병은 인류의 수많은 숙제들 중 하나로, 치사율 100퍼센트에 달하는, 그야말로 인간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병이었다. 대충 1년병 바이러스라 불리는 바이러스 감염이 발병 원인인데 문제는 전 세계의 학자들이 수십 년을 매달렸음에도 동물에게서 오는지, 식물에게서 오는지,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지,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지 밝혀진 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죽어나가서 부검을 해보니 1년병 감염자였든지, 건강검진을 받았더니 거기서 1년병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결과가 나오든지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1년병이 왜 1년병이냐면 발병한 그 날로부터 1년 이내의 어느 순간 돌연 숨을 거두게 된다 하여 1년병이다. 지금껏 약 5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1년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개중 딱 1년을 채우고 숨을 거둔 사람은 있었어도 1년 이상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년병이 발병된 줄도 모르고 살다 돌연사한 사람도 있고, 자살을 꿈꿨는데 때마침 1년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 숨을 거둔 사람도 있고, 발병 사실을 안 날이 바로 364일째 되는 날이라 바로 그날 밤 숨을 거둔 사람도 있고……. 감염자들은 제각각 다른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어쨌든 그들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발병 시점으로부터 1년 이내에 무조건 생을 마감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런 증상도 없고, 고통도 없고, 전염성이 있는 것도 아닌 고요한 병.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오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병. 하지만 감염의 대가는 반드시 목숨으로 치러야 하는, 끔찍한 병. 그것이 1년병이다.

-라는 게 일반 상식이지만. 가끔씩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존재하는데 그게 윤정한이었다. 대학 입학 직후 열린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선배의 말에

 

“윤정한이라고 합니다. 별명은 피닉스입니다.”

 

라고 자기소개를 했던 그 윤정한. 왜 별명이 피닉스냐는 질문에 ‘죽질 않아서요’라고 답했던 그 윤정한. 죽질 않는다니 뭐 피구왕 통키라도 되나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윤정한은 정말로 불사조였다. 홍지수가 그걸 깨닫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딱 2개월이 지난 늦봄이었다.


 


1.

 

「지수야. 엄마 외장하드 좀 갖다 줘.」

 

공강날이라 푸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이런 메시지가 와있었다. 지수는 인상을 한껏 찡그린 채 하얀 말풍선 속에 떠오른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심부름이 싫어서는 아니었다. 가습기 켜고 자는 걸 잊은 탓에 눈알이 말라붙어 그렇게밖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가끔씩 들어가는 서재 책상 위에는 언제나 연구 자료가 가득 쌓여있었고 외장하드 역시 다양한 모델로 두세 개가 맘대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우리 여사님께서는 그중 뭘 가져오길 바라시는 걸까. 한참이나 화면을 노려보던 지수는 몸을 일으키고 협탁 서랍을 뒤적여 인공눈물을 찾았다. 안구건조증이 있는 건 아닌데 올해 들어서부터 봄이 유난히 건조해 하루에 하나씩은 꼭 쓰게 되었다.

 

「어떤 외장하드?」

 

인공눈물을 넣고, 물기가 돌은 눈이 비로소 다 뜨이고 나서야 되물을 마음이 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말풍선 옆의 1이 사라지더니 「파란색」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파란색 외장하드란 말이지. 솥뚜껑만한 손에 비해 작은 핸드폰을 붙잡고 질문을 이었다.

 

「급해?」

「그렇게까지 급한 건 아니지만 가급적 빨리 가져다줬으면 좋겠네.」

「나 지금 일어났어. 가려면 좀 걸려.」

「누가 너 본다고. 대충 씻고 지금 입고 있는 거 그대로 입고 와.」

「어떻게 그래. 아무튼 최대한 빨리 가도 1시간은 걸리니까 기다려.」

 

엄마는 툭하면 방금 자고 일어난 지수에게 지금 입고 있는 거 그대로 입고 가면 되지, 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티셔츠에 츄리닝 입고 자는 습관이 있다면 모를까 꼬박꼬박 파자마를 입고 자는데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엄마 기준에 내 파자마는 바깥에 입고 나가도 될 만한 옷인 걸까. 지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쭉 켠 뒤 목을 좌우로 두 바퀴씩 돌렸다. 어쨌든 엄마가 귀중한 연구 자료를 놓고 갔다니, 하나밖에 없는 아들 된 도리로 신속배달을 해야 했다. 그냥 평범한 연구도 아니고 나름 인류를 위한 연구 아니던가. 오늘 이 행동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칠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하니 귀찮음을 조금이나마 억누를 수 있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엄마가 알면 세수만 하면 됐지! 라고 나무라겠지만- 옷까지 주워 입자 메시지를 확인한 시점에서 딱 45분이 지나있었다. 여기서 센터까지 가는데 대충 40분이 걸리니 총 소요 시간은 약 1시간 25분이 된다. 빨라도 1시간이랬지, 1시간 안에 간단 말은 안 했으니 괜찮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지수는 노트북 위에 당당히 얹힌 파란 외장하드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신발장에서 컨버스를 꺼내 발을 구겨 넣으니 길게 하품이 나왔다. 춘곤증은 이미 3월로 철이 지났는데 왜 이리 잠이 쏟아지는지 모르겠다.

센터까지는 지하철을 한 번 타거나 버스를 두 번 타야 했는데, 지하철은 내려서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기에 지수는 5분 느리고 다소 귀찮더라도 버스를 타는 쪽을 택했다. 집 앞에서 파란 버스를 타고 가다 중간에 내려서, 초록색 버스로 갈아타면 딱 센터 정문에서 버스가 정차한다. 거기서 대충 3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센터 본관이고, 로비 정중앙에 위치한 안내데스크에 이야기를 하면 엄마를 만날 수 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엄마에게 신성한 외장하드를 건네고 잔소리 몇 마디 들으면 임무 완료. 만약 엄마가 점심을 거른 채라면 같이 점심 먹기, 동료와 함께 내려왔다면 동료에게 소개당하기 등의 추가적인 임무가 주어질 수도 있겠으나 확률은 희박했다.

 

‘요즘 바빠 보였지…….’

 

드디어 연구에 무슨 진척이 생긴 것인지, 최근 엄마는 툭하면 늦게 들어오는 데다 눈 밑이 하루하루 시꺼멓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지수는 인류를 위해 뛰고 있다는 자랑스러움보다는 저러다 엄마가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과 실무자들이 저렇게 갈려나가는데도 연구 진척이 되질 않는 1년병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8살 때였나, 학교 숙제로 부모님에 대한 글을 쓰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이런 말을 했었다. 만약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나는 그날부로 실업자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 미지의 병을 때려잡고 차라리 백수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직 어려서 엄마가 백수가 되면 내 장난감은 누가 사주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나고 와서 생각하니 참 존경스러운 발언이었다. 나에게는 그냥 우리 엄마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을 위한 동아줄인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니 장차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이과 과목이 영 적성에 맞지 않아 꿈을 접기는 했지만.

꿈을 접고 문과로 진학하는 지수를 보며 엄마는 ‘누군가의 생에 대한 희망이 될 방법은 아주 많다’고 했다. 한 사람에게든, 여러 사람에게든.

 

-이번 정류장은 국립질병연구센터 앞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정류장 안내 방송이 귀에 들어왔다. 지수는 앉은 자리 바로 옆에 달린 하차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 앞에 선 뒤 교통카드를 태그했다. 안내방송이 나오고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 30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빨리 일어서지 않으면 가끔씩 내리지 못하거나, 기사에게 욕을 얻어먹고는 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은 후로부터는 벨을 누르자마자 일어나 뒷문에 서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씩 ‘차가 멈추고 나면 일어나라’며 혼내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왜 꾸물거리냐’고 혼내는 기사들보다는 그 수가 월등히 적었으므로 이 편이 훨씬 안전했다.

센터에 온건 약 반년 만이었다. 그 사이에 공사를 했는지 외벽이 깨끗한 화강암으로 싹 교체되어 있었다. 몇 달 전 엄마가 요즘 공기가 너무 안 좋다며 마스크를 끼고 다녔었는데 공사 때문이었을까. 사뭇 분위기가 달라 보이는 건물을 잠시 바라보던 지수는 정문을 지나 본관 로비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꽃이 제법 많이 심어져 있었지만 한창 때가 지난지라 거의 다 시들고 개중 몇 송이만이 싱싱했다. 누렇게 끝부터 타들어간 꽃잎을 보고 있으니 문득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병원이었다면 너무나도 무심한 조경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안녕하세요.”

 

로비 중앙 안내데스크로 다가가자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직원이 지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수는 엄마의 이름을 대며 자신이 그의 아들임을 알리고, 전해줄 물건이 있어 찾아왔다며 용건을 밝혔다. 직원은 잠시만 기다리라 한 뒤 내선전화를 이용해 엄마에게 지수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전화를 끊은 직원은 데스크 서랍에서 방문자용 출입증을 건네 지수에게 건넸다. 센터에 찾아온 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건만 출입증을 건네받은 건 처음인지라 지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직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건 왜…….”

“박사님께서 내려오시기 힘드니 올라와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하셔서요.”

“아…….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요? 제가 안으로 들어가본 적은 없어서요.”

“저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시면 바로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15층으로 가시면 박사님 연구실이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지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출입증을 건네받았다. 엄마의 출입증을 몇 번 본 적 있는데, 방문자용이라 그런가 그에 비해서는 어딘가 모르게 엉성해보였다. 사진도 없고, 이름도 없고, 식별 바코드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만. ‘방문자용’ 이라는 고딕체와 밑에 센터 로고가 찍혀있을 뿐인 출입증을 보고 있으니 이 센터 안에서 내 존재는 딱 이 정도겠지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당연한 얘기였다. 센터 입장에서 직원도 아닌 방문자가 소중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게이트에서 출입증이 오작동을 일으켜 제지당하는 상상을 했는데, 싱겁게도 출입증을 가져다대자 초록색 램프가 점멸하며 순순히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룸에는 좌우로 딱 6대의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개중 좌측 중앙 엘리베이터가 때마침 1층에 도착해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지하에서부터 올라온 연구원들 몇이 지수를 보자 구석으로 몸을 옮겨 자리를 비켜주었다. 몇몇은 ‘이런 어린애가 웬일이래’ 하는 눈빛으로 지수를 흘끔 보았다. 지수는 조용히 15층 버튼을 누르고 손을 모은 채 엘리베이터 상단의 층수 표시창을 보았다. 그리 고층건물도 아니건만 고속엘리베이터가 설치된 덕에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숫자가 올라갔다.

15층에 내리자 엘리베이터 룸 우측으로 유리문이 있고, ‘통제구역’ 이라는 글자와 카드리더기, 인터폰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자용 출입증이 먹힐 것 같지 않아 인터폰을 조작하자 누군가가 스피커를 통해 대뜸 용건을 말씀해 달라 물었다. 지수는 허리를 숙여 인터폰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괜히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엄숙하고 불친절한 분위기가 오면 안 될 곳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저, 서은경 박사님을 뵈려고 왔는데요.”

“어디서 찾아오셨나요?”

“아들인데, 외장하드를 좀 전해주러…….”

 

뚝 하고 연결이 끊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유리문이 지잉,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지수는 열린 문 앞에서 쭈뼛대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연구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보안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맡아본 적 없는 약품 냄새가 코끝을 싸하게 간질였다. 지수는 손등으로 코를 부비며 좌우를 살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엄마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엄마는 올라오라고 할 거면 연락이라도 좀 하던가…….’

 

난 여기 와본 적도 없는데. 속으로 불평을 쏟아내며 일단 우측으로 가보기로 했다. 가서 없으면 다시 좌측으로 가든지 엄마한테 연락을 하든지 하면 되겠지. 다소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걷고 있으니 몇 개의 문이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하나는 창고인 것 같았고 나머지는 다른 누군가의 연구실이었다. 이 층에 있는 연구원들은 모두 개인 연구실을 쓰는 모양이었다. 나름 연구의 핵심들이라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문과 진학 이후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엄마에게의 존경심이 잠시나마 되살아났다.

복도를 거의 끝까지 걷자 1501호가 나타났다. 1501호, 서은경 박사. 복도가 제법 길어 헛걸음이었으면 조금 짜증이 났을 뻔 했는데 맞게 찾아온 듯했다. 희디 흰 벽에 옅은 파란색의 문. 깨끗하기 짝이 없는 인상이었으나 그게 어딘가 모르게 섬뜩했다. 지수는 이 층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쭈뼛대다 노크를 했다. 나무문인지 제법 맑은 소리가 났다.

 

“엄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정면에 빈 책상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앉아있다 일어선 듯 옆으로 돌아간 의자가 보이고, 그 우측으로는 제법 큰 책장이, 좌측으로는 어딘가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안쪽에 있나? 지수는 문 앞에 선 채 연구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습기가 틀어져 있어 습도는 딱 좋았는데, 가습기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바깥보다도 약품 냄새가 진했다. 코가 한층 더 간질거려 인상을 찡그리고 코끝을 긁적이는데 좌측으로 난 문이 벌컥 열렸다.

 

“어?”

“응?”

 

허나 당연히 엄마겠지 하고 돌아본 쪽에는 엄마가 아닌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지수 또래의 젊은 남자애. 그것만으로도 의외인데 심지어 잘 아는 얼굴이기까지 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만큼이나 이 연구소와 상관이 없을, 과 동기 ‘피닉스’ 윤정한이었다. 니가 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도 지수의 존재가 의외인 듯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지수를 바라보았다.

 

“안녕.”

 

이대로 서로 마냥 쳐다볼 수는 없으니 지수 쪽에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정한은 ‘어어, 안녕’ 하고 아주 어색하게 마주 인사를 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길게 기른 금발머리가 보수적인 센터 분위기와 맞지 않았지만, 정한은 왜인지 하늘색 가운을 입고 있어 회색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은 지수보다는 관계자처럼 보였다. 왜 얘가 이 시간에 이런 차림새로 우리 엄마 연구실에 있을까. 도무지 이어지지 않는 인과를 따지고 있으니 정한이 닫다 만 문을 마저 닫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서 박사님이 아들 마중나간다고 하셨는데, 너였구나.”

“마중을 나간다 했어? 못 만났는데?”

“엇갈렸나보다. 방금 나가셨는데 왜 못 봤지?”

 

구조 상 마주치기보다 엇갈리기가 더 힘들 텐데 신기한 노릇이었다. 가능성이 있다면 지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동안 엄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 정도일까……. 그렇다면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싶어 가방을 뒤적여 핸드폰을 찾고 있으니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뒤를 돌아보자 엄마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돌아와 봤는데, 그새 도착했구나.”

“뭐야. 올라오라고 했으면 연구실에 가만히 있던지.”

“생각해보니 너 연구실에 와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데리러 가려 했지. 근데 그새 잘 찾아왔네.”

“숨은 왜 그렇게 헉헉대?”

“저기 왼쪽 복도부터 걸어갔다 왔거든. 어휴, 왜 이렇게 힘이 드니.”

 

엄마가 늙긴 늙었다. 엄마는 책상 앞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뒤 흰 실험가운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냈다. 운동부족이야, 엄마. 지수는 볼멘소리를 하며 가방에서 외장하드를 꺼내 엄마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외장하드와 지수를 한 번씩 번갈아 보고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거 두고 와서 회의도 오후로 미뤘잖아. 요즘 이렇게 정신이 없어.”

“엄마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지? 자꾸 밤새고 그러면 기억력 나빠져.”

“의학박사씩이나 돼서 문과 아들한테 충고를 다 받네, 엄마가.”

 

깔깔 웃은 엄마는 문득 시선을 느꼈는지 연구실 좌측을 보았다. 그와 동시에 지수도 엄마를 따라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거기에는 당연하게도 잠시 존재를 잊고 있던 정한이 애매한 표정을 지은 채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엄마는 ‘어머, 정한아’ 하고 호들갑을 떨며 의자 등받이에 푹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멋쩍게 웃었다.

 

“그새 다 끝났니? 미안해, 어수선하게 해서.”

“아니에요. 그, 결과지 나온 건 제가 빼다가 데스크 위에 뒀어요.”

“고마워. 참, 얘는 내 아들 지수.”

“알고 있어요.”

“응?”

 

이번에는 엄마가 놀란 토끼 눈을 뜬다.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지수를 바라보기에 지수는 정한을 곁눈질로 흘끗 보았다 다시 엄마를 보았다.

 

“같은 과 동기야.”

“어머, 그랬니? 그러고 보니 정한이도 삼성대 다닌다고 그랬었지.”

 

엄마의 시선이 이번에는 정한을 향했다. 정한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사이였다면 지금 이 상황이 그리 어색하지 않았겠으나- 애석하게도 지수와 정한 사이에는 별달리 친분이랄 것이 없었다. OT 때 방도 다른 방엘 배정받았었고 신입생 환영회때도 처음에만 같은 테이블에 앉았지 이후에 자리 이동을 한번 하면서 멀리 떨어졌기에 ‘불사조’ 자기소개 이후로는 정한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수업에서라도 접점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워낙 다인원인 과라 그러지도 않았고. 그래서 저런 애가 있다는 사실만 알았지 사실상 모르는 사이나 다름없는,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 마주치니 서로서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너희 둘이 별로 안 친하구나?”

 

그걸 눈치 챘는지 엄마가 바로 정곡을 찌르고 나섰다. 정한과 지수는 그냥 웃기만 했다. 아니야, 우리 친해 하고 부정하기도 뭐했고 그렇다고 내놓고 긍정하자니 그것 역시 좀 그랬다.

 

“저, 박사님. 저는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어색하게 웃던 정한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어어, 하고 약간 호들갑스럽게 답한 뒤 오늘 분은 다 끝났으니 얼른 들어가서 쉬라며 정한에게 손짓했다. 정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연구실 좌측의 어딘가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희미하게 무슨 기계 같은 게 보인 걸로 보아 실험이나 검사 같은 걸 저 안에서 행하는 듯했다. 그런데 저기 정한이 왜?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바로 다시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고개를 돌려 엄마를 보자 엄마는 손목시계를 보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너 밥 먹었느냐고.”

“아니, 아직.”

“하긴. 아까 방금 일어났다고 했지. 공강이라도 그렇지, 이때껏 자니?”

 

요 며칠 과제 때문에 늦게 잔 거 알면서 저런 야속한 소리를 하다니. 지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엄마는 점심을 아직 안 먹었거든 온 김에 같이 먹자며 지수를 보았다. 배가 별로 안 고픈지라 그냥 집에 가고 싶었지만 집에 돌아가 봐야 달리 먹을만한 것도 없을 테고, 엄마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오랜만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센터 근처의 식당을 대며 뭘 먹을지 정하고 있으니 또 다시 문이 열리며 안에서 정한이 나왔다. 그도 지수처럼 회색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 차림새가 대학생들의 아주 보편적인 차림새라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커플룩을 입은 것 같아 머쓱해졌다. 지수는 일부러 정한에게서 눈을 뗐고 정한 역시 애써 지수를 거른 채 엄마만을 보았다.

 

“박사님,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 그래. 정한이 수고했어. 같이 밥 먹으러 가면 좋을 텐데.”

“아니에요. 그럼 다음에 뵐게요.”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건넨 정한의 시선이 이내 지수에게 닿았다. 불편한 시선이 마주치자 둘은 잠시 주춤했다. 정한은 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지수에게 손을 흔들었고 지수는 입모양으로 ‘잘 가’라고 답했다. 지수가 연구실 한복판에 서있는 탓에 자연스레 정한은 지수의 뒤를 지나쳐 나가야 했다. 그가 지나가니 샴푸 냄새인지 무엇인지 모를 좋은 향기가 언뜻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같이 먹자고 하지 그랬어?”

 

엄마 성격상 ‘같이 먹으러 가면 좋을 텐데’ 가 아니라 ‘같이 먹으러 가자’여야 할 텐데 이상했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갑을 챙기며 대답했다.

 

“그러면 좋겠는데 정한이 금식해야 해서.”

“왜?”

“그런 게 있어. 자, 가자.”

 

엄마의 주력 연구 분야는 1년병이고 이 센터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연구도 1년병 연구이다. 센터에서는 1년병과 관련한 검사도 겸하고 있는지라, 관계가 전혀 없는 민간인이 센터에 방문한다면 십중팔구는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을 받고 정밀검사를 받기 위해 온 것일 텐데……. 엄마 잘 둔 덕에 주기적으로 정밀검사를 받는 입장에서, 지수는 1년병 검사에는 금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음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금식이라니? 잠시 잊었던 의문이 다시 머릿속에 둥실 떠올랐다.

 

“엄마.”

 

젓가락질을 멈추고 엄마를 부르자 엄마도 국물을 막 뜨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지수를 보았다. 왜? 하고 답한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뒤 젓가락을 들어 깍두기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아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부드럽게 생긴 편인 정한과 달리 엄마는 인상이 날카로운 편으로, 홍지수의 트레이드마크인 고양이 같은 눈매는 그녀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런데도,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엄마의 모습에서 왜인지 정한이 연상되었다. 머리가 길다는 걸 빼면 닮은 점은 하나도 없는데. 걔가 깍두기를 먹기는 하는지도 모르는데. 국밥 같은 걸 먹는지도 모르겠고.

 

“윤정한 걔 있잖아.”

“응.”

“센터에는 왜 온 거야?”

“음, 글쎄.”

 

엄마는 애매하게 답한 뒤 식사에만 집중했다. 뭐야. 지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보았다. 본인 연구실에 있었고, 정한이 정한이 하는 걸로 보아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글쎄라니. 자신이 무슨 라이벌 관계에 있는 회사 사람도 아니고 아들인데 저 성의 없는 답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글쎄라니. 엄마가 모르면 누가 안다고?”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긴 하지.”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수저로 국물에 만 밥을 한 수저 떠서 먹었다. 그러고는 따듯한 국물을 먹으니 몸이 살아나는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딴청을 피웠다.

 

“알고 싶으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니? 같은 과라며.”

“우리 별로 안 친해.”

“별로 안 친하니까 더 직접 물어봐야지.”

“…….”

“누가 네 얘기를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말하면 좋겠니?”

 

맞는 말이라 말문이 막혔다. 지수는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국밥만 열심히 떠먹었다. 파스타 먹고 싶다 했는데 본인이 안 땡긴다고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국밥이나 사주고……. 절반이나 먹을 때까지도 없던 불만이 심술에 괜히 생겨났다.

 

“너희 둘이 죽고 못 사는 관계였어도 말 안 해줬을 거지만.”

“왜?”

“소중한 사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직접 들어야지.”

“뭐야.”

“아무튼, 궁금하면 정한이한테 물어봐. 엄만 안 가르쳐줄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지수를 향해 씨익 웃었다. 태어나서 20년간 엄마를 봐온 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미소가 썩 좋은 의미의 미소는 아니라는 걸.

지수가 의문에 대한 답을 들은 건, 그로부터 정확히 24일 후 정한을 통해서였다. 봄 끝물 여름 초입이라 햇살이 제법 따가워진 시기로, 캠퍼스 안의 모두가 반팔 내지는 민소매를 입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그날 전공 수업에서 과제를 위해 조를 나누었는데, 교수 쪽에서 출석부 순으로 조를 짠 탓에 정한과 지수는 같은 조가 되지 못했다. 출석부 상에서 ‘윤’과 ‘홍’ 사이는 굉장히 멀었다. 1학년 거의 다가 참석하는 수업이니만큼 같은 조가 되지 못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조가 되면 이번엔 물어볼까 했는데.’

 

센터에 다녀온 이후로 의문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쩌다 정한을 마주칠 때면 다가가서 ‘안녕 오랜만이야 근데 물어볼 게 있는데 너 그 날 센터에는 왜 갔어?’ 하고 속사포로 쏟아내고 미친놈 취급을 받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짓을 하기에 지수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다소 민감할지도 모를 이야기를 함부로 꺼낼 수는 없다. 정한의 성격이 무던한 편이라면 그냥 질러볼 수도 있겠으나,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무던하긴 한데 예민할 때는 또 엄청 예민하다는 듯했다.

 

‘그리고.’

 

어쨌든 엄마의 지인……. 그 비스무리한 게 아닌가. 엄마 체면을 위해서라도 막 나갈 수는 없었다. 하여 언제든 분위기만 잡히면 곧장 물어보려고 했는데 도통 접점이 생기질 않았다. 이거 하나 물어보자고 일부러 친한 척 하기도 뭐하고. 게다가 센터에서 한번 마주친지라 오히려 더 다가가기가 면구스러웠다. 꼭 엄마가 ‘잘 지내라’고 해서 다가가는 것 같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한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지수 생각이 그랬다. 정한 쪽에서 먼저 다가오거나 하질 않는 걸 보면 그도 굳이 지수와 친해질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했고.

아무튼 그랬다. 그래서 그냥 거의 한달 째 정한을 볼 때마다 궁금해 하기만 했다. 지수가 센터에 다녀온 다음날, 정한이 전공수업을 죄다 결석하고 학교에 오지 않았던지라 더 그랬다. 센터. 엄마. 가운. 금식. 그리고 결석. 이 다섯 단어가 조합하는 결과는 대체 무엇일까. 두루뭉술하게 실마리가 잡히기는 했으나 어딘가 모르게 궤가 안 맞는 구석이 있어서 확신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정한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는 없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있어야지.’

 

계속 고민하던 지수는 인상을 찡그렸다. 남의 사생활에 흥미본위로 접근하는 것 같아 조금 찜찜해진 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정말 옷만 갈아입고 후딱 다녀오든지 아니면 아예 늑장을 부리든지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한과 마주치지 않았을 테고, 이렇게 의문에 시달릴 일도 없을 테니까. 생각이 많아지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안 그래도 맛이 별로인 학식이 무슨 소꿉장난 모래알처럼 느껴져 지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미리 떠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대로 정리하고 남은 음식을 싹 다 버린 뒤 학생식당을 떠날 생각이었다.

 

“안녕.”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펼쳐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수는 저도 모르게 마시던 물을 뿜고 기침을 했다. 지수의 맞은편에 앉은 정한은 ‘얘 뭐야’ 하는 눈으로 지수를 바라보다 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입가와 코 주변을 닦았다. 제대로 뿜는 바람에 물이 살짝 코로 넘어가 콧속이 축축했다.

 

“…안녕.”

“왜 그렇게 놀라? 내가 뭐 귀신도 아니고.”

“잠깐 다른 생각 하던 중이라……. 미안.”

“뭐가?”

“그냥 기분 좀 나빠 보여서?”

 

지수의 눈에는 정한의 표정이 약간 뚱하게 보였다. 허나 정한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괜히 제 발을 저리나. 뜨끔했지만 지수는 태연한 체를 하며 아니면 다행이라고 했다. 정한은 턱을 괴고 지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방금 막 받아온 듯 식판 위 음식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지수와는 다른 메뉴를 선택한 탓에 구성이 달랐는데, 정한의 식판을 보니 약간 후회가 몰려왔다. 나도 양식 말고 한식 시킬 걸.

 

“너 보여서 왔는데, 밥 다 먹었구나?”

“아, 응. 온지 좀 돼서…….”

“아깝네. 얘기 좀 해보나 했는데.”

“나랑?”

“그럼 누구랑?”

 

정한이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아까부터 얘가 왜 자꾸 헛소리를 하지? 하는 표정이었다. 민망함에 지수는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휴지로 입가를 닦아냈다. 무슨 짝사랑 상대 마주한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왜 이렇게 쪼다같이 굴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요 한동안 계속 의식했던 상대라 그런가.

 

“다 먹었으면 신경 쓰지 말고 가.”

“아니, 아직 다 안 먹었는데.”

“아깐 다 먹었다며?”

“그……. 밥은 다 먹었는데. 디저트는 아직이라.”

 

때마침 후식으로 과일 푸딩 하나가 딸려있었다. 원래는 먹을 생각이 없었던 거지만 지수는 웃으며 자연스럽게 플라스틱 스푼과 젤리의 포장을 뜯었다. 정한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보이는 이미지로는 편식도 심한데다 깨작댈 것 같았는데 의외로 이것저것 잘 먹었다.

 

“혹시 너 나한테 관심 있어?”

 

푸딩을 찔끔찔끔 떠먹고 있으니 정한이 돌연 폭탄을 던졌다. 지수는 아까 전 물을 뿜었을 때만큼이나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왜?”

 

실로 어색한 목소리였다. 마지막 ‘왜’는 음계가 너무 높은 탓에 갈라지기까지 했다. 신경이 쓰이다보니 가끔 흘끔대긴 했는데 그게 너무 티가 났나. 딱히 안 될 짓을 한 것도 아니니 당당해지면 될 텐데, 워낙 생각이 많았던 차라 제 발을 저렸다. 정한은 그런 지수를 무덤덤하게 한번 바라보더니 아님 말고, 하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그냥, 너랑 요새 눈이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서 물어봤어.”

“…그랬던가?”

“내 기분 탓인가 보지.”

 

내가 좀 도끼병 기질이 있나보다. 정한은 이번에도 몹시 무덤덤했다. 너무 무덤덤한 나머지 약간 감정이 없나 싶을 정도였다. 엄마 연구실에서 하는 실험이 1년병 이외에, 뭐 사이코패스 치료라던가……. 그런 게 있었던가. 하지만 엄마에게서 1년병 이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다.

 

“박사님은 잘 계시지?”

 

혼자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정한이 물었다. 지수는 한 스푼 뜬 푸딩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야 뭐, 가끔 피곤해하기는 해도 언제나 잘 지낸다. 지수가 그녀를 봐온 20년간은 계속 그랬다.

 

“엄청 잘 지내.”

“다행이네.”

 

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수는 정한의 식판 위 음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흘끔 살펴보았다. 자신이 손바닥보다 작은 푸딩을 절반 먹는 동안 정한은 식사의 4분의 3을 먹어치웠다. 의외로 먹는 속도가 빠른 모양이었다.

 

“요즘 좀 자주 굶었더니 배고파서.”

 

그 시선을 눈치 챘는지 정한이 지수를 보며 말했다. 지수는 그렇구나, 하고 로봇처럼 답하며 또 푸딩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왜 굶었어?”

“이것저것 검사가 많았거든. 박사님한테 얘기 안 들었어?”

“우리 엄마 나한테 그런 얘기 안 해.”

 

연구윤리에 위배된대. 지수는 최대한 새침하게 답했다. 내가 그날 뜻밖에 너를 우리 엄마 직장에서 마주쳤고,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니가 왜 거기 있었는지 많이 궁금할 법도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듯. 답해놓고 정한의 반응을 살피니 그는 여전히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보니 나만 신경 쓰고 있었나 싶어 약간 민망해졌다.

하기야, 정한의 입장에서는 썩 궁금할 일이 아니었다. 이쪽이야 왜 정한이 센터엘 방문했는가 하는 의문점이 있었지만 정한은 이미 그 날 모든 해답을 얻지 않았던가. 홍지수는 서은경 박사의 아들이다. 그는 서은경이 두고 간 외장하드를 전해주기 위해 센터에 찾아왔다. 끝. 의문을 가질 구석이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니 지수는 정한을 신경 써도 정한은 지수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왜인지 약간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불공평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못한다. 그냥 논리도 근거도 없이 든 감정이었다.

 

“근데, 그 날 센터에는 왜 간 거야?”

 

결국 이 감정의 불공정을 해소하기 위해 은근슬쩍 떡밥을 던져보았다. 정한은 지수를 보지 않고 묵묵히 입에 든 음식만 씹었다. 잘못 건드렸나 싶어, 소위 말하는 ‘쫄린다’는 감정이 들기 시작할 즈음에 정한은 고개를 들어 지수를 보았다.

 

“이것저것 검사받을 게 있어서.”

“아, 1년병 검사? 나도 자주 받아. 엄마가 하는 일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검사는 검산데, 그런 검사는 아냐.”

 

정한은 그렇게 말하고 지수 앞에 놓인 컵을 가리켰다. 물을 안 떠왔는데 한 모금 마셔도 되겠냐는 것이었다. 아까 마시다 뿜은 게 좀 걸리기는 했는데, 쟤도 봤지만 상관없으니 묻는 거겠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한은 고맙다고 답하고 지수의 컵을 가져가 목을 축였다. 제법 목이 막혔던 듯 오만상을 찌푸린 그는 컵을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나, 1년병 환자거든.”

“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일 줄이야. 어느 정도 각오한 결과인데도 이상하게 충격적이었다. 딱히 정한과 친분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엄마가 1년병을 연구하는 학자이니만큼 1년병이라는 존재가 새롭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나이의 또래가, 여명이 1년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게 조금 충격적이었다. 이 무덤덤함은 그래서일까.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 다소 무례한 생각이 들었다. 지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정한을 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과일푸딩은 어느새 내려둔 채였다.

 

“근데, 조금 달라. 너도 알 거 아냐. 이거 치료방법도 뭣도 없어서 딱히 병원 다니고 검사받고 하고 할 것도 없다는 거.”

“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1년병은 전 세계의 지식인들이 떼로 달려들었음에도 불구, 아직까지 감염원인도, 예방법도, 치료법도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병이었다. 그런데 달리 타인에게 감염이 되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이 극심한 고통-육체적인-을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보니 양성으로 확인되면 발병 시기를 특정하는 검사를 실시한 뒤 ‘앞으로 얼마 남았습니다’ 선고를 받고, 그걸로 끝이었다. 이외에 무언가 약을 먹는다거나 수술을 받는다거나 하는 행위는 확실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죽을 목숨, 인류에게 공헌이라도 하겠다며 혈액 등의 샘플이나 연구사례를 제공하러 센터를 오가는 환자들이 있기는 있었다. 그런 케이스일까. 지수는 정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한은 그런 지수를 흘긋 보더니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어?”

“아니, 쓸데없이 진지한 게 너무 웃겨서.”

“쓸데없다니…….”

“하긴, 누가 1년병이다 하는 소리 들으면 대개는 진지해지지?”

 

자기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저렇게 가벼울 수가 있나. 약간 신기했다. 지수가 아는 한 1년병 환자들은 9할이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아쉬워하고, 곧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누구보다도 가슴에 무거운 추를 달고 살았다. 그런데 윤정한은 1년은커녕 100년을 살기라도 할 듯이 무감각하게 굴고 있었다. 동시에, 1년 후에 찾아올 죽음이 꼭 남의 일이라도 된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근데 난 별로 안 진지해.”

“왜?”

“나, 두 살 때 1년병 진단받았다?”

 

안 믿기지? 정한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두 살에 1년병을 진단받았다면 자그마치 18년 전이다. 그런데 살아있다니? 그렇다면 이게 18년병이지 1년병인가?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아 지수는 미간을 찡그린 채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그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그저 웃기만 했다. 지수의 혼란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잠깐.”

머릿속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훅 떠올랐다.

“너, 그래서…….”

“응, 맞아.”

 

정한이 눈꼬리까지 휘며 웃었다. 지수는 거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한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 검지로 정한을 가리켰다. 그래서였구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며 머릿속에서 딩동, 벨이 울렸다.

 

“그래서 별명이 피닉스였구나.”

 

안 죽는다고. 지수의 말에 정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컵에 남은 물을 마저 다 마신 그는 휴지를 뽑아 입을 닦은 후 그것을 구겨 테이블 밑의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른 별명도 있어.”

“무슨 별명?”

“윤정한 네버 다이.”

 


 


2.

 

 

피닉스, 윤사조, 윤정한 네버 다이, 미라클 윤, 지옥에서 돌아온 윤정한……. 정한을 칭하는 언어는 대부분이 다 기적과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그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하게 1년 내로 죽는다는, 인류 최대의 미스터리이자 인간의 천적 1년병에 걸리고도 18년이나 살아남지 않았는가. 당장에 자길 재림예수라 칭하며 종교를 하나 창설해도 될 이력이었다. 우리 윤 교주님께서는 두 살에 1년병에 걸리시고도 스무 살까지 살아서 우리 곁에 계시니, 이는 곧 영생의 증거요 그가 진정한 신의 아들이라는 증거라.

 

“넌 교회 다니는 애가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정한이 질색했다. 지수는 정한이 이런 류의 욕망이 없는 사람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이쪽으로 의지가 있었더라면 진즉에 나라 제일가는 사이비 종교를 하나 만들고도 남았을 거다.

 

“근데 넌 네가 좀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1년병에 걸리고도 18년을 더 살았다면 한번쯤은 해봤을 법도 했다. 정한은 잠시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했다.

 

“특이하단 생각은 해봤는데 특별하단 생각은 안 해봤는데.”

“왜?”

“그냥…….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해서 뭐에 쓸 거야.”

 

자기연민밖에 더 안 되잖아. 정한은 그렇게 말하고 프린트물 위에 샤프로 무언가를 적었다. 교양과목으로 선택한 일본어 과제라는데 지수는 이때껏 살면서 일본어를 배워본 적이 없는지라 봐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술술 잘도 풀기에 신기하다 했더니 정한이 별로 어렵지도 않다며 문장 하나에 줄을 쫙 그었다.

 

“이건 너도 들으면 알 걸? 읽을 줄 몰라서 그렇지.”

“뭔데?”

“곤니치와.”

 

일본어 까막눈이지만 이 정도는 안다. 지수는 다음 학기에도 정한이 일본어 수업을 듣는다면 같이 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무릇 언어라는 것이 일단 배워두면 아주 무용지물은 아니지 않던가. 정한과 함께 수업을 들으면 조별과제니 뭐니 하는 문제에서 약간이나마 자유로울 수 있을 테고, 시험기간에 같이 공부할 파트너도 생기니 여러모로 수월할 것이다. 지수는 다음 수강신청 기간에는 시간표를 짜기 전에 정한에게 먼저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과제에 집중했다.

 

“난 홍지수 네가 더 신기해.”

“뭐가?”

“그거.”

 

지수가 풀고 있는 건 마찬가지로 교양과목인 스페인어 과제였다. 정한은 샤프 끝으로 지수의 교재를 가리키며 일본어 하는 사람은 널리고 깔렸어도 스페인어 하는 사람은 살면서 한 번도 못 봤다는 말을 했다. 그러니까 나보다는 홍지수 네가 더 신기하다고.

 

“게다가 넌 영어도 술술 잘하잖아.”

“그야 모국어가 영어니까 잘하지. 너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으면 잘 했을걸.”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났지.”

“그래서 한국말 잘하잖아.”

“근데 넌 영어도 잘하는데 한국말도 잘하잖아.”

 

의미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딱히 목적이 있는 대화가 아니니 당연했다. 그냥 이 조용한 적막을 채우고, 내 맞은편에 누군가가 앉아있음을 실감하고 싶어 떠들 뿐. 대화를 통해 상대를 탐색하고 친목을 다질 단계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이젠 그런 행위가 새삼스럽고 간지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학생식당에서 정한과 대화를 나눈 후로, 물 흐르듯, 구렁이 담 넘듯 자연스레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2학기 들어서는 시간표가 제법 겹친 덕분에 필연적으로 얼굴 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굳이 학교 안이 아니더라도 같이 시험공부를 하러 카페에 가거나 검진을 받는 날 센터에 같이 가거나 하는 식으로 만남을 가졌다. 덕분에 이제 누군가가 지수의 SNS에서 정한의 사진을 보고 ‘얘는 누구야?’라고 묻는다면 답할 말이 생겼다. ‘대학교 친구’.

 

“우리 지난번에 같이 셀카 찍은 거 내가 올렸었잖아. 인스타에.”

“난 몰라. 나 인스타 안 하잖아.”

 

정한은 과제를 다 끝냈는지 샤프를 필통 안에 돌려놓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는 굉장히 지루하다는 눈으로 지수가 한창 풀고 있는 스페인어 교재를 바라보았다.

 

“왜, 난리 났어? 잘생겼다고?”

“윤정한 진짜 개 뻔뻔해…….”

 

그래서 정한이 잘생기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잘생기긴 했다. 신입생 OT때부터 머리 길고 잘생긴 애로 소문이 자자했고 지금도 ‘경제학과 머리 긴 걔’로 통하고 있는데다, 학교 익명 커뮤니티에도 가끔 어느 과의 누구냐고 질문이 들어오는 걸 알고 있다. 아마 윤정한은 살면서 못생겨본 적이 없었고 못생겨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자기 입으로 나 잘생겼다 말하는 꼴을 보면 왠지 좀 얄미웠다.

 

“나는 뻔뻔한 게 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잘 된 거야.”

“아, 예…….”

“야. 솔직히 생각해봐. 잘생긴 애가 '내가 뭐가 잘생겼어, 나 못생겼어' 이런다? 그럼 그게 더 재수 없어.”

 

듣고 보니 너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다. 지수는 그냥 정한을 살짝 흘겨보고만 말았다.

 

“아무튼 왜. 내 사진 보고 누가 뭐래?”

“누가 너 소개시켜달라는데. 관심 있어?”

“아니.”

 

정한이 딱 잘랐다. 결혼할 사람 있다고 대충 둘러대란다. 그냥 애인이 있다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정도로 말하면 될 걸 뭐 굳이 결혼할 사람이 있다고 극단적인 거짓말을 치라는지……. 아무튼 싫다는데 들이댈 만큼 중매에 취미가 있는 건 아니라 알겠다 하고 말았다. 정한은 이제 더 할 일이 없는지 책상에 엎드린 뒤 검지로 지수의 책 모서리를 톡톡 쳤다. 한참을 그러더니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를 걷는 것처럼 움직여 책 위를 돌아다니게 하다 지수의 손등을 타고 올랐다. 지수가 쓰읍, 소리를 내며 쳐다보자 정한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하지 마.”

“심심해.”

“그럼 핸드폰으로 뭐라도 보든지, 다른 걸 하든지.”

“얼마나 더 해야 돼? 그냥 집에 가서 해.”

“자기 과제 다 했다고 이러기야?”

 

같이 과제하러 왔으면 조금 기다려주지, 자기 할 일 다 끝냈다고 바로 징징대는 건 어느 나라 상도덕인지 모르겠다. 정한은 엎드린 채 지수를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쟤는 정말로 집에 가고 싶어 조르는 게 아니라 그냥 지수를 훼방 놓으며 놀리고 싶을 뿐이다. 하여간. 지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정한을 노려보다 다시 과제에 집중했다.

 

“오늘 저녁 집에서 먹을 거야?”

 

저녁의 9할을 외식으로 해결하는 지수와 달리 정한은 9할을 집에서 해결했다. 하지만 가끔은 지수와 함께 먹고 들어갈 때도 있었기에, 지수는 높은 확률로 ‘아니, 집에서’라는 답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정한에게 저녁식사의 행방을 묻고는 했다. 정한은 눈을 감은 채로 아아니, 하고 말을 길게 늘여 답했다.

 

“금식이야. 내일 센터 가거든.”

“벌써 그렇게 됐나?”

“응. 그렇게 됐지.”

 

정한은 검진을 위해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그 외에 신약 실험을 받거나 연구 샘플 등을 제공하기 위해 요청이 있을 때마다 비정기적으로 한 번씩 센터에 방문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검사 결과와 샘플에 최대한 영향이 가지 않도록 방문 전 12시간은 금식을 했다. 가끔 작정하고 샘플을 뜯어낼 때면 방문 전 일주일은 약도 못 먹게 한다는 듯했다. 그렇게 세포며 피를 대량으로 내어주고 나면 정한은 3일쯤 비실거렸다. 그러고도 그가 얻는 건 단 2만원의 교통비뿐이었다.

 

“이번엔 뭐야? 정기검진? 아니면 샘플체취?”

“정기검진. 샘플은 아마 다음 달 즈음에 달라고 하지 않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말을 마친 정한은 길게 하품을 했다. 기분 탓인지 정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처음 그를 봤을 때에 비해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았다. 지수는 스페인어 교재 속 예시문제들을 풀며 얼마 전 일을 기억했다.

엄마가 갑자기 정한이 만나서 고기든 뭐든 몸에 좋은 걸 좀 사 먹이라며 꽤 큰돈을 줬다. 갑자기 뭐냐고 물으니 샘플이 대량으로 필요한 실험이 있어 피를 엄청 뽑았는데, 센터에서는 변변한 보상이 나오질 않는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넘기자니 뭐해서 결국 엄마가 사비를 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거기다 대고 ‘엄마가 왜 그걸 책임져?’ 할 만큼 정한에 대한 의리가 없지는 않은지라 순순히 돈을 받아다 정한을 불러냈다. 정한은 목에 제법 커다란 밴드를 붙인 채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목에 밴드는 어쩌다 붙였냐고 물으니 목에서 피를 뺐다는 답이 돌아왔다. 팔뚝 놔두고 왜 목에서 뽑아? 그렇게 묻자 정한은 자기도 모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유는 몰라도 하나는 알아.’

‘뭔데?’

‘목에서 피 빼면 뒤지게 아프다는 거.’

 

잠긴 목소리로 그런 말을 하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다 구워진 소고기를 전부 쓸어다 정한의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정한은 나만 입이냐며 개중 절반을 지수의 앞접시에 돌려놓았다. 음식 가지고 니가 먹으라니 내가 먹으라니 주고받는 것도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냥 먹었는데, 입안이 깔깔해서 무슨 맛인지도 잘 몰랐다. 맛을 느끼지 못하는 건 정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버석버석해진 얼굴로 더 버석버석하게 입에 든 것을 씹기만 했었다.

 

“아무 생각 안 들어?”

 

마지막 문제의 지문을 읽으며 정한에게 물었다. 감겨있던 정한의 눈꺼풀이 스르르 떠지더니, 갈색 눈동자가 위로 움직여 지수를 보았다.

 

“뭐가?”

“그렇게 몇 달에 한 번씩 피 뽑고 살 뜯어다 주는 거.”

“필요하다니까 주는 거지.”

 

그게 벌써 8년째건만 연구에는 아무 진척이 없는데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못된 화법인데다, 제 얼굴에 침 뱉기였다. 질병연구센터와 생판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냥 무능한 새끼들이라고 욕을 할 텐데 거기 엄마가 있다. 지수는 엄마가 1년병 치료법 개발을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니 이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피와 살을 내어주는 정한, 그리고 평생을 들여 파고들었는데도 이렇다 할 성과 하나 얻지 못한 엄마, 두 사람을 다 사랑하는 입장에서.

 

“그래도.”

 

그래도, 이건 한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샘플 채취 후 1주일이나 지났는데도 목에서 사라지지 않는 시퍼런 피멍을 봤을 때부터 든 의문이었다.

 

“왜 굳이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은 해볼 수도 있잖아.”

 

치료법이야 발견되든지 말든지, 어차피 나는 불사조이고 윤정한 네버 다이라며 나 몰라라 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다못해 보상이나 제대로 내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든가. 그런데 정한은 그냥 와서 피 좀 뽑아달라 하면 피를 뽑아줬고 세포가 필요하다 하면 세포를 주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비도 안 될 2만원만 딱 받은 채 말이다.

 

“해서 뭐 해.”

 

그런 거 따지고 들어봐야 지옥이 펼쳐질 뿐이야. 정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가 늘 말하잖아. 난 물 흐르는 것처럼 사는 게 좋다고.”

“그랬지.”

“뭐, 이러다보면 언젠간 성과가 있겠지. 피야 살아있는 한 계속 흐르니까 아까울 것도 없어.”

 

정한이 길게 하품을 함과 동시에 지수도 문제풀이를 끝마쳤다. 지수의 필통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정한이 엎드렸던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에구, 죽겠다. 앓는 소리를 낸 정한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지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 오늘도 밖에서 먹어? 같이 가줄까?”

“뭐 사서 집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그럼 나 너네 집에 갈래.”

 

집에 늦게 들어간다고 말해야지. 정한은 지수의 동의도 받지 않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화면 위로 분주히 손을 움직였다. 거기다 대고 안 된다고 하기도 뭐해 그냥 내버려두었다. 애당초 정한이 집까지 따라온다는 게 별로 싫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설 때의 싸늘함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윤정한이나마 뒤에 달고 들어가면 조금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사가려고 했어?”

“집 근처에서 샌드위치 사려고 했는데, 방금 맘 바꿨어.”

“왜?”

“그 집 샌드위치, 속이 너무 빵빵해서 먹을 때 좀 추하거든.”

 

지수의 말에 정한이 그게 뭔 상관이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속재료가 빵빵해서 줄줄 흐를 정도면 맛있고 좋은 거 아닌가. 허나 지수는 가방을 챙기며 지극히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놀릴 거잖아. 다 흘리고 먹는다고.”

“에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고두고.”

“안 그럴게.”

“싫어, 못 믿어.”

 

가방을 다 챙긴 지수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나서야 정한이 느릿느릿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지수는 그런 정한을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격도 급한 편이면서, 이상한 곳에서 저렇게 느긋하다.

 

“가방 들어줄까?”

 

뒤에서 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지수가 정한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제안에 정한은 눈썹을 찡그리며 왜? 하고 되물었다. 내가 뭐 어디 아파보이기라도 하나 생각했는데 지수는 그냥, 하고 실없는 대답을 했다. 정한은 보란 듯이 가방 끈을 어깨에 메고 지수를 보았다.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가방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제스처였다.

 

“싫음 말고.”

 

이러면 뭐라 말을 해줄 줄 알았는데 지수는 순순히 물러섰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가방을 들어주고 싶었던 건가. 정한은 앞서 나서는 지수를 잠시 바라보다 그 뒤를 쫓았다. 어깨로 지수의 등을 살짝 치며 그래서 저녁은 뭘 먹을 거냐 묻자 아무튼 샌드위치만큼은 절대로 안 먹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 사이에 뭐 그런 걸 따지냐고 했지만 지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라서 안 돼. 윤정한 너라서.”

“내가 뭐? 진짜 안 놀릴 거니까 먹고 싶은 거 먹어.”

“싫어.”

“홍지수 진짜 성격 이상해.”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지수의 목소리가 또 조금 새침해졌다.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빈정 상하게 할 것 같아 딱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집은 어디냐, 뭐 타고 가냐, 가는 데 얼마나 걸리냐……. 지수는 성실히 대답해주었고 덕분에 정한은 지수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집이 대충 얼만큼 넓고 어떤 느낌을 풍기는 집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지수를 보며 혼자 예측했던 대로, 아주 훌륭하고 예쁜 단독주택이었다. 수영장 딸린 것까지는 예상 못 했지만.

 


 

3.

 


「조슈지야」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핸드폰에 알림이 남아있었다. 조슈지라는 명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것은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는 명백했다. 조슈지는 지수의 진짜 이름, 그러니까 법적인 이름이 ‘조슈아 지수 홍’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 정한이 붙인 별명이었다. 뜬금없이 붙인 별명은 아니고 나름의 맥락과 뜻이 있는데 그리 알리고 싶지 않으니, 이건 비밀에 붙여두도록 하겠다.

정한이 밤늦은 시간에 메시지를 보내는 게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지수는 화면을 확인하며 ‘갑자기?’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정한에게 약간 서운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왜냐 하니, 바로 어제인 12월 30일이 지수의 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냉정한 윤정한이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놓고 하루 지난 12월 31일 오늘에서야 아무렇지도 않게 조슈지를 찾으며 말을 붙이고 있는 거다. 올해 안에 생일축하 받을 수 있겠나 했는데 올해 안에는 받겠네. 지수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정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왜」

 

보내놓고 스스로도 삐졌음이 드러나는 한 글자라 생각했다. 조금 더 쿨하게 보낼 걸 그랬다. 「정한아 무슨 일이야?^^」 정도면 나았을까, 아니면 보다 구질구질했을까.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아 정한의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답장이 늦은지라 그 사이에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는데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칼같이 답장이 돌아왔다.

 

「생축이얌」

「일찍도 축하하시네 내 생일 어제였어」

「나도 알아ㅎㅎ」

 

뭐 하자는 거지? 어제가 생일인 걸 알면서 일부러 모르쇠로 넘어가고 오늘에서야, 그것도 밤 11시를 넘긴 지금에서야 축하하겠다는 건가? 정한에게 다소 엉뚱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조금 황당했다. 지수는 저도 모르게 허,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당연히 기쁘고 재밌어서 웃는 건 아니었다. 지수는 약간 삐딱했던 자세를 바로 고치고 두 손으로 핸드폰을 잡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애인이랑 싸우는 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임전태세였다.

 

「뭐야? 대체.」

「오 조슈지 온점 찍는 거 봐」

「아니 정한아 나 진짜 좀 서운함 이전에 황당한데」

「그렇겠지?」

「아니 진짜 정말로」

 

엄마가 만약 이 대화를 본다면 우리 지수 한국인 다 됐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인은 아니, 진짜, 정말이 없으면 대화를 못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런데 일부러가 아니라 정말 기가 막혀서 저 말밖에 안 나왔다.

물론 우리 사이가 뭐라고, 쿨하게 넘길 수도 있었다. 어릴 적부터 각별하게 지낸 소꿉친구도 아니고,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그냥 알고 지낸지 대충 8개월 정도 된 대학 동기 아닌가. 근데 어제가 생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오늘 생일을 축하한다는 그 발상이 조금 서운했다. 홍지수가 어제 0시 0분에 시작해 23시 59분 59초까지 윤정한의 연락을 은근 기다렸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너 방 창문 열어봐」

「싫어 추워」

「열라면 그냥 쫌 열어」

「윤정한 진짜 짜증난다」

「알겠으니까 열어」

「창문 여니까 시원하지? 열받지마ㅎ 이러면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와 진짜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빨리 열어봐 좀. 정한의 재촉에 지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대로 시선을 살짝 내리자 집 앞 가로등 밑에 정한이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늦은 밤이라 소리칠 수 없어 입모양으로 물으니 정한이 타고 온 스쿠터에 실어두었던 쇼핑백에서 무언가를 꺼내 펼쳐 흔들었다. 제법 따듯해 보이는 코트였다.

 

「선물 사왔지롱」

 

코트를 대충 스쿠터에 걸쳐놓은 정한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까 전까지 짜증이란 짜증은 다 낸 주제에 갑자기 웃으면 없어 보일 것 같아, 지수는 표정관리를 했다. 창틀에 기대서 가만히 정한을 바라보자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내려와」

 

이 시점에서 더는 밀당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지수는 곧장 창문을 닫았다. 양말을 신고 외투를 꺼내려는데 또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코트는 입지 말고」

 

선물로 사온 거 바로 입어보라는 건가? 어쨌든 입지 말고 나오라니 시키는 대로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담벼락 대신 친 울타리 너머로, 양팔을 벌리고 손을 흔드는 정한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조슈지 안녕.”

“뭐야, 대체 이 밤에.”

“서프라이즈.”

“어이가 없다, 진짜.”

 

그냥 어제 곱게 연락하고 곱게 주면 안 됐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지수가 팔짱을 꼈다. 지수의 미간 사이 주름을 본 정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살짝 벌렸다.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래도 축하하러 와줬는데 좀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무게 잡고 있네. 아까 전에 너 입꼬리 올라가려던 거 다 봤어.”

 

허나 상대는 윤정한이었다. 결국 김이 팍 새서 푸스스 웃고 말았다. 정한 역시 히히 웃고는 나오라며 지수를 향해 손짓했다.

 

“나 진짜 서운해서 너한테 장문 카톡 보낼 뻔 했어. 알아?”

“아, 그랬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깝다.”

“막 핸드폰 붙잡고, '정한아 내 생일인데 너 설마 잊어버렸니 우리가 알고 지낸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나는 네 생일날 정각 땡 하자마자 축하메시지도 보내고 기프티콘도 주고 선물도 따로 주고 밥도 샀는데 좀 속상하다' 이러려고 그랬어.”

“에이, 설마.”

 

그냥 혼자 속상해하고 말 거 다 알아. 뻥이 너무 심하다며 정한이 지수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건드리기만 한 거라 별로 아프지는 않았는데 지수는 일부러 어깨를 감싸며 과장되게 반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한은 스쿠터에 걸쳐놓았던 코트를 지수에게 던졌다.

 

“이거나 입어봐.”

“이건 또 언제 샀대?”

“사기야 며칠 전에 샀지. 준 게 오늘일 뿐.”

“뭐야. 준비를 했으면 제때 축하를 해.”

 

지수는 중얼대면서도 냉큼 코트를 받아 입었다. 연한 미색의 더플코트였는데 돈을 제법 썼는지 대충 입어보기에도 제법 태가 났다. 스쿠터에 기대 앉아 지수를 바라보던 정한이 오, 하며 박수를 짝짝 쳤다.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 사긴 했는데 생각보다 더 어울렸다.

 

“괜찮아?”

“어. 너 막 한 학기 등록금 800만원쯤 하는 대박 비싼 고등학교 다닐 것 같아.”

“애 같다는 거야, 귀티난다는 거야?”

“귀티 나고 어려보인다고.”

“우리 나이에 어려보일 필요가 있어?”

“에이, 그래도 한 시간 있으면 우리 한 살 더 먹어.”

 

코리안 스타일이지만. 정한이 덧붙였다.

 

“지수 너, 어제 나이 먹자마자 오늘 또 먹네.”

“진짜. 어제는 만 나이, 오늘은 세는 나이로 두 번이다.”

“배부르니까 안 먹겠다고 기도해봐.”

“됐어.”

“왜?”

“안 먹으면, 너 나 놀릴 거잖아.”

 

형한테 잘하라면서. 지수의 말에 정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려고 꺼낸 얘긴데, 안 넘어가네. 얄미운 소리를 한 정한은 웃느라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처음 그를 봤을 때는 금발이었는데 얼마 전에 염색을 새로 해서 붉은 빛이 도는 갈색 머리가 되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수는 선물 받은 코트의 옷소매를 만지작거렸고 정한은 스쿠터에 기대앉은 채 잠시 땅을 보았다. 이대로 그냥 헤어지기는 아쉬운데 할 말은 없고. 지수는 모르는 체 시간을 끌다 정한을 보았다. 그 순간 정한이 숙였던 고개를 들며 눈이 마주쳤다.

 

“지수야.”

“응.”

“지금 추워?”

“아니.”

“종소리 들으러 갈래?”

“종? 제야의 종 얘기하는 거야?”

“지금 타이밍에 종이면 그거밖에 더 있어?”

“어떻게?”

 

제야의 종이 울리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종각까지 시간 내에 도착할 수도 없었거니와 사람이 너무 많아 종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을 터였다. 사실 정한이 타종행사에 초대를 받았다든지 하는 게 아닌 한은 어려울 텐데……. 혹시 TV로 타종행사 중계를 보자는 뜻인가 싶어 지수는 엄지손가락으로 집 현관을 가리키며 우리 집에서? 라고 물었다. 정한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아니, 라고 약간 성난 목소리를 냈다.

 

“TV로 볼 거 같으면 내가 들으러 가자고 하겠니.”

“그러니까, 어떻게?”

“방법이 있지. 이리 타봐.”

 

정한이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 헬멧을 꺼낸 뒤 지수에게 던졌다. 스쿠터를 타고 간대도 시간 내에 종각까지는 못 갈 것 같은데. 의아했지만 정한만이 아는 무슨 지름길 같은 게 있겠지 싶어 순순히 올라탔다. 정한의 허리를 붙잡기가 무섭게 엔진 소리가 조용한 주택가에 울리며 스쿠터가 앞으로 나아갔다. 제법 속도가 붙은 탓에 밤공기가 한층 차게 느껴졌다.

어딘가 대로변으로 나가지 않을까 예상했던 스쿠터는 골목골목을 달렸고, 중간에 제법 가파른 오르막도 올랐다. 스쿠터치고는 힘이 좋은 모델이었지만 장정 둘을 태우고 오르막을 오르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지수는 스쿠터에서 내려서 정한과 스쿠터의 뒤를 따라 오르막을 올랐다. 그때 시간이 11시 47분이었다. 타종까지 이제 13분 정도 남았는데 아무래도 이 주변은 종각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차라리 지수의 집이 거리상으로는 종각에 더 가까웠을 터였다.

 

“정한아, 대체 어딜 가려고?”

 

오르막을 다 올라온 지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스쿠터에 올라탔다. 정한은 있어 봐, 하고 짧게 답한 뒤 다시 스쿠터를 몰았다. 이제는 주변에 건물도 얼마 안 남아있었다. 설마 윤정한이 나를 어디 내다 파는 게 아닐까 의심해도 될 만큼 어둡기까지 했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넓은 주차장이었는데, 시간이 시간이고 날이 날인만큼 텅 비어있었다. 정한은 자판기 근처에 대충 스쿠터를 세워놓고 시간이 없다며 지수를 재촉했다. 결국 지수는 헬멧도 벗지 못하고 정한을 따라 달렸다. 껑충껑충 잘도 뛰는 정한의 뒤를 쫓다 보니 무슨 근린공원이라는 간판이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자더니 대체 상관도 없는 근린공원에는 왜 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수는 그저 달렸다.

10분 정도를 내리 달리자 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달할 수 있었다. 지수가 정상에 도착했을 즈음에 정한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수는 숨을 몰아쉬며 좀비처럼 정한을 향해 걸어갔다. 그 옆에 털썩 주저앉자 정한이 손부채질을 하며 지수를 보았다.

 

“우리 생각보다 체력이 좋나봐. 어떻게 안 쓰러지고 뛰어왔네.”

“지금, 체력에, 감탄할, 때가, 아니라……. 종은?”

“얼마나 남았지? 59분이니까 이제 1분 남았다.”

 

시간을 확인한 정한은 당장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눈을 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야 하는 건가 싶어 지수도 눈을 감았다. 빽빽하게 심긴 나무들 사이로 겨울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싸하게 들려왔다. 올해의 마지막 바람이다. 이대로 계속 분다면 아마 새해 첫 바람도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을까, 제법 선명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뎅- 하고 길게 울리는 묵직한 소리는 메아리를 끌고 다니며 밤의 공원을 빙빙 돌았다.

 

“들었지?”

 

정한과 지수는 동시에 눈을 뜨고 서로를 보았다. 아직 소리의 여운이 남아서 공원에 울리고 있었다. 여기서 제야의 종 소리가 들린다고?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한을 바라보자 정한이 특유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거 진짜 제야의 종 소리야?”

“몰라.”

“엥?”

“제야의 종은 아니지 않을까? 거리상.”

 

그 종이 아무리 크다 해도 여기까지 소리가 울리지는 않을 거 아냐. 정한이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답했다. 지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럼 우린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달렸으며, 아까 들은 종소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이건 뭔데?”

“몰라. 근처에 무슨 절이라도 있는 거 아냐?”

“…….”

“야, 종이 다 똑같은 종이지 제야의 종이라고 뭐가 특별할 것 같아? 해 넘어가는 순간에 들으면 그게 다 제야의 종 소리지.”

 

정한이 궤변을 늘어놓았다. 또 속았구나. 지수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정한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쓰고 있던 헬멧을 벗었다. 머리에 찬 열이 단박에 날아가며 약간 한기가 돌았다.

 

“나 헬멧 쓰고 새해 맞이했네.”

“새해에 머리 다칠 일은 없겠다.”

“야, 보조 헬멧이라 해도 그렇지, 좀 이쁜 걸로 가지고 다녀. 내가 이렇게 새해를 맞이해야겠어?”

 

사실 디자인 자체는 예쁘고 아니고 할 것도 없이 지극히 무난한 디자인이었다. 투덜대자 정한이 머리 깨지지 말라고 줬더니 디자인 따지고 앉아있다며 함께 투덜댔다.

그대로 잠시 앉아 바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보통 이런 장면에서는 아주 멋진 야경이 펼쳐지기 마련이지만 그렇게까지 고지대는 아닌데다 나무가 워낙 많은 탓에 주택가의 불빛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좋게 말해 고즈넉하고 솔직히 말하면 을씨년스럽다. 거의 10분 가까이 앉아있고서야 지수는 자신이 새 코트를 입고 있고, 그 코트의 색이 옅은 미색임을 떠올렸다. 지금쯤 깔고 앉은 엉덩이 부분이 지저분해졌을 거다.

 

‘뭐, 됐어…….’

 

윤정한이 준 거, 윤정한이 데려온 곳에서 더럽혔으니 나름 의미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옆을 보자 뛰어오느라 달아올랐던 몸이 좀 식었는지 정한이 모아 쥐고 있던 머리카락을 손에서 놓았다. 그와 동시에 길고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깃발처럼 부드럽게 나부꼈다.

 

“생일 말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정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는 다른 사람들도 너 많이 축하해줬을 거 아냐.”

“뭐……. 그랬지.”

“그 사이에 껴서 같이 축하하면 뭔가 너무 평범할 것 같았어.”

“…….”

“근데 오늘 축하해주면 나만 축하해줄 거 아냐.”

 

그래서 오늘 축하해주러 왔어. 정한이 히힛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까 전 정한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처럼 헛웃음이 나왔지만, 지수의 입꼬리는 양쪽이 다 활짝 올라가 있었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정한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 다 우르르 축하해주는 날에 꼽사리 껴서 같이 축하해주는 게 뭐 그리 중하다고.

 

“나름 괜찮은 날짜 선정이네. 만으로 나이 먹은 날과 세는 나이로 나이 먹은 날의 어느 중간.”

“그치? 그러니까 삐지지 마.”

 

정한이 몸을 기울여 어깨로 지수를 툭 쳤다. 지수는 모르는 체를 했다.

 

“삐진 적 없어.”

“아깐 삐졌다며?”

“그건 그냥 한 말이고. 농담. 저스트 키딩.”

“어우, 발음 굴리는 거 봐. 재수 없어.”

“굴리는 게 아니라 원래 이렇거든?”

“누가 너 조슈아 지수 홍인거 모른대?”

 

잠시 주고받으며 투닥댔다. 문득 우리는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대화를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어색하니 서로서로 꽤 조심을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처음부터 이랬던가? 윤정한 성격상 처음부터 장난을 걸었을 것 같기도 하고, 홍지수 성격상 초면에 그걸 받으며 같이 놀았을 것 같기도 하다.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정한아, 큰일 났다. 나 벌써 너랑 처음 만났을 때 일이 생각이 잘 안 나.”

“잊어버려. 그거 기억해서 뭐하려고.”

 

청년치매냐고 놀림 받을 각오로 말한 건데 정한이 뜻밖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뭘 그런 걸 기억하려 드냐는 반응에 서운해지려는데 정한이 고개를 돌려 머나먼 풍경을 보았다.

 

“살 날 많잖아.”

“…….”

“다른 걸로 채우면 되지.”

“…그러네.”

 

모르는 체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네가 할 소리 아니지 않니’ 하는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미웠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 새해 복 많이 받으란 말 안 했다.”

“그러게. 주변 사람들한테 카톡도 돌려야 하는데.”

“해 바뀌고 나이 먹는 거, 진짜 실감 안 나지 않아?”

 

되게 의미 있게들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별게 없어. 뭐 폭죽이라도 팡 하고 터지면 좀 실감이 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정한은 손으로 폭죽이 터지는 모습을 흉내 냈다.

 

“나, 기준이 되는 날짜가 2월 6일이거든.”

“응?”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지수가 눈을 크게 떴다. 정한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잠시 침묵하다 하늘을 보았다.

 

“1년병 발병일이 18년……. 아, 이제 19년 전이구나. 아무튼 2월 6일이었어. 그래서 기준이 그 날이야.”

“…….”

“내가 또 안 죽고 살아남았구나 하게 되는 게.”

 

목숨의 기준선인 거지. 정한이 허공에 선을 하나 쫙 그었다. 지수는 세워서 모은 무릎 위로 턱을 올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실감을 잘 못하면서도, 해가 바뀌었다 생각하면 좀 좋더라고.”

“뭐가?”

“내가 어제 죽었다면 스무 살에 죽는 건데, 오늘 죽으면 스물한 살에 죽는 거잖아.”

 

시간상으로는 얼마 차이 안 나는데 뭔가 좀 더 오래 산 듯한 기분을 낼 수 있다 이거지. 정한이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지수는 그게 기쁠 일인가 싶었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그런 셈 치기로 했다. 이제 막 해가 바뀌었을 뿐이라, 스물하나보다는 스물에 가깝다지만……. 어쨌든 스물하나는 스물하나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

 

이런 문제에 별로 태클을 걸어가며 깐깐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지혜로운 지적이 아니라 무식하기 짝이 없는 무례다.

 

“지수 너 이혜진이 한 고백 거절했다며?”

“어?”

 

정한이 딴소리를 했다. 화제가 돌아간 건 좋은데 너무 갑작스러웠다.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안 된다고 그랬다고, 소문 쫙 났어.”

“아니, 혜진이 걔는 대체 왜 이런 걸 떠벌리고 다니는 거야?”

“왜긴 왜야. 위로받고 싶으니까 말했겠지.”

 

정한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며 눈썹을 찡그렸다. 지수는 왠지 자신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사이코패스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체 얼마나 여기저기 위로를 받고 다녔으면 이혜진과 별 친분도 없는 윤정한에게까지 그 이야기가 들어갔느냐 하는 거지……. 왜인지 민망함이 몰려와 마른세수를 했다. 공연히 얼굴이 홧홧했다.

 

“이혜진 인기 많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긴 하지.”

 

지수에게 고백을 한 이혜진이라는 아이는 얼굴이 예쁜데다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두루두루 인기가 많은 아이였다. 학기 초에는 제법 친하게 지냈었는데, 1학기 중간부터 정한과 붙어 다니느라 자연스럽게 멀어졌었다. 하여 고백을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뭐가 있었어야 고백을 주고받고 하지 않겠는가. 지수가 난감해하자 이혜진은 OT때부터 너를 좋아했노라 고백했다. 지수는 그게 더 당황스러웠다. OT때면 진짜 얼굴하고 이름 빼면 아무 것도 모르는 때인데 어떻게 그랬나 싶어서.

 

“나만 해도 자각하는 데 꽤 오래 걸렸었는데…….”

“뭐를?”

“어?”

“뭘 자각해?”

“아.”

 

속으로 생각한다는 걸 너무 크게 말해버렸다. 당황에 지수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으나 정한이 집요하게 시선을 따라 맞추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시선의 추격전을 거치고 나자 결국 지수가 손을 뻗어 정한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원체 솥뚜껑만한 손인지라 정한의 얼굴이 완벽하게 덮였다.

 

“…야.”

“미안, 미안해.”

 

그러면서도 지수는 정한의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정한이 손을 쳐낸다면 순순히 치워줄 용의 정도는 있었다. 다만 정한이 치워낼 생각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너 지금 얼굴 빨개졌지.”

“아닌데?”

“그런 것 같은데?”

“앞도 안 보이면서 어떻게 알아?”

“마음의 눈으로 봤어.”

“사기 치지 마.”

“아냐, 맞는 거 같아. 솔직히 너 지금 좀 화끈거리지.”

“어, 맞아.”

 

순순히 인정한 지수가 손을 뗐다. 정한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정한은 의외로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무덤덤했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면 내가 부끄러울 게 없는데? 누구 좋아한다고는 말 안 했잖아, 나.”

“했잖아.”

“언제?”

“방금 행동으로.”

 

직접적인 고백만 고백이니? 정한이 지수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여기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윤정한이구나. 지수는 이마를 짚었다. 나름 철저하게 숨기고 산다고 숨기고 살았는데 이런 식으로 허접하게 드러낼 줄은 몰랐다. 기왕 드러낼 거라면 좀 치밀하게, 계획 하에 있어보이게 드러내고 싶었다.

 

“근데 나 대충 눈치 채고 있었어. 홍지수 나한테 관심 있나, 하고.”

“어?”

“물론……. 상황이 상황이라 생각만 하고 찔러보지는 않았는데.”

 

놀라움과 설렘도 잠시, 갑자기 슬퍼졌다. ‘상황’이라는 게 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거 관련해서 지수 너도 나도 할 말이 많겠지만, 그냥 여기까지 하자.”

 

정한이 쓰게 웃었다. 지수도 그러자며 쓰게 웃었다. 지금 여기서 언제부터 어떻게, 무엇을 계기로 정한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걸 어쩌다 자각했는지, 정한은 어쩌다 지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는지 떠들어봐야 별로 좋을 게 없다.

 

“새해 목표나 얘기해보자, 우리.”

 

지수가 화제를 돌렸다. 급조한 화제라 좀 답지 않은 이야기가 나왔다. 지수도, 정한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인물들이었지만 목표니 미래니 꿈이니 하는 진취적인 이야기를 양식으로 살지는 않았다. 아직 졸업하고 뭐 해먹고 살 거냔 얘기조차 해본 적 없는데 새해 목표라니.

 

“홍지수 너부터 말해봐.”

“음……. 올해는 일본어 배워볼까.”

“진짜? 그럼 나랑 시간표 맞춰서 같이 들을래?”

“그래도 되나? 근데 나 기초과목부터 들어야 해.”

“나 지난번에 들은 거 초급일본어야. 기초일본어 아니라.”

 

모르는 척 들어가서 꿀 빨아야지. 정한이 생각만 해도 좋아 죽겠다는 듯 꺄르륵 웃었다.

 

“정한이 너는?”

“으음, 글쎄. 난 스페인어는 별로 안 끌리는데.”

 

정한이 고민에 빠졌다. 오리마냥 입술을 쭉 내밀고 한참이나 생각하던 그는 이내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딱 쳤다.

 

“올해는 좀 용기 있고 과감하게 살아볼까?”

“지금까지 그렇게 살지 않았어?”

 

가끔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굴기에 ‘아, 저게 1년병 믿고 저렇게 설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딴에는 소심하고 조심스레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용기 있고 과감하게 살면 어떤 삶을 사는 거지? 약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소름이 돋아 팔을 문지르니 정한이 많이 춥냐며 웬일로 걱정을 했다.

 

“그만 가자. 나 이제 슬슬 뼈가 시려.”

“그러자. 정초부터 감기 들겠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달려서 왔던 길을 천천히 내려가고 있으니 뒤에서 쫓아오던 정한이 지수를 보며 마구 웃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코트가 딱 엉덩이 부분만 더러워졌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지. 좀 더 툭툭 털어보다 못해 정한이 거의 때리듯이 털어주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이미 생긴 얼룩은 생긴 얼룩이었다.

그 후로 정한은 가족여행을 가고, 지수도 친척들을 만나러 미국에 다녀온 탓에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원래부터 메시지를 자주 주고받지도 않았던지라 대화창은 썰렁하게 남았다. 정한이 가족여행지에서 먹은 음식을 자랑하느라 한 번, 지수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무슨 기념품을 사다줄까 물어보느라 한 번. 그게 전부였다. 그래도 별 생각은 없었다. 이러다 만나면 다시 어제도 보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잘 붙어서 다닐 자신이 있었으니까.

미국에서 바뀐 시차 때문에 한동안 주침야활 생활을 하다 간신히 생체시계가 맞아들은, 두 번째 날이었다. 혹시라도 깨는 순간 또 바뀐 낮밤의 세계로 굴러 들어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는데 누군가가 자꾸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지수는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어딘가의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1등실 객실에는 지수 혼자밖에 없었고 바깥을 오가는 승객들은 전부 낯선 이방인이었다. 즉 지수야, 하고 부를 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꾸 소리가 들렸다. 지수야. 지수야아, 홍지수. 지수야, 조슈아 지수 홍, 조슈지야, 지수야…….

 

“지수야!”

 

부르는 소리가 순간 명확해져 거의 튀어 오르듯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리번대고 있으니, 바깥에서 또 다시 지수야- 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장 침대에서 내려와 커튼을 치고 창문을 열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자 집 앞 도로변, 가로등 아래 정한이 서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정한은 한 손으로는 목을 감싸고 한 손은 지수를 향해 흔들었다. 지르지도 못하는 소리를 계속 지른 탓에 목이 아픈 모양이었다.

뭐야? 입모양으로 물어보자 정한이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침대 옆 협탁에 두었던 핸드폰을 가지고 창가에 다시 서니 진동이 울리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뭐긴 뭐야 미라클 윤 등장이시지」

「니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온 게 미라클이 맞긴 한데」

「그거보다 더한 미라클이 있을 텐데」

 

뭐가?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창밖의 정한을 보자 정한이 턱짓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핸드폰이 뭐 어쨌다고. 지수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평범한 카카오톡 화면이다. 위쪽에는 얼마 전 기념품 때문에 나눈 대화가 있고, 날짜가 지나서 날짜선이 나타난 다음 방금 주고받은 메시지가 있다. 그러니까.

 

‘오늘이.’

 

2월 7일 오전 5시 12분.

2월 7일…….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수가 돌연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쩍 벌렸다. 2월 7일이 되었는데 정한이 여기에 와서 자신이 불렀다. 정한을 바라보자 그는 멋진 척을 하며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만들었다.

 

「내가 올해도 닉값을 했다 이거 아니니」

「와 지옥에서 돌아온 윤정한 어디 안 간다 진짜」

「이제 홍지수 1년 동안 나한테 놀림당하는 일만 남았음」

 

두 사람은 잠시 핸드폰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별로 웃길 것도 없는데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신나게 웃은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시 핸드폰으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 뜨니까 안 죽고 살아있길래 생존신고 하러 왔어」

「오 쪼끔 감동이다 진짜 쪼금 개미 눈물만큼」

「밖에서 진짜 5분을 소리 질렀는데 홍지수 일어나지도 않고」

「전화를 해 왜 아침부터 동네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 너 민폐야 그거」

 

손으로는 타박을 했지만 입으로는 웃었다. 매일같이 정한이 1년병 환자이고, 언제 그 목숨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걸 기억하며 살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정한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피닉스, 윤사조, 미라클 윤, 지옥에서 돌아온 윤정한, 재림예수 윤정한……. 아무튼 온갖 기적이 붙은 별명을 가진 애 아니던가. 그래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내일도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나리라 믿고 있었다.

 

‘그치만…….’

 

정한이 예정된 1년을 무사히 넘기고 또 새로이 1년을 얻었다는 사실이, 기쁘고 감격스럽다. 왜인지 코끝이 찡해서 창밖의 정한을 바라보았다. 정한의 붉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나부꼈다. 정한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잡아 귀 뒤로 쓸어 넘기고 손나팔을 만들었다.

 

“지수야. 핸드폰 봐봐.”

 

그 사이 언제 메시지를 보냈는지 새로운 말풍선이 떠올라있었다.

 

「내가 또 안 죽고 살았으니까 우리 오늘부터 썸타는 걸로」

「그러다가?」

「내가 1년 더 살면 그땐 사귀는 거고, 그 후로 5년 더 살면 그땐 미국 가서 결혼하는 거고」

「그래도 돼?」

「당연하지 왜 홍지수 너 자신 없어?」

「너는 있어?」

「나는 있어」

 

지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정한을 보았다. 정한은 지수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인 후 핸드폰 액정 위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이내 지수의 핸드폰 화면 위로 새 메시지가 떠올랐다.

 

「윤정한 네버 다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