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8년 02월 공산당선언 : 카를 마르크스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Karl Marx
(칼 마르크스)
한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
유럽의 모든 낡은 세력이 이 유령을 잡으려고 성스러운 동맹을 맺고
신성한 몰이사냥에 나섰다. 교황과 차르, 메테르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 그리고 너.
정권을 잡은 정당한테 "공산주의다!"라고 욕먹는 모임,
정권을 못잡은 정당한테 "공산주의냐?"라며 욕먹는 모임,
이 모임이 뭐냐고?
이 사실에서 두 결론이 나온다.
공산주의는 한 세력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공산주의자가 자기 견해와 목적, 경향과 의도를 전 세상에 알려, 귀신 같은 유령 이야기에 당당한 선언으로 맞서야 할 때다.
이 결론으로 여러 국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런던에 모여 다음 선언문을 썼다. 곧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플라망어와 덴마크어로 나온다.
〔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지금까지 인간 사회의 역사는 모두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견습 기능공, 언제나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이는 몸과 마음을 마주하여, 은밀하게 싸우거나 대놓고 투쟁했다. 그러면 억압하는 쪽이 사회를 바꾸든지, 억압받는 쪽이 세계를 부수든지, 이 싸움이 끝났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제 어디서나 여러 신분과 계급으로 세계가 나뉘어 있다. 고대 로마는 세습귀족-무사귀족-평민-노예가 있고. 중세는 봉건 영주-기사-길드장인-기능직인-농노가 있다. 그 계급 안에서조차 계층이 나뉘어 있다.
낡은 봉건 세계를 지나서 새로운 사회가 열렸지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이의 계급 조건과 계층 형태는 낡은 것을 따라 했다.
지금 우리 세상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단순하게 두 계급으로 점점 나뉘고 있다.
중세에 농노에서 성 밖 시민이 나왔고, 성 밖 시민에서 부르주아지까지 같은 속성이다.
아메리카 발견과 아프리카 회항이 부르주아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었다. 동인도와 중국 시장, 아메리카를 식민 지배하며, 교환 수단과 교역 상품은 늘었다. 이로써 상업과 항해, 온갖 산업에서 부르주아지 영역이 크게 늘어났고, 기존 세계를 부술 혁명적 의식도 같이 자랐다.
지금까지 봉건적 또는 길드 조합적 경영 방식은, 새로운 시장에서 알게 된 수요를 총족 못하게 막는, 낡은 제도의 방해였으므로, 분업적 수공업인 매뉴팩처가 공급자 자리에 들어섰다. 기존에 장인과 직인은 담합하던 자리에서 밀려났고, 싸움이 끝났다.
그러나 공급과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매뉴팩처도 감당 못하자, 한 발명품이 산업 생산을 크게 바꾼다. 산업 중간층의 자리 위에 더 큰 산업의 백만장자, 부르주아지가 증기 기계 장치를 설치하고 공급자 자리를 틀었다.
이 큰 산업은 아메리카 대륙 발견에서 세계 시장으로 발을 넓히는 만큼 상업과 항해와 육상 교통을 이용했고, 사고파는 계약서와 배와 철도를 이용하는 만큼 부르주아지의 자본이 늘어났고, 자본이 늘어나는 만큼 중세부터 이어진 모든 낡은 세계의 방해물을 부숴버렸다.
결국 부르주아란, 역사 발전 과정의 한 산물이고, 생산과 교환 방식이 변혁되며 나온 투쟁계급임을 우리는 알 게 된다.
이 계급 속성은 계급투쟁 역사의 발전 단계마다 정치적 진보도 따라왔다. 이들은 봉건 영주의 지배에서 억압 받고 있었다. 어떤 곳에선 무장한 시민군으로 겨우 독립했고, 다른 곳에선 납세의무만 있는 소외된 제3신분이었다. 군주제 국가에서 귀족을 보조하며 평형추 역할을 했을 뿐이고, 귀족제 국가에서 군주를 보조하며 명분적 토대 역할을 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대의민주제 국가에서 큰 산업과 세계 시장을 다루는 엄청난 논리로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한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본질을 부르주아지의 계획된 공동 업무나 맡아 보는 위원회로 바꾸었다.
억압받는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역사에서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배권을 쟁취한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인 방해물을 모두 부쉈다. 신성한 주인과 묶인 천부적인 봉건의 끈을 가차 없이 끊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간에 이득과 손해라는 냉정한 '계산 관계'외에 다른 지배의 끈을 남기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성직자의 전교, 군인의 명예, 예술가의 광기를 <나한테 이득이 되는지>라는 얼음 물속에 빠뜨리고 본다. 청춘의 몸과 노인의 마음을 돈으로 사고 팔며 존엄한 양심보다 상업적 자유를 내세운다. 다시 말해, 종교적이고 정치적 환상으로 은밀하게 착취하던 것을 대놓고 착취함으로 바꾸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지탱하던 세계관의 후광을 꺼버린다. 의사, 법률가, 성직자, 시인, 학자를 성스럽게 보던 낡은 관점에서 돈을 주고 부리는 임금 노동자로 관점을 바꾸었다. 가족 관계도 상속 재산을 계산하는 관계로 민낯을 드러내 보였다. 억압받는 이의 계급 투쟁을 가로막던, 중세풍 보수반동주의자들의 잔인한 칼과 화살이, 실은 그들의 게으르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보장받는, 밥그릇을 지키기 위함이었음을 폭로했다. 이집트 피라미드, 로마의 송수로, 고딕 양식 성당 건축을 기적이라고 설명한, 낡은 세대와 다르게, 부르주아지는 인간의 활동으로 세운 경이로운 작품이라고, 처음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민족대이동이나 십자군원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토를 시장으로 개척했다. 그래서 부르주아 계급은 낡은 시대의 사회관계를 계속 변혁해야, 존재의 정당성을 갖는다. 자기가 그랬으니까.
과거부터 사회 관계 속 세력들은 낡은 생산 방식을 계속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첫째 생존 조건이었다. 그래서 생산 수단을 둘러싼 사회 계급의 끊임없는 변혁과, 세계관의 뒤흔들림에서 오는 불안함과 불안정은, 지금이 부르주아 시대임을 가리킨다. 부르주아는 모든 오래된 관계가 낳은 관념과 견해의 못을 뽑아버리고, 자기가 새로 박은 못은 제대로 자리 잡기도 전에, 녹슬어 버려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신분제처럼 멈춰있는 것은 증발시켜버리고 성스럽다는 것을 깔보고 사람들에게 너의 사회적 위치와 상호 관계를 냉철하게 보라며 부르주아 사상을 강요한다.
생산물 유통을 계속 확대해가는 욕망은 부르주아지를 지구 끝까지 데려왔다. 이들은 지역 곳곳에 둥지를 틀고, 도처에 주둔지를 세우며, 조직망을 맺어나가야 산다. 모든 국가에서 생산과 착취를 하고 모든 국가에 소비시장을 구축한다. 보수반동 세대에게 유감이지만, 한 민족 국가의 구닥다리 산업은 허물어졌고 지금도 날마다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새로운 산업은 먼 땅에서 가져온 원료를 가공하고 국내외 모든 대륙에서 소비된다. 국내 생산물로 만족하던 문명국 사람들은 새로운 산업이 공급한 상품을 보고 생긴, 새로운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먼 땅의 다른 기후에서 생산물을 들여온다. 지방에서 고립되어 자족하던 옛 자리는 털어내고, 전면적인 교류와 상호 의존이 자리한다. 물질적인 생산처럼 정신적인 생산도 마찬가지다. 부르주아가 들어선 국가마다 사회적 환경이 비슷해져, 각 나라의 특수성은 점점 희미해지니 한 지역의 정신적 산물은 다른 지역도 쉽게 이해되어 세계 문학상을 받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더 나은 생산도구와 더 나은 통신로를 이용해서 낡은 미개 국가에 더 나은 문명의 맛을 보여 준다. 만리장성을 저렴한 상품으로 뛰어넘고, 텃세를 질 좋은 상품으로 굴복시킨다. 새로운 문명이 도래했으니, 망하고 싶지 않으면 우리 부르주아 생산 양식을 받아들이고, 부르주아 계급이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창조한 자기 모습대로 세계를 구성해 간다.
농촌 인구를 도시로 오게 하여 농촌이 도시에 종속되듯이, 미개국가에서 문명국가로, 우매한 백치에서 부르주아 민족으로, 동양에서 서양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생산수단과 노동인구가 흩어지는 걸 꺼려서 한곳으로 모았고, 손에 쥔 망치와 제철소 간판의 정치적 성격을 통일했다. 독립된 지방들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법률, 행정, 관세로 느슨한 동맹 관계였다. 하지만, 부르주아 계급 아래에서 하나의 국가, 세계 정부, 법전, 계급 간 이해관계, 관세의 정치적 성격을 하나로 합쳤다.
부르주아지는 과거 세대를 모두 합한 것보다 더 큰 생산력을 이용하게 되었다. 엔진, 기계 장치, 공업과 농업에서 화학 응용, 증기선 항해, 철도, 전신, 전 지구적 농지 개간, 하천 운하 건설, 땅에서 솟구친듯한 인구─이 엄청난 생산력이 사회적 노동(력) 안에 잠자고 있는 걸 어느 시대가 알았을까.
우리는 이제 알게 된다. 중세적봉건 세계에서 생산수단과 교환 수단이 계속 발전하나, 생산력이 따라오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 사회적 관계는 파괴돼야 했다. 이 족쇄를 부수고 들어선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적 정치적 지배권을 가지고 자유경쟁 세계를 내세웠다.
눈앞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부르주아의 생산관계, 교류관계, 소유관계는 잠자던 지하의 유령을 불러내서, 엄청난 생산력을 감당 못하는 마법사와 같다. 거쳐온 세계를 또 다시 보는 것처럼, 비슷비슷하다. 그래서 상업과 공업의 지난 수십 년은 부르주아지의 생존 조건인 이 관계를 부수려는, 반란과 투쟁의 역사다. 그 예로 공황을 말하는 걸로 충분하다. 공황이라는 전염병이 올 때마다 이미 생산한 물건을 폐기한다. 이미 커진 생산력까지 잘라낸다. 흉년 없는 기근이 오고, 전쟁 없는 야만이 퍼진다. 부르주아지의 요상한 아이디어 상품과 마구잡이 중개수수료와 마사지나 청소처럼, 제 할일을 남에게 미루는 추잡한 일거리가 사회를 미개하게 퇴보시킨다. 문명의 공황은 낡은 부르주아적 관계 탓이다. 사회의 생산력과 더 나은 발명품이 이제 협소한 부르주아적 관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부르주아 계급은 이 무질서한 위기를 어떻게 대처할까? 사회에 나온 생산력을 강제로 파괴하거나, 쓸데없이 시장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공부를 시키는 동안 좀 더 철저하게 착취한다. 결국 이런 대처는 무엇으로 가는가? 부르주아지 아래로 통일된 세계 정부는 모든 방향에서 혼돈을 준비해야하며, 부르주아 계급이 봉건세계를 무너뜨릴 때 사용한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 자신을 겨누게 된다.
이 무기를 벼려온 부르주아 계급은 이 무기를 들 사람도 부르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다.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이 발전한 만큼, 프롤레타리아 계급, 즉, 일손 노동자도 발전했다. 부르주아가 일자리를 주어야 프롤레타리아는 생존했다. 단, 이 계급 질서를 유지하며, 부르주아의 재산을 불어나게 하는 동안만, 일자리를 받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일자리를 받으려고, 자신의 시간을 조각조각 값으로 매겨, 시장 경쟁에 상품처럼 내맡겨야 한다. 기계장치와 분업에서 단순한 부속물이 된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노동력은 매력도 흥미도 없이 노예스러움만 있다. 부르주아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유지하는 비용은 노동력의 생계와 노동력의 번식까지만이다. 그러니 프롤레타리아트가 혐오스럽고 야한 생활을 한다는 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격도 내렸다는 뜻이다. 게다가 기계장치와 분업으로 생산속도가 빨라졌다고 하는데, 노동시간은 그대로다.
가부장적 길드 장인의 소규모 작업장이 산업 자본가의 대규모 공장이 되었다. 공장 노동자 대중은 군대식으로 사열되고, 산업 장교와 하사관의 감시 감독을 받는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국가와, 매일, 매시간, 기계와, 감독자와, 특히 개별 공장 운영자의 몸종이자, 주체성 없는 노예가 된다. 이 부르주아 세계가, 사회에게, 재산이 최고라고 공개적으로 말할수록, 정치는 더욱 무자비하고,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된다.
노동에 손과 힘이 덜 들수록, 즉, 산업이 발전할수록 여성이 남성의 노동력과 같아진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에서는 성별과 나이는 사회적으로 이미 동등하다. 성별과 나이는 부르주아 세계에서나 비용이 조금 달라지는 생산 도구로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력 유지비로, 임금을, 지폐와 동전으로 받고 나면, 이번에는 집주인, 소매유통 상인, 전당포 주인 등 다른 부르주아들이 달려든다.
조만간 작은 부르주아와 연금생활자, 수공업자,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된다. 이들의 작은 자본으로는 큰 부르주아가 되지 못하고 생산 방식도 낡아서 경쟁이 안된다. 이러니 다양한 계층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충원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치는데, 존재와 함께 발전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뿔뿔이 흩어져서 분열되어 있는 무리였다. 다음에는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모아서, 절대 왕정이 남아 있는 지주들, 산업이 아닌 부르주아, 소시민인 작은 세력과 싸운다. 그러면 대항 세력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해서, 기계와 외국산 상품을 파괴하고 공장에 불을 지르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중세 시절의 낡은 노동자 지위를 되찾아 주려 한다. 그러나 두 세력의 싸움은 크든 작든 모두 부르주아지 단결의 결과다. 프롤레타리아는 적의 적들과 싸워주며 투쟁 역사의 운동을 부르주아 손에 집중시켰고, 그렇게 얻어진 승리는 부르주아 계급일 뿐이다.
기계장치가 노동력 차이를 점점 없애고, 부르주아들이 노동력 가격을 최저로 맞추다 보니, 어디서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활 수준이 비슷해진다. 공황으로 삶이 팍팍한 개별 프롤레타리아들이, 개별 부르주아들과는 생활 여건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해관계에 저항할 힘을 느낀다. 점점 계급 간 세계가 충돌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함께 모임을 갖고, 투쟁을 하고, 연합을 결성하여, 봉기를 위해 보급품을 마련하니, 부르주아 세계에서는 폭동이라고 불린다.
프롤레타리아가 가끔 승리해도 최종 승리가 아니다. 투쟁의 성과는, 점점 번지는 프롤레타리아의 단결에 있다. 같은 성격과 목적을 지닌 하나의 단결은 교통과 통신 수단으로 쉽게 퍼진다. 낡은 사회에서 중세 교회의 단결은 시골길 위에서 수백 년 만에 이루었고, 새로운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 단결은 철도 위에서 불과 몇 년 안에 이루었다. 모든 계급 투쟁은 정신 투쟁이다. 정치 정당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세계에서 경쟁으로 파괴될 수 있지만,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부활한다. 낡은 부르주아지와 새로운 부르주아지는 끊임없는 경쟁을 벌이다가, 세력 확장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 정당에 공감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몽적 이념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 교양은,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누는, 혁명의 무기를 건네준 셈이 된다. 도움의 대가로 부르주아 정당에게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이 되는 법률을 쓰게 하는데, 그 법률은 기존 지배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든다. 또 생활 여건을 위협받은 다른 부르주아지는 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교양적 지식을 제공하며 정치적 연대를 부탁한다.
프롤레타리아트 사회와 부르주아지 세계, 두 세계의 충돌이 막바지에 이르고, 세계 내부가 모두 해체된다. 낡아 버린 세계는 미래를 손에 쥔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으로 이끌린다. 그러면 몇몇 봉건 귀족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넘어갔듯이 이제는 부르주아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슬며시 넘어간다. 역사 운동을 드디어 이론적으로 이해한, 부르주아지 사상가가 먼저.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맞서는 진정한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다. 다른 계급은 부르주아지의 대규모 산업에 밀려 점점 쇠퇴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규모 산업 자체의 산물이다. 소기업가, 소상인, 소공업자, 농민, 중산층은 모두 중간 계층으로 살아남으려고 싸우지만,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 하기에 보수적이고 반동적이다. 세계에서 현재 이익을 내려놓고, 사회에서 미래 이익을 볼 때에야 진정,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위한 혁명적 입장에 선다.
그런데 낡은 세계에서 그저 프롤레타리아로 살아 남으려는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매수된 자들이 있다. 룸펜이다. 그러나 낡은 세계에서 억압받는 자들의 생활 여건은 이제, 새롭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개선한다. 룸펜과 달리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적 재산이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족은, 부르주아적 가족과 공통점이 없다.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의 자본 앞에서 노동자는 족보가 사라졌다. 지금 법, 도덕, 종교 앞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양심은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지켜줄 뿐이다.
역사에서 지배 계급은 자기 이익대로 사회를 은밀하게 조작하고, 이미 가진 지위를 공고히 하는데만, 노력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 방식을 버린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 계급의 사회 점유 방식과, 또 자기가 가진 지위도 버려야, 비로소 사회에서 생산력을 지혜롭게 나누어 쓸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에겐 자기가 지킬 계급이 없어야 하기에, 역사가 남긴 모든 지배 계급적 이익과 사회적 위치를 보장하는 것을 끝내야 한다.
역사에서 사회 운동은 소수의, 소수의 이득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엄청난 다수의, 다수의 이득을 위한 자립 운동이다. 최하층에서 프롤레타리아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일어서려면 현 세계의 공식적인 상부구조를 부숴야 한다. 일단은 국가 내부에서 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민족적 부르주아들 먼저 쓸어버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 발전 단계를 쓰면서, 은밀한 심리 싸움이 대놓고 투쟁하는 혁명으로 번지는 새로운 사회를 읽었다.
낡은 세계는, 다수의 억압받는 이에게 생존을 보장해 주어, 억압하는 자가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게 노예적인 생존이라도, 억압받던 농노는 코뮌이 되었고 억압받던 소시민은 부르주아가 되었다. 그런데 부르주아 세계에서는 산업이 진보하고 생산력이 향상되어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생존은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남은 프롤레타리아는 빈민이 되고, 사회적 빈곤은 인구 감소나 부의 증가보다 더 빨리 퍼지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기 노예에게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았고, 노예는 주인을 부양하지 못하고 있다. 주인이 노예를 부양해야 할 만큼,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는 비참하다. 이제 부르주아 세계는 사회를 다스릴 명분이 없다.
부르주아지는 기생과 착취가 생존 조건이자 지배 조건이다. 부르주아지 세계에서 경쟁이 어쩔 수 없이 산업을 진보시켰고, 덕분에 고립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트들은 모여서 부르주아지의 무덤을 파게 됐다. 그들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승리는 불가피하다.
〔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관계인가?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가 만든 정당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프롤레타리아 전체 이익과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이 굴러가는 것을 억지로 방향을 꺾지 않는다.
공산주의자가 각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국적을 넘어서 프롤레타리아의 전체 이익을 강조하고, 국경을 넘어서 공동 이익을 추구하며, 사회가 발전하고 있는 운동임을 알려준다. 공산주의자는 그래서 모든 나라에 프롤레타리아 정당 가운데 가장 단호하며 추진력이 강하고,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행 과정, 결과를 이론적으로 꿰뚫어 보고 있다. 각 국가의 프롤레타리아 정당과 같은 점은 프롤레타리아를 모아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부수고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말할 이론은 개혁, 개량이나 혁신 같은 게 아니다. 끝난 사회 운동이나 진행되는 운동을 새삼스레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기존 지배자가 소유한 생산관계를 폐기하자는 것은 역사에서 다른 이념들도 계속 말했다. 그리고 부르주아는 프랑스혁명으로 봉건적 생산관계를 폐기하고, 부르주아가 소유하는 생산관계를 내세웠고 가장 완성적인 착취 관계를 이루고 있다.
공산주의는 소유 자체를 폐기하는 게 아니라, 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폐기하고, 개인이 이득을 보는 착취 관계를 폐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의 폐기로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공산주의자를 모함한다. 힘들게 일해서 얻은 재산과 스스로 노력할 자유, 사업 밑천인 토대를 공산주의자가 폐기한다고 말이다.
'힘들게 일해서', '스스로 노력한', '토대'라고!?
소시민과 소기업, 소농민의 '소유'를 말하는가? 그건 우리가 폐기할 것도 없이 산업이 발전하면서 부르주아가 매일매일 폐기하고 있다.
아니면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를 말하는가? 당신이 프롤레타리아라면 노동이 소유를 가져다주는가? 결코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노동력이 가져다주는 건 사회 자본이다. 생산된 자본에서 부르주아가 이익을 착취하고 나머지 자본을 프롤레타리아에게 준다. 이마저도 노동력을 다시 출산할 만큼만 받은 재산이다. 부르주아가 유지하는 시스템 재산과는 차원이 다르다.
자본은 본래 공동체적 산물인데, 부르주아가 자본가로 존재하면 개인적인 생산만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까지 가져가버린다. 생산력은 본래 개인의 권력이 아니라 사회의 권력이다. 많은 구성원이 공동으로 활동해야만 움직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이 공동체의 소유, 즉 사회 구성원 모두의 소유로 바뀌면 자본은 부르주아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성격이 바뀐다. 개인의 재산을 빼앗아 또 다른 개인이 가로채는 게 아니다. 소유한 재산에서 계급적 성격을 폐기하는 것이다.
스스로 노력할 자유라는 임금 노동을 보자.
임금노동은 최저임금이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최저란, 부품이 헤지면 다른 부품으로 갈아끼우는 딱 그만큼이다. 임금노동은 헐벗은 몸을 헐벗은 몸으로 유지하는데 그친다. 우리는 인간 사회 발전에 필요한 순이익이라는 자본을 폐기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부르주아의 순이익을 위해 살아야 하는 비참한 성격을 철폐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의 세계에서 노동은 프롤레타리아 삶의 범위를 축소시키고 노동력을 억지로 유지시키는 장치지만,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프롤레타리아 삶의 범위를 넓히고 풍요롭게 창조 의지를 북돋우는 수단이다.
부르주아는 '과거가 이러했으니, 현재가 이러하다.'라고 프롤레타리아를 다그치지만, 공산주의자는 '현재가 이러하니, 미래는 어떠한가.'라고 프롤레타리아에게 묻는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자본은 부르주아 가정 하나를 행복하게 하지만, 프롤레타리아 가정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자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의 인격을 더럽히지만, 공산주의에서 자본은 돌려주는 방식 하나로 일하는 사람의 인격을 높인다.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가 인격과 자유를 폐기한다고 말한다! 맞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부르주아지 인격과 부르주아지 자유를 폐기할 것이다.
부르주아적 생산관계에서 사고파는 자유는, 지금은 사라진 중세에 낡은 지배층에게 종속된 상인에게나 의미가 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고파는 것 자체가 사라지면, 부르주아지가 말하던 가지각색 자유라는 단어들도 과거의 낡은 봉건 세계처럼 의미가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사적 소유를 폐기한다고 경악한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의 구십 퍼센트는 이미 사적 소유가 폐기되고 무소유 상태다. 나머지 십 퍼센트만 사적 소유하고 재산을 과점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무자산 상태를 조건으로 하는 사적 소유를 폐기할 거냐고? 그렇다. 우리는 그렇게 할 거다.
어떤 사람은 사업 밑천인 토대가 부르주아적 소유로 바뀌지 못하는 순간, 다시 말해 개인적 재산으로 사업을 해서 착취하는 계층이 못 되는 순간, 인간성이 말살된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그는 이미 부르주아 말고 다른 누구의 인간성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성이라면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누구한테도 사회적 생산물을 빼앗지 않는다. 사회적 생산물을 빼앗은 자의 권력만 빼앗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개인의 착취 수단이자, 사적 소유를 폐기하면, 사람들이 노동 활동을 멈추고 게으름이 만연해져서 사회가 무너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르주아 세계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시간을 못 벌고, 거기서 시간을 취하는 사람은 게으르게 놀러 다니는데, 왜 안 무너지는가.
모든 반박은 반복적으로 같은 결론에 이른다. 부르주아의 자본 착취를 없애서 프롤레타리아의 임금 노동도 없애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물질적 생산물을 얻고 나누는 방식'을 비난하려고, 부르주아는 정신적 양식으로 세뇌해 간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교육'을 멈춘다는 건, '계급의 물질적 소유를 옹호하는 정신적 양식'을 멈춘다는 것이다. 이 교육은 계급적으로 많은 사람을 기계 부품으로만 기능하게 한다. 그러니 자유니 교육이니 법이니 부르주아 세계의 낡은 잣대로,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기하려는 우리와 더는 논쟁하지 말라. 부르주아 세계에서 떠받드는 법은 부르주아 계급의 의지에 불과하고, 사회에 박은 이념은 부르주아적 생활 조건 자체다. 역사에서 일시적인 과정인 부르주아적 생산과 소유관계를, 자연과 이성의 법칙이라고 속이는 얄팍한 모습에서, 오래전에 멸망한 지배 계급의 관념이 그대로 보이고 있다. 부르주아가 고대에 낡은 소유관계를 이해하고, 또 봉건적 낡은 소유관계도 이해하는데, 자기의 부르주아적 소유를 이해 못 한다는 것은 스스로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이성을 모욕하는 것이다.
가족까지 폐기한다? 가장 진보적인 사람도 공산주의자에게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냐고 한다.
지금 부르주아 가족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본 착취로 나온 이익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지금 사회는 부르주아의 단란한 가족 형태를 이뤄주려고, 프롤레타리아 딸은 부르주아 아들 뒤에서 은밀한 창녀가 되고, 프롤레타리아 아들은 부르주아 딸 앞에서 당당히 말 똥이나 치우고 있다. 자본 착취가 사라지면 프롤레타리아 가족이 더는 망가지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착취하는 것도 폐기한다고 우리를 비난하는가? 이게 비난받을 죄라면 우리는 죄인이 되겠다.
또 자기 가족만을 위하는 교육을 세상 사회와 더불어 위하는 교육으로 바꿔, 혈육의 정을 폐기한다고 우리를 비난한다. 그러나 교육으로 사회에 끼어든 것은 공산주의자가 먼저 한 게 아니다. 지금 학교는 부르주아가 조성한 교육 환경으로 인간의 사회적 성격을 개조하고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은가? 단지 우리는 원래 하던 교육에서 지배계급의 사회적 정당화를 떼어 놓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든 유대가, 착취 앞에서 상품과 도구가 되고, 사람의 이성이 갈리고 찢기고 있는데, 가정과 양육의 소중함, 부모와 자식의 친밀한 관계를 말하는 부르주아의 입바른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역겨워진다.
'공산주의자가 부인까지 공유하려 든다'고, 특히 부르주아가 열띠게 비난한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사고 체계를 가만히 보면, 공산주의자가 생산 수단을 공유해버리면, 자기 아내도 공유하게 돼버린다는 것이다. 여자를 생산도구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면 이런 생각이 가능할까? 프롤레타리아의 아내와 딸을 건드려 이용해먹고, 암묵적으로 다른 부르주아의 아내까지 건드는 낙으로 사는걸 보면, 언제나 지배계급끼리는 생산수단을 공유했나 보다. 여자가 생산도구로 취급되는 처지 자체를 폐기하려는데 부르주아의 숭고한 도덕관념이 막는다는 게 우습기만 하다. 다시 말해 여자는 부르주아의 사적 소유가 아니다. 여자의 연은 여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를 굳이 비난하려면 부르주아적 결혼은 위선적인 부인 공유제였으나 공산주의는 솔직한 부인 공유제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자본을 착취하는 이 낡은 생산관계를 폐기하면, 매춘과 부인 공유제의 의미도 낡아서 사라진다.
자 다음은, 조국을 뺏고 국적을 없앤다고 공산주의자를 비난한다.
프롤레타리아에게 조국은 없다. 갖지 않은 걸 어떻게 뺏는가?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나서, 스스로 평등한 세계로 올라선 다음에야 공산주의자가 조국을 뺏는다고 비난 받을 수 있겠다. 그리고 부르주아가 생각하는 국가 같은 게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체가 국가의 틀을 넘어선 단결이기에 없어지는 국적은 부르주아 국적이다.
부르주아지의 등장과 시장 확대, 상업 자유, 생산력 증가로 국가마다 생활 환경이 비슷비슷해지면서 민족 사이에 국경으로 분리된 것이 이미 희미해졌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단합된 행동으로 가져온 해방의 불씨는 선진문명 국가 사이의 분단과 대립을 더욱 사라지게 하고 있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착취하는 것을 폐기하는 만큼,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착취하는 것도 폐기된다. 국가 안에서 계급 대립이 사라지면, 국가 밖에서 적대적 관계도 사라진다. 그들이 종교교단과 철학학계와 이념적 관점에서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길게 대답할 필요도 가치도 없다. 프롤레타리아는 고통받고 있는데,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생활 수준과 그들 끼리 친한 사람을 보면, 그들의 의식을 가늠하는 데 깊은 통찰까지 필요할까? 역사적으로 지배명분은 물질적 토대를 지배한 계층처럼, 계속 바뀌었다. 다시말해,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일 뿐이었다.
세계에 혁명을 일으킬 이데올로기를 말하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사회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낡은 세계 안에서 무너지는 낡은 이념을 해체하면서 낡은 생활 조건도 같이 해체된다는 걸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고대 종교들이 그리스도 가르침으로 해체되었고, 종교적 봉건 세계는 부르주아적 계몽 세계로 해체되었다. 양심의 자유나 종교의 자유라는 이념도 낡은 세계와 혁명 사회가 지식 영역에서 싸우는 걸 표현했을 뿐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말한다. "종교교단, 도덕양심, 철학학계, 정치제도, 재판과처벌은 역사 발전 과정에서 변해왔지만, 신앙, 도리, 지혜, 지휘, 규율 그 자체는 안 변했고, 자유나 정의 같은 영원한 진리도 있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진리를 폐기한다. 종교나 도덕을 좀 수정하고 개선하는 대신, 아예 다 부숴버린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기존부터 있던 이념의 역사 발전 과정과 모순된다."
이 비난은 결론이 어디에 닿는가? 계급 대립을 이대로 유지하잔 거다. 그러나 계급 대립은 어떤 형태건, 누가 누구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 시대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의식구조가 다양하게 변했어도, 착취구조는 진리라며 이대로 유지하자는 기득권의 주장은, 별로 놀랍지도 않다.
공산혁명은 과거부터 유지된 소유관계를 가장 철저하게 부숴버린다. 따라서 낡은 이념에서 극단적으로 결별하자는 혁명권의 주장도 역사 발전 과정에서 별로 놀랍지 않다.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부르주아지는 이쯤에서 그만 듣고 접자.
우리는 앞서 프롤레타리아가 민주주의 나라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바로 세우는 것이 혁명의 첫걸음이라고 살펴봤다. 절대적 다수가 된 프롤레타리아 정당이 부르주아지가 뺏은 모든 자본과 생산도구를 프롤레타리아 손에 돌려주고, 공동체 의식이 건강해지면서 사회 생산력이 점점 빠르게 강해질 것이다.
처음에는 부르주아적 소유권과 생산관계를 내려놓아야 하기에 인습적으로 떨리고 관성적으로 불안하겠지만, 이 공산혁명이 이루어지려면 불가피하다.
당장 적용할 수 있는 조치는 나라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① 사유한 토지 재산을 정당이 몰수하고 땅 사용료를 직접 노동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돌려줌.
②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이 직접 노동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돌려줌.
③ 상속이나 세습을 폐기함.
④ 망명자와 반역자의 재산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돌려줌.
⑤ 자본은 프롤레타리아트 창고에 모아둠.
⑥ 운송 수단을 공유함.
⑦ 공장이나 생산도구, 토지 개간을 공동 계획
⑧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노동 의무, 특히 농업에서 동등한 노동.
⑨ 무기 군대는 해체하고, 농기구 부대를 양성하여 도시와 농촌 간 모든 격차 해소.
⑩ 오늘날 아동의 공장 노동 폐기, 아동에게 사회 공교육을 무료로 하되 너무 현학적이지 않도록 실체적 생산 활동을 결합시킴.
이 과정에서 모든 계급 차이가 사라지고, 생산력이 각 개인의 손안에서 연합되어 나타나면, 공권력은 계급적 성격을 잃게 된다. 본래 공권력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려고 조직한 정치적인 폭력이다. 부르주아지와 투쟁에서 억압받는 사람은, 프롤레타리아트 하나로 단결할 수밖에 없고, 혁명은 필연적이며, 지배권을 쟁취한 프롤레타리아가 낡은 생산관계이자 계급 조건을 쓸어버리면, 드디어 계급 대립이 끝난다. 그리고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자기 스스로 낡은 지배권을 폐기하고 사라진다.
끈질기게 이어온 계급 대립의 끝은 낡아버린 부르주아적 세계 대신에, 한 사람이 자유롭게 발전하면 모두가 발전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새로이 연합한 이들에게 나타난다.
〔3장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문헌〕
1. 보수반동적 사회주의
1-1. 봉건적 사회주의
프랑스와 영국 귀족 계급은 멸종되지 않으려고, 부르주아 계급을 반대하는 팸플릿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러나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과 영국 선거법 개혁 운동에서 귀족들은 또다시 얄미운 부르주아 부자들에게 패배했다. 정치권 투쟁에서는 벌써 패배했고. 남은 건 글쓰기다. 그러나 군주제 시절로 돌아가자는 낡은 언어가 통하려면, 귀족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착취 당하는 프롤레타리아만 위해서라며 구차하게 부르주아에 대한 고발장을 써야 한다. 귀족들은 새로운 지배자를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약간 섬뜩한 종말을 예언하며 부르주아의 귓구멍에 분풀이를 했다. 이렇게 봉건적 사회주의가 탄생했다.
이 글의 절반은 슬픈 노래고 풍자 노래다. 절반은 과거 영광이고, 미래 경고다. 간혹 날카로운 비판으로 부르주아 등허리를 서늘하게 했으나, 역사의 흐름은 읽지 못한 그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그중에 프랑스 정통 왕조파와 영국 청년파가 제일 웃겼는데, 귀족들이 프롤레타리아의 동냥자루를 깃발처럼 흔들어 대서 사람들을 자기 뒤로 모아들였지만, 제 망토에 그린 궁정문양을 본 사람들은 크게 어이없어하며 흩어져 버렸다.
봉건주의자가 부르주아와 다르다는 걸 증명해 낸다면, 방식과 상황이 좀 다를 뿐 어쨌든 착취는 계속됐음을 빠뜨린 것이고. 자기 시대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없었다고 증명해 낸다면, 그 시대에는 부르주아지가 필연적인 산물임을 빠뜨린 것이다.
요새는 반동적인 성격을 별로 숨기지도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을 비난할 때, 나약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서 낡은 세계 질서 전체를 날려버릴 작정이냐고 할 정도다. 그래서 부르주아가 판치는 정치권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제압하는 모든 일에 지지하고 돌아와, 황금사과처럼 허울뿐인 신앙, 희망, 사랑을 현실적인 정부보조금, 복지연금, 술과 맞바꾸며 일상생활을 한다.
옛날에 종교 교단이 봉건 귀족과 손을 잡았듯이, 기독교적 사회주의도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을 잡는다.
기독교는 어떤 이념으로든 색칠하기가 쉽다. 성경에서 사적 소유, 결혼, 국가를 반대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부르주아를 반대할 수 있다. 교단은 자선을 행하고, 독신과 금욕을 추구하며, 수도원과 교회에 머무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성직자는 성수로 귀족들의 분노를 축복하며 교회를 구걸할 뿐이다.
1-2. 소시민적 사회주의
부르주아 세계에서 생활 조건이 점점 위축되는 계급은 봉건 귀족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부르주아 옆에서 중세 성외 시민과 소농민이 끊임없는 경쟁으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를 떠돌다가 결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되고 있다. 대규모 산업이 발달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상실하고 나면 상업, 제조업, 농업에서 노동 감시인이나 노동자로 부르주아의 하인이 되는 자기 모습을 보게 된다. 프랑스처럼 농민이 인구 절반을 넘는 국가에서 작가는, 소시민적이고 소농민적 잣대로 부르주아를 비판하며 프롤레타리아 정당 편에 서는 게 당연했다. 소시민적 사회주의다. 시스몽디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런 글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소시민적 사회주의는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예쁘게 꾸며놓은 헛소리를 '생산관계가 모순됨'이라고 날카롭게 들추었다. 기계와 분업이 다른 산업을 파괴하고, 자본과 토지 소유가 점점 한쪽으로 몰리고, 쓸 데 없는 물건을 만들어서 공황이 오고, 소시민과 소농민은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빈곤하고, 똑같은 물건을 서로 만들어대고, 부의 분배가 불평등하고, 국가 간에 산업적 전쟁, 낡은 도덕 관습과 낡은 가족 관계, 낡은 국적을 해체하며 열심히 증명해냈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 결론은 방금 해체한 낡은 생산수단과 낡은 교환 수단 그리고 낡은 소유관계를 다시 만들고 있다. 그게 안되면 자기의 낡은 소유관계 틀만은 억지로 밀고 나가려고 난리다. 둘 다 반동적이고 공상적이다. 매뉴팩처에서 길드 제도가, 농촌에서 가부장제 경제가 마지막 목표라고 방향을 잡은 이 사회주의 노선은 안타깝게 자기 비겁함에 빠지고 말았다.
1-3. 독일 사회주의가 말하는 '참된' 사회주의
프랑스의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에게 대항하고자 쓰인 책이, 독일에 들어왔을 땐, 독일의 억압받는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절대주의 왕정과 아직 싸우고 있을 때였다.
독일 얼치기 철학자와 도서수집가가 이 책을 읽었다. 하지만 프랑스 세계까지 독일 사회로 들어온 게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이 책이 현실이었지만, 독일에서는 낭만적인 소설책으로 보였다. 그래서 18세기 독일 철학자에게는 제1차 프랑스 혁명이, 억압 받는 이들의 요구인 '실천 이성'의 보편성 요구이고,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혁명적인 모습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참된 인간의 법칙인 '순수 의지'의 모습이었다. 독일 글작가가 한 일은 고작 프랑스에서 건너온 새 이념을 칸트와 피히테라는 낡은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고, 이 과정을 외국어 번역처럼 있는 단어 안에서 다루었다. 중세 기독교인이 고대 그리스 신화에 자기네 성인 이름을 붙인 것처럼, 독일 글 작가는 프랑스의 화끈한 책 제목에 자기 철학적 헛소리를 밋밋하게 써넣었다. <화폐의 경제적 기능에 대한 비판>에다가 <인간의 본질 양도>라고 쓰고,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프랑스인의 비판>에는 <추상적 보편 지배권의 철폐>라고.
프랑스에서 이루어진 사회적 논리 발전에 '행동하는 철학'이니 '참된 사회주의'니 '독일의 사회주의 과학'이니 '사회주의의 철학적 논고'니 현학적 상투어를 갖다 붙이고 앉아 있다. 결국 관념적인 분들께서는 이 책의 실천적 계급 투쟁은 빠트렸다. 이분들께서 말씀하시길, 한쪽 편만 드는 프랑스인의 '일면성'을 극복했으며, 현실적 이해관계 대신에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인간, 그 인간의 보이지 않는 본질, 그 본질을 철학적 하늘 위 안갯속에서 대변하고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러나 독일 부르주아지가 점점 본격적으로 독일 봉건 세력에게 투쟁할수록, 독일의 참된 사회주의는 자유주의 운동 앞에서 인간 본질을 위한다던 현학적 순진함을 잃어 갔다.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물질적인 삶과 정치제도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책이 쓰였다는 걸, 이분들은 또 까먹으셨다. 그리고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가며 말씀하시기를,ㅡ독일보다 앞선 프랑스의 사회문화적 글밥을 씹어 먹어보니
뒤쳐진 독일의 부르주아가 자유주의 운동으로 독일을 지배해도, 아랫것들은 얻을 게 없고 다 잃을 위험만 있으니까 미리미리 '편파성'을 극복하라ㅡ며, 자기 철학을 홍보했다. 독일 '참된' 사회주의는 제대로 시작도 안한 자유주의와 대의제 국가, 부르주아적 경쟁 출판 법 평등에 미리미리 저주를 퍼부었다.
성직자와 학자, 지주 귀족, 관료와 모든 공무원을 거느린 독일 절대왕정은 자기 잔칫상에 위협적으로 떠오르는 부르주아를, 독일 '참된' 사회주의라는 허수아비로 쫓아내고, 노동자가 봉기하면 총알과 채찍으로 진압하고, 남은 국민에게 빵과 여물 대신 독일 '참된' 사회주의라는 사탕과 당근을 주었다.
이렇게 독일 '참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를 막는 독일 절대왕정의 손에 들린 무기가 되었고, 16세기부터 이어 내려온 독일 성외 시민, 중산 소시민 계층의 이익도 대변해 주었다.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소시민적 부르주아는 절대주의 계급 질서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였다. 혹시나 부르주아지가 산업과 정치를 장악하고, 설마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으로 모든 계급 질서를 파괴할까, 염려하던 중이었는데, 독일 '참된' 사회주의는 일반인 모두를 위한다는 말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마리 계급 투쟁을 한 번에 잡는 돌이었다. 생각만으로 실을 짜고, 화려한 언어로 꽃을 수놓고, 낭만적인 눈물로 염색한 이 옷을 가져다가 다썩고 뼈만 남은 '영원한 진리'라는 마네킹에 걸쳐놓았다. 상품을 홍보한 독일 '참된' 사회주의는 사람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서 큰 수익을 올려주었다.
독일 '참된' 사회주의자도 소시민층이 자기들의 후원자이자 구매자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 참된 정체성을 바꾼거 같다.
곧, 독일 '참된' 사회주의는 소시민적 인간이, 인간의 표준이라고 선언하고 중산계층의 속물적이고 비열한 행위를 반대로 심오하고 고상한 행위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엔 공산주의를 '거칠고 난폭한' 비표준적 인간 행위라며 반대했다. 계급투쟁은 자체가 파괴적이니 위아래 계급 다 잘못이며, 그걸 넘어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 비당파적, 중립적 결론을 선언했다. 현재 독일에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고 홍보되는 문헌이 나돌고 있는데, 몇 권 빼고는 거의 다 더럽고 추잡해서 신경 거슬리는 이 '공평함' 문헌이다.
2. 보수부르주아적 사회주의
일부 부르주아지는 부르주아 세계를 존속하려고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폐해를 고쳐 잡으려고 한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경제학자, 박애주의자, 인도주의자, 노동자 계급 처지를 개선하는 자, 자선사업가, 동물 학대를 금지하는 자, 금주 금연 협회 설립자, 각양각색의 쪼잔한 개혁가들이 있다. 개량주의자라고 체계를 갖추긴 했다. 그 예로 프루동 <빈곤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적 부르주아들은 생활 조건을 그대로 바라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투쟁과 위험은 바라지 않는다. 기존 세계 질서를 바라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혁명과 해체는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 프롤레타리아트 없이 부르주아만 있는 사회를 바란다. 부르주아지는 자기가 지배하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고 새로운 예루살렘 성지라고 상상하고, 프롤레타리아에게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그러나 이 손짓은 사실 프롤레타리아에게 지금 사회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금 세계에 대한 증오심을 버리라는 것일 뿐이다.
이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이런저런 물질적 생활 조건이나 경제적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 너 자신에게 유익하다는 논리를 펼쳐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적 혁명 운동에 싫증 내게 만든다. 이 사회주의가 말하는 변화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 폐기가 아니라, 국가 행정 비용을 절약하고 국가 살림을 간소화해서 부르주아지의 사회 지배 비용을 좀 줄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임금노동과 자본 착취 관계는 그대로 두고, 프롤레타리아가 임금을 좀 더 받고 싶으면, 괜히 대들어서 공권력에 쓸 비용 늘리지 말고, 중간 감독 관리자나 부르주아 오케스트라의 반주자나 되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주의가 선거철에 자주 하는 표현이 있다. 노동 계급을 위한 자유 무역! 노동 계급을 위한 보호 관세! 서민을 위한 입법! 노동 계급을 위한 독방 감옥! 이것이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결론이다. 핍박받는 이를 돕고 싶으세요? 먼저 핍박하는 자가 되세요!
3.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와 공동체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한 초기 운동과 반동적인 책은 보편적인 금욕과 조잡한 논리로 평준화를 가르치기에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다. 이들은 지배 세계 안에 그 세계를 해체하는 계급 대립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사회주의와 공동체주의 체제가 처음 등장할 때는 산업과 계급 투쟁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기에 프롤레타리아의 능동적인 역사적 독자성과 독특한 정치적 운동성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미리 프롤레타리아에게 필요한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서 사회과학과 그 법칙을 연구했다. 세계에서 직접 사회적 활동을 하는 대신 설계도를 짜넣는 창의적인 노력을 하고, 해방에 필요한 역사적 순서 대신 판타지적인 조건을 찾고, 프롤레타리아트로 계급화될 조직 대신 그들이 고안한 사회 조직을 만들었다. 다가오는 세계 역사는 자기들 계획대로 실행되어야 바람직하다고 믿었다. 그 계획은 주로 가장 고통받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주장하고 있지만,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계속 고통받는 계급으로만 보고 있다. 이들은 부자인 자신이 가난한 이를 대변하는 것을 보면서, 투쟁과 대립을 멈추고 계급을 초월해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최상위 지배계층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을 개선할 수 있으니, 자기가 고안한 이 체계를, 특히 지배계층에게 계속 호소했다. 이 체계만 이해시키면 그 어떤 사회보다 가장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정치 활동, 특히 혁명적 활동을 비난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작은 본보기를 보여주면서 새로운 사회의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어쨌든 이 공상적인 미래 사회 묘사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자기를 잘 모르지만, 뭔가 세계를 전반적으로 변혁하고 싶은 본능적 열망에서 나왔다. 도시와 농촌 간 대립 멈추기, 가족과 사적 영리와 임금 노동 없애기, 사회적 조화 선포, 국가를 단순한 생산관리 기구로 전환 등, 이 문헌에도 기존 세계의 모든 토대를 공격하는 게 나오기에, 프롤레타리아를 계몽하는 소중한 초기 자료가 되었지만, 이제는 공허하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큰 획을 그려보지 못했다. 희미하게만 보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나약하게만 여겼다.
비판적-공상적 사회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의미는 역사 발전과 반비례하고 있다. 계급 투쟁이 발전하여 현실적 형태를 갖출 수록, 공상적 태도는 현실적 타당성이 약해진다. 이 체계 창시자들은 많은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그 제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 발전을 보면서도 여전히 스승의 공상적인 견해를 지킨다. 그래서 계급 투쟁과 대립을 중재하려고 애쓰고 여전히 실험적으로 사회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부르주아의 마음과 돈주머니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다가 앞서 언급한 반동적-보수적 사회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기적을 미친 듯이 믿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프롤레타리아들의 정치 운동을 짜증스레 반대하는 이유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을 안 믿어서다.
〔4장 여러 반대 정당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
영국 차티스트 노동투표권자와 미국 토지 분배파가 결성한 노동자 정당과 공산주의자의 관계는 제2장에서 밝혔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현재 목표와 이익을 위해 투쟁하지만, 동시에 운동의 미래도 내다본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자는 보수, 급진 부르주아지에 맞서 사회주의-민주주의 정당과 손을 잡았지만, 투쟁 공론에서 환상을 비판할 태도는 포기 안 했다. 스위스에서 공산주의자는 급진 세력을 지지하지만, 이 세력에 프랑스풍 민주주의-사회주의자와 급진적 부르주아가 있는 것은 잊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자는 토지 분배를 민족 해방 조건으로 내세운 정당, 즉 1846년 크라쿠프 봉기를 일으킨 그 정당을 지원한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 노선에 동참하는 한 이들과 손을 잡고, 절대 왕정과 봉건적 토지 소유와 반동적 소시민층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적대적 관계임을 노동자가 잊지 않도록 계속 알려서, 독일의 반동적 계급이 제거되자마자 부르주아지가 도입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부르주아지를 몰아낼 무기로 다시 이용할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에 관심을 쏟고 있는데, 독일은 늦은 부르주아 혁명이지만 발전한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이 변혁을 수행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앞장서고 있다.
한마디로 공산주의자는 기존 정치 세계 질서에 대항하는 모든 사회 운동을 지지한다. 운동이 어느 발전 형태를 띠든, 공산주의자는 소유 문제를 근본 문제로 내세운다. 모든 민주적 정당이 우리와 함께 지배계급에 맞서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공산주의자는 자기 견해와 의도를 감추면 수치스러워한다. 어디서건 지배계급이 정한 세계질서를 혁명하려면, 결국 지배계급의 폭력이 따름을 모두에게 알린다. 그러나 억압받는 이들의 투지로 지배계급을 벌벌 떨게 하라!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건 노예 사슬뿐이다. 우리에겐 얻어야 할 세상이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