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12일.

 


“야 고딩.”

 

선우는 뒤통수에 냅다 꽂히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몸을 돌리자마자 웬 곱상한 남자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눈을 반으로 접어 웃는 낯이 비현실적으로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보기 좋게 볶은 갈색 머리부터 스니커즈를 꺾어 신은 발끝까지 훑어보는 데 한참이 걸렸다. 몸 존나 기네. 부럽게. 근데 누구?

 

“저를 아세요?”

“가슴팍에 박혀있네. 김선우.”

 

고개를 숙여 제 가슴팍을 보니 명찰에 김선우 세글자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그래요 제가 김선우긴 한데요.

 

“누구신데 갑자기”

“그쪽으로 가지 마. 공사 중이야.”

 

선우는 제가 향하려던 골목 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참. 재개발인가 뭔가로 헌 집 다 때려 부수는 중이랬지. 그제야 옆집 아주머니께 들은 소식을 떠올리곤 뒤통수를 긁적였다. 달동네 클리셰 존나 변하질 않아. 이사 갈 곳을 정말,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조심히 가라 김선우야.”

 

선우가 짧은 자기 연민에 빠질 찰나, 복슬머리 남자는 가벼운 목소리로 안녕을 고하며 등을 돌렸다. 고맙긴 한데 좀 이상한 사람이네. 그래서 선우도, 이상한 짓을 하고 싶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좀 전 남자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형.”

“엉.”

 

남자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라지도 않고 대답해왔다.

 

“이름이 뭐예요?”

“나 이재현.”

“밥 사주세요.”

“내가 왜?”

“저 오늘 생일이에요.”

 

이상한 첫 만남이었다.

 




재현은 선우를 데리고 수제 버거 가게에 가서 밥을 먹였다. 급식과 라면을 제외하고는 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끼니라 선우는 허겁지겁 입에 베이컨 치즈버거를 쑤셔 넣었다. 손이며 입에 소스 덕지덕지 묻히고 먹다가 재현과 눈이 마주쳤을 땐 조금 멋쩍어서, 저 버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라고 넌지시 물었다. 걍 내가 좋아해서 데리고 왔어. 라고 짧게 대답하더라. 부른 배를 퉁퉁 두드리며 가게를 나선 후엔 자연스럽게 제 손목을 잡아 동네 빵집으로 이끄는 재현 때문에 조금 당황했다.

 

“형 설마 지금,”

“엉. 케이크 사러 가.”

“원래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렇게 잘해줘요?”

“잘해주길 바라고 붙잡은 거 아니야?”

 

말문은 막혔는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 진짜 이상해. 초면에 은근슬쩍 말 놓지 마라. 아 뭐야 꼰대였네. 니 뭐라 그랬냐.

 

생크림에 딸기 콕콕 박힌 케이크 하나 사 들고 고깔모자 달랑달랑 흔들며 둘은 달동네 골목길을 걸었다. 낡은 콘크리트 계단은 건장한 남성 둘이서 밟으니 후드득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진짜 집까지 따라올 거냐는 물음에 재현은 생일 초 혼자 부는 거 아니라고 대답했다. 저 형도 이상한데 집에 들이는 나도 개또라이인 듯. 선우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머리 위로 물음표 하나가 떴다.

 

“나 집에 가면 혼자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그냥? 제 행색이 그래 보여요?”

“뭔 말을 그렇게 하냐. 대충 안 거지.”

 

부모 없이 혼자 사는 거 티 나나. 선우가 제 꼴을 한 번 훑더니 교복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자, 재현이 와하학 시끄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너 골 때린다. 형이 더 이상해요. 됐고, 생일 끝나기 전에 빨리 집이나 안내해라.

 



걷다 보니 어느새 하늘이 완전히 어둠으로 뒤덮였다. 오만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집에 해 잘 드는 날 없는 동네인지라 밤이 되니 더 으스스해 보였다. 선우가 늘 야자를 째는 이유도 이것이었다. 공부에 뜻이 없기도 했는데, 이 깜깜한 길을 혼자 걷기 싫었다. 무서웠다. 전봇대도 고장 나 깜빡거리는 좁은 골목은, 마치 수라의 아가리로 기어들어 가는 길 같잖아. 선우는 옆에 사람 하나 꼈다고 이렇게나 안심이 되네 싶어서 피식 웃었고, 재현은 그런 선우를 멀뚱히 쳐다볼 뿐이었다.

 

녹슨 철문을 지나 선우의 집에 도착했다. 집이라고 해봐야 방 한 칸이었다. 거기에서 둘은 아무렇게나 펼쳐져 있는 이불을 개고, 만화책이며 옷가지로 뒤덮인 바닥을 대충 발로 치워내고, 앉은뱅이 밥상을 펴고, 케이크에 초를 꽂아 불을 붙였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재현의 목소리는 미성이라 듣기 좋았다. 큰 초가 하나, 작은 초가 아홉 개 꽂힌 케이크 위로 선우가 후 바람을 불었다. 불이 꺼지고 한참을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던 선우가 고개를 들자, 재현이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무슨 소원 빌었냐.”

“형한테 반말하게 해달라는 소원이요.”

“허.”

“지금부터 할게.”

 

재현은 어이없단 표정으로 선우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때렸다. 그리고 케이크를 먹다가 퍼질러 누워 수다를 떨었다. 곰팡이 핀 천장을 바라보며 둘은 조잘조잘 떠들었다.

 

“그럼 가을에 복학해야겠네?”

“엉.”

“나도 대학생 하고 싶다. 염색할래 형처럼.”

“공부나 해 너는.”

 

으 꼰대.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내뱉어버렸다. 재현은 잠시 빡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거두고는 손을 내밀었다. 폰. 내놔. 엥? 폰은 왜. 번호 찍게. 형 나랑 친해지고 싶구나. 엉. 싱겁게 끝난 대화에 괜히 불쑥 부끄러움이 올라온 선우가 뜸 들이며 폰을 내밀었다. 언제적 투지폰이야. 재현이 쿠사리를 먹이고 나서야 선우가 멋쩍은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재현과 선우는 서로의 인생에 발을 들였다.

 




벚꽃의 꽃말은 시험기간이라는데 우리 선우는 참 잘도 노는구나.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무시한 채 선우는 지고 있는 벚꽃을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재현의 스마트폰이었다. 꽃을 찍을 거면 꽃만 찍고 하늘을 찍을 거면 하늘만 찍지 주구장창 하늘에 꽃이 슬쩍 걸쳐진 사진만 찍길래 핀잔을 주었더니 형은 감성을 모른다며 볼멘소리로 대답해왔다. 재현은 그냥 웃었다.

 

여름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사 먹으면 안 되냐는 재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수박화채를 만들어보고, 부산에 내려가서 조개구이를 먹고, 선우의 완강한 고집으로 산에 기어들어 가서 글램핑도 해보고, -물론 모든 경비는 재현이 댔다.- 평범하게 선우의 집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며 낄낄거리고. 열대야에 못 이겨 방을 나온 날은 좁은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별구경을 하기도 했다. 아이스크림 쭉쭉 빨던 선우의 위로 길게 그림자가 지고 달빛을 등진 재현이 그대로 입 맞춘 날, 둘은 저들이 하는 것이 사랑이라 확신했다. 축축하고 뜨겁게 몸에 달라붙는 공기, 흘러내려서 손가락에 닿는 메론맛 아이스크림, 제 입술을 훑는 재현의 말랑한 혀 같은 것들을 선우는 꼭꼭 기억해두었다.

 

선우는 재현이 신기했다. 재현이 가진 색이 참 이상했다. 저 말고는 살아있는 것 하나 없는 케케묵은 방, 형광등을 밝혀도 그 아래 몸뚱어리가 도무지 따뜻하지가 않아서 딱딱한 방바닥에 누워 등을 동그랗게 말아보던 밤, 이따금 자다가 얼굴에 눈물 자국 죽죽 그어져 깬 날에 그 습기 하나 증발시키지 못하고 물이끼 낄 듯 축축하게 젖어 들던 벽, 도화지만 한 창문으로는 도저히 볕이 닿지 않아서 자꾸만 까맣게 해져가던 방 귀퉁이. 그 해묵은 것들을 재현이 엎지른다. 불 켜도 환해지지 않아서 싫었던 방이, 재현이 곁에 있으면 환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온갖 사람들 다닥다닥 붙어사는 동네면서 밤이 짙게 깔리면 숨 쉬는 것들 다 사라진 것 마냥 고요가 감돌아서 서러웠던 집이, 곁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 하나로 가득 메워진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행복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9월도 더운 건 마찬가지였으나 아침저녁으로 조금 선선한 바람이 불기도 했다. 학교에서 나눠준 스터디플래너는 텅 빈 채로 책상 구석에 처박아 뒀는데, 한참을 뒤져 그것을 찾아낸 선우는 9월 13일에 정성 들여 꾹꾹 글씨를 눌러 썼다. 재현이 형 생일.

 

“형 생일에 뭐할까?”

 

잔뜩 신나서 떠드는 선우의 목소리에도 재현은 반응이 없었다.

 

“형 자전거 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그날 한강 갈까.”

“아니, 아니. 싫어.”

 

선우의 말끝을 잘라먹고 재현이 대답해왔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선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 왜 그래?”

“그냥 너네 집에서 둘이 있자.”

 

등치는 산만 하면서 제 허리를 감싸고 뒤에서 안아오는 품이 어쩐지 비 맞은 강아지, 풀 죽은 어린애 뭐 그런 종류의 작고 가엾은 존재로 느껴졌다. 선우는 허리를 감싼 팔 위로 손을 겹쳐 단단하게 당겨 안았다. 그리고선 고개를 돌려 재현과 눈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응. 그러자.

 



기다리던 재현의 생일날 둘은 좁은 방 한 칸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뭐 이런 생일이 다 있나 싶은데, 당사자인 재현이 저를 품에 가두고 놓아주질 않아서 선우도 반항 없이 가만히 안겨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하게, 평소엔 좋아하지도 않는 과자가 먹고 싶어져서.

 

“형 나 매새 먹고 싶다.”

“매새?”

“매운 새우깡.”

“참아.”

 

별걸 다 줄인다고 핀잔줄 줄 알았던 재현은 단호하게 참으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이 형 진짜 이상하네.

 

“내가 사 올게. 형은 여기서 기다려.”

“어딜 나가. 가지 마.”

“형 대체 왜 그래. 어디 아파?”

 

참다못한 선우가 결국 짜증을 내었다. 형 오늘 진짜 이상해. 아니, 그냥 이번 달 들어 나사 빠진 사람 같아. 형 생일을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보내는 것도 싫고 미안한데 왜 나가지도 못하게 해. 선우가 말을 쏟아낼 동안 한마디도 못 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재현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이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벅벅 쓸어내렸다.

 

“알겠어. 그럼 내가 사 올게.”

“뭐?”

“매운 새우깡. 내가 사 올게. 넌 집에 있어.”

 

재현은 일방적으로 대화를 끝내고 몸을 일으켜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져지를 주워 입었다. 폰을 추리닝 주머니에 넣고 지갑을 챙기면서도 시선 끝에는 계속 선우를 담았다. 불안해 보여. 선우는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재현은 금방 다녀올 테니까 꼭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하고서야 대문을 나섰다. 5분 거리를 뛰어서 3분 만에 도착하고서 손을 벌벌 떨며 슈퍼 문을 열었다. 매운 새우깡. 이것만 사 들고 가면 화낼 테니까 투게더 하나랑. 빼빼로 하나.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몇 개 주워든 재현은 계산하는 동안에도 손톱을 씹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카드를 받아들고 빠른 걸음으로 슈퍼를 나서면서는 조금 안심했다. 어쩌면 오늘은. 오늘은 괜찮을지도 몰라.

 

내내 구겨져 있던 미간에 조금은 힘이 풀렸다. 재현은 까만 봉다리를 고쳐 잡고 선우의 집이 있을 오르막길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세상이 까맣게 꺼진 사람처럼,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그렇게 굳어버렸다.

 


“짠! 놀랐지.”

 


선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재현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뛰어온다. 재현은 그 자리에 가만히 못 박혀있다. 차라리 지금 눈을 감을까.

 

예정된 것처럼 클랙슨 소리가 울린다. 평소에는 오토바이조차 잘 지나가지 않는 이 달동네 골목길에, 차 한 대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인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려온다. 무서운 속도로, 선우를 향해. 그 아이를 집어삼킬 아수라가 붉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 선우가 경적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땐 이미 몸이 공중에 붕 떠버린 후였다. 그대로 추락. 자동차는 슈퍼 옆집을 박아 벽을 다 허물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고 헐레벌떡 중년의 남성이 내렸다. 슈퍼 아주머니도 놀라 뛰어나왔다. 미동 없이 축 늘어진 선우의 몸을 안아 들고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119를 부르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재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텅 빈 눈으로 그 장면들을 담아내다가 이내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찔 움직였다.

 

그리고, 뒤돌아 달렸다. 비극이 내려앉은 골목을 벗어나 마구 내달렸다. 달동네를 내려오며 몇 번이나 굴러 무릎이 깨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위눌린 사람처럼 뻣뻣한 몸으로, 악몽에서 도망치듯 앞만 보고 달렸다. 큰 길가에 다다르고는 무작정 도로에 뛰어들어 택시를 잡아탔다. 목구멍이 꽉 막혀 쇳소리만 나오는 탓에 목적지를 알아듣지 못한 택시 기사가 화를 냈다. 더듬더듬 겨우 집 주소를 내뱉고 탈진하듯 고개를 젖혔다. 1분 1초가 억겁같이 느껴졌다. 택시가 집 앞에 멈춰 서자마자 오만원권 지폐를 내던지고 미친놈처럼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 도어락 앞에서도 손가락이 자꾸 미끄러져 꽤 애를 먹었다. 겨우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방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고이 올려져 있는 수첩을 집어 들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어 글자를 휘갈겨 썼다.

 


16번째.

장소 김선우네 동네 슈퍼 앞.

집에만 두려고 했는데 자기가 기어 나옴.

혼자 두지 말기.

 


마지막 온점을 끝으로 펜을 놓은 재현은 현기증이 도는 머리를 감싸 쥐고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아직 기회가 있잖아. 괜찮아.

 

팔을 뻗어 책상 끄트머리에 놓여있는 모래시계를 집어 든다. 손바닥만 한 모래시계는 모래들이 다 아래쪽으로 쏟아져 내린 상태였다. 재현은 망설임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 모래가 역류하는 것을 바라보다, 기절하듯 쓰러졌다.

 



눈을 뜨니 제 방 천장이 보였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날짜를 확인했다. 


2018년 4월 12일.

 





해가 저물 때까지 골목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 하늘만 쳐다봤다.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현은 입안 여린 살을 짓씹고, 손바닥 살들이 마구 파질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고,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나 지금 웃고 있는 거 맞겠지. 조금 불안했다. 걱정이 스민 얼굴을 감추고, 자길 지나쳐가는 뒤통수를 향해 툭 말을 뱉었다.

 

“야 고딩.”

 

어깨를 움찔 들썩이며 놀랐다가 뒤돌아 자길 훑어보는 불량한 눈빛.

 

“저를 아세요?”

“가슴팍에 박혀있네. 김선우.”

 

선우야, 김선우야.

이번에는 살려줄게.

제발, 살아주라.

 

“누구신데 갑자기”

 

너를 살리기 위해 이 만남을 열일곱 번째 겪고 있는, 너의 연인이야.


 





흔한 서사

w.에게







2018년 9월 13일 김선우가 죽었다. 재현의 생일을 맞이해 데이트를 하고 헤어진 후에. 편지를 주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 자정이 지나기 전에 전해주려고 재현의 집을 찾아갔다가. 도로 건너편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재현을 보고 붕붕 뛰며 인사한 뒤에. 재현을 향해 달려가다 편지를 흘려서 주우려 몸을 숙였다가, 반대편에서 돌진하는 차를 보지 못해서. 재현이 보는 앞에서 그렇게, 죽었다.

 

산 사람보다 시체에 더 가깝게 지내던 재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김선우의 방 한편에서 작은 모래시계를 주웠다. 모래시계의 밑면에는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막대가 새겨져 있었다. 막대 양극단에는 0에서 20까지의 숫자들이 촘촘히 적혀 있었다. 숫자 아래로는 작은 칸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첫 번째 칸이 까맣게 채워진 상태였다. 비어있는 투명한 칸들을 바라보다 무심코 모래시계를 뒤집고 나서 재현은 약을 먹은 듯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니, 시간은 5개월 전. 김선우를 처음 만난 2018년 4월 12일로 돌아가 있었다.

 

몇 번이나 날짜를 확인한 재현은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 것을 알고는 과거를 바꿔 선우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선우를 처음 만났던 곳에서, 똑같은 상황 똑같은 말투로 가짜 첫 만남을 연기했다. 그러면서 9월 13일을 기다렸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선우가 죽었던 장소를 피하면 그 애를 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재현은 부러 자정을 조금 앞둔 시간에 선우를 자신의 집과 반대 방향인 공원에 불러냈다. 그런데도 선우는 또 죽어버렸다. 절망한 재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모래시계를 떠올리고 집을 향했다. 모래시계는 책상 위에서 가지런히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로 다 쏟아져 내린 모래알들을 바라보다, 막대가 두 번째 칸까지 까맣게 채워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재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재현은 바로 모래시계를 그러쥐고, 뒤집었다. 예상대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4월 12일이었다.

 

재현은 책상에 모래시계와 수첩 하나를 두고 한참 생각했다. 저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시간이 돌아가고, 5개월을 거쳐 9월 13일이 되면 김선우는 죽는다. 한 번 시간을 돌릴 때마다 모래시계 아래의 막대가 한 칸씩 채워진다. 아마 숫자의 끝인 스무 번째가 마지막이겠지. 김선우를 살리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들, 죽음을 피할 경우의 수들을 그려보았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네 번째 타임리프에서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선우가 죽었던 장소를 피해 다녔다. 선우를 아예 엉뚱한 장소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먼 지역의 카페라거나 선우가 다니는 고등학교 운동장 같은. 그러나 어떤 상황이든, 어떤 장소든 예정된 운명처럼 9월 13일에 김선우는 죽었다. 카페에서는 실내 공기 답답하다고 잠깐 가게를 나섰다가 갑자기 덮쳐오는 차에 치여서, 그리고 운동장에서는 벤치에 앉아있다가 급발진한 차를 피하지 못해서. 사람도 차도 잘 오지 않는 시골로 내려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상황이 선우를 죽음으로 내몰고 재현만 덩그러니 남게 했다. 한 번 더 시도했다가 또다시 선우의 죽음을 보고, 이 방법을 그만두었다.

 

재현은 타임리프를 반복하며 자신의 실패들을 수첩에 기록했다. 시간은 리셋 되는데 재현의 기억과 수첩 속 메모들만은 사라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였다. 다섯 번 실패하고 알아낸 것은, 처음 선우가 죽은 장소에서 벗어나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또, 죽음을 반복할 때마다 죽는 시간이 달라진다는 것. 아마 재현의 개입으로 죽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섯 번째부터는 대신 죽으려 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그러나 김선우의 죽음이 예정된 시간에, 선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대신 서있어봐도 운명은 지독하게 선우를 점 찍어 재현에게서 앗아갔다. 선우를 향해 돌진하는 차에 달려들어 보기도 했지만, 방향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거리에서도 차는 선우를 타깃으로 바퀴를 틀었다.

 

그다음엔 김선우를 모른 척 해봤다. 김선우가 제 생일에 꼭 죽어야 하는 운명인 게 혹시 자기 때문이라면, 만남 자체를 없애볼까. 처음 만난 날로 돌아가서 우리의 만남을 없던 일로 만들어볼까. 싶었기 때문이다. 재현은 선우를 만났던 날로 돌아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피하고 무시하고 도망쳐도, 결말이 정해진 비극인 것 마냥 이재현은 김선우를 계속 마주쳤다. 재현을 관망하는 신이 체스 말 놀리듯 선우를 재현 앞에 데려다 놓고, 엮이게 하고, 사랑하게 만들고, 마지막엔 죽이는 것만 같았다. 운명처럼 자꾸만 제게 다가오는 선우를 필사적으로 피해 본 적도 있지만, 그런 재현을 비웃기라도 하듯 9월 13일이 되면 눈앞에서 김선우는 또 죽었다. 재현과 연인이 되지 않았는데도, 함께 있지 않았는데도. 우연을 가장해 재현 앞에서 또.

 

먼저 죽으려고도 해봤다. 선우가 죽기 전에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자신과 선우의 인연도 끊어지고, 빌어먹을 운명에 묶여있던 선우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재현은 죽을 수도 없었다. 잔인한 신이 휘갈겨 쓰고 있는 이 이야기 안에서, 재현의 죽음만은 절대 금기라는 듯이.

 

열여섯 번째 타임리프에서는 선우를 집 안에만 두려고 했다. 이제까지 모든 죽음은 차에 치이는 것이었으니까, 차가 들어올 수 없는 장소에 있으려 했다. 본인 발로 기어 나와버려서 살릴 수 없었지만.

 



재현은 넝마처럼 닳은 수첩을 첫 장부터 다시 넘겨보았다. 연인의 죽음을 몇 번이나 목격하면서 기록한 글씨들이 가엾게 뒤틀려있다. 써 내려가며 삼켰던 비명들이 모조리 글씨에 꾹꾹 담겨있다. 더 무너질 마음조차 남지 않았다.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잖아. 시간을 되돌려 죽은 연인을 살려내는 이야기.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해 빠진 스토리잖아. 근데 나는 그 흔한 서사의 주인공도 못 되나 봐, 선우야. 단 한 번도 너를 살려낼 수가 없더라. 그 흔한 기적이 우리한텐 없더라. 세상에 없는 선우에게 한탄해보기도 했다.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이 싸구려 서사가 재미있는지.

 

재현은 지칠 수도 없었다. 그 애를 살려야 하니까. 모래시계를 본다. 처음부터 닳아있던 한 칸과 재현이 쓴 열여섯 칸. 총 열일곱 칸이 까맣게 채워져 있었다. 열여덟 번째 칸도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는 중이었다.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휴대폰 액정에 팝업창이 떴다.

 

[형 집 도착했어? 생일 축하해줘서 고마워.]

 

선우에게서 온 문자였다. 시간을 보니 4월 13일로 넘어가는 자정이었다. 재현은 너무 많이 반복해서 익숙해진 답장을 전송했다.

 

[엉. 내년 생일도 축하해줄게 꼭.]

 




“형 경영학과랬나? 졸업하고 뭐 할 건데?”

“몰라 그냥 성적 맞춰 간 거라.”

“나는 커서 뭐하지.”

 

지금부터 생각해 놔, 를 내뱉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선우에게 그런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혀뿌리가 굳은 듯 한참을 머뭇거렸다. 선우는 그런 재현을 보며 재수 없다는 듯이 툴툴거렸다. 지금 나 공부 못 한다고 무시해? 뭘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어, 열 받게.

 

선우는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데 재현은 깊은 구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둘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닮아가고, 그래서 입을 맞추고, 끌어안고, 온기를 기억하며 시간을 보냈다. 재현은 이미 더 손 쓸 수도 없이 사랑하는 연인을 앞에 두고, 사랑에 빠져가는 모습을 연기했다. 이따금 감정이 비적비적 새어 나와 자기보다 작은 등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일도 있었다.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이야기 속에 덩그러니 놓인 것 같아서, 묶어 둘 수 없는 시간이 너무 두려워서. 낮은 어깨에 이마를 대고 한참을 서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선우는 이 형 왜 이래. 하며 질색을 하다가도 손을 들어 재현의 등을 토닥토닥 감싸주었다.

 

삼,이,일. 재현이 길을 걸으며 속으로 카운트를 셌다. 끝나기 무섭게 선우가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질리도록 반복해온 광경이다. 한참을 발이 묶여있는 선우를 보며 재현이 기가 찬다는 듯이 물었다.

 

“너 설마 꽃 선물 받고 싶냐.”

“그냥 예뻐서 보는 건데?”

“어우 징그러워.”

“개짜증나 이재현.”

 

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로 툭툭 선우의 신발코를 건드리니 눈을 세모꼴로 뜨고 노려봐왔다. 재현은 또 시끄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스무 살 되면. 성년의 날에 선물로 줄게.”

 

자기가 내뱉은 말인데도 너무 아팠다. 목구멍이 따끔하다. 나 지금 웃고 있겠지? 또 확인해야 했다.

 

“약속 안 지키면 그때부터 내가 형 한다.”

 

선우가 픽 웃으며 대꾸했다. 존나 기어올라. 재현의 혼잣말에 선우가 발을 쾅쾅 구르며 앞서 걸어 나갔다. 평범한 8월의 오후였다.

 



재현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선우의 뒷모습을 구경했다. 까만 다리가 공중에서 달랑달랑 흔들렸다. 엄청 신났네.

 

“너 공부하냐?”

“아니.”

“엉. 아닐 줄 알았다.”

“오늘치 짜증 다 냈으니까 더 빡치게 하지 마~”

 

할 일을 끝낸 선우가 플래너를 덮고 뒤를 돌아 재현과 눈을 맞췄다.

 

“형 생일에 뭐할까?”

 

재현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형 자전거 타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 그날 한강 갈까.”

“아니. 하고 싶은 거 따로 있어.”

 

뭐냐고 묻는 말에 재현은 웃으며 그때 알려줄게, 하고 말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이재현이 가장 기다리고 원망하는 날. 9월 13일이 되었다. 선우에게 집에서 꼼짝도 말라고 단단히 일러 놓은 재현은 양손에 매운 새우깡을 다섯 봉지나 든 꼴로 선우의 집을 찾아왔다.

 

“하고 싶은 거 있다더니 왜 우리 집에서 만나. 뜬금없이 매새는 또 뭐고.”

“선우야. 잘 들어.”

 

방바닥에 과자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재현이 선우의 어깨를 감싸 쥐고 눈을 맞췄다.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기만 하기에 선우는 조금 당황한 티를 냈다.

 

“형 나 고등학생인 거 알지?”

 

팔을 엑스자로 만들어 제 가슴께를 가리는 선우를 보고 재현은 준비했던 말이고 뭐고 푸학 웃어버렸다. 숨도 못 쉬고 웃는 재현을 보면서 선우가 하는 말은, 웃으니까 생일 같네. 생일에 왜 초상난 표정을 하고 있어. 좀 웃어라, 얼굴 믿고 인상 쓰지 말고. 생일 축하해. 였다. 허리까지 굽히며 끅끅거리던 재현은 그 말을 듣고서도 계속 웃었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계속. 형 미친놈같아 그만 웃어. 선우는 진짜 어디 아프냐며 재현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재현은 손을 뻗어 제 이마를 덮은 선우의 손을 겹쳐 잡고, 그대로 끌어내려 제 뺨에 대었다. 얼굴이 온통 축축하다. 잡힌 손이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았다.

 

“형 울어?”

“선우야. 있잖아.”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다. 이게 제일 쉬운 방법이니까. 그런데 저를 바라보는 말간 얼굴을 보면, 차마 이 지리멸렬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다. 선우는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다. 그냥 제힘으로 살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 방법이 없다. 말해야 했다.

 


“너 오늘 죽어.”

 


사실 예전에 죽었어 이미. 너 죽고 병신처럼 지내다가, 우리 처음 만났을 때로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을 알게 됐어. 그래서, 몇 번이고 되돌려서. 너 살리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계속 실패했어.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는데도 너 하나 살릴 수가 없더라. 이제 너한테 다 말하고 비는 것 밖에 못해 나는. 오늘만 넘기면 돼, 오늘만 무사히 보내면 너 살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하루만 아무것도 안 하고 나랑 여기에 있자. 오늘이 지나면 생일 그거 다시 하자. 너 하고 싶다고 했던 것들 다 같이 해줄 테니까…

 

말하다 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오열하며 더듬더듬 이어가는 문장들은 인간의 말소리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처절했다. 늘 단단한 바위 같던 재현의 몸이 휘청였다. 선우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푹 젖은 재현의 뺨을 그러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쓸어주었다.

 

“못 믿겠지, 선우야.”

“아냐. 믿어.”

 


고생했네. 힘들었겠다. 고마워.


 

덧붙이는 말에 재현은 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재현을 따라 자세를 낮춘 선우가 저보다 큰 몸을 품에 안고 떨리는 등을 감싸주었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끊어질 듯 위태롭게 몰아쉬던 숨이 안정될 때까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울던 재현은 선우의 품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색색거리는 소리만이 좁은 방을 가득 채웠다. 선우는 말없이 재현을 계속 토닥였다.

 



눈을 떴을 때는 온통 깜깜했다. 창밖에도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찬 바닥에 누워있던 재현은 더듬거리며 주변으로 손을 뻗었다.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선우야? 너 어디 있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벌떡 몸을 일으켜 형광등 스위치를 켰다. 혼자였다. 선우가 없었다. 불을 켰는데도 세상이 암전되는 기분이었다. 재현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문턱을 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맨발로 좁은 마당을 지나 대문을 벌컥 열었을 때, 눈앞에 보인 건 약봉지를 들고 서 있는 선우였다.

 

“너 어딜,”

 

울컥 치미는 감정에 말문이 막힌 재현이 고개를 젖히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드러난 턱과 목이 온통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선우가 없음을 깨닫고 뛰쳐나오는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땀을 비 오듯 쏟았다. 심장은 바닥까지 꺼졌다가 불안함에 요동치길 반복했다. 재현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처박은 장본인은 놀란 눈으로 동그랗게 뜬 채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으득, 이가 갈렸다.

 

“넌 내가 하는 말을 대체 뭐로 들은 건데.”

“아니, 형 열 나길래…”

“그게 중요해? 니가 죽는다는데, 하루만 나가지 말고 있어 달라는데…”

 

선우는 대답 없이 재현의 눈치를 살폈다. 엄청 화내고 있었으면서, 선우가 습관처럼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 재현은 선우의 입술에 제 검지를 갖다 대었다. 그건 재현의 습관이었다. 엄지와 검지로 아랫입술을 쓸어내리다가 이내 나머지 손가락을 펼쳐 선우의 오른쪽 뺨을 감싸주었다. 선우는 강아지처럼 재현의 손 쪽으로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는 따뜻한 손바닥에 제 뺨을 부볐다.

 

“미안해. 근데 형 열이 너무 심했어. 병원 가자고 흔들어 깨웠는데도 안 일어나서, 무서워서 그랬어. 약이라도 먹이려고. 심야약국 가까우니까 괜찮을 거 같아서…”

 

무서워서 그랬단다. 재현은 선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잃을까 봐 무서운 기분은 제가 가장 잘 아니까. 선우가 불편해함을 알면서도 더 꽉, 으스러질 듯 안았다. 나도 늘 그랬어. 니가 사라질까 봐 무서웠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어. 매분 매초가. 선우가 손에 들고 있던 약봉지를 놓쳤다. 바닥으로 떨어진 봉지 안에서 작은 해열제들이 굴러 나왔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모습을 선우는 눈으로 좇으며, 몸은 가만히 재현에게 안겨있었다.

 

“형 또 울 건 아니지?”

“빨리 안 들어가면 땅바닥 구르면서 울 거야.”

“미쳤어 진짜.”

 

선우는 재현의 어깨를 밀어내며 부러 오버해서 치를 떠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선우에게 떠밀린 재현은 반쯤 열려있던 대문 안으로 발을 뻗으며 선우를 재촉했다. 빨리 들어와. 빨리. 아 잠깐만. 이것만 줍고.

 

선우가 굴러간 해열제를 주우려 걸음을 옮겼다.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였다. 손바닥 반 만 한 유리병들을 주워 다시 품에 안고, 숙였던 허리를 펴서 재현을 돌아보았을 땐, 재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재현의 시선을 따라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시력을 다 섬멸시킬 거 같은 빛줄기가 온 얼굴을 덮쳐온다. 헤드라이트인가, 이거?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땐, 이미 늦어버렸다. 끼이익, 쾅. 익숙한 굉음.

 



열일곱 번째 타임리프. 김선우를 살려내는 데에 실패했다. 또.

 










갑자기 차가 달려올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애초에 차가 잘 다니지도 않는, 다 쓰러져가는 달동네 골목길. 그런 길에 고작 몇 분 나와 있었다고 죽는 거면, 정말 김선우의 운명인 걸까. 재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 바꿀 수 없는. 그날 꼭 죽어야만 하는 운명. 그걸 바꿀 수 있다고 믿고 발버둥 친 게, 교만이었을까.

 

재현의 시선이 멍하니 모래알들에 머문다. 제 방 침대에 걸터앉아 책상 위 모래시계만 바라보기를 몇 시간째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며칠째 일수도.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비극일 수 있나. 지옥도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제가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벌레가 뒤엉켜 들끓는 웅덩이 같아 보였다. 언제부턴가 재현은 일상을 이루고 있던 사소한 풍경들이 하나둘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베개는 검게 썩어 떨어져 나간 살점으로 보였고, 커튼은 악취를 풍기는 피고름 같았다. 책으로 빽빽한 책장은 마치 축 늘어진 시체가 즐비한 아귀도인 것만 같았다. 무너진 채로 겨우 버티던 재현의 정신이 정말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스스로가 위태롭다는 건 재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 떨어지고 있는 걸까, 내가 걷는 이 지옥에 끝이 있긴 할까 매일 생각해왔으니까. 타임리프를 반복할수록 정신이 마모되고 바닥없는 깊은 수렁에 빨려들어 간다고 느껴왔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선우야. 


이 무저갱 끝이 너의 구원이라면 나는 더 추락해도 돼.

 



재현이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푹 꺼지며 축축한 늪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발을 들어 겨우 책상 앞에 선 재현이 모래시계를 집어 들었다. 손이 잘게 떨리는지, 모래알들이 요동쳤다. 열아홉 번째 칸, 열여덟 번째 시도. 눈을 질끈 감고 모래시계를 뒤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