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림답부
67년부터 179년까지 생존하였습니다.
165년에 차대왕의 폭정을 반대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신대왕을 올려앉힌 공로로 하여 최고벼슬등급을 받고 국상으로 임명되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172년 12월 외적이 고구려에 대한 대규모적인 침공을 감행하였을 때 많은 관료들이 싸울것을 제기하였으나 그는 적은 군사로 많은 외적과 맞서는 조건에서 청야수성전술을 쓸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 기명일은 말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명림답부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성을 굳게 닫고 완강하게 방어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적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였고 드디여 퇴각하게 되였습니다. 이때를 기다리고있던 그는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좌원에서 적들에게 섬멸적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들은 <말 한마리도 돌아가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명림답부는 이 전투공로로 하여 좌원과 질산지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명림답부는 고구려를 강대하게 만드는데 기여한 장군의 한사람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