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화 - 예술, 체육
30여년후에 알려진 사실
  1970년대 중엽 중국의 어느 한 가정에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와 교원들의 말을 잘 듣기로 소문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학교와 가정에서는 그가 능히 문학가로서의 명성을 떨칠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그에게 문학공부를 시켰습니다.
  워낙 소질도 있었던지라 그의 발전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얼마 안가서는 성적인 경연에서 순위권에 입선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 중앙대학에로의 넓은 길이 열려졌습니다.
  부모와 교원의 기쁨과 자부는 이를데 없었고 온 마을이 문학신동의 앞날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이였던듯 온 마을을 실망케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뜻밖에도 그 애가 자기는 문학가가 되지 않고 의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는것이였습니다.
  (뚱딴지같이 의사라니?!…)
  부모와 교원은 기절초풍했습니다.
  그날부터 무엇때문에 그런 결심을 하였는가고 아무리 물어보아도 그는 부모와 교원에게 일체 그 사연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제날의 문학신동은 희망대로 의사가 되였고 부모와 교원은 끝내 그 원인을 알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
  주체97(2008)년 우리 나라의 피바다가극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가극단이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공연을 진행하고있던 어느날 어제날의 문학신동이 나이지숙한 안과의사가 되여 가극단의 책임일군을 찾아왔습니다.
  먼저 공연성과를 축하하고난 안과의사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감회깊은 어조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안과의사로 된것은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지주놈때문에 눈이 먼 순희가 너무도 불쌍하여 울고 또 울었으며 앞으로 꼭 사람들의 눈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리라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결심대로 이렇게 안과의사가 되였습니다.》
  어제날의 문학신동이 30여년동안 가슴속에 깊이 묻어두고있던 사실은 바로 이것이였습니다.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주체61(1972)년 7월 이전 체스꼬슬로벤스꼬의 까를로비와리에서 진행된 제18차 국제영화축전에서 관례를 벗어나 특별상과 특등메달을 받고 당시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상영되였습니다.


  영화의 감동적인 내용과 장면들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어버리고 수억의 관중을 눈물의 바다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중국에서는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농촌사람들이 수십리길을 걸어서 현으로 모여들었고 신문들에서는 《모두가 눈이 퉁퉁 부어 영화관을 나섰다.》고 앞을 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당시 어린시절을 보낸 중국의 로세대들은 지금도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와 같은 조선의 혁명적인 영화들을 보면서 옳은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게 되였다고 감회깊이 추억하고있습니다.



  불멸의 꽃 김정일를 육종해낸 일본의 원예학자 가모 모도데루도 당시 일본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있던 이 영화를 보면서 자기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인류를 위하여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조선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는 지난 세기 세계영화계만을 뒤흔든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인생길도 바꾸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