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2분기 재고자산평가 손실이 1조9345억원에 달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 5913억원보다 세 배 넘게 급증했다. 재고자산평가 손실은 재고는 쌓이고, 구매하려는 수요는 줄면서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덤핑 현상이 발생한 데 따른 것이다. 팔 곳이 없어 재고만 쌓이는 탓에 '떨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사려는 곳이 없어 여의치 않다는 신호다. LG전자를 비롯한 다른 국내 기업도 재고자산평가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렇게 되자 기업은 공장을 돌리는 엔진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생산라인 가동률을 20%가량 하향 조정 중이다. 삼성전자는 TV 부문의 가동률을 1분기 84.3%에서 2분기에는 63.7%로 내렸다. 휴대폰 라인 가동률은 81%에서 70.2%로 조정했다. LG전자도 냉장고와 세탁기, 에어컨 등 생활가전 라인의 가동률을 전 분기 대비 최대 5분의 1 수준까지 떨어뜨렸다. 가동률 하락만큼 인력은 남아돌게 된다. 인력 운용의 조정 신호탄이 올라간 셈이다.
롯데케미칼은 재고자산평가 손실이 4000억원에 이르자 일찌감치 감산에 돌입했다. 하지만 공장 가동률을 낮춰도 경제 회복 기미가 없자 올해 신규 채용 계획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올해 채용할 인원을 모두 내년으로 미뤘다. 내년에도 공장 가동률이 회복되지 않으면 신규 채용은 더 늦춰질 수 있다. 이 회사 인사담당 임원은 "인재를 채용하지 않으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도 "재고가 쌓이고, 그에 따라 제품의 가격이 내려가는 상황에선 재무구조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말했다.
기업이 인력 운용 시스템을 만지기 시작했다. 근로시간을 비롯한 채용까지 전반적인 고용 조정에 착수했다는 뜻이다. 청년들이 먼저 직격탄을 맞을 전망이다. 여러 규제 때문에 기존 인력에 대해 구조조정을 하는 대신 신규 채용을 먼저 줄이는 쪽을 택하기 때문이다. 신규 채용을 하지 않는데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으면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번질 수 있다. 경제 불안으로 노동시장에 불어닥칠 후폭풍이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곳곳에서 노동시장을 뒤흔들 태풍의 전조가 급속한 속도로 생성되고 있다. 냉각 속도가 워낙 빨라서 고용 빙하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업이 이처럼 선제적 조치를 취하며 화들짝 놀라는 이유는 글로벌화가 가속화하면서 기존의 경제 패턴이 깨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환율이 상승하면 가격 경쟁력이 생겨 수출이 늘어나는 구조였다. 하지만 수출을 하면 할수록 적자를 보는 시대가 됐다. 외국에서 수입하는 원자잿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어서다. 여기에다 고물가로 내수 진작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금리가 인상되면서 이자 갚기도 버거운 판에 물건을 살 여력은 더 떨어진다. 내수도, 대외시장(수출)에서도 돈이 돌지 않아 기업과 가계를 가리지 않고 돈줄이 막혀가고 있다는 뜻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투자를 주저하게 되고, 기업은 자금 조달이 어려워 재무위험이 증가하게 된다. 여기에다 글로벌 시장이 잠행하면서 다른 나라의 통화가치도 떨어져 가격 경쟁력도 기대하기 어려워 수출이 안 된다"고 현 경제 상황을 진단했다. 성 교수는 "결국 일자리가 늘어날 여지가 없고, 위축될 수 있다는 것"이라며 "현 경제 상황의 여파는 빠르게 노동시장에 고스란히 전이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수출하면 적자가 나는 상황이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으로 고물가가 지속하고 있다. 인력을 끌어안고 가는 단기적인 노동시장 보듬기조차 힘겨운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는 조짐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는 "생산은 정체되고, 인건비 부담 가중이 겹치면 인력 구조조정, 더 나아가 산업 구조조정으로 번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업종별로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이병창 한국은행 경제통계국 국민대차대조표(B/S)팀장은 "조선과 같은 수주 기간이 긴 곳은 환율과 같은 경기 변동에 견디기 쉽고, 노동시장의 영향도 적게 받을 것"이라며 "반도체나 화학과 같은 업종은 채산성이 떨어져 고용이 늘지 않고 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고용 조정이 대두하는 업종의 경우 단기적으로는 채용을 기피하면서 고용을 늘리지 않는 방향을 택하고, 물량이 있을 경우에는 초과근무로 때울 공산이 크다"며 "재고가 쌓이는 상황이 되면 가동률 하향 조정 등으로 대응하다 중·장기적으로는 구조조정을 택하는 기업이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실제로 포스코의 경우 지난 7월 "복합 경제위기"라며 대응 방안을 내놓으면서도 올해 채용 계획은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향후 인력 운용 계획이 지속될 지는 의문이다. 이 회사 임원은 "공장 특성상 재고를 쌓아둘 곳이 없는데다 수주도 달려 생산라인 일부는 감산에 돌입했다"며 "현재는 인력 문제와 관련해 (경영계획에)변화가 없지만 계속 모니터링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의 대응책이 불명확한 것도 경제 불안과 노동시장의 위축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왔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은 "외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정부의 정책 방향을 모르겠다. 환율시장에 개입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맡길 것인가, 명확하게 정부 스탠스가 시장에 전달돼야 한다"며 "노동시장에 닥칠 충격도 그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정책의 신속성과 신뢰성, 정확성이 시장에 긍정과 부정의 신호를 가를 수 있다는 의미다.
같은 맥락에서 노동시장의 법·제도를 선진화해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일자리를 붙잡아야 한다는 대안도 제시됐다. 대외 환경 변화에 따른 수출 적자 등의 현상을 컨트롤하기는 힘들어도 이참에 내부 개혁을 통해 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투자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권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국내 일자리가 미국으로 대규모 리쇼어링을 한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라며 "노동시장은 경제 상황의 후행지수인 점을 고려해 지금이라도 노동개혁으로 선진화 모듈을 장착해 내부 경쟁력을 키우면 투자를 통한 온기를 노동시장에 불어넣을 수 있고, 경제 위기가 노동시장 전반에 주는 충격파를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기정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이 2년 이상 지속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고용빙하기가 도래할 가능성은 농후하다"며 "노동개혁은 그나마 최소한의 노동시장 유지를 위한 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