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시험관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하는 만큼 체중감량을 하지도 못했고, 물혹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시작을 해보기로 했다. 서울역차병원에서 검사까지 마치고 시험관을 목전에 뒀지만 서울역차 대신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체외수정을 시작했다.
서울역차병원에서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전원하게 된 계기는 오픈카톡방에서 만난 난임선배의 추천이 가장 컸고, 중위소득 180%까지는 5년간 부부에게 각각 100만원씩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자체적으로 지원을 해준다는 점이 두번째였다.
난임선배인 A 언니는 마흔이었고, 몇 번의 실패 끝에 국립중앙의료원으로 전원을 했다. 그리고 시험관 두번째에 임신을 했다. 다른 난임병원처럼 기나긴 대기도 없고, 1분컷 진료도 아니라며 입 닳도록 칭찬을 했다. 딱 하나뿐인 난임전문의인 최안나 선생님이 정말 좋다며 전원을 추천했고, 실제로 뵌 최안나 선생님은 언니의 말대로 엄마같이 자상하고 좋은 의사였다. 4시간 대기, 1분 진료인 난임병원과 달리 선생님은 1~2시간씩 긴 상담을 해주셨다. A 언니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전원을 했는데 다들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선생님께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나는 난임병원에서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이 신경쓰여서 궁금한 점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했고 진료도 1분컷이라 불편했는데, 이곳에서는 마음 편하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었고 진료실에 오래 있어도 눈치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선생님 덕분에 공공의료원이라 시설이 낙후되었다는 점, 의사를 제외한 직원들은 일반 병원과 달리 매우 불친절하다는 점은 익스큐즈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지난 달에 시험관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병원을 갔고 기대를 많이 했는데 뜻밖의 문제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자궁에 큰 물혹이 자리잡았다고 하셨다. 전원하면서 초음파 기록도 카피해서 들고갔는데 전에는 없던 물혹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한달간 피임약을 먹고 물혹을 줄인 다음에 시작해보자고 하셨다. 예전에 자궁내막증, 다낭성난소증후군으로 받았던 피임약 3통이 남아 있어서 처방은 받지 않았다. 언제 다시 쓰일까 싶었던 야즈가 물혹 제거용으로 다시 쓰이게 되어서 고맙다고 해야 할 지.
이번에도 자궁이 깨끗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시험관을 시작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초음파를 보고 결과를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일단 시작해보자.'고 하셨다. 일단 시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약을 처방받고 피검사와 심전도검사,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채혈실에서 피를 8통이나 뽑았다. 오랜만에 채혈 샤워를 해서 행여나 팔뚝에 피멍이 들진 않을까, 밴드 알레르기가 또 돋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무탈히 채혈을 성공했다.
약국에서는 이틀치의 과배란 주사를 처방받았다. 배주사 폴리트롭은 배란 유도제로 난포를 키우는 약이다. 폴리트로핀 75, 150, 225, 300 IU가 용량별로 있는데 나는 가장 용량이 큰 300 IU를 처방받았다.
국립중앙의료원에서는 어느 곳에서든 진료비 납부를 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물어보는데, 약국에서도 납부 처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약사가 납부 했냐는 말을 매우 강조하며 물어봤다. 지금까지 국립중앙의료원을 세 번 방문했는데, 국립중앙의료원의 환자들은 일반 대학병원의 환자들과의 행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고 행색이 남루한 분들이 많았다. 공공의료의 최우선에서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환자들을 위해 자리잡고 있는 국립중앙의료원에 감사한 마음이 들고, 병원에 있으면 공공의료는 확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이패스 등록을 하면 수납창구에서 수납하지 않고도 진료가 가능하고 당일 저녁에 하이패스 신용카드에서 결제가 된다. 난임환자라면 하이패스 등록을 강력 추천한다. 수납창구 대기가 기본 2~30명이다.
심장검사실에서 심전도검사를 했다. 난임병원이었다면 대기가 길었을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든 검사가 5분컷으로 빠르게 진행된다.
영상의학과는 주황색선을 따라가면 된다. 어르신들이 많은 병원이라 그런지 진료 기록지에도 주황색 선을 따라가라는 안내 코멘트가 있었다. 선만 보고 따라가면 되어서 대학병원보다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산부인과 간호사 선생님께서 배주사 맞는 법을 알려 주셨다. 난임선배인 A 언니가 간호사 선생님한테 보냉백을 달라고 말하라고 해서 난임환자의 필수품 보냉가방을 받았다. 폴리트롭을 생산하는 LG화학에서 만든 보냉가방을 주셨다. 앞으로 보냉가방과는 한몸처럼 잘 지내야 한다.
국립중앙의료원 2층에 중앙난임·우울증상담센터가 있다. 시험관 시술 전에 멘탈 관리를 위해서 상담을 시작했다. 첫회기는 카톡 영상통화로 상담을 했고 2회기차에 병원 날짜와 맞춰서 방문을 했다. 중앙난임·우울증상담센터는 보건복지부 소속의 국가중앙센터인데 사무실이 매우 협소하고 작아서 정말 놀랐다. 15평도 안되는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제대로 된 상담실도 따로 없었다. 정신건강전문요원, 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산부인과 전문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구성된 상담센터라고 하는데 센터 들어가보면 열악한 중소기업 그것도 5인 미만인 사무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보건복지부 예산이 부족한가? 난임은 여성가족부 사업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여성가족부 예산으로 중앙난임우울증상담센터 지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상담실은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
2회차에 상담을 하고 스트레스 측정 검사와 인바디 검사를 했다. 검사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데 난임 환자들은 상담센터에 거부감이 큰 느낌이 든다. 오픈카톡방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스트레스가 심해서 일상 생활이 어려울 것 같은 사람들도 많은데 난임상담이 무료라는 정보를 알려줘도 문을 쉽게 두드리지는 못하는 것 같다. 상담은 10회기로 진행이 되는데 1회기에 상담을 종료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조금만 더 마음을 열고 상담을 받으면 도움이 많이 될텐데.
상담선생님께 실패의 두려움이 크고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상황이 두려워서 이런 문제를 해결 하고 싶다고 말씀 드리니 임신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길러보자고 하셨다. 선생님 말에 위안을 얻었다.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 스탯을 키워봐야지.
오늘은 아침 10시에 폴리트롭 300을 자가 주사했다. 주삿바늘이 크고 두꺼운 배주사가 너무나도 두렵지만, 일단은 시작했으니 앞으로 나아 가야지. 실패해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