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Sex, 강한 국가
입력 2000.11.24 16:25
강한 섹스가 강한 국가를 만든다는 주장의 한 가지 근거로는 독일의 대학생활을 들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학창생활은 즐거운 법이다. 18세기 중엽 ‘폭풍과 파도’로 표현되는 젊은 독일의 시대-학생들도 생명적 비약에 불타고 있었다. 독일 서부의 예나와 괴팅겐 등의 대학도시에는 학생들이 최상의 청춘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대학생의 태반은 하숙생활을 했었는데 그것도 ‘세끼 식사에 처녀가 딸린’ 감칠맛 나는 하숙이었다.
당시 학생생활의 풍속을 기술한 마기스텔 타우크하르트의 저서 ‘예나에서는 대학생은, 이른바 샤르만트라고 불리는 여성 한 사람씩을 모두 갖고 있었다. 이 샤르만트는 신분이 천한 처녀들로 대학생이 이 도시에 있는 한 처녀들과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유지하다가 공부를 마치고 이 도시를 떠날 때는 후배 대학생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고 나와 있다. 예나라는 대학도시에는 그 당시 일반 가정집 처녀에서 대학교수의 딸까지 한 사람 남김없이 학생과의 연애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미망인이 경영하는 하숙집에서는 두서너명의 대학생을 두고 ‘매일 밤 차례차례 동침했다’고 하는 일처다부적인 정사까지 해낸 극단적인 방종도 예사롭게 볼 수 있었다. 시들어가는 남편보다 싱싱하고 정력이 넘치는 대학생쪽이 매력적이었으며 게다가 뒤탈도 없었다. 대학도시의 모든 동네에서 대학생은 침대의 손님으로 대환영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학생의 생활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비도덕적인 행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의 구가였고 우애정신의 발로였다.
선배들은 학생들에게 “사랑하는 친구여, 술을 마셔라. 싸움을 해라. 마음껏 놀아라. 그것은 모두 제군의 자유사상과 마찬가지로 제군의 명예를 조금도 손상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학생활에서 유럽의 강력한 근대국가가 된 젊은 독일이 건설되었다고 지금의 독일인들은 이야기한다.
동프로이센의 소국에 불과했던 프러시아는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공고한 군주에 의해 오늘날 독일 통일 국가의 기초를 쌓아올렸다. 그것은 침략과 정복에 의한 완력다짐의 판도 확장과 통일이었다. 따라서 병력의 소모는 소총의 탄약과 비례해 엄청났다. 지원병과 용병으로는 모자라 징병제를 실시하고 병력을 모았다. 겨우 3만이었던 상비군이 8만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전쟁 때마다 곧 2만~3만명의 병사들이 소멸됐다. 이웃나라 프러시아에 잠입해 건장한 젊은이를 납치해 모자라는 병력을 보충했다. 그래도 병력이 늘 부족했으므로 군주는 대담한 인구증산 정책을 구상했다.
빌헬름 1세는 ‘앞으로 10년간 60세 이하의 남자는 수도원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든 남자는 아내를 두 사람씩 거느리라’고 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대왕은 도덕법전-형법전을 만들어 이른바 애욕의 범죄에 대한 일체의 규제를 배제하고 그 인구정책을 위해서는 축첩은 물론 근친상간과 강간 그리고 처녀 능욕까지도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 젊은 처녀들이 교회에서 간음의 죄를 범하고 참회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 불량한 품행에 대한 비난도 금지시켰다. 중혼은 합법적으로 인정되고 낙태에 대한 사형도 폐지했다. 임신할 만큼 출산능력이 있는 여자라면 장래에도 수태가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어찌 되었든 ‘낳아라, 늘려라, 남자는 종마가 되거라’며 출산을 장려했던 것이다. 이미 이 나라에서는 풍기문란이니 하는 말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런 정책이 시행된 이후 바라던 대로 급속하게 인구는 증가했다. 남자는 병역에 복무하고 여자는 방적공장의 여공이 되어 직물생산에 종사, 산업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성을 과감하게 해방시켰다.
성은 이미 꺼림칙한 종교적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간통이나 외도라는 말조차 사전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또한 창녀의 존재 이유도 없어졌다 매독으로부터도 낙태의 공포로부터도 여자들은 구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활기에 넘치고 부유한 국가로 근대 유럽에 군림하게 되었다.
곽대희 피부비뇨기과 원장/일러스트 조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