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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증언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충격적 고백!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
2004-10-27 17:11:00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간단해요. 혼자 하는 무술은 고달프거든. 상대가 있어야 서로 경쟁력이 생기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겁니다. 다른 도장에서는 ‘사람 죽는다’고 반대할 때 우리(지도관)가 먼저 겨루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제시대 부민관이 있던 장소에서 시합을 열었는데, 우리쪽 아이들이 다 이기다시피 했어요. 다른 도장은 시합을 안 했으니까 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처음엔 지도관의 겨루기를 두고 다른 도장에서 말들이 많았어요. 사람이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 그때 내가 ‘죽긴 뭘 죽어, 밥을 죽여?’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다른 도장들도 노상 질 수는 없으니까 겨루기를 적극적으로 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 도장이 맥을 못 추는 신세가 됐어요.

저는 처음부터 태권도의 가치를 높이려면 경기화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자가 나와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건 미미한 비율이었어요. 그보다는 싸우면서 선수들의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스포츠 전체를 볼 때 수기(手技)는 권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족기(足技)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경기에서는 주먹을 못쓰게 하고 경기 규칙도 발공격 중심으로 만들었고….

이걸 가지고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발만 쓰는 건 아닌데 주먹 점수를 없애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해서 지금은 주먹을 쓰되 얼굴을 때리면 반칙을 주도록 고친 겁니다. 어떤 운동이든 스포츠로 발전하려면 뭔가 독특한 것이 있어야 돼요. 말하자면 축구는 발로 차는 거고 농구는 손으로 던지는 게 특징이죠. 그래서 우리는 발 중심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만일 태권도를 서로 엉겨붙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경기로 만들었다면 아주 지저분한 싸움이 됐을 거예요.”

―경기화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싸움을 붙여보니까 재미있거든.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을 하잖아. 솔직히 태권도를 배웠다는 놈들이 밖에서 매 맞고 들어오면 기분 나쁘잖아. 그래서 매맞지 말라고 시킨 건데, 아이들이 단순히 손발만 빨라지는 게 아니더란 말이에요. 제일 중요한 건 순간 포착력이 빨라진 점입니다. 결국 경기화가 선수들의 말초신경까지 발달시켜놓은 거죠. 저는 실전 경험이 많아서 그걸 잘 알아요.”

―안전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초창기엔 검도 선수들의 투구를 헤드기어로 이용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때리는 사람은 손에서 피가 나고, 맞는 사람은 투구가 흔들려 머리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펀지를 넣어서 헤드기어를 만들었죠.”

―저는 초등학교 때 1년쯤 태권도를 배웠는데, 당시 사범이 태권도는 자기수련이라고 자주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요즘 들어서 태권도가 경기화에 치중하다 보니까 자기수련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옳은 얘기예요. 태권도는 스포츠로 인격을 기르는 운동이기 때문에 도(道)라는 말을 붙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게 더 흥미있고 즐길 수 있느냐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혼자 하는 품세는 고독하고 힘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겨루기를 시작한 거고. 겨루기를 하다보면, 이기면 이길수록 신이 나고, 지면 그날밤 잠을 설치면서 자기가 어떻게 맞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단 말이에요.”

태권도는 유난히도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지금까지 한국 태권도계를 이끌어온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채명신 최홍희 김용채 김운용 최세창 이필곤…. 또한 역대 대통령들도 태권도에 상당한 관심을 쏟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태권도인들이 시범을 보인 것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와 군대에 태권도가 집중적으로 보급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태권도가 ‘국기’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직후부터 맺어진 정치권과 무도계의 특수한 관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태권도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운용씨를 회장으로 모신 건 그 양반이 당시 태권도인들보다 좀 낫고, 자금 등 여러가지로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볼 때 태권도인 중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가진 역량이 뻔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용한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이용당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 시점에서 득과 실을 따져보면 득을 많이 본 게 사실입니다.

군사혁명 시절에는 채명신 장군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돈 한푼 내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김용채씨를 앉혔죠. 그 사람은 나름대로 국고지원도 받고 해서 기초를 잘 닦았어요. 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요로에 많은 협조요청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 뒤를 이어 김운용씨가 큰 일을 했고….”

―태권도계 인사들을 보면 과거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태권도를 한 사람들이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로 해서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누르려는 저의가 숨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건 말하기 곤란한 얘기인데, 상대방이 수 틀리게 나올 때를 대비해 제어장치로 갖다놓은 사람도 있고…. 결국 그 사람들은 죄가 없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죄인이죠.”

―총회나 이사회 같은 데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로 눈에 거슬릴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내세우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거죠.”

―태권도계의 해묵은 파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얼마전 대한태권도협회는 우여곡절 끝에 두 정치인이 맞붙어서 구천서 전의원이 회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정치인이 회장을 맡는 건 문제가 없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일하기 나름이죠. 처음에는 누구나 잘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들어와서는 공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태권도인들 스스로 태권도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태권도인들한테 몰매 맞아 죽을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심사비를 규정대로 받는 도장이 아마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반성할 때가 된 겁니다.”

―1980년에 태권도계의 국보위 정화자 명단을 이부원장께서 직접 작성하신 경위를 설명해 주세요.

“국보위에서 정화자 명단을 내라고 통보가 왔잖아요. 그러니까 김운용씨가 고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나하고 의논해서 명단을 작성하고, 원로들도 다 퇴진하기로 결정한 거죠. 무더기로 사람을 자르고 원로랍시고 눌러앉아 있으면 말이 안되니까 저도 일선에서 물러났던 거죠. 저는 그 뒤에 김운용씨가 이규호 장관한테 얘기해줘서 컴백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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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