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역사시대로의 이행
한반도, 기원전 4세기부터 격변
흉노 계통 옛 조선은 청동기 집단
연나라 진입으로 철기시대 시작
한사군 시대부터 문자생활
미사리 유적 '마을의 흔적'
원삼국시대부터 부뚜막 설치
소가족 모여 밭 공동 경작
광개토왕비·단양적성비
소가족 세대를 '烟'이라 지칭
(2)역사시대로의 이행
한반도, 기원전 4세기부터 격변
흉노 계통 옛 조선은 청동기 집단
연나라 진입으로 철기시대 시작
한사군 시대부터 문자생활
미사리 유적 '마을의 흔적'
원삼국시대부터 부뚜막 설치
소가족 모여 밭 공동 경작
광개토왕비·단양적성비
소가족 세대를 '烟'이라 지칭
인류 역사는 국가의 성립을 전후해 원시 선사시대와 문명 역사시대로 구분된다. 한반도에서 문명 역사시대로의 이행은 기원전 4세기 이후 장기에 걸쳐 완만한 과정을 밟았다.
기원전 4세기 한반도에 새로운 형태의 토기와 동검을 제작하는 청동기 문화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에 밀려 송국리형으로 대표되는 기존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까지 소멸했다. 기원전 4세기 이후 중국 대륙은 전국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동세기 중엽 중국인은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朝鮮)이란 정치체를 인지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 조선은 요동으로 진출한 연(燕)과 충돌했다. 조선은 연에 밀려 한반도 청천강 이남의 평양으로 그 중심을 옮겼으며, 연은 그 이북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정치체 조선은 원래 스키타이, 오르도스, 요서의 넓은 지역을 무대로 하는 흉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집단이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와 같은 기간 벌어진 청동기 문화집단의 단절적 교체는 밀접한 상관을 지녔을 터다.
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부뚜막
미사리 유적의 부뚜막.
이 유적은 몇 개의 문화 지층으로 이뤄져 있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37기인데, 부뚜막이 한 군데도 없다. 원삼국시대(1~3세기) 지층에 속하는 주거지는 20기인데, 그 가운데 17기에 부뚜막이 설치됐다. 부뚜막은 주거지 내부 벽에 돌과 점토를 섞어 붙이는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토기를 올려 조리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인근 남양주시 장현리 유적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됐다. 여기서는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백제시대(4~6세기)에 걸치는 170기의 주거지가 발굴됐다. 부뚜막은 원삼국시대 설치되기 시작했다.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주거지 내 노지는 한동안 부뚜막과 병존하다가 3세기까지 모두 자취를 감췄다.
미사리 유적의 백제시대 밭.
부뚜막은 불을 들이는 아궁이, 솥걸이와 솥받침을 놓는 연소부, 연기가 빠지는 연도(煙道·구들)로 구성됐다. 시설 재료는 초기에는 돌과 점토였는데 점차 판석재로 고급화했다. 그에 따라 부뚜막의 난방 기능이 강화됐다. 부뚜막이 설치됨에 따라 반지하 움집의 벽체도 고급화했다. 연도가 벽체에 시설되면 벽체는 내화성을 지녀야 한다. 이에 반지하 움집의 하부 벽체가 종래의 목재에서 점토를 덧칠한 더 견고한 형태로 바뀌어갔다. 벽체 높이도 높아져 반지하 움집이 점차 지상가옥으로 이행하는 양상을 드러냈다.
연(烟)
전회에서 지적한 대로 청동기시대 인간들은 야외 노지에서 공동 취사를 했다. 공동 취사 단위는 대개 20명으로 소규모 가족 4개의 복합체였다. 곧 청동기시대에서 생활자료의 취득과 소비 단위로서 개별 세대(household)는 20명 안팎의 가족복합체였다. 철기시대에 이르러 부뚜막이 주거지 내에 설치됐음은 소규모 가족이 개별 세대로 성립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414년 세워진 고구려 광개토왕비에서는 이렇게 성립한 소규모 가족의 세대를 가리켜 연(烟)이라 불렀다. 반지하 움집의 부뚜막에서 밥 짓는 연기가 지붕 위로 솟은 연도를 통해 피어오르는 모습에서 그런 백성 칭호가 고안됐다고 여겨진다. 551년 세워진 신라 단양적성비도 그의 백성을 가리켜 연이라 했다. 문명 역사시대의 상징으로 국가가 솟아오를 때 그 저변에는 소규모 가족이 공동 취사의 집단에서 분리돼 개별 취사의 세대로 자립하는 역사의 진보가 가로놓였다.
세대복합체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굴된 반지하 움집(복원).
미사리 유적의 백제시대 지층에서는 11기의 주거지와 더불어 9900㎡ 이상의 밭이 발굴됐다. 원래는 그보다 훨씬 더 넓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시된 자료 사진에서 보듯이 이랑과 고랑의 폭이 넓고 깊이가 얕다. 이랑과 고랑의 접면은 직선이고 수직이다. 이 같은 이랑과 고랑의 생김새는 거친 쟁기갈이의 소산이 아니다. 쟁기는 아직 보급되지 않은 단계였다. 이랑과 고랑은 여러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쇠호미로 흙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방식의 노동이라면 노동력이 2명에 불과한 소규모 가족이 9900㎡ 규모의 넓은 밭을 그 가족만의 힘으로 경작하긴 곤란했을 것이다. 밭은 11기의 주거지에서 공동 경작했음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주거지 유적에서는 벼루, 방제경, 쇠호미 등이 출토됐다. 방제경은 한경(漢鏡)을 모방한 거울을 말한다. 주거지 주인은 외부와의 교통을 책임진 유력자였다. 11개의 소규모 가족은 이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대복합체로 결속했다.
이 같은 세대복합체의 존재는 미사리 유적에서뿐 아니라 각지 취락 유적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세대복합체는 공동 노동의 단위였을 뿐 아니라 고대 국가가 구축한 백성 지배체제의 기초 단위를 이뤘다. 4~6세기 한국인이 이 세대복합체를 가리켜 무엇이라 불렀는지는 아직 문자생활이 일반화하지 않아서인지 전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인되는 것은 7세기 말 신라촌락문서인데, 공연(孔烟)이라 했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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