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국가는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차원으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을 하나의 강력한 상징체계로서 상상하게 하고 국민을 하나로 통합된 정치 단위로 묶으면서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하는 국가의 이미지화, 이미지의 정치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봉건 국가와 근대 국민국가를 가르는 경계선 가운데 하나는 이미지를 통한 국가와 국민 정체성 수립의 성공 여부다. 대한제국을 전후해 새롭게 등장한 국기, 독립문, 우표 도안, 화폐 도안 등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 상징물로서 통일적인 국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국기는 한 국가의 이념과 정체성, 지향성을 압축해서 시각화하는 상징체계로서 근대의 산물이었다. 대한민국의 국기인 태극기는 1883년 1월에 제정되었다. 태극기의 문양에는 군주와 백성이 일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태극기는 대한제국에서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대한제국은 대외적으로 국가의 독립성을 확보하고 국내적으로는 군민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태극기를 적극 활용했다.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하면서 국가 상징체계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궁중용어, 의복, 도장, 관복 등 황궁과 황실, 그리고 관료집단을 중심으로 도안, 색깔, 형식, 의미 등 황실의 권위와 위엄에 걸맞은 새로운 의식이 도입되었다. 이런 변화는 상층 지배집단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국가 상징체계는 화폐와 우표 도안에 적용됨으로써 대중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그저 화려한 왕궁 안의 특권계급 집단으로만 인식되던 국왕과 그저 두렵고 피하고만 싶던 국가의 존재가 명료한 이미지로서 일상적인 차원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이제 민중들은 구체적이고 통일적인 실체로서 황제와 국가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황실의 의식 개혁과 국기, 우표, 화폐의 도안이 제도적인 차원에서 위에서 아래로 추진되었다면,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은 개혁지향적인 엘리트층과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 기반을 토대로 아래에서 위로 전개된 국가 이미지 형성 작업이었다. 군주권 강화가 황제의 목표였다면, 민권 의식과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이 독립협회의 지향점이었다.
영은문과 모화관은 중화주의적 질서를 숭상하던 사대외교의 상징물이었다.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치욕적인 과거와 단절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독립문과 독립공원, 독립관을 창설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갑신정변 뒤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박영효의 권고로 1895년 귀국한 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동지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독립협회 회원들은 독립문, 독립공원, 독립관을 건립하기 위해 보조금 510원을 갹출해 헌납했다. “우리 대조선국이 독립국이 되어 세계만방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을 기념하고 독립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새로 세우며 독립관을 세우고 독립공원을 창건하여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 후인의 표준을 삼고자” 하는 게 그들의 뜻이었다.
독립문 건립 사업에 대해 각계각층으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1896년 11월 2일 오후 2시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했다. 이날 식에는 5천~6천명이 참석해 돈의문 밖 서교에는 수레가 구름 같이 모이고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897년 5월 3일에는 독립관 개수가 완료되자 현판식을 거행했다. 초기 독립협회에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다양한 집단들이 혼재되어 있었지만, 자주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당대의 대의 아래 결합될 수 있었고 그것이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이라는 근대적 조형물로 빚어졌던 것이다.
국기는 국가 이미지를 안팎으로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국기에 대한 논의는 대한제국 시기 이전부터 이루어졌다. 국기 제정에 관한 공식기록은 《고종실록》에 실린 짧은 기사가 전부이다.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국기가 지금 제조되었으니 팔도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인험(認驗)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아뢰자 이를 윤허했다.” (《고종실록》 1883년 1월 27일)
이처럼 태극기에 대한 공식 기록이 소략하기 때문에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호암 문일평은 <태극기의 유래>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한 시대에 태극국기가 있었다. 그러면 이 태극국기가 어떤 기연(機緣)으로 언제부터 국기가 되었는가.
1876년 고종 13년 병자에 한일 양국 사신이 강화에 모여 수호조규를 논정(論定)할새, 일본 사신은 국기를 높이 내걸었지만 조선 사신은 국기가 없어 내걸지 못했더니,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향하여 왜 조선은 국기를 띄우지 않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한다.
이때 일본 사신의 수원 1인으로 왔던 궁본모(宮本某)가 말하되, 내가 일찍이 조선에서 문루(門樓)와 기타 그림에도 흔히 태극(太極)을 그렸음을 보았노라, 귀국에서 태극으로써 국기를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는 의견을 말하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아직 외국과의 교섭이 없으므로 국기의 필요를 느끼지 않느니만큼 그 말을 그대로 흘려버렸다. 그후 한미조약(韓米條約)이 성립되며 외국과 교섭이 열리게 되매, 차차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모양이다. 그리하여 임오(1882) 이후에 이르러 공주 관찰사 이종원이 제출한 태극팔괘(太極八卦)의 도식(圖式)에 의하여 비로소 태극으로써 국기를 결정하였다 한다.
태극국기를 사용하게 된 것은 임오란(壬午亂) 후 박영효가 일본에 특파대사로 갈 때 맨처음으로 내걸게 되었다. 그후 박정양이 미국 공사로 갈 때도 미국 함선에서 이 태극국기를 내걸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사용된 것은 을미(1895) 이후의 일이다.”(문일평, 정해렴 편역, 《호암 사론사화 선집》, 현대실학사)
그밖에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 제안설, 고종 창안설, 마건충(馬建忠) 창안설, 이응준(李應逡) 창안설 등이 있다. 이태진은 이런 제안들을 검토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조선정부는 1876년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 이후 새로운 국제 관계를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1880년 12월에 국제관계를 전담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1881년 윤7월에 국기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했다. 그리하여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태극팔괘기가 이미 준비되어 있어서 미국측이 국기를 사용하도록 제안한 것을 따를 수 있었다. 1882년 8월에는 일본 사신으로 떠나는 수신사가 태극사괘기로 국기를 만들고 태극팔괘기는 군주기로 낙착을 보게 되었다. 태극기는 1883년 1월 정식 국기로 채택되었다.
태극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태극기를 처음 내건 인물은 박영효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1882년 8월 제3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메이지마루(明治丸)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길에 국기를 제정해 첫 기숙지인 고베(神戶) 숙소에서 처음 내걸었다. 그는 사행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서 당시 상황을 적어놓았다.
“8월 14일 맑음. 인시 정각(오전4시)에 신호(神戶)에 도착하니, 이곳은 병고현(兵庫縣)이다. (…) 진시(오전 8시 전후)에 작은 화륜선을 타고 육지에 내려 서촌옥(西村屋)에 도착하여 쉬었다. (…) 새로 만든 국기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졌는데 세로는 가로의 5분의 2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에는 건(乾)·곤(坤)·감(坎)·이(離)의 사괘(四卦)를 그렸는데, 이것은 이전에 상(上)께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박영효,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사화기략》, 민족문화추진회)
태극사괘기의 모형이면서 군주기로 결정된 태극팔괘기는 군민일체 사상을 형상화했다. 즉 우주 자연의 조화의 원리를 왕정에 적용하는 뜻을 바탕으로 소국을 보호하는 정치를 펴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이는 곧 백성이 곧 군주이며 군주와 함께 나라의 주인이라는 전통적인 유교의 원리를 채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83년 태극기가 국기로 제정된 이후 태극기는 자주 독립 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국가와 왕실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1884년 한국 최초의 우표로 알려진 5문(文)짜리 우표에 태극 문양이 사용되었고, 그해 50푼(分)짜리 우표 도안 시안에는 태극사괘기가 그려져 있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독립신문》에서는 국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이 실리고 시가에서도 태극기가 소재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해 11월 독립문 기공식을 열 때는 무려 18개의 대형 국기가 동원되기도 했다. 국기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해 11월 명성황후 국장 때는 시위대 기마병이 태극사괘기를 들고 행렬하기도 했다.
태극기는 외국인들에게 조선을 소개할 때도 사용되었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태극기는 한국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 프랑스의 화보 잡지인 《르 프티 주르날》은 1900년 12월 30일자에 한국관의 모습을 소개하면서 오른쪽 위의 여백에 태극기가 꽂혀 있는 모습을 그렸다. 지금의 태극기가 국기로 정식으로 채택된 것을 공포한 것은 1949년 10월 15일이다.
국기에 대한 의례의 중요성은 당시 학교와 언론, 그리고 노래 등을 통해 널리 선전되었다. 다음은 《독립신문》 논설과 정동 배재학당 문경호가 지은 <애국가>이다.
“애국하는 것이 학문상에 큰 조목이라. 그런 고로 외국에서는 각 공립학교에서 매일 아침에 학도들이 국기 앞에 모여 서서 국기를 대하여 경례를 하고 그 나라 임금의 사진을 대하여 경례를 하며 만세를 날마다 부르게 하는 것이 학교 규칙에 제일 긴한 조목이요, 사람이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위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직무로 밤낮 배워놓으면 그 마음이 아주 박혀 자란 후라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것 사랑하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중해질지라.
전국 인민이 남의 나라 사기도 알려니와 자기 나라 사기들을 먼저 알아 언제는 나라가 흥했고 언제는 나라가 못된 것을 밝히 알아 조상이 잘못한 것은 증거가 되어 그 부끄러움을 가엽게 씻으려 하며 옳은 일은 본받아 그보다 더 낫게 할 도리를 생각들을 하며 나라라 하는 것은 자기 몸과 목숨보다 더 중한 것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어린 소견을 주물러놓아야 그 사람들이 자라면 자기 나라를 끔찍하게 알고 누가 자기의 국기와 나라 명례를 대하여 실례하는 말을 하든지 무리한 일을 행하면 전국 인민이 일시에 일어나 화약에 불 지르는 것 같이 그 국기와 그 임금과 그 동포 형제를 위하여 일어나 전국에 있는 백성이 다 죽을 때까지라도 싸우고 그 국기를 기어이 높이 세우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야 외국이 감히 없이 여기지를 못하고 백성들도 자연히 국중에 권위가 생겨 정부 관원들이 생성을 무리하게 침범치 못하고 백성끼리라도 서로 대접하며 서로 점잔하게 여길 터이라.
조선이 이렇게 되기는 지금 각 학교에 다니는 학도의 손에 달렸으니 지금 이 학교 일을 아는 체 하는 관원들이 자기네는 이왕에 학문을 못 배웠거니와 이 후생들은 자기네보다 나은 사람들이 되도록 주선을 하여 주는 것이 그네들의 직무라.
조선 사람들은 국기가 어떠한 것인 줄을 모르는 고로 국기를 보고 공경하고 사랑할 마음이 없거니와 국기라 하는 것은 그 나라를 몸 밧은 물건이라 그러한즉 국기가 곧 임금이요 부모요 형제요 처자요 전국 인민이라 어찌 소중하고 공경할 물건이 아니리요.
우리 생각에는 조선 정부 학교에서들 국기를 학교 마당 앞에 하나씩 세워 매일 학도들이 그 국기 앞에 모여 경례하고 애국가 하나를 지어 각 학교에서 이 노래를 아침마다 다른 공부하기 전에 여럿이 부르게 하고 이런 노래는 학부에서 위원을 정하여 하나를 율에 맞게 만들어 외국 사람을 청하여 몇 날 동안 교원들을 노래하는 법을 가르친 후 그 교원들이 자기 학교들에 돌아가 학도들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학문상에 대단히 유조한 일이요, 또 조선 백성들이 나라 사랑하는 것을 배울 터이요, 또 국기가 소중한 물건으로 생각들 할 터이니, 학부 제공들은 이 일을 생각하여 각 학교에서 매일 학도들이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를 부르게 주선하여 주는 것을 우리는 깊이 바라노라.” (《독립신문》 1896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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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즉위하면서 여러 의례와 상징들이 바뀌었다. 궁중 용어는 황실의 용어로 바뀌었다. 조선시대 왕의 명령인 교(敎)와 교서(敎書)를 황제의 명령인 칙(勅)과 칙서(勅書)라고 했고, 전하, 왕비, 옥책문, 사와 직, 즉조당 등을 폐하, 태후, 금책문, 태사와 태직, 태극전 등으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황태자와 황태자비로 책봉되었다. 고종의 왕자인 장귀비 소생 강과 엄귀비 소생 은은 1900년에 각 의왕와 영왕으로 봉해졌다.
종래 국왕과 대군주 폐하가 사용하던 어새와 어보의 장식도 모두 바뀌었다. 이전까지 조선 국왕이 쓰던 국새는 국왕이 즉위할 때 중국의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장식도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황제가 등장함으로써 어새의 장식은 천자를 상징하는 용으로 바뀌었다. 대한국새는 가로·세로 각 9.6㎝의 정사각형이며 ‘大韓國璽’라는 글자를 새겼다.
국새는 국사에 사용하는 왕의 인장으로 임금이나 임금이 지정하는 관원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에 사용했다. 국가의 표상과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의 외교문서 및 왕명으로 행해지는 국내 문서에 사용되었고, 왕위계승 시에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되었다. 또 왕의 각종 행차시에는 행렬의 앞에서 봉송되기도 했다.
고종이 타던 수레가 용교(龍轎)로 바뀌고, 왕에게 올리는 옥책문이 금책문으로, 오얏꽃(李花)이 왕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등장해 각종 집기를 장식했다. 나라의 각종 공문서 양식과 용어도 바뀌었다. ‘조선국’ 혹은 ‘왕’과 ‘대군주폐하’로 된 양식이 ‘대한제국’ ‘대황제폐하’로 바뀐 것이다.
고종의 의복에는 색깔 혁명이 일어났다. 국왕을 상징하는 색이 붉은색이었던 반면, 황제를 상징하는 색은 노란색이었다. 환구단의 건물장식은 물론 궁궐 내외의 각종 건축물이나 의복, 장식물 등에 노란색이 흔히 쓰이게 되었다. 국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도 황색으로 바뀌었다. 그 대신 왕이 입었던 자주색 곤룡포는 황태자에게 계승되었다.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고 역대의 고사에 따라 전국의 죄인들에 대해 대사령을 내렸다. 아울러 고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존되어 다음달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이후 정부에서는 국가와 황제의 어기(御旗), 친왕기(親王旗), 군기(軍旗) 등을 제정했으며, 황제를 대원수로 한 프러시아식 복장과 관복을 제정해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도 제작했다. 고종 황제 면복에는 12장(章)의 문양을 새겼다. 좌측 어깨의 ‘일’(日)은 일상(日象)의 조광(照光)을 상징하며, 우측 어깨의 ‘월’(月)은 불로불사(不老不死)를, 등 중앙의 ‘성신’(星辰)과 산(山)은 각각 충의로운 사람과 진정(鎭靜)을, 상(좌우 각 1)의 ‘화’(火)는 빛나는 밝은 덕을, 상(좌우 각 1)의 ‘조’(藻)는 쌀과 청결과 화미(華美)를, 상(좌우 각 1)의 ‘분미’(粉米)는 사심(私心)이 없으며 양민에 충성을 다함을, 상(좌우 각 2)의 보(?)는 왕의 결단과 의지를, 상(좌우 각 1)의 불(?)은 사심이 없음과 신민(臣民)의 배악향선(背惡向善)을, 어깨(좌우 각 1)와 폐슬(좌우 각 1)의 ‘용’(龍)은 신기변화(神奇變化)를, 소매(좌우 각 3)와 상(좌우 각 1)의 ‘종이’(宗彛)에 새긴 호랑이는 용맹을, 원숭이는 지혜를 상징하며, 소매끝(좌우 각 3)의 ‘화충’(華蟲)에는 상상의 새를 새겨넣었다. (한영우,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효형출판, 155쪽 참고)
경운궁의 전각인 중화전의 용상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붉은 해와 흰 달은 각각 왕과 왕비를 상징하며, 다섯 개의 봉우리로 표현된 산은 곤륜산으로 임금을 상징한다. 일월오악도의 해, 달, 솔, 물 등은 천계, 지계, 생물계의 영원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러 신의 보호를 받아 자손만대까지 오래도록 번창하라는 국가관의 투영이며, 왕(황)실의 권위를 나타낸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도안과 상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오얏꽃 무늬다. 이 무늬는 1885년 전환국이 인천에 있을 때 발행된 동전에 처음 등장했고, 이후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황실의 문장으로 채택되어, 훈장과 우표 등 대한제국기에 광범위하게 쓰였다.
바로 이 시기에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 태극기와 함께 독립문에도 이 무늬가 새겨졌다. 따라서 대한제국 황실은 오얏꽃 무늬를 독립문의 완공에 곧 이어 선포된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으로 채택할 의향이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왕족의 성씨인 이(李)씨에서 나온 모티프다. 태극이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오다가 국가의 상징으로 채택한 데 견주어 볼 때 사용된 예가 거의 없어서 근대시기에 창안한 것으로 보인다. 오얏꽃 무늬는 몇 번 바뀌기도 했지만 대체로 5개의 꽃잎마다 꽃술을 3개 놓고 꽃잎 사이에 또 꽃술을 1개씩 놓은 꼴을 기본으로 했다. 빛깔은 황제의 나라를 의미하는 황금색을 띠게 했다.
이 무늬는 황실을 상징하는 무늬이면서, 국가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먼저 황실을 상징한 예로는 고종황제의 서류함, 덕수궁의 귀빈실로 쓰던 덕홍전의 복국, 석조전의 박공 등 황실에서 사용한 기물과 실내 및 실외에 두루 쓰였다. 따라서 이 무늬는 좁은 의미의 황실을 상징했다.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의 군통수권자를 겸해 대원수로 취임하면서 원수부 소속의 장관은 황색 바탕에 은실로 오얏꽃 무늬가 수놓인 모자와 견장, 식대 식서 등을 착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예복을 입었을 경우 모자에는 처음에는 정면에 붙이는 모표에, 곧 이어 모자 꼭대기에도 이 무늬를 수놓아 사용하도록 했다.
오얏꽃 무늬는 국가를 상징하는 무늬로도 쓰였다. 종이돈, 쇠돈을 막론한 화폐와 나아가 외국과의 통상에 사용되는 우표, 파리 만국박람회의 소개 화보에 실린 건물 기둥에도 이 무늬가 쓰였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자 오얏꽃 무늬는 더 이상 황실이나 대한제국의 상징이 아니라 왕가의 무늬로만 격하되었다. 그래서 식민지가 된 시기에도 제한적이지만 이왕가미술품제작소에서 만들어진 각종 기물의 무늬로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는 대한제국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왕가의 무늬라고 하면 일본왕가인 이른바 천황가와 대등한 지위가 아니라 그보다 한 등급이 낮은 왕족으로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 태극과 오얏꽃 무늬가 도안된 우표와 화폐들
대표적인 상징 문양인 태극이나 오얏꽃 문양은 우표와 화폐에서 가장 먼저 적용되었다. 근대적인 통신제도의 대표격인 우표에서 특히 잘 적용되었다.《독립신문》은 우정국이 지방에 개설될 때마다 서울 시내 우편물이 어느 정도인지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국가와 황실의 상징도안이 근대 제도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태극 문양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1885년에 제작된 문위(文位) 우표 도안에서였다. 여기에 표현된 태극은, 원을 반으로 잘라 대칭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어 뒤에 태극기 도안으로 채택된 것보다는 전통적인 형식을 지녔으나, 태극 모티프가 점차 그 형식을 취해나간 선구적인 예로 보인다.
1) 1884년의 우표 도안: 1885년에 발행한 문위우표, 1897년에 발행한 태극우표, 1900년과 이듬해 사이에 만들어진 오얏꽃 우표들, 1902년의 기념우표.
2) 1884년 우표: 문위우표의 원 도안이, 실제로 발행되었을 때는 사괘를 갖춘 태극기를 주 문양으로 하고 위아래에 각기 한자와 한글로 ‘大朝鮮國郵票’ ‘대조선국우표’와 ‘五十分’ ‘오십분’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이 우표의 도안자는 당시 이 우표를 인쇄한 일본 대장성 인쇄국 소속의 일본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3) 1895년 우표: 1884년 당시 쓰였던 태극기 형상을 잘 반영한 우표는 1895년 미국의 워싱턴 앤드류 비 그래함 회사에서 인쇄해 온 우표(태극우표)이다. 이 우표에는 처음에 의도했던 태극기 모양이 실현되었다.
1895년에 우정제도가 재개된 가운데 널리 사용되었던 이 우표는 태극과 사괘를 둔 태극기 문양을 가운데 두고, 우표의 네 귀퉁이에 오얏꽃 무늬를 배치했다. 음양의 태극 도안이 매우 낯설고, 어두운 부분을 아래에 그리고 밝은 부분은 위에 위치하는 원칙이 바뀌었다. 사괘의 위치도 좌우가 바뀐 것이지만, 애초 도안의 의도가 잘 살아나 있다. 태극기를 감싼 테두리의 네 귀에 오얏꽃 문양을 넣었다. 우표에 표현된 나라이름은 조선으로 되었는데, 이전에는 대조선이라 썼다. 1897년 소인이 찍힌 우표에는 나라이름이 적혔을 법한 부분이 공란으로 되었던 것 같은데, 뒤에 대한을 덧붙여 넣었음을 알 수 있다.
4) 1900~1901년 우표: 이 시기 우표는 처음으로 국내에서 인쇄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모두 14종의 우표와 우편엽서가 발행되었는데, 오얏꽃 문양이 태극문양과 함께 중심문양으로 등장한 것이 특징이다. 이 우표들에는 나라이름이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으며, 영문 표기 또한 그에 해당하는 ‘Imperial Korea"이다. 1902년 고종황제의 등극 40주년을 기념해 발행된 우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우표이기도 하다. 이 기념우표는 황제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황금색을 기본색으로 했는데, 가운데에는 원유관을 새겨 넣었다.
화폐는 우표와 비교해볼 때 대외적으로는 사용도가 떨어지나 국내적으로는 우표보다 더욱 더 광범위하고 일상으로 쓰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국내적인 상징 문양이 활용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화폐를 만드는 기계는 독일제이나 조각 등 기술적인 처리는 거의 일본인이 했다. 그러므로 일본 화폐의 문양을 오얏꽃이나 오얏나무 가지 또는 무궁화 가지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다. 화폐를 살펴보면서 유의할 점은 그 제도가 일본의 침략적 금융정책에 수용되어가는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대한제국기에 국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리잡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 성공하지 못한 과정이라고 여겨지지만 전반적으로는 근대적인 제도의 수용과 시도의 과정에서 노력한 것만은 의미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 1887년 은화: 1883년에 설립된 전환국이 서울에 있을 때 발행한 화폐. 앞에는 어기(御旗)에서 나타난 태극변화도와 오얏나무 가지를, 뒤에는 용을 문양으로 새겼다.
2) 1892년 주화: 전환국이 인천으로 옮긴 뒤 발행한 주화. 중앙의 위에 태극 대신 오얏꽃 문양을, 양쪽에는 오얏나무 가지와 무궁화 가지를 얽어지게 그려넣었다.
3) 1901년 주화: 용문양이 러시아식 독수리문양으로 바뀐 주화인데, 제작되기는 했지만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종노릇하던 표적을 없애버리고 정말 실질적 독립을 소유한다는 표로 이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니, 우리 국민 일반은 이 점을 잘 생각하고 우리 나라 독립·자주를 위하여 더욱 분발해야 한다.”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정치결사로서 서재필의 주도로 1896년 7월 2일 창립되었다. 회장은 안경수, 위원장은 이완용 등 30여 명이었다. 초창기 독립협회를 이끌어갔던 주역들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외세 종속적인 사대주의의 상징물로 규정하고 자주 독립국가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 같은 독립 기념물을 조성하려 했다. 창립총회에서 통과된 <독립협회 규칙> 제2조에는 “독립협회에서는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설하는 사무를 관장할 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모화관은 ‘중화를 숭상’하기 위한 건물로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중국 사신을 맞을 때는 왕세자가 모화관에 나아가 하마연(下馬宴)이라는 환영식을 열고, 돌아갈 때는 상마연(上馬宴)이라고 해서 문무백관이 극진한 송별연을 베풀어주었다. 갑오경장 이후 모화관은 사용이 중지되어 방치되어 있었다.
모화관 앞에는 영은문을 세우고 남쪽에 연못을 팠다. 영은문은 조선시대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운 문이다. 1536년 모화관 남쪽의 영조문을 김안로의 주청으로 개축하고 영조문이라는 액자를 걸었다. 1539년 명나라 사신 설연총이 영은문이라 써서 걸도록 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 영은문은 1895년 2월에 김홍집 내각에 의해 철거되어 장주형초석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과 독립공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1896년 6월 20일경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위해 국왕의 승인까지 받고 이름을 ‘독립문’이라고 새길 것까지 합의되었다. 서재필은 《Independent》지 1896년 6월 20일자에 독립문 건립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영은문의 옛터에 독립문이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할 것을 승인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명(彫銘)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대항해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해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 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 쏟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해 조선은 손상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이광린·신용하 편저,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일지사)
독립문이 세워진다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자 환영일색이었다. 1896년 7월 16일자 《독립신문》에는 김석하가 투고한 <독립가>가 실렸는데, 당시 사람들이 독립문 건립 계획에 대해 얼마나 열광적으로 반응했는지 엿볼 수 있다.
“우리 조선 신민들은 독립가를 들어 보오
우리 성주 유덕하여 자주독립 좋을시고
병자지수 설치하고 자주독립 좋을시고
연주문을 쇄파하고 독립문이 높아지네
독립문을 지은 후에 독립가를 불러보세
우리 성주 수만세요 우리 창생 화합이라
우리 조선 신민들은 진충보국하여 보세
오백년래 좋은 일은 독립문이 좋을시고”
독립협회는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비용을 국민의 성금을 모아 충당하기로 했다. 우선 독립협회 발기 위원들은 510원의 보조금을 거두어 헌납했다. 왕실에서는 왕태자 명의로 7월 20일경 1천원을 하사했다. 독립문 등의 건설사업은 각계 각층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었다. 8월 말에는 모금 총액이 1067원에 이르렀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을 독립문 건립 책임자로 선정하고, 1896년 9월 6일 총비용 3825원으로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독립협회와 서재필 사이에 계약이 체결되었다.
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모형을 축소해서 기본 설계로 하고,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일설에는 러시아인 기사 G. Sabatin)가 서재필을 도와서 세부설계를 작성했다. 9월 16일부터는 독립문 기초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공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이 담당했다. 심의석은 당시 유명한 서양식 건축기사로서 독립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간사원에도 선출되었다. 석공(石工)은 한국은 고급 기술자들이 담당하고 역사(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주춧돌을 놓는 기공식인 정초식(定礎式)은 1896년 11월 21일 토요일 오후 2시에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날 정초식에는 무려 5~6천 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했으며, 독립협회 회원들뿐 아니라 정부의 각부 대신들, 각 학교 학생들, 각국 공사·영사와 외국인들도 운집했다. 그리고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20일경에 독립문은 역사적인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날 관립 영어학교와 배재학당 학생들이 체조와 창가로 식을 더욱 빛냈다고 한다. 독립문 준공식 석상에서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옛날 종노릇하던 표적을 없애버리고 정말 실질적 독립을 소유한다는 표로 이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니, 우리 국민 일반은 이 점을 잘 생각하고 우리 나라 독립·자주를 위하여 더욱 분발해야 한다.”(김도태, 《서재필 박사 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독립문은 높이가 14.28m, 너비 11.48m로 화강암 벽돌 1천 850개를 쌓아 올렸다. 독립문 내부 왼쪽에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돌층계가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었다. 독립문의 남쪽 현판석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북쪽 현판석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새겨 넣었다. 독립문 글씨 좌우에는 태극기가 그려져 있다. 무지개문의 이맛돌에는 황실 상징인 오얏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한편 서재필은 독립문과 함께 자주독립의 상징으로 모화관을 전면 개수해 ‘독립관’(The Independent Pavillion)이라고 고치고 독립협회 회의장과 사무소로 사용하기로 했다. 무려 2000원이라는 막대한 경비를 들여 1897년 5월에 보수가 완료되자, 독립협회는 1897년 5월 23일 왕태자가 국문으로 친서한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개관했다. 독립협회는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서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독립공원은 독립문과 독립관 일대가 공터였으므로 독립협회는 이를 현대식 공원으로 꾸미고 독립문과 독립관을 보존하고자 했다. 당시 《독립신문》은 “조선 인민이 양생을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정(淨)한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으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지라고 전할 뜻이라”(1896년 7월 4일)고 독립공원의 건립 취지를 밝혔다. 독립공원에는 각종 관상목과 화훼를 심고 징검다리를 설치해 1897년 5월에 일단 건설이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독립공원은 운동장과 휴게소, 그리고 강연장 등으로 계획되었으나, 자금 부족으로 우선 휴게소만 건설되었다.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의 건립은 전 국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됨으로써 국민의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전 세계에 한국 국민의 자주독립 의지와 결의를 알렸으며, 영구히 보존 가능한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 만대에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각성시켜 주었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