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31년 일제시절 조선. 만보산 사건과 관련해 화교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일본 측이 ‘일본 제국의 신민’ 조선인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서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 이에 빡친 중국인들은 조선인 정착촌으로 몰려가 수로를 파괴하며 난동을 부렸고 일본 경찰이 출동해서 이를 저지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펼쳐진 것이다.

 

 창춘에 주재하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은 만보산 현지를 답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관헌의 말을 급보로 송고한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명의 동포와 충돌, 조선인 다수 살상, 중국 주재 (일본) 경관 교전 급보로 창춘 주둔 일본군 출동 준비” 등 흡사 전쟁이라도 터진 느낌의 보도였고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하며 이 소식을 식민지 조선 전역에 전파한다.

 

 이 소식을 듣고 평양의 조선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해 평양 내에서 서식하던 화교 짱깨새끼들을 보이는대로 잡아죽였다.주일공사가 보기에 군중은 조직이 잘 갖춰진 집단처럼 보였다. 이 군중들의 폭동은 새벽까지 이어졌으나, 일본제국 경찰은 무장을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막지 못했다. 7월 8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09명, 부상자가 163명, 생사불명자 63명이었다. 

 당시 조선인이 생각하던 짱깨의 이미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때 조선인들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공원을 가든지 문에는 인도인과 중국인 순사가 섰다. 중국인은 들이지 아니한다. 중국인 특권이 있는 사람은 잔디밭 가꾸는 노동자와 백인 아이의 유모차를 끄는 늙은이 뿐이다.” (동아일보 1925년 1월 4일) “중국인을 연상할 때에는 반드시 아편을 연상케 되며, 아편을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중국인을 연상하리만치.....”(동아일보 1925년 5월 3일) “우리는 중국사람이라 하면 더러운 것과 푸른 옷을 먼저 상상한다.” (1926년 3월 1일 동아일보) “사람으로서의 체면유지라든가 위생사상으로부터 따진 생활법이란 것은 털끝만큼도 생각지 아니한다.” (동아일보 1928년 8월 4일)

 

 

 

요약

1. 일제시절 짱깨들이 조선에서 깽판부리니

2. 조선인들이 자경단 결성해서 평양에 서식하던 짱깨들을 다 잡아죽임

3. 그때 조선인들이 요즘보다 생각을 행동으로 실현 잘함. ㅆㅅㅌ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