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번째 짤은 조선후기 목재가격과 관련된 연구물
조선 후기 목재 가격 상승은 실록에도 나와 있지만
송정사의에서 언급된 관. 이것의 실질가격 상승을 보면 벼 가격과 비교하였을 때
당시 상대적으로 물가가 안정된 편이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높이 올라감
땔감 가격의 경우도 마찬자기로 올라감
이러한 원인으로는
조선 후기가 상대적으로 기온이 한랭하였다는 연구 결과들도 고려할 수 있고
점점 확대된 온돌의 영향도 컸다고 함
17세기 전반만 해도 궁궐의 나인들이 아직 온돌방에서 생활하지 못하였으나
19세기 중엽 기록으로 넘어가면 과거의 마루방과 다르게 온돌과 구들장이 일반화 되었다는 기술도 보이고
(이규경, 오주연문)
동일한 기시 최한기의 기술에 보면 온돌에 불기가 고루 퍼지게 하는 방법이 치가하는 자로서 알아두어야 한다고 써 있는 등
조선 후기로 가면 온돌사용이 더 보편화 된 듯 함
역갤에서 자주 언급되던 조선후기 건축의 특징
구부러지고 연령이 어린 나무들을 건축에 활용하는 것(동시대 중국 일본과 목재 사용 변화 방향이 다르다고 함)이나
영조 이후 정부도 목재 조달에 어려움을 느끼면서
목재 공급하는 공인에게 책임을 묻던가, 조운선과 병선을 병용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것
군선이 경우 사용할 목재의 질이 떨어지면서 재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며(큰 배를 해체한 목재를 작은 배에 씀)
사용 연한이 줄어들었고
관에서 큰 목재가 없어서 왕실 능원의 나무까지 벌채할 것을 명령하기도 함
조선 후기 많았던 3대 송사가
토지, 노비와 함께 산송으로
위의 2번째 짤에 보이지만 시기가 지날수록 상당히 늘어남(갑오개혁 이후 줄어든 것은 제도 변화 때문임)
기본적으로는 분묘기지권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으로 한쪽 무덤을 파내는 것이 대부분으로(67.4%)
묘지와 관련된 사유 개념이 선산이라는 형태로 정립되며 유교적 장묘문화 확대와 연결성이 가장 크지만
실제 정소자를 보면 양반이 선점한 땅에 다른 신분층이 침입하여서 제소한다는 형식이 많으니
18세기 후반 이후 목재나 연료의 도벌이 연관되어 발생한 산송 역시 증가추세임
(17세기 후반 2건, 18세기 전반 4건에서 18세기 후반 12, 19세기 전반 23건, 19세기 후반 68건)
나중에 기술하겠으나 조선왕조 체체에서 소나무를 제외한 특히 임업부산물에 대해서는
무주공산이라는 개념 아래 타인이 선산으로 선점한 곳에도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과 비교하면
후기로 갈수록 사적점유가 점점 분묘권과 연결되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의 영향도 크지만
사회적 마찰이 점점 늘어가기 시작하는 것도 한 단면일 것임. 목재부족으로 인한
조선후기 산림은 황폐화가 점점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반영되었음
그리고 추가하면 조선 후기 화전 확대역시 영향을 미쳤음
내가 지금 관자를 읽고 있는데...기원전 650년경(조선시대 2500년전) 에 이미 1년은 농사만 한게 없고 10년을 볼때는 나무를 심는것만 한것이 없다. //일생을 볼때는 인재 드립~
2011.11.12 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