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조 산림 정책의 기본은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한 사적소유의 금지
개국 세력이 고려말의 산림 사점화를 혁파한 후
이미 태조 때부터 고관들이 산에서 백성들의 채취를 금지하지 말것을 명한 것을 시작으로
실록에 의하면 1414년 경제육전속전에 언급된 후
경국대전 형전 금제조에서부터 19세기 대전회통까지 이어지며
큰 이념은 왕토사상 아래 여민공지與民共之라는 통치이념으로
맹자와 주자의 이념에서 유래된 왕을 포함하여 어떤 개인이 산림천택에서 얻어지는 이익을
독점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
실제 윤형원 같은 경우 탄핵의 죄 중 하나로 산을 독점했다가 제기되기도 하고
관찬사료, 지방관의 행정교범, 산송에 대한 판결 등에서도 큰 틀로 계속 남아있음
또 하나 조선 시대 산림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인식은
술, 소와 함께 삼금으로 불리우던 소나무 보호책, 송금
고려 시대에도 있었던 소나무에 대한 보호 인식은
1397년 편찬된 경제육전에도 송금 규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병선에 쓸 목재의 확보같은 실리적인 면을 포함하여
특수하게 보호받는 금산, 봉산 등 국유림의 지정과 유지로 이어짐
일반적인 환경보호 정책에서 출발한 이 송금은
조선후기 산림자원 고갈로 국가에서 목재 조달에 어려움을 겪으며 민간과 경쟁하는 구도로 접어드는 시기로 갈 수록
더 강한 산림자원 확보의 명분이 됨
실록의 홍수-가뭄 기사 비율을 봐도 산의 나무가 없어서 경작지들이 물 조절에 어려움을 겪은 상황이 늘어난 것으로 보이고
조선후기로 갈수록 국유림 영역이 확대되고, 점점 내륙의 일반백성의 접근이 힘든 지역으로 옮겨가는 특성은
당시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고
경제육전의 단순한 송금 규정은 여러 법률에서 점점 세밀해지고 처벌의 강도가 높아지는 경향도 뚜렷함
대부분 이런 전근대 선점-소유가 되는 공유지에 대한 일방적인 처벌 정책은 당연히 실패했고 조선도 마찬가지
또 하나 이 송금 정책은 다산 등이 기술한 바
소나무 외의 다른 나무에 대한 보호 인식의 미비와
특히 각종 부산물이나 잔가지, 낙엽 등은 아무나 선점하여 사용하면 된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만듬
현실적으로는 주인이 있는 산조차 국유림이 아닌 한 \'무주공산\'이므로 들어가서 열매를 따거나 땔감 가져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고 이것은 식민지시기 마찰을 가져옴
현실적으로 주인이 있다는 개념이 위에 언급되는데
산림의 양도나 매매에 대한 법규, 혹은 조사가 존재하지 않고 공적인 증명이나 수취제도가 그닥 발달하지 않았으나
다만 입안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관에 신청하여 개간을 전제로 소유권을 인정받는 것은 보임
권세가나 궁방 등에서 이용했던 것인데
기본적인 왕토사상 아래서도 사적소유권 개념도 일정부분 등장함
오늘날 생각하면 선산의 개념으로 볼 수 있는데
시작점은 풍수설 및 유교 사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묘지에서 출발함
묘지가 들어서면 주변의 일정 영역에 대해서 배타적인 권리를 가지게 된다는 것으로
고려사에도 무덤 주변 일정 영역에 대해 경작과 목축을 금한다는 규정이 보이고
이것은 경국대전에서 대전회통까지 이어지며
이러한 묘지와 연관된 소유권 인식 확산은
조선후기 급증하는 산송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왕토사상 아래서도 사적 소유권이 일정 수준 성장하는 부분을 이끌어 내게 됨
그렇다면 일제의 산림령은 뭐라고 설명하나요? 소유권 획정이라고 해야하나요?:
2011.11.12 21:31다음 글에 쓸 생각인데 어쩌면 지겨워서 못 쓸 수도 있네요
2011.11.12 21:33그렇다면 조선은 소나무 외에 다른 수종에 대해선 보호의식이 전무했다고 봐야겠네요?
2011.11.12 21:33남의 집에서 사실상 사적으로 나무를 키운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가거나 하면 고소미 먹었긴하죠
2011.11.12 21:35ㄴ ㅇㅇ;; 그렇다면 관에서 소나무 외의 수종을 멋대로 베어가는 것을 단속하러 오거나 그런건 없고, 다만 그런 사적소유 침해로 인한 산송은 늘어났었고요? 그리고 그 원인이 예전에 말심하신 그 온돌이고
2011.11.12 21:36생환잔차/ 흥미롭게 읽음,,,,소나무는 한옥의 주재료라, 벌채를 아무나 할수 없엇고, 타 수종은 다소 자유로웠으나, 양반들의 소유지인터라, 양반위주의 난방, 조리용도로 쓰였던 터라, 산림이 훼손될 정도로, 벌채가 되지는 않았을듯,,,,,
2011.11.12 21:39산송도 대부분은 사실 묘지에 관한 것이고, 사실 관에서 행정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실록 등의 기록을 보면. 어떤 나무가 온전한 지역은 대부분 당시 사람이 접근이 힘든 곳 뿐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2011.11.12 21:39온돌이 민간에 확산되고 17세기 소빙기 영향으로 인해 나무 수요가 늘어났다면, 민둥산화가 가속되엇을 것이고
2011.11.12 21:40근데 온돌이 확산된건 잔차가 주지했다시피 19세기인데 소빙기는 17세기에서 18세기 아닙네까 ㅡ,ㅡ 기록이 19세기라서 그런지는 모르것지만
2011.11.12 21:41ㄻ/영국도 18세기 겪었고 중국 남동부도 19세기 겪었고, 조선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순환사이클이, 무조건 쓰고 심지 않는 채취 구조 속에 파괴되었다고 보입니다. 남의 산이라도 뭐 밤나무가 있으면 밤은 아무나 따는 것이고 이런 인식이 일제시대 까지 이어져서 마찰이 심하고 초기 진출한 일본인들과 고소와 단속이 왔다갔다하고. 사실 한국에서 이런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박정희\'때인 것 같음
2011.11.12 21:42소빙기에 대해서도 나이테 가지고 다룬 쪽에서는 약간 시기를 다르게 보기도 하는데 전체적으로는 조선후기가 전기보다 한랭하였다는 이야기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요
2011.11.12 21:4217세기 까지는 아예 지식인들조차 현재 산림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2011.11.12 21:43아 그렇군요;;
2011.11.12 21:45지구의 한랭화는, 황해 일대의 해안선 변화로도, 추정됩니다,,,,즉, 고구려시대경엔, 현재보다 몇백미터인가 내륙으로 물이 찰정도로 따듯한 기후였죠,,,그래서, 콩이 만주벌판쪽에서 고구려시대에 재배가능,,,,,기록상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재배한 곳은 고구려시대 만주지역.
2011.11.12 2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