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정보] 베르사유 조약이 만악의 근원이자 원흉이다
  • 시티즌(59.16)
  • 2020.10.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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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글 22



패전국 독일을 상대로 그토록 터무니없는 배상과 영토 분할, 군비 봉쇄를 일방적으로 강요한 건 둘째치고,


민족 자결주의란 미명을 앞세워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중분해시켜 중부 유럽 및 발칸의 해묵은 민족 문제만 일층 심화되었으며,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으로 80만 사상자를 낸 이탈리아마저 X차반 취급해 참전 미끼였던 달마티아 영유권 약속을 꽁쳐버렸지.


덕분에 파시즘이 대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중동 문제 역시 날림으로 처리해 영토-종족 분쟁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듬.


일본은 인종 평등 조항을 단념하는 댓가로 극동 태평양의 독일 권익을 차지했지만, 워싱턴 회의에 가서 반쯤 포기해야 했는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의 깽판으로 영일동맹까지 폐기되는 바람에 일본 외교에 미칠 영미의 영향력은 오히려 사라져버린다.


결정적으로 러시아가 불참함으로써 유라시아 정세의 불안정은 완전히 수습되지 않은 채 노정되기 시작했다는 점이 문제였음.


소비에트 러시아의 혁명 노선은 그 존재만으로도 상대주의 윤리관 및 규범에 기반한 토탈리즘 시스템의 구심점으로 작동했고,


대공황 충격 속에 유럽과 일본에서 좌우를 막론한 현상 타파 세력이 발흥해 행동에 나서자 베르사유 체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전간기에 미시적 국면마다 위정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렸더라면 역사의 조류를 바로 잡고, 또다른 참화도 막을 수 있었으나,


인간의 얕은 사고, 무지, 이기심, 편견, 그리고 불운은 모든 기회를 날렸음은 물론, 구세계의 완전한 종말로 귀착되게 만들었지.


2차대전 후 인류에겐 미국식 자유주의냐,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냐의 양자택일이 선택 가능한 대상으로 반강제되다시피 했으며,


이에 수반해 식민제국이 해체된 것은 문명화가 미숙하고, 자율 의식도 부재한 수억의 유사 인종들이 활개칠 여건을 마련해 줌.


소비에트 제국은 내재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유라시아에서 온갖 파장만 일으키다가 자멸했지만 그 휴유증은 현재진행형이고,


미국은 특유의 미숙함과 이상주의 독선에서 드러나듯이 대영제국에 비해 저차원스런 국제 질서 관리로 숱한 부작용을 양산함.


유럽 열강이 쇠퇴한 공백을 제대로 메꾸긴 커녕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 걸쳐 소련-중공 레드팀의 활동 반경만 실컷 넓혀진데다,


미중 데탕트처럼 미국 스스로 장래의 프랑켄슈타인을 키워준 자해 행위까지 감수한 단계를 밟아갈수록 세계는 혼탁해져 갔다.


한마디로 PC충, 유사인종, 우민화된 여론에 휘둘리는 저질 위정자들이 설쳐대며 건전한 인류의 정신을 좀먹게 된 단초는


191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그 '빌어먹을 조약'이 체결되었던 순간부터 스타트를 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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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 ㅇㅇ(59.12)

    근데 베르사유 조약때 내밀었던 조건보다.. 미국이 일본제국 패배후 내민 조건이 더 가혹하지 않나?

    10.26 22:34
  • tur(219.250)

    적산 동결조치 점령지 거주 일본인들은 최소한의 재산외엔 반출 금지인데 그재산도 하이퍼인플레도 휴지조각

    10.26 22:38
  • 시티즌(59.16)

    해외 식민지랑 자산을 모두 상실한 건 분명 뼈아픈 타격이었지만, 샌프란시스코 조약 당시 일본의 경우 황실은 유지되었고, 국민 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의 배상금이 부과되지도 않았지. 심지어 그 배상금조차 미국이 전액 면제하려고 했다가 동남아랑 네덜란드가 반발하는 바람에 역무 차관이나 보상 형식으로나마 내놓게 된 거고.

    10.26 22:43
  • 시티즌(59.16)

    솔직히 영토 상실로 치면 2대전 후 독일이 더 타격이 컸음. 국토가 동서로 분단된 것도 그렇지만, 재통일 댓가로 오데르 나이세선을 승인하는 바람에 12세기 이래 선조들의 텃밭이나 다름없던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같은 알짜배기 땅을 모조리 포기했고, 동유럽 각지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의 터전도 뿌리째 뽑혀버렸으니깐.

    10.26 22:47
  • tur(211.243)

    애초에 동유럽엔 러시아계 폴란드계 독일계가 뒤섞여 있었는데 2차대전 끝나고 완벽하게 갈라지게됨

    10.26 22:49
  • tur(211.243)

    애초에 동유럽은 여러민족이 뒤섞인거고 일본은 오키나와 제외하고 단일민족이라 분할할 껀덕지가 없었음

    10.26 22:50
  • 시티즌(59.16)

    도중에나마 항복해서 연합국으로 진영 바꿔 갈아탄 이탈리아조차 국민투표 절차를 빙자한 영미의 영향력 행사로 왕실이 유지되지 못하고 축출당했는데, 진주만 트라우마가 생생하던 시기에 히틀러-무솔리니랑 도매금 취급당한 천황이 계속 재위하는 걸 용인하고, 황실의 조명도 이어나가도록 한 것만으로 은전을 베푼 건 맞지. 사실 황실의 보장은 종전 직전 국무성 차원에서 이미 결정된 바이긴 했지만.

    10.26 22:52
  • 시티즌(59.16)

    소련이 참전했더라면 일본 본토, 최소한 북해도는 넘어가거나 분할되었을거라 봄. 독일 항복 직후에 주소대사 사토 나오다케가 진언한대로 황실의 보장만을 전제 조건으로 미련없이 항복했어야 했는데, 너무 꾸물거린게 아쉽지. 미국도 무조건 항복 요구에 천착했던게 문제고.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제안대로 조선과 대만을 유지시켜주는 선에서 항복을 받아들이는 편이 가장 좋았겠지만, 이제 막 취임한 트루먼 입장에선 아는 게 거의 없었고, 루스벨트가 남긴 참모진의 영향력을 무시못했으니.

    10.26 22:55
  • 시티즌(59.16)

    여기서 소련이 참전했다는 의미는 소련 육군이 북해도나 혼슈에까지 직접 상륙했을 경우를 가정한거임.

    10.26 22:57
  • tur(211.243)

    15일 이후 만주쪽에선 계속 전투가 벌어졌는데 일본군이 사할린에서 소련군 상륙부대한테 승리한적도 있음, 애초에 러시아가 쓰시마해전에서 해군이 궤멸당한뒤 언제나 해군은 약세라 사실 상륙을 했더라도 훗카이도는 힘들 가능성이 높다고 본인은 생각함, 애초에 44년-45년부터 상륙방지로 대규모 부대들이 사단들이 편성된걸 고려하면

    10.26 23:02
  • tur(211.243)

    애초에 만주작전을 일본애들이 얕본게 소련군이 만주땅이 얼어붙어서 소련군의 장기(당시 세계최고 육군보유국)인 전차전을 유도할려면 11월이나 가능할거라 생각했는데 바실리예프스키가 걍 다옌링 산맥 넘은후에 주요도시만 공격하고 나머지 부대가 요새나 일본군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서 순식간에 뚫린거지

    10.26 23:03
  • tur(211.243)

    실제로 15일 항복했을때 수많은 병사들이 소련군이랑 만주 전체에서 교전중이었음

    10.26 23:04
  • tur(211.243)

    훗카이도까지 상륙할 수준의 장비를 갖추려면 11월이후 침공의 경우 아니면 사실상 힘들었다고 봐야할듯

    10.26 23:06
  • 시티즌(59.16)

    소련 상륙에 대비한 북해도 사수 여부는 장담할 수 없거니와, 미소 양면 전쟁을 감내할 만한 역량이 남아있었는가라면 글쎄... 이미 원폭까지 개발해놓은 상황에서 독일 케이스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일본 본토 만큼은 단독 점령하려는 의향 때문에 11월~연말까지 미국이 기다려줄리 만무하고. VG-day 기점으로 90일 후에 소련 참전이 예정되어 있었던데다, 스케줄대로 8월 8일부터 만주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그전에 빨리 끝내려는 초조감 때문에 원폭이란 극단적 수단까지 써버리고 만 거지. 물론, '무조건 항복' 형식을 고집한 미국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야 할 부분임.

    10.26 23:28
  • 시티즌(59.16)

    사토 대사의 진언도 진언이지만, 제네바에서 앨런 덜레스랑 비밀 화평 교섭을 벌이던 루트를 통해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어필했어야 했는데, 단 하루도 허투루 지샐 수 없는 촉박한 순간에 너무 무르게 대응했음. 기실 중일전쟁 당시의 숱한 화평 공작도 그랬지만, 내각과 대본영은 조직만 갖춰져 있지 결단을 내리는 데 필요한 추진력도, 응집력도 부재한 채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공전만 거듭하다가 일을 키워오는 등 정계 상층부의 의사 결정 시스템 자체가 기능 부전에 빠져들었던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함.

    10.26 23:28
  • ㅇㅇ(223.39)

    황실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는데, 포츠담 선언 초안에는 현 황실 하의 입헌군주제를 지속할지 안할지는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한다 라는 문구가 있었다는데, 이건 이탈리아처럼 군주정 투표를 염두에 두고 삽입한 조항이었음?

    10.26 23:28
  • 시티즌(59.16)

    말할 것도 없이 미 행정부 내부에서도 황실의 유지 및 보장을 놓고 갑론을박이 심했지. 딘 애치슨 같은 강경파는 천황의 기소와 황실 폐지까지 주장했지만, 스팀슨 육군장관과 그루 국무차관은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인 황실이 존속되지 못하면 차후의 점령도 장담할 수 없다는 의견을 고수한 끝에 일본 국민의 의사에 맡긴다는 수사를 선언문에 삽입시킨거고. 천황 심판론에 경도된 강경파 및 미국내 여론의 반응을 의식하면서 일단 천황의 안태 여부는 제껴두되, 종전 후 점령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강경론이 어느 정도 진정 국면에 접어들면 그 지위를 확실히 보장해놓겠다는 국무성의 의향이 반영된거라 볼 수 있음.

    10.26 23:42
  • 시티즌(59.16)

    이탈리아의 경우 영국은 군주정을 유지시키는 것이 자국에 유리하다는 계산으로 사보이 왕가의 존속을 희망했지만, 미국은 공화정 전환을 기대했고, 실제로 파시스트 정권이 붕괴된 형국에서 옛 자유당 계열의 왕당파나 가톨릭 교회를 제외하면 대부분 정파는 공화정 전환을 지지하고 있었거든. 국왕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 실각 후 왕실 가족들 데리고 남부로 탈출한 것도 국민 여론에 악영향을 미친데다, 파시즘 협력 커리어 역시 민감한 화두였으니깐. 국왕 자신이 이 점을 의식한 나머지 무솔리니 체포 후에도 후임 수상을 물색하는데 그 조건으로 왕실에 충성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 이념까지 계속 추종할 군부 인사를 선호했을 정도로 공화파의 위세를 걱정했음.

    10.27 00:00
  • 시티즌(59.16)

    연합국 진영으로 넘어간 후엔 영미군 장성 내지 외교관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안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바람에 영국도 본래 입장에서 선회하여 왕가 존속을 열정적으로 지지하지 않게 되었고, 로마 귀환 후엔 전권을 왕세자한테 위임하는 식으로 은거에 들어갔지만, 이미 왕정 폐지 여론은 돌이킬 수 없는 수순에 접어들었지. 새롭게 창립된 기독교 민주당부터가 바티칸의 의향을 거스른 채 공화정 지지파가 주류를 장악해버린 순간 게임은 끝난 셈이었고, 국민투표는 그 절차를 확인해주는 요식 행위였을 뿐임.

    10.27 00:03
  • ㅇㅇ(223.33)

    이탈리아의 경우는 결국 왕가가 스스로의 멸망을 재촉하게 된 케이스구나.. 전쟁 중에 국민을 버리고 탈출할 생각을 하다니, 어찌 보면 끌려 내려져도 할 말 없을 행보이긴 하지. 그런 점에서 쇼와 천황이 전후 처신을 잘한 것 같음. 쇼와 천황이 미국의 협조에 잘 따라주느냐에 따라 황실의 존속 여부가 어쩌면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음.

    10.27 00:04
  • 시티즌(59.16)

    에마누엘레 국왕이 남부로 피신해있을 적의 일화인데, 어느 영국군 장성이 반바지 차림으로 면전에 나타나니깐 비명을 지르면서 '감히 짐 앞에서 어떻게 저런 복장 차림으로 등장하느냐?'라며 경기를 일으켰다고도 함. 이 시기에 접촉한 연합국 인사들 가운데 나중에 영국 총리가 되는 해럴드 맥밀런 같은 사람은 왕을 한물 간 늙다리 취급하는 투로 본국에 보고하는가 하면, 전후 초대 주일 미국대사가 되는 로버트 머피도 비슷한 평가를 내렸으니, 더이상 기댈 곳이 없었던거나 마찬가지랄까.

    10.27 00:09
  • 댓글돌이
  • ㄱㅈ(113.153)

    실제로 홋카이도 사수 전선이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있었고 치열하게 저항해서 상륙을 막았다는데 좌파진영은 오키나와-미군 전선만 조명하고 문제시해서 반미질중

    10.2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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