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院君・閔妃〈2〉大院君伝-明治人による近代朝鮮論影印叢書』-菊池 謙譲/
ボク的にジャーナリストが書く、うさん臭い本か?という印象がありましたね。でも朝鮮日報の鮮于鉦氏が記事に引用していたのを見たら、韓国でも一応の評価があるんですね。
ボク的にジャーナリストが書く、うさん臭い本か?という印象がありましたね。でも朝鮮日報の鮮于鉦氏が記事に引用していたのを見たら、韓国でも一応の評価があるんですね。
で、メモとして↓
朝鮮日報・韓国語版[선우정 칼럼] 他者의 시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6/2016120603306.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06/2016120603306.html
韓半島は常に日本の利益線の内側に存在してきた。
彼らの関心はそうした次元で展開される。それゆえ情勢が混乱するほど、関心は高まり、研究も深まる。
彼らの関心はそうした次元で展開される。それゆえ情勢が混乱するほど、関心は高まり、研究も深まる。
世界全体が一つとなって回り始めた19世紀後半以降は特にそうだ。
熊本の同心学舎(現在の熊本県立済々黌高)が朝鮮語を教え始めたのは1879年だ。
当時朝鮮語を学んだ人々は韓半島に押し寄せ、スパイ、記者、密使、大陸浪人などに身分を変え、韓半島に関する情報をかき集めた。
その後、植民地支配の先鋒となったが、当初から関心が汚染されて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
熊本の同心学舎(現在の熊本県立済々黌高)が朝鮮語を教え始めたのは1879年だ。
当時朝鮮語を学んだ人々は韓半島に押し寄せ、スパイ、記者、密使、大陸浪人などに身分を変え、韓半島に関する情報をかき集めた。
その後、植民地支配の先鋒となったが、当初から関心が汚染されて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
その中に菊池謙譲という人物がいる、若くして朝鮮に渡り、草の根の世論を把握する一方、上は大院君(テウォングン)にもつながりを持ち、明成(ミョンソン)皇后(閔妃)暗殺にも加担した怪物だ。
数十年蓄積した情報と優れた現場能力で多くの著述を残した。
特に「大院君伝」は朝鮮王朝末期の学者黄玹(ファン・ヒョン)による「梅泉野録」と並び、明成皇后の闇の歴史を今に伝える代表的な野史だ。
特に「大院君伝」は朝鮮王朝末期の学者黄玹(ファン・ヒョン)による「梅泉野録」と並び、明成皇后の闇の歴史を今に伝える代表的な野史だ。
崔順実(チェ・スンシル)事件で最近話題になった女性シャーマン「真霊君(チンリョングン)」の話も詳しく書かれている。
そうした悪意の記述が今でもゾンビのように動き回る。関心と情報で当時の日本に圧倒されていたからだ。
学問と研究の分野では言うまでもない。歴史学は今でもその枠組みの中で闘っている。19世紀の外部に向けた関心の非対称が20世紀初めの国の運命を決めたと私は考えている。
そうした悪意の記述が今でもゾンビのように動き回る。関心と情報で当時の日本に圧倒されていたからだ。
学問と研究の分野では言うまでもない。歴史学は今でもその枠組みの中で闘っている。19世紀の外部に向けた関心の非対称が20世紀初めの国の運命を決めたと私は考えている。
한반도는 일본의 이익선 안에 항상 존재해 왔다.
그들의 관심은 이런 차원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정세가 흔들릴수록 관심은 커지고 연구는 깊어진다.
세계가 하나로 돌아가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특히 그랬다.
일본 구마모토의 동심(同心)학교가 조선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1879년이다.
이때 조선말을 익힌 사람들이 한반도로 밀려와 첩자, 기자, 밀사, 대륙 낭인 등으로 역할을 바꾸면서 한반도 정보를 긁어모았다.
얼마 후 식민 지배의 첨병 노릇을 했지만 초기부터 관심이 오염된 건 아니었다.
이들 중 기쿠치 겐조란 인물이 있다.
젊은 날 조선 땅에 뛰어들어 바닥에서 민심을 파악했고 위로는
대원군까지 줄을
대면서 명성황후 암살에도 가담한 괴물이다.
수십년 동안 축적한 정보와 탄탄한 현장력 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대원군전(傳)'은 황현의 매천야록과 함께 명성황후의 흑(黑)역사를 지금 우리에게 전한 대표적 야사(野史)다.
최순실 사건으로 요즘 화제가 된 '무당 진령군' 이야기가 여기에도 자세히 서술돼 있다.
이런 악의적 기술이 지금껏 좀비처럼 살아 꿈틀댄다.
관심과 정보에서 당시 일본에 압도당한 탓이다.
학문과 연구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학은 여태껏 그 틀 속에서 싸우고 있다.
19세기 외부를 향한 관심의 비대칭이 20세기 초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관심은 이런 차원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정세가 흔들릴수록 관심은 커지고 연구는 깊어진다.
세계가 하나로 돌아가기 시작한 19세기 중반부터 특히 그랬다.
일본 구마모토의 동심(同心)학교가 조선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게 1879년이다.
이때 조선말을 익힌 사람들이 한반도로 밀려와 첩자, 기자, 밀사, 대륙 낭인 등으로 역할을 바꾸면서 한반도 정보를 긁어모았다.
얼마 후 식민 지배의 첨병 노릇을 했지만 초기부터 관심이 오염된 건 아니었다.
이들 중 기쿠치 겐조란 인물이 있다.
젊은 날 조선 땅에 뛰어들어 바닥에서 민심을 파악했고 위로는
대원군까지 줄을
대면서 명성황후 암살에도 가담한 괴물이다.
수십년 동안 축적한 정보와 탄탄한 현장력 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대원군전(傳)'은 황현의 매천야록과 함께 명성황후의 흑(黑)역사를 지금 우리에게 전한 대표적 야사(野史)다.
최순실 사건으로 요즘 화제가 된 '무당 진령군' 이야기가 여기에도 자세히 서술돼 있다.
이런 악의적 기술이 지금껏 좀비처럼 살아 꿈틀댄다.
관심과 정보에서 당시 일본에 압도당한 탓이다.
학문과 연구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학은 여태껏 그 틀 속에서 싸우고 있다.
19세기 외부를 향한 관심의 비대칭이 20세기 초 나라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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