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과연 성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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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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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감히 비판되서는 안되는 성역이 몇몇 존재하니, 그 유래는 삼국지를 지은 진수가 마한은 성역이 있어 그곳으로 도망친 죄수들에게 죄를 묻지 않는다고한 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완벽하지 않으며, 신이 아닌 이상, 조지 워싱턴처럼 전적으로 추앙만 받을 위인들은 정말로 손에 꼽힌다. 한국인들은 세종을 그런 위인으로 간주하는 것 같다. 그는 한글 창제만으로도 큰 업적을 쌓았음을 인정될만 하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결점이 없는 이를 찾아보기 드물다. 아이작 뉴튼은 세계사의 페라다임을 바꾼 위대한 일인 가운데 하나이나, 지극히 편협하고 치사한 인물로서, 말년엔 사이비 성경 연구가로 재능을 망쳤다. 아인슈타인 역시 위대한 대물리학자나 사생활이 더러웠으며, 수소 원자의 파동 방정식을 처음으로 유도하고 유전자학의 초석을 다진 슈뢰딩거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스위스에서 대놓고 바람피우면서 파동 방정식 논문을 작성했다. 퀴로스, 페리클레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하드리아누스 등등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사생활 및 공적 생활에서 결점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들은 거의 없다.
세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학문이 고명하고 널리 아는 게 많으며 유교 덕목을 갖추어 왕의 재목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비만하고 저열한 건강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수많은 여자들을 첩으로 들여 스스로의 건강과 결백한 명성에 누를 끼쳤으며, 여러 아들들에게 권력을 나눠줘 훗날의 가정사 및 국가에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논할 것들은 그의 잘못된 통치에 관한 것들이다. 즉, 위에서 논한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실수가 아닌 중대한 결함을 논하려는 것이다.
1. 노예 인구의 급증
시대가 흘러간다고 시대 정신 역시 앞서 나아가는 건 아니다. 프로이센 등지에서는 16세기 신교 도입 이후 농노 인구가 더 증가하게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 시대의 역행은 그 상상의 영역을 초월하였다. 그는 노비 종모법을 만들어, 아버지 태종이 20%대로 억제하려했던 노비의 숫자를 급증시켜 통치 계급의 착취 수단으로 삼아줬다. 영응대군 같은 자는 노비를 1만명이나 갖고 있었으니 그 상황이 한심하니 않은가? 이는 임견미와 염흥방 일당을 조지고 그들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준 우왕, 노예와 양인의 자식을 이유 불문하고 모두 양인으로 등재한 공양왕보다도 못한 지극히 한심한 처사로서, 이 때 인구의 절반까지 노예 인구가 치솟아 16세기까지 이어지게 되어, 율곡 이이 같은 위대한 인물이 “고금 천하에 동족을 이렇게씩이나 노예로 부려먹는 예시가 없었다”고 한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피통치자의 절반 가까이 노예 신세로 저주한 이 썩어빠진 미친놈을 성군으로 부르는 자들의 뇌가 궁금할 따름이며, “세종은 그 시절에는 노비들에게도 출산 휴가를 주었다”느니 “세종은 노비들에게도 따뜻했덩 성군이었다”니 변명하는 인간들을 노예근성이 넘쳐난다고 인정할 용의가 내게 있다.
또한 세종은 기생 제도를 마련하여 각종 역참 및 각처에 비치하게 하였으니, 이들은 관리들의 성접대, 파견자들 및 변경 병사들의 위안부가 되었다. 아무리 인권이 말살되던 시대라 하나, 이렇게까지 여성의 인권을 참혹하게 탄압했던 예시는 근세 유럽의 마녀 사냥 이외에 찾아볼 수 없다.
2. 수령고소금지법
세종조에 허조가 건의한 이 법은 쉽게 말해 상관이 뭔 짓을 하든 그 밑의 놈이 반항하면 잡아다가 모가지 날리자는 것으로서, 관리자를 투표로 뽑는 관행이 없는 조선인들에게 통치자들의 무한한 탈취와 폭압을 사실상 허용한 최악의 악법이다. 내 관찰에 이 법은 아직까지도 한국인의 관행과 습관을 촘촘히 얽매고 있다. 군대식 숨막히는 상명하복 문화를 무슨 독재정권 시절의 전유물인양 까는 자들이 있는데, 그 근원은 바로 이 미쳐버린 씹꼰대가 만든 악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선 정권을 백성들의 어려움을 따스히 보살피는 21세기식 인권 정부러 생각하는 자들도 있나본데, 내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이 정의가 구현된 걸 거의 본 적이 없다.
3. 외교 실패
조선이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하나, 인조 및 고종 때를 빼면, 그렇게씩이나 중국에 굴욕적으로 굴종한 적은 세종조가 거의 유일하다. 조선 강역의 절반은 사신들의 약탈에 방치되었으며, 조정은 그들의 “심기”가 상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민간을 징발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중국의 권력자들을 위해 전국의 미혼 여성들을 잡아 바치기까지 하였으니, 동서고금을 통해 이 정도로 썩어 빠져 굴종했던 예시를 난 찾아볼 수 없다. 이 정신 나간 노예 새끼를 실리외교를 구사한 성군이라 칭하는 게 낯간지럽지 않은가?
또한 당대의 권력자들은 일본의 앞서 나간 수차 및 도시 제도를 배우자는 사신의 건의도 씹고, 북경에 갔다 온 사신들조차 벽돌과 십자로로 뻗은 반듯한 제도를 보고도 두 눈 질끈 감았으니, 얼마나 상병신들이었는지 이해되는 바다.
4. 지극히 혼란했던 국내 상황
위의 실책이 있다 하나, 세종이 선정을 펼쳤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아니었다. 조선에서 멋대로 결사 조직을 만들어 불특정 다수에게 살인과 강도의 피해를 끼치던 자들을 명화적이라 불렀는데, 실록에 “명화 도적”이라 검색하면 가장 많이 검색되는 시대가 바로 세종조이다 (1위 : 세종조 23건, 2위 : 고종조 8건) 그리고 흉년이 빈발했던 그의 치세를 살펴보면 (1위 : 중종조 1066건, 2위 : 세종조 686건), 도적이 들끓게 된 것도 크게 이해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리하여 그의 치세는 강도 사건이 들끓었으니 (1위 : 세종조 217건, 2위 : 성종조 216건), 범법자의 처단도 그만큼 많았다 (“참형”으로 검색한 결과, 1위 : 세종조 467건, 2위 성종조 237건).
일반 대중들이 이렇게씩이나 살기 어려웠던 시절이 바로 세종 시절이었으며, 국가에 의한 폭력이 가장 많이 자행되던 시절도 바로 세종 시절이었다. 그가 할 수 있던 대책은 흉년에 구휼미를 푸는 것, 범법자를 처단하는 것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경제를 잘 이해하지 못한 세종은 상품 경제도 제대로 발전되지도 못한 상황에서 돈을 유통시키려다가 혼란만 끼쳤고, 생산력을 끌어올려서 국가를 부강하게하는 대신, 백성 다수를 노예로 만들어 차라리 그들은 더욱 가난하고 비참하게 만들었으니, 가난하자가 유랑민이 되고 도적이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심지어 그의 시절엔, 당시 전쟁 때 말고 조선에 일반적이지 않았던 식인 기사마저 출현하는 실정이니, 얼마나 그의 시절이 살기 어려웠나 짐작 가능하다.
세종을 외국 군주와 견주면, 오덕력이 있었으나 나라를 사실상 방기한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 정도에나 비교될 수 있다. 같은 조선에서 비교해봐도, 출중한 장군이었던 태조, 명민한 판단력을 지녔던 선조, 다수의 백성들을 노예 상태에서 과감히 해방시킨 영조의 역량이 훨씬 미치지 못했으며, 그는 단지 통치자 계급의 그 어느 누구도 죽이지 않음으로서 해동요순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따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통치자로서의 그를 암군이라 평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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