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게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주장이다. 인터넷에서 보면 초록불이라는 사람이 이러한 착각과 망상을 마치 정론인 것처럼 포장하여 열을 올리며 전파하고 또 무식한 대중들은 초록불이라는 소위 말하는 아마추어 역사학도의 권위에 매몰되어,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비판도 없이 받아들이곤 한다. 이들은 자료나 증거따위보다 '종교'를 더 신봉하기 때문에 어떤방식으로 계도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많으나, 단지 몇가지만 지적하여 그들의 망상을 깨트려보고자 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팔아 먹은 소수의 매국노때문에 망했다라는 세뇌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면서 그 부귀영화라는 대가의 증거로 고작 작위 수여 사실과 훈장 및 은사금 수여를 예로 드는데.. 여기에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시 매국노라 불리던 사람들이 실상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들이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왕조국가이기 때문에 왕에게 모든 주권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이념이나, 국민민주권론을 적용시키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나라를 팔아 먹더라도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당시 이완용은 내각의 수장으로서 조선왕의 신하였을 뿐이므로, 나라팔아 먹는 데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이완용이 합방조약에 도장찍었기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고 주장하는 초록불같은 이들의 망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본다. 이들의 주장을 곰곰히 살펴보면 조선은 아주 정상적인 나라였는데, 왕도 아닌 일개 신하가 도장을 찍어서 멀쩡하던 나라가 갑자기 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은 아무런 잘못이 없고, 이완용 개인이 나라를 팔아 먹었다고 한다. 뇌가 있긴 있는걸까?

이것을 보면 잘 알겠지만, 당시 조선왕이던 순종황제는 합병에 찬성하고 있었다. 이완용은 그저 왕의 의지에 따라 협상을 진행하고, 대신 도장을 찍은 것이다. 일본측 대표로는 사내정의 통감이 선정되었다. 이 자는 이등방문의 후임으로 조선통감으로 부임되어 당시 조선내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다. 국가간 어떤 조약을 체결하더라도 국가의 최고수장이 직접 협상을 하지 않는다. 한일협정때도 김종필이 협상을 맡았다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종필은 박정희의 명령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수교협상을 했다는 것일까? 정말 정상적인 뇌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데라우치 통감처럼 조선측에서는 이완용 총리대신이 협상자로 선정되었을 뿐이다. 조약을 체결하는데 황제가 직접 나서서 일본국 천황과 대한제국 황제가 직접 만나야만 한다는 발상... 정말 뇌 수준이 의심스럽다.
이 자료는 한일합방 조약 문서이다. 사내정의 통감과 이완용 총리대신의 직인이 그대로 찍혀있다. 데라우치 통감이 일본국의 대리자인 것 처럼 이완용은 단지 조선왕의 대리자로서 조약에 도장을 찍은 것 뿐이다. 이것을 마치 이완용이 도장찍어서 조선이 망했다는 식으로 몰아부쳐 조선왕은 여기에 반대하고 있었다는 망상으로까지 확대하는 이들을 보면 정말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이들의 뇌는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조선왕이 이렇듯 합방에 찬성한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대체로 조선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때문에 일본에 나라를 팔아 먹어 안전을 도모하고, 계속적으로 권력을 누리려고 했는데, 일본으로부터 그 대가를 받게 된다. 위에 제시된 문서는 한일합방문 조약의 3조로서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와 태황제 폐하와 황태자 폐하 전하와 그 후(后)와 비(妃) 및 그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상응하는 존칭과 권위와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그것을 보지(保持)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라는 항목이다. 이러한 조약문구에 의해 조선왕실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했어도 여전히 그 지위와 명예, 그리고 돈을 약속받는다. 세계 그 어디를 둘러봐도 이러한 형식의 식민지배체제는 존재하지가 않는다. 조선왕은 이렇게 좋은 조건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은 그 시작부터 중국의 속국으로 시작하여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전까지 조선왕은 중국 황제의 신하에 불과했기 때문이고. 일본의 보호 없이는 밖으로 또다시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그밖의 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안으로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란 등의 내부혁명에 의해 붕괴될 것이 뻔했기에 조선왕실 입장에서도 매우 좋은 조건이었음이 틀림없다.

위 문서는 한일합방 후 조선왕실의 처우에 대한 일본정부의 왕공가궤범이라는 공식문서이다. 일본은 앞서 한일합방을 준비하면서 1910년 중순부터 병합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키고 현 조선 황제를 태공으로 임명하고, 의친왕 이하 한국 황족에 대해서는 공작을 수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그러나 이완용 총리대신과 조중응 농상공상이 데라우치 통감을 방문하여 '현 황제는 창덕궁 이왕 전하, 태황제는 덕수궁 이태왕 전하, 황태자는 왕세자 전하의 호칭을 사용해서 한국황실 및 원로의 의향을 완화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말은 즉 조선왕실의 왕호를 유지시키지 않을시에 합방을 할 수 없으며 왕실과 내각을 설득할 수 없으니, 왕호유지를 허락해달라. 그러면 왕실과 내각은 합방에 찬성할 것이다.' 라는 의미다. 결국 데라우치 통감은 이를 받아들였고, 왕실과 내각이 합방조약에 찬성하고 합법적으로 조선은 일본국에 팔려나간 것이다. 이것은 작위 수여자 명단에서 다시 한번 증명된다. 고종, 순종, 영친왕, 의친왕, 왕실종친 등등 전부 다 작위를 받았다. 이완용이 작위 받았기 때문에 매국노라 하니, 이들 작위 받은 조선왕실인사들은 전부 매국노인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는 나라의 모든 권리가 왕에게 귀속되는 것이니, 왕이 매국을 하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때문에 이완용 혼자서 협상을 하고, 왕실과 내각이 반대했다는 기존의 통념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로 인해 왕공가궤범이 새로이 제정되고 조선왕실은 완벽히 왕칭호를 보장받는다. 여기서 이완용이 이렇듯 왕호유지에 집착한 이유를 살펴볼 수 있는데, 당시 조선은 더이상 나라를 유지할 힘이 없었고, 일본의 병합의지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나라가 망해야만 한다면 왕실이라도 보존시키자고 했던 것이다. 사실 조선은 이전부터 중국 속국이었기 때문에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아 황제의 신하로서 조선이라는 땅을 황제 대신 통치한 것이었다. 때문에 왕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으면 충분히 국가를 형성할 수 있고, 중화세계의 속국으로서 중화황제의 임명을 받아 왕이 된 것처럼 일본천황의 인정을 받은 왕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당시 왕조국가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국민주권론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신하의 주된 도리는 왕실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왕실을 지켜 사직을 보전하는 것만이 유교원리에 충실한 이완용의 생각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분개하고, 비통해 할 수는 있을 것이지만, 마치 조선이 정상적인 국가였고, 소수의 매국노들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당시의 국제정세와 조선의 피폐한 상황도 고려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고종황제의 일본대훈휘 국화장을 패용하고 있는 모습
태왕 고종, 이왕 순종, 왕세자 영친왕의 일본훈장 패용모습
의친왕의 일본 대훈위 국화장 패용모습
일본 황족들만 패용할 수 있는 대훈위 국화 장경식
위 사진에서는 순종황제 또한 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고종은 상왕으로서 이왕자리에서 물러나 이왕 순종이 그 지위를 세습.

일본국 최고 영예의 대훈위
국화장 고종, 순종, 영친왕, 의친왕 모두 패용하고 있다.
한일합방으로 새로이 재정된 왕공가궤범 제 51조에 의해 조선왕은 일본국의 왕족으로서 편입되고 일본국최고의 영예인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으며 일본국 천황가의 친왕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것을 거부했다는 조선왕족은 아무도 없다. 이완용의 매국 증거로서 백작 작위를 흔히 들지만, 이들 조선왕실은 그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의 지위와 특권을 부여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순종황제는 이완용을 대은인으로 삼아 그에게 대한제국 최고 영예인 대훈위 금척대수 훈장을 내리고, 상금을 내린다. 합방이후 작위 수여자는 총 76명, 그중 사후 반납이나 박탈자는 고작 6명... 이들 70명에 이르는 이들은 조선왕족, 왕실종친, 내각대신들이다. 이완용의 작위는 백작이었고, 아무런 특권도 없는 이름만을 받았을 뿐이며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던 총리대신의 지위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 것 없다. 합방이후 일본천황이 대사령을 내려 국사범,정치범등 8백여명 석방,횡령이나 공금착복한 관리들에게 변상을 면제하고, 은사공채 3천만엔을 발행해 왕족과 대신 양반,한학자,효자,열녀등 8만9천8백64명에게 뿌렸고,
의친왕 이강은 공으로 봉해지고 은사금 83만원,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은 공으로 봉해지고 은사금 83만원, 순종의 계비 윤비의 아버지 윤택영은 후작의 작위와 은사금 50만4천원을 받게 된다. 앞서말한 6명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거부했다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다. 그에 비해 이완용은 고작 15만원, 그리고 나라 팔아 먹었다는 사람의 지위는 왜 이 모양일까? 게다가 조선왕족들은 승승장구, 일제시대 내내 호의호의식하며 천수를 다 누렸는데... 이완용 일가는 세간의 지탄을 받으며 죽을때까지 욕을 먹고 살았다. 조선이 망하여 무슨 부귀영화를 봤다는걸까? 오히려 패가망신 하지 않았나? 일제시대 당시 민족정론지였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조차 이완용을 나라 팔아 먹은 죄인이라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이완용에게 보복을 당한 것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완용은 아무런 권세도 없었고, 또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려고 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오로지 조선왕실에 충성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거절하고 반대한 사람이 없는데 왕의 충신인 이완용이 왕의 명령을 거부해 합방에 반대해야만 죄가 없다라는 논리는 분명한 억지다. 그는 왕실에 모든 것을 헌신한 충신이었다.

위 문서는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위한 '조선급만주' 라는 잡지다. 샤코 이토우가 발행인으로서 이완용이 죽었을 당시 그의 죽음을 추도하며 친미친러이자 배일파의 선구자였던 이완용이 어찌하여 을사조약과 한일합방에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일파들의 우두머리였던 친미개화선각자 이완용이 친일파로서 돌아서게 되자 일본인들조차 놀랐다고 전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완용은 일본어를 전혀 몰랐고, 친하게 지낸 일본인도 전혀 없었다. 일본인 관료들 사이에서는 이토히로부미의 신임을 얻은 자로만 알려져 능력과 신의가 있는 인물로서 인식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재산이 많은 것과는 다르게 돈을 흥청망청 쓰지도 않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돈을 모으고, 잘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기가 죽으면 자기 일가를 보호해 줄 것은 돈밖에 없을 것이다라며 재산을 축적한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사심도 없었고, 자기 생활에 철저한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 한국인들은 일제에 의해 무력침공을 당해 조선이 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적이없다. 나라는 합법적으로 팔려나갔고, 여기에 저항한 인간들은 극소수 기득권 양반들이다. 당시의 조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포츠머스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선배열강들로부터 인정받은 일본의 병합 야욕에 전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또한 오랜 당쟁과 세도정치, 그리고 민씨일족들의 전횡으로 인해 백성들의 피폐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름 정신을 차려 일본과 같이 자력근대화의 꿈을 꾸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외교에 온 총력을 기울렸으나 그것 마저 실패하게 된다. 결국 자국내 반란도 자력으로 진압하지 못해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 백성들을 학살하게 되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미 내부에서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현대 한국인들은 이렇게 비참한 나라를 옹호하며 안망할 수 있었는데, 잔혹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무력으로 침략을 해서.... 또는 자신의 부귀영달만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매국노들때문에 망하지 않아도 될 나라가 망했다라는 거짓을 지어낸다. 무능하고 부폐한 왕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져 버린 이완용이라는 충신을 욕하면 욕할수록 우리만 더 비참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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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쓰기서점에 가셔서 역사책 하나라도 더 보세요
아니면
가까운 정신과 병원가서 상담 받아보세요
미친넘..ㅉㅉ
헤이그 밀사사건이나
고종이 독일황제한테 한일합방은 무효라고 편지보낸 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고종은 별로 마음이 없었던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