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U>키무라 노부오의 홈페이지</U>에서 가져온 것입니다.(한국어 번역이 기계 번역이라 오역을 수정했습니다.) 작성자는 jpn1_rok0이라는 일본인이며 몇년전 인조이재팬에 올라왔던 글입니다. 리플 역시 인조이재팬의 것입니다.
전시에서의 날조와 오차
전시(戦時)에는 어떠한 교전자라도 선전을 한다. 그것은 손해를 은폐하여 전과(戦果)를 과대하게 주장하는 형태로 행해진다.
일본의 경우 노몬한 사건에 대한 전과와 손모(損耗)의 날조가 유명한데, 이는 전쟁 후에야 패배였던 것이 밝혀졌다. 대량의 손실이 발생했음이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인원수나 후생성의 유족 연금 지급자로써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미드웨이 해전의 손해도 은폐되었다.
이러한 일은 일본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초두의 미국에서는 잇따르는 패배와 필리핀에서의 실함 등으로 미국내에 불만이 높아진 것 외에도 전선의 병사들 사이에 「일본군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관념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군은 Colin P. Kelly, Jr 대위라는 한 영웅을 날조했다. 그는 필리핀에 상륙하는 일본군 수송선을 폭격하기 위해 B-17 폭격기에 탑승하여 출격했지만 일본해군에 의해 격추되어 전사한다.
미군은 그를 「일본 기동부대를 공격하고 폭격에 의해 전함 1척을 격침하였으며 다른 전함에 전력투구 공격을 감행해 이를 대파했다. Kelly 대위는 전력투구 전에 자기 이외의 탑승원을 탈출시키고 홀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날조하여 전쟁 후에도 그것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과의 학술적인 조합이 진행되자 Kelly 대위는 기동부대 공격 등은 하지 않았음과 그가 선단을 향해 투하한 폭탄은 1발도 명중하지 않았던 것, 그를 격추했던 자가 일본의 에이스 파일럿 「Sakai Saburo」인 것 등이 밝혀져 미국에 의한 선전임이 밝혀졌다. 현재는 미국도 Kelly 대위는 만들어진 영웅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작위적인 선전외에도, 전시의 전과 인정은 곤란을 극히, 때때로 과대한 보고수를 기록한다. 태평양에서 일·미가 기록한 전과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면 미군의 격추기 수는 일본이 제조한 모든 항공기를 격추해도 부족한 수이고, 일본군의 기록은 그만큼은 아니지만 미군이 작전 불능이 되는데 충분한 수를 격추하고 있다. 이러한 오차는 전투시의 혼란 등에 기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2차대전 참가국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오차를 배제하기 위해 상호의 기록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거의 정확한 전과와 손해 확인에 성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련이 붕괴했기 때문에 소련의 정확한 데이터가 입수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주목되고 있다.
청산리 대첩은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BLOCKQUOTE>일본 기병사(하권) 佐久間亮三·平井卯輔 편찬
萌黄会 昭和38년 11월 24일 발행 비매품 666페이지
기병 제27연대
기병 제27연대는 러일 전쟁후 조선병합과 수반하여 조선에 신설된 제19사단에 설치되었고, 북한의 요충 羅南에서 시베리아 사건(시베리아 출병) 및 만주사변시 항상 재빨리 출동했었으며,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그 땅에서 오로지 대소 경비에만 임명되고 있었으나 전쟁이 가열되자 결국 히시마(比島; 필리핀)에 증파되었다. 또 그 부재중대(留守隊)는 종전전의 소련군의 침입에 의해 전투부대가 되어 이것을 요격하고 분전해, 대부분이 옥쇄한 특이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연대다.
1 창립 및 군기배수(軍旗拝受)
大正5년초에 창립되어 동년 4월 18일 군기가 수여되었다.
2 병영
병영은 조선 羅南에 있었다.
3 편제의 변혁
편제는 다른 사단 기병 연대와 같았지만, 만주사변에 출동했을 때에는 본부와 1중대 및 기관총 1소대였다. 또 昭和15(1939)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되어 군기를 봉환(奉還)했다. 수색 제19연대의 편제는 연대 본부와 승마 1중대, 장갑차 1중대였지만 昭和19(1944)년 필리핀 출동에 해당한 승마 중대는 승차(乗車) 중대로 개편되었다.
4 역대 연대장
제1대 중좌 츠치야 아츠시(土屋篤)
제2대 대좌 카노우 노보테루(加納信暉) (시베리아 사건)
제3대 대좌 이이지마 마사조우(飯島昌蔵)
제4대 대좌 하야카와 야스시(早川靖)
제5대 대좌 키요오카 키노미(清岡公臣)
제6대 대좌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 (만주 사변)
제7대 대좌 토요시마 히카루(豊島暉)(만주 사변)
제8대 대좌 나카무라 엔타로(中村円太郎)
제9대 대좌 카타기리 시게루(片桐茂)
제10대 대좌 쿠보타 타케지로우(窪田武二郎) (장고봉 사건)
제11대 대좌 모리카와 이사무(森川勇)
이하 수색 19연대로 개편(후략)
5 전력
먼저, 大正7년 시베리아 사건에 즈음해 7월에 2소대를 연해주에 파견, 大正9년까지 토벌, 경비를 담당했다. 또 大正9년에 간도사건(한국측이 주장하는 청산리 전투)이 일어나자 마자 연대 주력을 가지고 용정촌(竜井村)으로 출동, 약 3월에 걸쳐 부근 소탕에 종사했다. 연대장은 카노우 노보테루(加納信暉※) 대좌였다.
그 다음, 만주사변 발발 후 얼마되지 않아 昭和6(1931)년말 연대 주력을 가지고 출동, 금서(錦西)에 진주하여 토비숙정(討匪粛正; 게릴라 토벌)을 임명받았지만 다음해인 7(1932)년 1월, 금서 서방지구를 소탕중 금서의 병력이 작은 것을 틈타 약 2000의 적비(敵匪)가 반격하여, 우리 잔류 부대를 포위해 군기(軍旗)의 수호가 위험해졌으므로, 연대장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 중좌는 급히 작은 수병(手兵)을 데리고 금서로 귀환하여 금서를 포위 공격하는 우세한 적을 공격, 진두에 서서 분전중 장렬히 전사했고 연대 부관 米井三郎大尉 대위 이하 다수가 사상했다. 그러나 장병은 연대장의 죽음을 극복하고 분전, 결국 적을 격퇴하여 군기는 평안무사했다. 그 후 연대장은 토요시마 히카루(豊島暉) 중좌로 바뀌고, 길림(吉林) 북부로 옮겨 치안 숙정을 임명받아 곧 羅南으로 귀환, 중일전쟁 발발 때에는 羅南에 있었다. (후략)</BLOCKQUOTE>
(※ 한국측 주장에는 「Ganou 대좌」라는 말이 있지만 해당하는 연대장의 이름은 없으므로 취임 시기와 발음의 유사성으로 볼 때 Kanou 대좌의 오역이라고 판단된다.)
기병 27연대의 기록에 간도에서의 대규모 전투 기록은 없고, 연대장 전사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1931년 만주사변에서의 게릴라의 기습 및 연대장의 전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다.
【검증】
1904년~1938년까지 전몰한 기병 장교(사관학교 출신자) 명부
1 러일 전쟁(1904~1905)
아시비 료(馬男木伊予) 사관학교 3기
모리타 타케오(森田猛雄) 사관학교 5기
아사노 리키타로(浅野力太郎) 사관학교 7기
타케다 미츠노부(武田三喜) 사관학교 7기
하야카와 하루스케(早川治輔) 사관학교 10기
카노우 타다오(加納忠夫) 사관학교 12기
코야마 요시후미(小山能文) 사관학교 13기
고바야시 타마키(小林環) 사관학교 14기
코즈츠미 신타로(小堤辰太郎) 사관학교 14기
난부 토시요시(南部利祥) 사관학교 14기
나카무라 유조(中村雄蔵) 사관학교 14기
노무라 모리시게(野村盛重) 사관학교 14기
타무라 우마조(田村馬蔵) 사관학교 15기
나카무라 모리노부(長岡守全) 사관학교 15기
2 제1차 세계대전(1914~1919)
사쿠마 젠지(佐久間善次) 사관학교 13기
3 시베리아 출병(1920~1922)
사사무라 유코(笹村遊虎) 사관학교 27기
이시바시 후지오(石橋富士雄) 사관학교 29기
사가 하루오(嵯峨春雄) 사관학교 29기
4 만주 사변(1931)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사관학교 15기
코야마 코우지(小山光二) 사관학교 26기
콘도 타이조(近藤泰三) 사관학교 28기
하나자와 토모오(花沢友男) 사관학교 29기
후와 나오하루(不破直治) 사관학교 29기
카와사키 노부오(川崎長雄) 사관학교 30기
사토 이치로(佐藤一郎) 사관학교 30기
오오무라 모토마사(大村基昌) 사관학교 30기
시부야 쥰조우(渋谷順三) 사관학교 30기
요나이 사부로(米井三郎)사관학교 32기
히로세 타츠오(広瀬辰男) 사관학교 34기
시바 토키오(柴時男) 사관학교 36기
카타오카 미츠오(片岡三男) 사관학교 39기
카가미야마 마사오(鏡山正夫) 사관학교 44기
오오타 토시오(太田利男) 사관학교 46기
노구치 시게카즈(野口茂一) 사관후보생
5 노몬한 사건(1938)
오오우치 츠토무(大内孜) 사관학교 26기
아즈마 야오조(東八百蔵) 사관학교 26기
이오키 에이이치(井置栄一) 사관학교 28기
시마누키 타다마사(島貫忠正) 사관학교 33기
후루타 히데오(古田秀夫) 사관학교 33기
카와노 이와오(河野巌) 사관학교 45기
이이지마 테루오(飯島照雄) 사관학교 51기
1920년의 전사자 가운데 카노우 대좌라는 이름의 해당자는 없다. 또 기병출신 장교전사자 명부전체(2차 대전 종료시까지 조사가 끝난 상태)에도 해당 이름은 없다. 한편, 27연대의 전투 기록에 있는 코가 중좌(전사 후 대좌로 승진) 및 요나이 대위의 전사는 위의 명부와 합치한다.이로부터 기병 27연대장 「Kanou 대좌」는 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자, 이 「증거 사진」을 검증해 볼까?

이 사진은 김좌진 기념관과 독립기념관에 있는, 청산리 전투 직후 촬영된 일본군 사진 자료입니다. 병사들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합니다. 부상자의 모습은 매우 심각하게 보입니다. 도적을 토벌 하는 일본 정규군의 위용이 안보이고 매우 지치고 피곤한 모습인데, 이런 모습은 승리한 군대에서는 나타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dymaxion 아저씨의 지당한 듯한 설명입니다만···· 여기서 해설
① 우선, 사진의 일본군 모자를 주목!
이 모자는 「약모(略帽)」또는 「전투모(戦闘帽)」라 불리는 것으로 昭和7년(1932년)에 정식 채용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明治45년에 제식 채용된 「45式」이라 불리는 모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위의 사진은 1932년 이후에 촬영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다음으로, 들것을 메는 병사와 그 앞 병사의 어깨를 주목!
병사의 어깨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5式, 45式改(색조가 다름), 昭和5년식의 군복은 어깨에 프랑스식 계급장이 붙어있지만, 昭和13년(1938)에 제식화 된 「98식 군복」은 옷깃에 계급장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위 사진의 병사가 입고 있는 군복은 「98식」이고 昭和13년(1938) 이후에 촬영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③ 참고 자료
45식 군복을 입은 기병 상등병과 45식 군모
어깨의 계급장에 주목.
군모에는 「타이쇼 9년(1920) 제조」라 각인되어 있다.

덧붙여서 이쪽이 쇼와 7년 이후에 사용된 「약모」

카노우(加納) 씨는 건강합니다
지금까지의 경위
평소 화제의 중심 인물인 기병 제27연대장 「카노우」대좌입니다만, 왜 한국측은 「카노우 대좌」에 집착할까요? 그것은 「조선독립운동지혈사」등의 한국측 자료에 있는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실명이 기재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군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카노우 대좌가 전사하고 있으면 「영사관 비밀 보고서」의 신빙성이 높아져 「일본군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근거는 만약 일본측에 의해 뒤집어졌을 경우 「조선독립운동지혈사」 그 자체의 신빙성을 크게 저하시키는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노우 대좌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측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본측으로부터 제시된 자료는 「간도 출병사에 장교의 전사 기록은 없다」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명부에 카노우 대좌의 이름은 없다」 「후생성의 전사자 명부에도 이름이 없다」 「육군사관학교출신 기병 전사자 명부에도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측은 카노우 대좌가 1920년에 전사하여 차기 연대장으로 교대했「을 것이다」라는 논법을 전개했습니다. 근거로서 1920년 10월 이후 카노우 대좌의 이름이 기재된 문서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측의 요구에 근거해 찾았습니다. 역시 카노우 대좌는 죽지 않았습니다.
●기초 자료:
간도 사건 이후 카노우 대좌의 행동 일부에 대하여 알려드립니다. 카노우 대좌은 기병 제27연대의 제2대 연대장으로서 大正 8년에 부임, 3년의 근무를 무사하게 종료하고 차기 연대장과 교대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자료를 제시합니다.
기병 제27연대 역대 연대장의 임기
중좌 土屋篤 大正5년 4월 18일 ~ 大正8년
대좌 加納信暉 大正8년 ~ 大正11년 8월 15일
대좌 飯島昌蔵 大正11년 8월 15일 ~ 大正14년
대좌 早川靖 大正14년 ~ 昭和3년
대좌 清岡公臣 昭和3년 ~ 昭和6년
대좌 古賀伝太郎 昭和6년 ~ 昭和7년 1월 (만주사변에서 전사)
대좌 豊島暉 昭和7년 1월 ~ 昭和9년 (古賀 대좌의 임무를 계승)
대좌 中村円太郎 昭和9년 ~ 昭和12년
대좌 片桐茂 昭和12년 ~ 昭和15년
대좌 窪田武二郎 昭和15년 ~ 昭和18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
대좌 森川勇 昭和18년 ~ 昭和20년 2월무렵 (주력은 필리핀에서 전멸)
원 사료는 「http://www.nids.go.jp/」에서 조사한 「기병 제27연대사」
●자료 해설과 검증:
① 한국측의 주장대로 카노우 대좌가 전사하거나 또는 부대의 지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어 후임의 이이지마(飯島) 대좌가 大正9년에 연대장으로 교대했을 경우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중좌 土屋篤 大正 5년 4월 18일 ~ 大正8년
대좌 加納信暉 大正8년 ~ 大正9년 10월 22일
대좌 飯島昌蔵 大正9년 11월무렵 ~ 大正11년
대좌 早川靖 大正11년 ~ 大正14년
대좌 清岡公臣 大正14년 ~ 昭和3년
대좌 古賀伝太郎 昭和3년 ~ 昭和6년 (모순①)
대좌 豊島暉 昭和6년 ~ 昭和7년 (모순②)
대좌 中村円太郎 昭和7년 ~ 昭和9년
대좌 片桐茂 昭和9년 ~ 昭和12년
대좌 窪田武二郎 昭和12년 ~ 昭和15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
대좌 森川勇 昭和15년 ~ 昭和18년 (모순③)
연대장 부재 昭和18년 ~ 昭和20년 (모순④)
※昭和7년 1월에 만주 사변에서 전사한 코가(古賀) 대좌와 昭和19년에 필리핀으로 전전(轉戰) 한 모리카와(森川) 대좌의 임기가 정합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발견한 자료에서는 각 연대장의 재임 기간과 코가 대좌·모리카와 대좌에 관한 사실이 정합하고 있으므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시된 3종류의 전사자 명부와 더불어 카노우 대좌는 청산리에서 전사하지 않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카노우 대좌가 청산리에서 죽지 않음이 증명된 이상, 그 이후의 카노우 대좌의 행적은 논의와 무관계하므로 제시하지 않는다.
② 한편, 한국측의 사료에만 존재하는 「간도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사상자의 통계가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전투후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집계된 것이긴 하지만 피해집계가 가능한 단계에서 연대장이라는 고급장교의 전사등과 같은 정보가 오인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영사관의 보고서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설득력 없음을 알 수있다.
③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해를 주었다는 주장의 유일한 구체적인 근거인 「영사관 비밀 보고서 내용」이라는 기술이 설득력이 없는 이상, 청산리 전투에 대하여 한국측이 주장하는 전과를 증명하는 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고, 한국측 자료의 신빙성은 현저하게 저하된다.
④ 즉 박은식의 기술에 있는 「영사관 비밀 보고서」라는게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과장·각색된 것이며, 자신의 유능함을 보여서 지지자를 모으기 위한 단순한 선전이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환언하면,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청산리에서의 전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진 유일한 자료는 허구인 것이 되고, 이것은「조선독립운동지혈사」나 「독립군보고서에 근거하는 신문보도」등과 같은 문서의 사료적 가치 그 자체에 큰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전투 직후 카노우 대좌의 행동은 이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전제가 되는 사실의 확인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구일본군은 임시 편성한 부대에 지휘관의 명칭을 붙여 「xx 지대(支隊)」 「xx 토벌대」 「xx 기병척후(騎兵斥候)」등으로 불러서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시합니다.
덧붙여서 간도사건 당시에 기병 제27연대는 몇 개의 부대로 분산하여 행동했는데, 카노우 대좌가 지휘하는 기병 연대 주력을 중심으로 하는 부대는 「카노우 토벌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카노우 대좌가 어떠한 이유로 임무가 해제된 경우나 혹은 부대가 큰 손해를 입어 재편성을 피할 수 없게 된 경우에는 부대를 새로 지휘하는 지휘관의 명칭이 붙여집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식으로 편성된 부대가 아니므로 책임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BLOCKQUOTE>본문:
11월 중순, 지대장은 安同利龍県界 밀림지대에 도적의 한 무리가 잠복한 것을····(중략)····이전, 카노우 토벌대는 동불사(銅仏寺) 방면의 소탕에 임명되어····(후략)
(간도 출병사 P78 ~P79)</BLOCKQUOTE>
oppekepe씨의 제공 자료:
<BLOCKQUOTE>본문:
秘間情 제69호 大正9년 11월 31일
在간도 일본 총영사관
二 불령선인(不逞鮮人) 금강(金剛) 체포
11월 13일 연길현(延吉県) 대평구룡포동(大平溝竜浦洞) 부근에서 카노우 기병 연대의 손에 잡힌 금강(金剛; 본명 송재길(宋在吉) 호 무산(武山))은 종래 국민회 경호부장으로서 횡포를 다한 유력한 불령선인으로서
<みすず書房 현대사 자료 28 P412></BLOCKQUOTE>
大正9년 11월 중순에 카노우 대좌가 지휘하는 「카노우 토벌대」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카노우 대좌는 건강하게 부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중상을 입어 교대같은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잔인한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 심판을 내립니다.
카노우 대좌는 청산리에서 죽지 않았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제19사단이나 기병 제27연대에 큰 손해가 나온 형적도 없다. 즉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 있는 전과는 비정상적인 과장이다. 따라서 청산리의 대승리 등은 거의 확실한 날조다.
전시에서의 날조와 오차
전시(戦時)에는 어떠한 교전자라도 선전을 한다. 그것은 손해를 은폐하여 전과(戦果)를 과대하게 주장하는 형태로 행해진다.
일본의 경우 노몬한 사건에 대한 전과와 손모(損耗)의 날조가 유명한데, 이는 전쟁 후에야 패배였던 것이 밝혀졌다. 대량의 손실이 발생했음이 당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인원수나 후생성의 유족 연금 지급자로써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미드웨이 해전의 손해도 은폐되었다.
이러한 일은 일본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초두의 미국에서는 잇따르는 패배와 필리핀에서의 실함 등으로 미국내에 불만이 높아진 것 외에도 전선의 병사들 사이에 「일본군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관념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군은 Colin P. Kelly, Jr 대위라는 한 영웅을 날조했다. 그는 필리핀에 상륙하는 일본군 수송선을 폭격하기 위해 B-17 폭격기에 탑승하여 출격했지만 일본해군에 의해 격추되어 전사한다.
미군은 그를 「일본 기동부대를 공격하고 폭격에 의해 전함 1척을 격침하였으며 다른 전함에 전력투구 공격을 감행해 이를 대파했다. Kelly 대위는 전력투구 전에 자기 이외의 탑승원을 탈출시키고 홀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날조하여 전쟁 후에도 그것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측 기록과의 학술적인 조합이 진행되자 Kelly 대위는 기동부대 공격 등은 하지 않았음과 그가 선단을 향해 투하한 폭탄은 1발도 명중하지 않았던 것, 그를 격추했던 자가 일본의 에이스 파일럿 「Sakai Saburo」인 것 등이 밝혀져 미국에 의한 선전임이 밝혀졌다. 현재는 미국도 Kelly 대위는 만들어진 영웅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작위적인 선전외에도, 전시의 전과 인정은 곤란을 극히, 때때로 과대한 보고수를 기록한다. 태평양에서 일·미가 기록한 전과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면 미군의 격추기 수는 일본이 제조한 모든 항공기를 격추해도 부족한 수이고, 일본군의 기록은 그만큼은 아니지만 미군이 작전 불능이 되는데 충분한 수를 격추하고 있다. 이러한 오차는 전투시의 혼란 등에 기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2차대전 참가국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오차를 배제하기 위해 상호의 기록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거의 정확한 전과와 손해 확인에 성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련이 붕괴했기 때문에 소련의 정확한 데이터가 입수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주목되고 있다.
청산리 대첩은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BLOCKQUOTE>일본 기병사(하권) 佐久間亮三·平井卯輔 편찬
萌黄会 昭和38년 11월 24일 발행 비매품 666페이지
기병 제27연대
기병 제27연대는 러일 전쟁후 조선병합과 수반하여 조선에 신설된 제19사단에 설치되었고, 북한의 요충 羅南에서 시베리아 사건(시베리아 출병) 및 만주사변시 항상 재빨리 출동했었으며,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그 땅에서 오로지 대소 경비에만 임명되고 있었으나 전쟁이 가열되자 결국 히시마(比島; 필리핀)에 증파되었다. 또 그 부재중대(留守隊)는 종전전의 소련군의 침입에 의해 전투부대가 되어 이것을 요격하고 분전해, 대부분이 옥쇄한 특이한 전력을 가지고 있는 연대다.
1 창립 및 군기배수(軍旗拝受)
大正5년초에 창립되어 동년 4월 18일 군기가 수여되었다.
2 병영
병영은 조선 羅南에 있었다.
3 편제의 변혁
편제는 다른 사단 기병 연대와 같았지만, 만주사변에 출동했을 때에는 본부와 1중대 및 기관총 1소대였다. 또 昭和15(1939)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되어 군기를 봉환(奉還)했다. 수색 제19연대의 편제는 연대 본부와 승마 1중대, 장갑차 1중대였지만 昭和19(1944)년 필리핀 출동에 해당한 승마 중대는 승차(乗車) 중대로 개편되었다.
4 역대 연대장
제1대 중좌 츠치야 아츠시(土屋篤)
제2대 대좌 카노우 노보테루(加納信暉) (시베리아 사건)
제3대 대좌 이이지마 마사조우(飯島昌蔵)
제4대 대좌 하야카와 야스시(早川靖)
제5대 대좌 키요오카 키노미(清岡公臣)
제6대 대좌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 (만주 사변)
제7대 대좌 토요시마 히카루(豊島暉)(만주 사변)
제8대 대좌 나카무라 엔타로(中村円太郎)
제9대 대좌 카타기리 시게루(片桐茂)
제10대 대좌 쿠보타 타케지로우(窪田武二郎) (장고봉 사건)
제11대 대좌 모리카와 이사무(森川勇)
이하 수색 19연대로 개편(후략)
5 전력
먼저, 大正7년 시베리아 사건에 즈음해 7월에 2소대를 연해주에 파견, 大正9년까지 토벌, 경비를 담당했다. 또 大正9년에 간도사건(한국측이 주장하는 청산리 전투)이 일어나자 마자 연대 주력을 가지고 용정촌(竜井村)으로 출동, 약 3월에 걸쳐 부근 소탕에 종사했다. 연대장은 카노우 노보테루(加納信暉※) 대좌였다.
그 다음, 만주사변 발발 후 얼마되지 않아 昭和6(1931)년말 연대 주력을 가지고 출동, 금서(錦西)에 진주하여 토비숙정(討匪粛正; 게릴라 토벌)을 임명받았지만 다음해인 7(1932)년 1월, 금서 서방지구를 소탕중 금서의 병력이 작은 것을 틈타 약 2000의 적비(敵匪)가 반격하여, 우리 잔류 부대를 포위해 군기(軍旗)의 수호가 위험해졌으므로, 연대장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 중좌는 급히 작은 수병(手兵)을 데리고 금서로 귀환하여 금서를 포위 공격하는 우세한 적을 공격, 진두에 서서 분전중 장렬히 전사했고 연대 부관 米井三郎大尉 대위 이하 다수가 사상했다. 그러나 장병은 연대장의 죽음을 극복하고 분전, 결국 적을 격퇴하여 군기는 평안무사했다. 그 후 연대장은 토요시마 히카루(豊島暉) 중좌로 바뀌고, 길림(吉林) 북부로 옮겨 치안 숙정을 임명받아 곧 羅南으로 귀환, 중일전쟁 발발 때에는 羅南에 있었다. (후략)</BLOCKQUOTE>
(※ 한국측 주장에는 「Ganou 대좌」라는 말이 있지만 해당하는 연대장의 이름은 없으므로 취임 시기와 발음의 유사성으로 볼 때 Kanou 대좌의 오역이라고 판단된다.)
기병 27연대의 기록에 간도에서의 대규모 전투 기록은 없고, 연대장 전사 기록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1931년 만주사변에서의 게릴라의 기습 및 연대장의 전사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다.
【검증】
1904년~1938년까지 전몰한 기병 장교(사관학교 출신자) 명부
1 러일 전쟁(1904~1905)
아시비 료(馬男木伊予) 사관학교 3기
모리타 타케오(森田猛雄) 사관학교 5기
아사노 리키타로(浅野力太郎) 사관학교 7기
타케다 미츠노부(武田三喜) 사관학교 7기
하야카와 하루스케(早川治輔) 사관학교 10기
카노우 타다오(加納忠夫) 사관학교 12기
코야마 요시후미(小山能文) 사관학교 13기
고바야시 타마키(小林環) 사관학교 14기
코즈츠미 신타로(小堤辰太郎) 사관학교 14기
난부 토시요시(南部利祥) 사관학교 14기
나카무라 유조(中村雄蔵) 사관학교 14기
노무라 모리시게(野村盛重) 사관학교 14기
타무라 우마조(田村馬蔵) 사관학교 15기
나카무라 모리노부(長岡守全) 사관학교 15기
2 제1차 세계대전(1914~1919)
사쿠마 젠지(佐久間善次) 사관학교 13기
3 시베리아 출병(1920~1922)
사사무라 유코(笹村遊虎) 사관학교 27기
이시바시 후지오(石橋富士雄) 사관학교 29기
사가 하루오(嵯峨春雄) 사관학교 29기
4 만주 사변(1931)
코가 덴타로(古賀伝太郎)사관학교 15기
코야마 코우지(小山光二) 사관학교 26기
콘도 타이조(近藤泰三) 사관학교 28기
하나자와 토모오(花沢友男) 사관학교 29기
후와 나오하루(不破直治) 사관학교 29기
카와사키 노부오(川崎長雄) 사관학교 30기
사토 이치로(佐藤一郎) 사관학교 30기
오오무라 모토마사(大村基昌) 사관학교 30기
시부야 쥰조우(渋谷順三) 사관학교 30기
요나이 사부로(米井三郎)사관학교 32기
히로세 타츠오(広瀬辰男) 사관학교 34기
시바 토키오(柴時男) 사관학교 36기
카타오카 미츠오(片岡三男) 사관학교 39기
카가미야마 마사오(鏡山正夫) 사관학교 44기
오오타 토시오(太田利男) 사관학교 46기
노구치 시게카즈(野口茂一) 사관후보생
5 노몬한 사건(1938)
오오우치 츠토무(大内孜) 사관학교 26기
아즈마 야오조(東八百蔵) 사관학교 26기
이오키 에이이치(井置栄一) 사관학교 28기
시마누키 타다마사(島貫忠正) 사관학교 33기
후루타 히데오(古田秀夫) 사관학교 33기
카와노 이와오(河野巌) 사관학교 45기
이이지마 테루오(飯島照雄) 사관학교 51기
1920년의 전사자 가운데 카노우 대좌라는 이름의 해당자는 없다. 또 기병출신 장교전사자 명부전체(2차 대전 종료시까지 조사가 끝난 상태)에도 해당 이름은 없다. 한편, 27연대의 전투 기록에 있는 코가 중좌(전사 후 대좌로 승진) 및 요나이 대위의 전사는 위의 명부와 합치한다.이로부터 기병 27연대장 「Kanou 대좌」는 전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자, 이 「증거 사진」을 검증해 볼까?

이 사진은 김좌진 기념관과 독립기념관에 있는, 청산리 전투 직후 촬영된 일본군 사진 자료입니다. 병사들의 모습이 어쩐지 처량합니다. 부상자의 모습은 매우 심각하게 보입니다. 도적을 토벌 하는 일본 정규군의 위용이 안보이고 매우 지치고 피곤한 모습인데, 이런 모습은 승리한 군대에서는 나타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dymaxion 아저씨의 지당한 듯한 설명입니다만···· 여기서 해설
① 우선, 사진의 일본군 모자를 주목!
이 모자는 「약모(略帽)」또는 「전투모(戦闘帽)」라 불리는 것으로 昭和7년(1932년)에 정식 채용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明治45년에 제식 채용된 「45式」이라 불리는 모자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위의 사진은 1932년 이후에 촬영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 다음으로, 들것을 메는 병사와 그 앞 병사의 어깨를 주목!
병사의 어깨에는 계급장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5式, 45式改(색조가 다름), 昭和5년식의 군복은 어깨에 프랑스식 계급장이 붙어있지만, 昭和13년(1938)에 제식화 된 「98식 군복」은 옷깃에 계급장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위 사진의 병사가 입고 있는 군복은 「98식」이고 昭和13년(1938) 이후에 촬영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③ 참고 자료
45식 군복을 입은 기병 상등병과 45식 군모
어깨의 계급장에 주목.
군모에는 「타이쇼 9년(1920) 제조」라 각인되어 있다.

덧붙여서 이쪽이 쇼와 7년 이후에 사용된 「약모」

카노우(加納) 씨는 건강합니다
지금까지의 경위
평소 화제의 중심 인물인 기병 제27연대장 「카노우」대좌입니다만, 왜 한국측은 「카노우 대좌」에 집착할까요? 그것은 「조선독립운동지혈사」등의 한국측 자료에 있는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실명이 기재되어 있는 유일한 일본군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카노우 대좌가 전사하고 있으면 「영사관 비밀 보고서」의 신빙성이 높아져 「일본군 1000명 이상을 사살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근거는 만약 일본측에 의해 뒤집어졌을 경우 「조선독립운동지혈사」 그 자체의 신빙성을 크게 저하시키는 양날의 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카노우 대좌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측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일본측으로부터 제시된 자료는 「간도 출병사에 장교의 전사 기록은 없다」 「야스쿠니 신사의 합사 명부에 카노우 대좌의 이름은 없다」 「후생성의 전사자 명부에도 이름이 없다」 「육군사관학교출신 기병 전사자 명부에도 이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측은 카노우 대좌가 1920년에 전사하여 차기 연대장으로 교대했「을 것이다」라는 논법을 전개했습니다. 근거로서 1920년 10월 이후 카노우 대좌의 이름이 기재된 문서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측의 요구에 근거해 찾았습니다. 역시 카노우 대좌는 죽지 않았습니다.
●기초 자료:
간도 사건 이후 카노우 대좌의 행동 일부에 대하여 알려드립니다. 카노우 대좌은 기병 제27연대의 제2대 연대장으로서 大正 8년에 부임, 3년의 근무를 무사하게 종료하고 차기 연대장과 교대하고 있습니다. 또 새로운 자료를 제시합니다.
기병 제27연대 역대 연대장의 임기
중좌 土屋篤 大正5년 4월 18일 ~ 大正8년
대좌 加納信暉 大正8년 ~ 大正11년 8월 15일
대좌 飯島昌蔵 大正11년 8월 15일 ~ 大正14년
대좌 早川靖 大正14년 ~ 昭和3년
대좌 清岡公臣 昭和3년 ~ 昭和6년
대좌 古賀伝太郎 昭和6년 ~ 昭和7년 1월 (만주사변에서 전사)
대좌 豊島暉 昭和7년 1월 ~ 昭和9년 (古賀 대좌의 임무를 계승)
대좌 中村円太郎 昭和9년 ~ 昭和12년
대좌 片桐茂 昭和12년 ~ 昭和15년
대좌 窪田武二郎 昭和15년 ~ 昭和18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
대좌 森川勇 昭和18년 ~ 昭和20년 2월무렵 (주력은 필리핀에서 전멸)
원 사료는 「http://www.nids.go.jp/」에서 조사한 「기병 제27연대사」
●자료 해설과 검증:
① 한국측의 주장대로 카노우 대좌가 전사하거나 또는 부대의 지휘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상을 입어 후임의 이이지마(飯島) 대좌가 大正9년에 연대장으로 교대했을 경우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중좌 土屋篤 大正 5년 4월 18일 ~ 大正8년
대좌 加納信暉 大正8년 ~ 大正9년 10월 22일
대좌 飯島昌蔵 大正9년 11월무렵 ~ 大正11년
대좌 早川靖 大正11년 ~ 大正14년
대좌 清岡公臣 大正14년 ~ 昭和3년
대좌 古賀伝太郎 昭和3년 ~ 昭和6년 (모순①)
대좌 豊島暉 昭和6년 ~ 昭和7년 (모순②)
대좌 中村円太郎 昭和7년 ~ 昭和9년
대좌 片桐茂 昭和9년 ~ 昭和12년
대좌 窪田武二郎 昭和12년 ~ 昭和15년 (수색 제19연대로 개편)
대좌 森川勇 昭和15년 ~ 昭和18년 (모순③)
연대장 부재 昭和18년 ~ 昭和20년 (모순④)
※昭和7년 1월에 만주 사변에서 전사한 코가(古賀) 대좌와 昭和19년에 필리핀으로 전전(轉戰) 한 모리카와(森川) 대좌의 임기가 정합하지 않게 된다.
이번에 발견한 자료에서는 각 연대장의 재임 기간과 코가 대좌·모리카와 대좌에 관한 사실이 정합하고 있으므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제시된 3종류의 전사자 명부와 더불어 카노우 대좌는 청산리에서 전사하지 않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카노우 대좌가 청산리에서 죽지 않음이 증명된 이상, 그 이후의 카노우 대좌의 행적은 논의와 무관계하므로 제시하지 않는다.
② 한편, 한국측의 사료에만 존재하는 「간도 영사관 비밀 보고서」에 사상자의 통계가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전투후 어느정도 시간이 흘러 집계된 것이긴 하지만 피해집계가 가능한 단계에서 연대장이라는 고급장교의 전사등과 같은 정보가 오인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므로 「영사관의 보고서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설득력 없음을 알 수있다.
③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해를 주었다는 주장의 유일한 구체적인 근거인 「영사관 비밀 보고서 내용」이라는 기술이 설득력이 없는 이상, 청산리 전투에 대하여 한국측이 주장하는 전과를 증명하는 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고, 한국측 자료의 신빙성은 현저하게 저하된다.
④ 즉 박은식의 기술에 있는 「영사관 비밀 보고서」라는게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의해 고의로 과장·각색된 것이며, 자신의 유능함을 보여서 지지자를 모으기 위한 단순한 선전이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환언하면,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서 청산리에서의 전과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진 유일한 자료는 허구인 것이 되고, 이것은「조선독립운동지혈사」나 「독립군보고서에 근거하는 신문보도」등과 같은 문서의 사료적 가치 그 자체에 큰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전투 직후 카노우 대좌의 행동은 이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전제가 되는 사실의 확인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구일본군은 임시 편성한 부대에 지휘관의 명칭을 붙여 「xx 지대(支隊)」 「xx 토벌대」 「xx 기병척후(騎兵斥候)」등으로 불러서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명시합니다.
덧붙여서 간도사건 당시에 기병 제27연대는 몇 개의 부대로 분산하여 행동했는데, 카노우 대좌가 지휘하는 기병 연대 주력을 중심으로 하는 부대는 「카노우 토벌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카노우 대좌가 어떠한 이유로 임무가 해제된 경우나 혹은 부대가 큰 손해를 입어 재편성을 피할 수 없게 된 경우에는 부대를 새로 지휘하는 지휘관의 명칭이 붙여집니다. 그러지 않으면 정식으로 편성된 부대가 아니므로 책임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BLOCKQUOTE>본문:
11월 중순, 지대장은 安同利龍県界 밀림지대에 도적의 한 무리가 잠복한 것을····(중략)····이전, 카노우 토벌대는 동불사(銅仏寺) 방면의 소탕에 임명되어····(후략)
(간도 출병사 P78 ~P79)</BLOCKQUOTE>
oppekepe씨의 제공 자료:
<BLOCKQUOTE>본문:
秘間情 제69호 大正9년 11월 31일
在간도 일본 총영사관
二 불령선인(不逞鮮人) 금강(金剛) 체포
11월 13일 연길현(延吉県) 대평구룡포동(大平溝竜浦洞) 부근에서 카노우 기병 연대의 손에 잡힌 금강(金剛; 본명 송재길(宋在吉) 호 무산(武山))은 종래 국민회 경호부장으로서 횡포를 다한 유력한 불령선인으로서
<みすず書房 현대사 자료 28 P412></BLOCKQUOTE>
大正9년 11월 중순에 카노우 대좌가 지휘하는 「카노우 토벌대」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카노우 대좌는 건강하게 부대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중상을 입어 교대같은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잔인한 것 같습니다만, 마지막 심판을 내립니다.
카노우 대좌는 청산리에서 죽지 않았고, 중상을 입지도 않았다. 제19사단이나 기병 제27연대에 큰 손해가 나온 형적도 없다. 즉 「조선독립운동지혈사」에 있는 전과는 비정상적인 과장이다. 따라서 청산리의 대승리 등은 거의 확실한 날조다.




물론 인조이재팬의 일본인 주장도 문제가 있는게, 너무 청산리대첩 전과를 축소하느라고 독립군 토벌작전의 의의마저 훼손시킨다는 점.
2008.05.24 14:21그러니까 아놔 몰라 니가 찾아봐...의 답변이군요 ㅡㅡ;
2008.05.24 14:22대답이 괭장히 성의없음.
2008.05.24 14:23대답만 보면 일개 아마추어 집단인 인조이 제팬이, 전문가 집단인 국사편찬위원회를 쳐바르는 것 같아보임..
2008.05.24 14:26좀 성의있게 정황근거니 전투의 의의니 아주 길게 읊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질문보다 어떻게 답변이 더짧아?
2008.05.24 14:35애들이 뭘 착각하는게 독립군측 자료는 안믿고 일본측 자료만 믿는다고 하는데. 임시정부측 발표나 당시 신문기사는 입증이 안됐고 오.히.려. 반.증.이. 나.왔.음(신용하가 죽었다고 주장한 장교의 사례). 반면 일본측 기록은 간접증거로 증병이 됐고. 입증된 기록 vs 입증안된 기록 일때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전자를 선택하게 돼있다.
2008.05.24 14:35신문보도로 치면 헤이그 밀사 사망사건의 내역을 안다면 신문기사란건 2차 사료로서 공문서, 보고서 같은거랑 충돌하면 깨갱할 수 밖에 없는...
2008.05.24 14:52망신살 뻗기 전에 저 사진은 청산리 대첩 코너에서 빨리 내려야 할 듯.. 고증 검증없이 대충 이럴 것이라고 초딩들이 학급 미화정리할 때 화보 붙이는 수준으론 절대 않됨.
2008.05.24 14:55공문서가 성경은 아님. 거기도 방증자료 필요하지.헌데일빠들 하는 거 보면 고거 하나만 가지고 열심히 흔들어대면서 지 혼자 다 논파했다고 득의양양하는 꼴.
2008.05.24 14:56ㄴ개구역질난다 이 씹쓰레기 주먹구구 김치새끼야
2015.02.25 0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