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ction

계절편지 | 두고 가요

Shoes



면접 대기실의 공기는 설렘과 긴장으로 한껏 들떠있었다. 전면 유리창에 뿌연 수증기가 낄 정도로 면접자들은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며 예행연습을 했다. 우석은 떨리는 손을 맞잡고 계속해서 심호흡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 소란스러움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남들의 긴장한 기운이 죄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 같아 버겁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하필 면접 번호도 제일 뒷 번호여서 우석은 남은 인원과 면접 소요 시간을 대충 갈무리 하다가 이 답답한 곳보다 화장실이 낫겠다 싶어서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제 목을 조이고 있던 갑갑한 넥타이를 당겨 벗고는 셔츠 첫 단추를 풀었다. 그래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자 몇 번이나 세수를 했다. 젖은 앞머리에서 톡톡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괜찮아, 잘 할 수 있어, 괜찮아, 우석아”


이제 막 사회인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은 설레기만 할 줄 알았는데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온전히 제 책임과 제 선택의 결과로 인생이 결정될 것이다. 20대의 열정과 패기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이 한 번에 덮치자 우석은 분명 철저히 준비했는데도 떨렸다. 앞머리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의 박자에 맞춰 눈을 감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어느 순간 물방울이 뚝 끊겼다. 눈을 뜬 우석의 앞에는 한 남자가 페이퍼타월을 뽑아들고 우석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치고 서 있었다.


“셔츠 다 젖겠어요”

“아...네”

“면접 보러 오셨나 봐요?”

“네, 너무 떨리네요”


우석은 남자가 건넨 페이퍼타월로 앞머리와 얼굴을 가볍게 닦고는 다시 옷차림을 매만졌다. 셔츠 앞 단추를 잠그고 다시 넥타이를 매려는데 고쳐 매려고 할수록 매듭이 꼬였다. 아침에도 몇 번이나 애먹던 넥타이였다.


“괜찮으면 제가 해드릴까요?”

“아...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나요. 이쪽 한 번 봐주실래요?”


남자 쪽으로 몸을 틀자 남자는 자기 손에 입김을 한 번 불어넣고는 꼭 잡고 쓱쓱 문질렀다. 우석의 셔츠 깃을 올리다 얼핏 남자의 손가락이 우석의 뒷목을 건드렸지만 차갑지 않았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라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몰라 우석은 넥타이를 매주는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긴 손가락과 툭 불거진 손마디, 넓은 손바닥과 손등에 올라온 얇은 핏줄, 거기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넥타이를 여며주는 손길에 우석은 챙김 받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 조금만 들어볼래요?”


넥타이의 여밈 부분이 잘 보이지 않는지 남자의 말에 우석이 고개를 들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대, 진한 눈썹에 깊은 눈, 집중하며 제 목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시선에 우석은 자기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조용한 화장실 안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자 우석은 민망해서 얼른 입을 가렸지만 남자는 살짝 미소를 짓고는 손을 떼고 우석의 차림새를 매만져주었다. 남자의 손이 우석의 이마께에 닿아 앞머리를 살짝 넘겨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우석이 살짝 놀라며 눈을 찡긋거리자 남자가 작게 웃었다.


“지금도 멋있는데 앞머리 넘기는 게 더 인상이 좋아요.”

“아...감사합니다”

“면접 잘 봐요, 우석씨”


꾸벅 인사를 하는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하고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남자는 화장실을 나가고 없었다. 우석은 몸을 돌려 거울을 봤다. 반듯하게 접힌 넥타이와 옷깃이 단정했다. 잠시 흐트러졌던 차림새가 자리 잡힌 것 뿐인데 우석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살짝 앞머리를 올려봤다. 앞머리로 가려져있던 이마가 훤히 눈에 들어오니 정말 남자의 말대로 인상이 더 좋아보였다. 우석은 손에 물을 묻혀 머리를 다시 정돈했다. 깔끔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면접 잘 보라는 말이 주문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잘하자. 김우석.


긴장은 어느 정도 풀렸지만 면접 대기실의 사람들이 줄어들수록 한기가 들었다. 썰렁해진 면접 대기실은 통창 너머 겨울의 한기를 계속해서 들이키고 있었다. 왜 이런 곳을 면접 대기실로 잡았는지 우석은 기껏 다 풀어놓은 긴장이 다시 추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마지막 면접자들 대여섯 명 정도만 남았을 때 면접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화장실에서 보았던 남자가 종이컵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느라 힘드시죠. 이거 한 잔씩 드세요”


남자는 마지막 남은 면접 대기자들에게 종이컵을 나눠줬다. 우석의 차례에는 서로 알아보았는지 작은 목례를 나눴다. 우석의 손에 종이컵이 쥐어지자 따뜻한 온기가 손에 번졌다. 혹시나 뜨거울 것 같아 쉽게 마시지 못하고 있는데 남자가 뜨겁지 않다며 바로 마셔도 된다고 첨언했다. 남자의 말에 차를 한 모금 마시니 정말 적당히 따뜻한 온도의 차였다. 가끔 면접장에서 나눠주는 마실 것들은 찬 물이거나 너무 뜨거운 커피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런 사소한 것에도 마음 써주는 사람이라는 게 우석은 신기하면서도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과 함께 일한다며 어떤 기분일까.


마지막 면접자들이 호명됐다. 우석은 빈 종이컵을 다시 남자에게 건네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닫히는 문 뒤로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예의를 갖추는 사람. 다시 만날 수 있다면.


*


우석은 그토록 바라던 홍보팀에 입사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대로 다시 만나게 된 남자, 이진혁. 진혁은 홍보팀의 팀장이자 우석의 사수가 되었다. 팀장이 직접 신입사원의 사수를 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홍보팀은 워낙에 일의 양이 많고 상대해야 하는 고객사가 많아서 빠르고 정확하게 일을 배워야했다. 그래서 홍보팀 온 사원이 멘티와 멘토로 묶여있었다. 우석은 다시 만나게 된 진혁이 반가운 마음도 잠시 사수라는 소리에 긴장이 됐다. 입사 동기들은 저마다 우석에게 하필 걸려도 팀장과 엮이다니 고생길이 훤하다고 위로했다.


안 그래도 긴장되는데 동기들의 얘기에 우석은 목석처럼 굳어서 앞자리에 앉은 진혁을 힐끔거렸다. 진혁의 모습은 제가 상상했던 어른의 모습이었다. 깔끔한 차림에 바른 자세, 쓸데없는 가십성 대화 없이 적당히 담백한 말투와 행동들이 여전히 단정했다. 단 둘이 앉아있는 회의실이 어색할 법도 했지만 우석은 일단 제 눈앞에 놓인 첫 업무가 더 중요했다. 팀장과 한 팀이니 더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신입이다 보니 어려운 업무 대신 고객사와 광고 대행사, 업체들과의 거래 계약서를 비교하고 맞추는 서류 업무를 맡았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서식이 맞지 않아 어떤 방법을 써도 문서가 깔끔해지지 않았다. 우석은 사내 메신저로 동기들에게 SOS를 쳐봤지만 동기들도 다 방법을 모르겠다는 말 뿐이었다. 시간은 점점 지나고 식은땀이 났다. 정해진 시간에 업무를 마무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잘하고 싶은데 모른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서웠다. 이럴 때는 당연히 사수인 진혁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인데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우석 씨, 서식 정리 다 됐으면 넘겨줄래요?”

“네? 그게...”

“시간 좀 더 필요해요?”

“...”


우석이 시원찮게 우물거리자 진혁은 잠시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석의 자리 뒤로 돌아와 컴퓨터 화면을 내려 보았다. 우석은 창피해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이런 기본적인 업무도 못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첫 날부터 찍히는 건가 우석은 무릎 위에 올려둔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진혁의 마우스를 잡아 스크롤을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뭐가 문제였는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석의 옆에 앉았다.


“자, 이거 정리하는 방법 알려줄게요. 잘 봐요”


진혁은 우석이 잘 따라할 수 있게 쉽고 정확하게 업무를 알려줬다. 중요한 부분은 메모를 해주기도 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던 것들이 막상 실전에서 하려면 막히는 일들이 생기는데 지금이 딱 그런 경우였던 것이다. 보통의 상사라면 빠르게 일처리 하는 요령을 알려줄 텐데 진혁은 요령보다는 정석에 가까운 일처리를 알려주었다. 진혁은 제가 알려준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챕터를 우석에게 직접 시켜보고 손에 익은지,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도 봐주었다.


“어려운 거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물어봐요. 그러라고 내가 있는 거니까요.“

“네... 죄송합니다...”

“우리는 팀이잖아요”

“바쁘신데 귀찮으실까봐...”

“귀찮아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요”


진혁은 눈썹을 올리며 우석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한껏 긴장했던 우석이 진혁의 그런 행동에 조금 웃음이 났다. 한 번 더 손가락을 흔드는 진혁에게 우석도 새끼손가락을 걸어 쥐었다. 진혁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웃으며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정리하고 퇴근하라며 회의실을 나섰다. 우석은 진혁이 쓴 업무 메모를 한참이나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제 업무 다이어리 첫 장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다. 그리고 그 아래 진혁의 말을 다시 한 번 적어두었다. [귀찮아하지 않기, 약속]


*


진혁은 우석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늘 예의 있고 깍듯했다.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언제나 누구씨, 누구님 지칭하며 존댓말을 했다. 회사 내의 경비, 청소하시는 분들에게도 늘 수고하신다며,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고 핫팩을 건네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성격은 다정했지만 일에서는 철저한 사람이었다. 사원들의 작은 의견들도 귀담아 들었고 좋은 아이디어 같으면 꼭 문서로 작성해 보고하게 했다. 그 아이디어가 성과를 이루면 진혁은 꼭 그 아이디어를 줬던 사원에게 공을 돌렸다. 선을 넘는 일에 대해서는 혹시나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확한 이유를 들어 거절의 사유를 들려줬다. 하나하나 사회생활에 유용하고 뼈와 살이 되는 조언들과 경험이었다.


“나도 팀장님한테 일 배우고 싶다”

“뭐야... 전에는 팀장님이 사수라서 고생길 훤하다고 놀리더니”

“그렇게 멋있는 사람인 줄 알았나 뭐~”

“잘생겼지, 일 잘하지, 착하지, 완벽하다 정말!‘

“저런 사람이 애인이면 진짜 좋겠다”


그러고 보니 같이 일하면서도 사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워낙에 공과 사의 구분이 깔끔한 사람인가 하고 말았는데 우석도 사실 궁금하긴 했다. 회사에서는 완벽한 사람인데 밖에서는 어떨까. 너무 완벽해도 사람이 별로라던데 성적 취향이 이상하다랄까, 아니면 페티쉬가 있다랄까, 오타쿠라던가 막 이상한 쪽으로만 잡생각이 드는 우석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열심히 일하는 진혁을 힐끔힐끔 보던 우석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진혁이 피식 웃었다.


“내 얼굴 닳겠어요”

“아... 죄송합니다”

“무슨 할 말 있어요?”

“저...팀장님은 애인 없으세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을 하던 진혁이 고개를 들어 우석을 바라봤다. 평소에 일 관련 얘기만 하다가 처음 사적인 질문을 한다는 게 대뜸 애인 유무라니. 처음 보는 진혁의 당황한 모습이라 우석은 신기하면서도 궁금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우석을 보니 진혁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애인 없어요”

“에이...재미없어”

“우석씨는 애인 있어요?”

“아뇨 저도 없어요”

“재미없네요”


질문과 답을 우석과 똑같이 하는 진혁을 보고 이정도 농담은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이정도는 얘기해도 되는구나 싶어서 우석은 좋았다. 곧잘 대답을 해주자 우석은 조금 더 궁금했다.


“그럼 이상형은 어떻게 되세요?”

“이상형이라...”


이상형 얘기에 다시 고개를 들어 우석을 보던 진혁이 아예 자세를 옆으로 빼 앉았다. 가만히 우석을 보고는 하나하나 이상형을 말하는데 그 내용이 조금 남다른 거.


“눈꼬리가 길고 쌍꺼풀이 예뻤으면 좋겠고, 귀는 안 뚫었으면 좋겠어요. 코랑 입은 좀 작았으면 좋겠고 앞머리를 내려도 좋지만 이마가 드러난 스타일도 잘 어울렸으면 좋겠고요. 손은 커도 발은 좀 작았으면 좋겠고, 피부는 하얀 편이 더 좋아요.”


하나하나 듣고 있던 우석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인상이 꼭 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착각인가 싶었다. 그런데 말하면서 제 눈을 그윽하게 보는 눈빛이 왠지 모르게 간지러워서 이번에는 우석이 모니터로 시선을 피했다.


“엄청 구체적이시네요...”

“좋아하는 사람 떠올리면 구체적일 수 밖에요”


그 말이 꼭 좋아한다는 소리처럼 들려서 우석은 텀블러에 담긴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히터를 튼 것도 아닌데 회의실이 후끈해진 것 같아 손부채질을 해보이자 진혁이 씨익 웃는 게 보였다. 회의실의 공기가 조금 어색해졌을 때 전체 회의 알림이 울렸다. 진혁과 우석은 회의 자료를 들고 사내 강당으로 향했다.


*


하반기 대형 광고 경쟁이 시작됐다. 굴지의 대기업들의 광고를 따내기 위한 경쟁 피티였고 우석의 회사도 참가하게 됐다. 기획팀과 홍보팀의 정예 멤버로들만 꾸려진 프로젝트 팀에서 진혁은 홍보팀 대표로 들어가게 됐다. 우석은 신입사원이고 그런 대형 프로젝트에 낄만한 경력이 되지 않아 멤버에서 제외되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자 진혁은 정신없이 바빴다.


“팀장님 저러다가 쓰러지시는 거 아냐?”

“그러니까... 어제도 못 들어가신 것 같던데?”

“잠은 주무시나?”

“회사에서 쪽잠자고 그러신가봐”


진혁은 거의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홍보팀의 팀장이니 간간이 와서 업무 사항이나 진행 내용들을 체크하는 일 외에는 얼굴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업무 장소도 기획팀의 자리로 옮겨져 있어서 기획팀에 볼 일이 있지 않는 한 마주칠 일도 없었다. 회사에서도 중요한 프로젝트다 보니 진혁이 홍보팀에 신경 쓰지 않게 배려한 것도 있었지만 우석은 거의 매일 진혁과 붙어 있다가 떨어지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진혁을 못 본지 보름 정도 되었을까 남은 업무를 정리하느라 퇴근이 늦어진 우석은 허기진 배의 신호를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이라 속이 좀 쓰려서 밥 대신 간단히 죽이나 사먹어야겠다 생각하는데 불현 듯 진혁 생각이 났다. 평소라면 기획팀에 갈 일이 없지만 대부분의 사원들이 퇴근한 시간이라 기획팀 쪽은 한산했다. 우석은 조심스럽게 기획팀을 가로질러 구석의 회의실로 향했다. 슬쩍 올려다본 회의실에는 진혁이 있었다.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은 없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자 진혁이 고개를 들었는데 오랜만에 마주한 진혁의 얼굴은 정말 반쪽이 되어 있었다.


“어? 우석 씨, 퇴근 안했어요?”

“지금 하려고요... 팀장님은요?”

“전 보시다시피”


회의실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들과 칠판에 적인 일정들, 알 수 없는 전문 용어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온갖 인스턴트 음식들로 가득한 책상 위에 약 봉투까지 놓여있었다. 그러고 보니 진혁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간간히 기침을 하는 것 보니 감기까지 걸린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저야 잘 지내는데...팀장님은 괜찮으세요?”

“바쁜데 어쩔 수 없죠. 요즘 제대로 못 챙겨줘서 미안해요”

“잠은 주무세요?”

“한 두시간씩은 자요. 괜찮아요”


오랜만에 봐서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여유가 없어보였다. 진혁은 금요일인데 어서 가서 불금 즐기라며 우석에게 인사하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우석도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회사를 나섰다. 죽 집에 들러 제가 먹을 죽을 사는데 아무래도 진혁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우석은 죽 두 개를 포장해서 다시 회사로 발길을 옮겼다. 다시 돌아온 우석을 보고 진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는데 우석의 손에 들린 죽을 보고서 진혁은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이 들었다.


“감기 걸리셨으면서 왜 끼니도 거르세요... 이거 드세요”

“고마워요. 이것 때문에 다시 온 거예요?”

“식기 전에 얼른 드세요”

“정말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나중에 말고 지금 같이 먹어요”


사실 진혁은 입맛이 없어서 우석이 두고 가면 나중에라도 먹어야지 싶었는데 지금 안 먹으면 안 될 것처럼 우석이 딱 버티고 서 있으니 결국 노트북을 한 켠으로 치워뒀다. 그렇게 오랜만에 나란히 앉아서 저녁을 먹고 근황 얘기를 했다. 그 대화에서도 진혁은 그동안 우석에게 못해줬던 사수 역할을 다 하려는 것처럼 프로젝트의 방향, 진행 상황 등 쓸모 있는 이야기들을 해줬고 우석도 흥미롭게 들었다. 실무자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경험담은 우석에게 큰 재산이 되었다. 죽을 다 먹고 진혁이 약까지 챙겨 먹는 걸 보고서야 일어설까 했는데 결국 자리에 다시 앉는 우석이었다.


“단순 업무라도 주세요. 혼자 하시는 거 무리예요”

“우석씨 나 정말 괜찮아요”

“아뇨. 도와드릴게요”

“감기라도 옮으면 어쩌려고요. 혼자 해도 돼요”

“제가... 안 괜찮아요”


한 번 더 거절하면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의 우석을 보니 진혁도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면서 미뤄뒀던 서류들을 우석에게 건네고 할 일을 지시했다.


사실 진혁은 기획팀과의 일손이 잘 맞지 않았다. 서로 합이 잘 맞지 않다보니 기초적인 자료 정리부터 문서작성까지 진혁이 다시 손보면서 하다 보니 진행이 느려졌다. 몇 번이나 서포트를 붙여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우석이 팀에 들어올거고 괜히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우석이 일을 도와주니 정리가 착착 되기 시작했다. 기초부터 잘 가르쳐두기도 했고 진혁과 손을 맞춰오던 우석이어서 진혁이 말하지 않아도 센스 있게 일 정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기획팀과 했으면 이틀을 꼬박 새웠을 일인데 우석과 하니 하루면 될 것 같았다.


회의실에는 서류 넘기는 소리와 타자소리만 가득했다. 간간히 업무에 대한 대화 빼고는 온 집중을 다하는 두 사람이었다. 진혁은 한참 집중하다가 등 뒤로 따뜻한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밤을 샐 생각이긴 했지만 우석까지 새우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놀라서 돌아보니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들어있는 우석이 보였다.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는데 정신없던 회의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위 쓰레기도, 엉망으로 널려있던 서류들도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진혁은 가만히 우석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봤다. 처음 회사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한껏 긴장해 있던 사람이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고 있다니 신기했다. 첫인상이 예쁜 사람이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했는데 홍보팀으로 들어와 다시 만났을 때는 정말 어안이 벙벙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팀 내 멘토 멘티를 정할 때 올해 진혁은 맡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우석을 보고 마음을 바꾼 터였다. 팀장이 사심으로 일을 정하면 안 되는 건데 슬쩍 자기 의견을 넣어서 우석의 사수를 자처한 것도 있었다.


우석에게 일을 가르치면 스펀지처럼 빨아들여서 가르치는 재미도 있었고 일 합도 잘 맞았다. 일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고 무엇보다 자기만큼 다정한 사람이었다. 동기들에게 평판도 좋았고 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무리 내에서 자연스럽고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도 있어서 그런 면이 진혁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진혁은 남모르게 우석을 조금씩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혁은 절대 제 마음을 먼저 들켜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자기는 상사고 혹여나 이 마음이 우석에게 부담이 되면 회사 생활이 힘들어질 테니까. 우석을 좋아한다는 마음이 우석에게 부담이 가는 게 싫었다. 그리고 일단 우석이 자기에게 어떤 마음인지 모르는 채 자기 감정을 앞세우는 건 폭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먼저 불쑥 다가와주는 우석을 보면 진혁은 어찌할 줄 몰랐다. 착각하고 싶지 않은데 욕심내고 싶었다.


“으응”


우석이 자는 자세가 불편한지 몸을 뒤척이자 진혁은 우석을 깨워서 소파에서 자라고 하려는데 아무래도 깨우는 게 미안했다. 조심스럽게 다리와 등에 손을 뻗어 공주님 안기처럼 천천히 우석을 안아들었다. 그러자 우석이 고개를 돌려 진혁의 품에 더 깊이 안겨들었다. 추웠던 건지 진혁의 몸을 팔로 꽉 붙드는 바람에 진혁은 우석을 소파에 내려놓을 수도 그대로 안고 서 있을 수도 없어서 안은 채로 소파에 앉았다. 한 쪽 다리를 올려 제 품에 우석을 가둬 안았고 우석이 최대한 편할 수 있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마치 아이처럼 제 품에 안겨 색색 거리며 자는 우석이 귀여웠다. 진혁의 가슴팍에 닿는 우석의 숨이 따뜻했다.


“이렇게 무방비하면... 위험해”


진혁은 우석을 한 번 꼭 제 품에 껴안았다가 놓았다. 더 안고 싶었지만 그러면 감기라도 옮을 수 있으니까. 날이 밝으면서 점점 해가 솟아오르자 햇빛에 회의실 공기가 따뜻해졌다. 약 기운인지 제 품안의 우석의 따뜻함 때문인지 진혁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조금은 더운 느낌에 우석이 눈을 떴는데 제 시야에 하얀 것만 어른거렸다. 눈을 깜빡이며 뿌연 시야가 조금씩 또렷해지자 그 하얀 것이 진혁의 가슴팍인 걸 알고 우석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왜 이런 자세로 자고 있는지 너무 놀라서 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굴렸다. 언제 자세를 바꿨는지 좁은 소파에 나란히 누워서 진혁의 품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오늘이 주말이었기에 망정이니 평일이었으면 회사 사람들한테 들켜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와중에 우석을 더 편하게 눕히려고 자기가 소파 바깥쪽으로 누워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진혁이었다. 우석은 혹시 떨어지지 않을까하고 진혁의 허리춤을 살짝 잡아 당겼다. 그 기척에 진혁이 몸을 들썩이더니 우석을 좀 더 제 품에 잡아 당겼다. 진혁의 체향이 더욱 깊게 들어오자 우석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진혁을 보니 이렇게 가까이서 진혁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똑부러지게 일하는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편하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아마 진혁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본 사람은 자기 밖에 없겠지 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함도 생겼다. 자기만 알고 있는 모습이 있다는 거, 조금은 특별한 사이가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가만히 진혁을 보던 우석은 다시 진혁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진혁의 숨을 따라 조금 더 잠을 청하기로 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품에 안기는 걸 수도 있으니까. 우석은 그렇게 조금 자기 욕심을 채워보기로 했다.


정오 가까이 돼서야 잠에서 깬 두 사람은 조금은 어색했지만 잘 잤냐는 싱거운 인사와 함께 일을 정리했다. 진혁은 그 뒤로 회사에 요청해서 아예 우석을 프로젝트 서포터로 들였다. 마감 시한은 가까워지는데 일의 속도가 더딘 것을 알았던 회사도 흔쾌히 허락해줬다. 기획팀도 군말없이 동의해서 둘은 다시 일을 시작했다. 간간히 밤을 새우는 일은 있었지만 그 날처럼 소파에서 동침을 하는 날은 없었다. 서로 집에 들여보내고 자기가 남아서 일하겠다고 실랑이하다는 날이 더 많았지.


그렇게 찾아온 최종 프레젠테이션 날. 대한민국에서 광고한다는 사람들이 죄다 모인 강당은 복잡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사람들, 이미 유명한 광고인들이 가득한 곳에서 우석은 바짝 긴장해있었다. 발표 전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만지는데 또 넥타이가 말썽이다. 여전히 서툰 넥타이 메는 솜씨에 옆에서 진혁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우석의 귀까지 빨개졌다.


“괜찮으면 제가 해드릴까요?”

“아...”


진혁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면접장에서 떨리던 우석 대신 넥타이를 고쳐주던 진혁이었다. 우석을 돌려세우고는 넥타이를 만져주는 진혁의 손길은 여전히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옷깃을 만져주는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고 긴장이 풀렸다.


“팀장님, 힘내세요”

“네, 그동안 같이 해줘서 고마워요. 잘 할게요”


진혁과 우석은 작게 파이팅을 외쳤다. 진혁의 프레젠테이션은 깔끔했다.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막힘없이 풀어냈다. 단상 위에서 발표를 하는 진혁의 모습이 빛나보였다. 우석은 주변의 반응도 빠짐없이 살펴봤다. 이 분위기라면, 이 기세라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우석은 진혁의 모습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진혁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알기에 하나하나 정성이 담겨있는 걸 알기에 우석은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모든 경쟁사들의 발표가 끝나고 심사 시간동안 잠시 대기 시간이 주어졌다.


“너무 떨려요. 팀장님”

“저도 떨리네요”

“꼭 잘 될 거예요”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심사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도하는 우석은 초조했다. 제가 맡았던 일 중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이었다. 진혁과 함께 했기에 꼭 잘 되고 싶었다. 우석은 자기만 이렇게 떨리는 건가 싶어서 옆자리에 앉은 진혁을 바라봤다. 빛나는 눈으로 단상 위를 바라보는 진혁의 옆모습은 언제나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런데 진혁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진혁도 많이 긴장하고 있었다. 우석은 진혁의 손을 잡았다. 진혁은 잡힌 손을 한 번 보더니 우석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진혁은 손바닥을 뒤집어 우석의 손을 맞잡았다.


잠시 후 단상 위에 한 사람이 올라섰다. 결과 발표의 순간이었다. 강당의 온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렸다. 집중과 정적.


“최종 PT 결과, 저희 그룹과 제휴할 곳은...”


맞잡은 두 손이 더욱 꽉 쥐어졌다.


*


고기 집은 왁자지껄했다. 불판 위에는 삼겹살이 아닌 소고기가 구워지고 있었고 누군가 사온 비싼 양주가 테이블마다 세팅됐다. 오가는 잔속에 웃음들이 가득했다. 그 한가운데에는 진혁과 우석이 있었다. 메인테이블에 나란히 자리해 임원들의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둘의 표정은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메인 제휴는 되지 않았지만 몇 개의 대형 광고를 따내는 걸로 만족해야했다. 그것만으로도 회사에서는 좋은 결과라고 진혁과 우석에게 고생했다며 축하주를 건내곤 했다. 진혁은 적당히 겸손하게 수고의 인사를 받았고 우석이 얼마나 잘 도와주고 고생했는지를 상사들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어필했다. 그 덕에 우석에는 평소에는 볼 일 없을 기업 임원들과도 인사를 나누게 됐다. 고생했다며 포상금까지 주어지자 동기들은 부러워했지만 우석은 기쁘지가 않았다. 이게 다 자기가 부족한 탓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진혁은 그런 우석의 기색을 살폈지만 무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적당히 회식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1차가 끝나고 임원들이 진혁에게 2차 자리를 제안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진혁과도 인사를 나누려고 했는데 임원들에게 둘러싸여 2차 자리를 알아보는 진혁을 부를 수가 없었다. 멀리서 타이밍만 보다가 우석은 그냥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과 헤어지고 혼자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갔다. 술기운에 데워진 입김이 겨울 공기에 하얗게 번졌다. 겨울 공기가 차갑고 시원한데도 가슴 속이 답답했다. 우석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몸속에 공기가 하나도 남지 않을 만큼 깊게 내뱉었다. 그 순간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처음 경험한 실패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긴장이 풀리면서 참아왔던 서러움이 쏟아졌다. 우석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그냥 눈물이 떨어지는 채로 걸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우석 씨!”


땅만 보고 걷다가 어디선가 들리는 제 이름에 우석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진혁이 보였다.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는 진혁을 보자 우석은 마음이 일렁였다.


“팀장님...2차 가신 거 아니었어요?”

“자리만 알아봐드렸어요. 인사도 안하고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얼마나 멀리서부터 뛰어온 건지 숨을 고르는 진혁을 보자 우석은 기분이 이상했다. 우석의 얼굴이 눈물로 엉망인 걸 본 진혁이 조금 당황한 눈빛으로 우석의 두 뺨을 손으로 감쌌다. 술기운과 울어서 달아오른 뺨에 진혁의 차가운 손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진혁의 다정한 손길에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석씨 울었어요?”

“으윽... 왜...”

“어디 아파요? 속 안 좋아요?”

“아뇨... 그게 아니고...흐윽”


혹시 우석이 어디 아픈가 이마에 손은 얹어보고 넘어져서 다친 건가 몸 이리 저리 살펴봐주는 진혁이었다. 우석은 그 다정에 숨이 막혀서 눈물이 났다. 자기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빛에, 따뜻한 손길에, 걱정하는 말투에 온통 기대고 싶어졌다. 위로 받고 싶었다.


“팀장님...”

“네”

“저...잘하고 싶었어요”

“잘했어요”

“팀장님께...도움 드리고 싶었...”

"충분히 증명했어요. 고마워요.“

“으...”


치사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의 위로는. 얼마나 노력했는지 옆에서 가장 잘 보아온 사람의 인정은 그동안 쌓였던 불안과 아쉬움을 단번에 녹아내리게 했다. 우석은 진혁의 위로에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진혁은 우는 우석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크흥...훌쩍...”

“이제 괜찮아요?”

“네...죄송해요”

“죄송하긴요”


한참 울던 우석이 조금 진정되자 진혁은 근처 편의점으로 가서 따뜻한 꿀물을 사왔다. 네 병이나 사왔기에 뭘 이리 많이 사왔나 했더니 한 병 씩 나눠 마시고 두 병은 우석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내일 아침에 마시라며 사왔다는데 코트 양쪽 주머니에 온기가 퍼지자 우석은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왜... 이렇게 다정하세요”

“제가 다정한가요?”

“네, 설마 모른다고 하진 않으시죠?”

“전 오히려 냉정한 쪽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의미 없이 다정한 거 범죄인 건 아시죠?”

“그럼 저 잡혀가나요? 철컹철컹?”

“헐...팀장님 신고”


두 손으로 수갑 채워진 모양을 하고 안 어울리는 농담을 하는 진혁에 결국 우석은 피식 웃어버렸다. 평소에 이런 농담이라고는 한 번도 안하는 사람이 하는 거라서 더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게 또 엉뚱하게 귀여워서 우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이제 웃네요”

“네?”

“오늘 처음 웃은 거 알아요?”


하루 종일 긴장해서 어떤 표정인지도 몰랐는데 내내 울상이었나 보다. 최종 결과 발표에 자신보다 더 실망하고 아쉬워하는 우석이 계속 신경 쓰인 진혁이었다. 회식 자리에서도 챙겨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워낙 많았고 따로 얘기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놀란 진혁이었다. 그런데 자기를 보자마가 아이처럼 우는 모습이라니, 진혁은 우석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우석의 웃는 모습은 진혁에게 큰 힘이 됐으니까.


“나 정말 많이 힘이 됐어요. 고마워요 우석씨”

“더 일찍 도와드릴 걸...”

“그런 마음도 다 고마워요. 우석 씨 아니었으면 이 정도도 못했어요”


자신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진혁을 보자 우석은 확신했다. 진혁을 좋아한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팀장님이랑...”


꿀물 병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웅얼거리는 우석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진혁이 고개를 기울였다. 잔뜩 빨개진 얼굴로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하는 말을 듣고 진혁도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팀장님이랑 오래 같이 하고 싶어요”


목적어가 무엇이던 간에 설레는 말이었다. 그 말에 진혁이 우석의 손을 꼭 잡아왔다. 진혁의 큰 손에 쏙 들어오는 우석의 손이 꼼질 댈 때마다 더욱 세게 잡아들었다.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


하반기 가장 큰 이슈였던 경쟁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오랜만의 한가한 주말이었다. 쉬는 날이면 잠이나 실컷 자야지 싶었던 우석이지만 막상 쉬니까 심심했다. 친구들이랑 놀까 싶다가도 시끄럽게 우르르 만나기를 싫고 집에만 있기도 싫은 날씨고. 결국 우석은 오랜만에 문화생활이나 하자며 가볍게 입고 서점으로 향했다. 조금 복잡하지만 나름 조용한 곳을 택한 것이었는데 오랜만에 맡는 책 냄새에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좋아하는 시집 코너에서 신간을 몇 권 고르고 게임 책도 몇 권 집었다. 업무 관련 책도 사서 공부를 좀 더 해볼까 싶어서 광고 코너로 옮겼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트레이닝복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살짝 돌아본 모습은 분명 진혁이었다. 우석은 반가운 마음에 단번에 달려가 등을 톡톡 쳤다. 진혁도 우석을 발견하고는 놀랍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밖에서 사복차림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생소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주말인데 서점이라니, 팀장님 진짜 모범생이시네요”

“그러는 우석 씨도 서점이잖아요”

“저야 취미용이고 팀장님은 휴일에도 일 생각뿐이세요?‘

“일 생각만 한다기에는 복장이 좀 불량이죠?”

“휴일엔 편한 게 최고죠”


진혁이 고른 책들은 잔뜩 광고 관련 서적과 트렌드 분석용 책들이었다. 광고 회사에 다니려면 이런 것쯤은 기본이었지만 휴일까지 투자하는 진혁의 모습을 보고 너무 인간미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을 보니 이렇게 느슨한 모습도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책을 계산하려는데 진혁이 우석의 손에 들린 책까지 가져가서 한 번에 결제를 했다.


“제건 제가 계산 할게요”

“포상금 두둑이 받아서 괜찮아요. 우석 씨 고생했으니 제가 살게요”

“그럼 제가 저녁 살게요, 팀장님 뭐 좋아하세요?”

“전 다 잘 먹는데... 우석 씨 먹고 싶은 거 먹을까요?”


그래서 선택한 메뉴는 닭발이었다. 오랜만에 닭발을 먹을 생각에 들 떠 있는데 막상 보글보글한 닭발을 보자마자 정신이 번쩍 든 우석이었다. 진혁과 처음 단 둘이 식사하는 자리인데 우악스럽게 닭발을 뜯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졌다. 최대한 입을 가리고 오물거리며 닭발을 먹는데 진혁은 먹는 게 좀 시원찮았다.


“팀장님, 입맛에 안 맞으세요? 너무 맵나?”

“사실... 저 닭발 잘 못 먹어요”

“네? 그런데 왜 말씀 안하셨어요!”

“우석 씨가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요”


우석이 너무 놀라 추가로 다른 메뉴를 시키려는데 진혁이 아예 못 먹는 게 아니고 잘 발라먹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했다. 그 말에 우석은 닭발마니아답게 친히 시범까지 보여주면서 닭발 먹기 강습에 들어갔다. 먼저 마디를 톡톡 먹고, 손바닥 부분을 쭉 눌러서 살코기를 싹 한 번에 발라먹으라면서 신나서 설명하는 우석을 보고 진혁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신나서 닭발을 먹는데 그만 우석의 손에 있던 닭발이 미끄러지면서 옷 위로 빨간 양념을 잔뜩 묻혀버렸다. 진혁이 얼른 물티슈를 건네 닦았지만 흰 옷이라 빨리 세탁하지 않으면 얼룩이 져서 버려야 될 것 같았다. 우석은 버리기에는 너무 아끼는 옷이라 어떻게 하지 곤란해 하자 진혁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제안했다.


“괜찮으면 우리 집 가서 옷 갈아입고 갈래요?”

“팀장님 집이요?”

“여기서 10분 거리에요. 우석 씨가 괜찮다면요”


괜찮지 않을 리가. 거의 식사를 다 마친 상태여서 우석이 계산을 하고 진혁을 따라 나섰다. 쇼핑백으로 얼룩진 옷을 가리고 나란히 걷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다. 낯선 동네였지만 진혁이 사는 동네라고 생각하니까 진혁의 일상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라 설레기도 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엉망이지만...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엉망이라던 진혁의 말과 달리 진혁의 집은 깔끔했다. 흔히 말하는 아저씨 냄새 같은 것도 나질 않았고 대충 널어진 옷가지들도 없었고 단정했다. 아침에 먹다 남은 사과 한 조각이 덩그러니 식탁에 놓여있었지만 그것마저 없었으면 모델 하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게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갈아입어요”

“네 감사합니다”


진혁이 건넨 맨투맨으로 갈아입었는데 길이가 제 골반까니 내려오고 팔이 흐느적거릴 만큼 길었다. 분명 진혁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작은 옷을 준 걸 텐데 꼭 아빠 옷을 입은 아이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이 푸핫 웃더니 다가와 소매를 접어주었다. 얌전히 진혁의 손길을 받는 우석을 보자 진혁은 자꾸 웃음이 났다.


“왜 자꾸 웃으세요”

“귀여워서요”

“으...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니고 진짜예요”


진짜인거 아니까 더 미치겠는 거예요. 진혁은 우석의 소매를 다 접어주고는 우석의 얼룩진 옷을 손으로 애벌빨래 한 후 세탁기에 넣었다. 다음에 회사에 가져다주겠다고 했지만 우석은 그냥 지금 대충 빨아주시면 가져가겠다고 하고는 진혁에게 집 구경을 시켜달라며 졸랐다.


진혁의 집은 크진 않았지만 시원스레 넓어보였다. 가구도 딱 필요한 만큼만 들여져 있었고 부산스러운 액자나 장식품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가족사진이 있어 들여다보는데 어린 시절 진혁의 사진이 꽤나 귀여워서 우석은 한참을 그 사진으로 진혁을 놀려댔다. 진혁도 제 공간에 있어서 그런 지 좀 더 편안하고 여유로워보였다. 일 얘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람인데 학창시절 얘기, 산타를 믿었던 이야기, 뽀뽀랑 키스의 차이점을 몰라서 놀림 받았던 이야기 들 술술 자기 이야기를 했다. 어느 순간 진혁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나 생각했지만 그게 다 우석이었기에 괜찮았다.


우석은 가는 시간이 아쉬웠다. 이렇게 진혁과 사적인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고 그 사람의 공간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대화를, 이런 시간을 더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일상에 내가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세탁기의 알림음이 울리자 진혁은 건조까지 잘 돼 보송보송한 옷을 우석에게 건넸다. 빠르게 흐른 시간이 야속했지만 월요일에 출근하면 또 볼 수 있으니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일어섰다. 신발을 신으려는데 우석의 신발끈이 풀려있었다. 진혁이 외투를 가져온다며 잠시 방에 들어간 사이 현관에 앉아서 신발끈을 묶는데 신발장 아래 틈 사이로 웬 구두 하나가 보였다. 검정색 에나멜 하이힐. 우석은 잘못본건가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분명히 하이힐이었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쿵쿵 뛰는 심장을 따라 온 몸에 열이 올랐다.


“우석 씨, 왜 앉아있어요?”

“네? 아... 신발끈이 풀려서요”

“그렇게 묶었다가는 또 풀릴 걸요”


어설프게 묶인 신발끈을 보더니 진혁이 우석의 앞으로 다가와 앉아 직접 신발끈을 매줬다. 우석의 발에 꼭 맞게 신발끈을 조절해서 야무지게 리본 모양으로 묶더니 풀리지 말라고 리본끼리도 한 번 더 묶는 진혁이었다. 그런 진혁을 보는 우석의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저... 혼자 갈게요. 나오지 마세요”

“지하철역까지 금방 가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팀장님, 오늘... 죄송했어요”


진혁이 붙잡을 새도 없이 우석은 현관문을 열고 뛰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도 없이 비상계단을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진혁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득하니 멀어질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가득 들어섰다 나갔다.


“애인 없다면서...어떻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석은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진혁의 말이 거짓이라고 믿어본 적이 없었는데 제 눈으로 확인한 여자의 구두가 계속 눈에 어른 거렸다. 우석은 자기 혼자 삽질한 기분이 들어서 이불을 발로 팡팡 쳤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자 제가 입고 있던 진혁의 옷에서 진혁의 향이 퐁하고 솟아 풍겼다.


“나만 알고 있는 건 줄 알았는데...”


진혁의 향도, 진혁의 일상도, 진혁의 잠든 얼굴들도 다 자기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는 생각에 우석은 눈물이 핑 돌았다. 이렇게 표현도 못하고 접어야 할 제 마음이 가여워서 우석은 조금 울면서 잠이 들었다.


*


다시 홍보팀으로 돌아온 진혁은 그동안 비워둔 업무를 보느라 바빴다. 그런데 어딘가 쌀쌀 맞아진 우석이 진혁은 의아했다. 평소 같았으면 팀장님 점심 뭐 먹을까요? 신상 카페 생겼던데 점심 먹고 가요. 이 업무는 잘 모르겠어요 하면서 제 곁을 따라다니며 종알거렸을 우석이었는데 메신저로만 딱딱 업무보고를 할 뿐이었다. 복도에서도 엘리베이터에서도 화장실에서도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고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는 게 진혁을 피하는 게 분명했다.


우석은 진혁을 마주보기 힘들었다. 눈만 마주쳐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저 웃음이, 다정이 다른 사람에게 향해있다는 걸 인정하기 힘들었다. 짝사랑하는 상대를 매일 회사에서 봐야하는 건 곤혹이었다. 그래서 보는 족족 피해 다니고 있는데 보이는 곳곳 진혁이 있어서 더 죽을 맛인 우석이었다. 진혁은 여전히 다정했고 자신을 잘 챙겨줬는데 전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힘들었고.


그런 우석이 그나마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은 탕비실이었다. 진혁은 커피도 간식도 잘 안 먹었기 때문에 탕비실에 오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진혁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는 걸 몸이 안 좋다는 말로 거절하고 대충 샌드위치로 때우고 탕비실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언제까지 진혁을 피해 다닐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빨리 마음을 접을 수 있는지도 몰라서 더 힘들었다. 쪼그려 앉아서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탕비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들었는데 진혁이 우석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석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탕비실을 나가려는데 진혁이 더 빨랐다. 탕비실 문이 탕 하고 닫혔다.


"우석씨 잠깐“


우석의 손목을 잡은 진혁이 너무 가깝자 우석은 얼른 뒷걸음질 쳤다. 좁은 탕비실에서 도망갈 곳이라고는 없었다. 우석의 등 뒤에 정수기를 당장이라도 발로 차버리고 싶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요?”

“아뇨...”

“그런데 왜 나 피해 다녀요?”

“안 피했는데요...”

“진짜요?”

“...”

“말하기 싫은 이유에요?”

“...”


당신이 좋아서, 그런데 포기하기가 힘들어서 조금이라도 안 보려고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진혁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진혁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하기는 싫었는데 우석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우석을 잡고 있던 진혁이 손을 내리고는 작은 메모지 한 장을 건넸다.


“이거 받아요”

“...뭔데요?”

“일 관련 강의 사이트에요. 내가 결제 해뒀으니까 그냥 로그인해서 들으면 돼요”

“알려주시면 제가 따로 찾아들을텐데...”

“이렇게 피해 다니니까 말해줄 타이밍이 없었어요”

“...”

“언제든 편해지면 말해줘요. 기다릴게요”


진혁은 우석의 손에 메모를 쥐어주고는 탕비실을 나갔다. 우석은 진혁이 준 메모지를 들여다봤다. 강의 사이트와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 [ID- JH0608 PW- WS1027]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우석은 탕비실을 나가지 못했다.


결국 우석은 제 마음을 포기하는 일을 포기했다. 이 마음을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짝사랑이라도 마음껏 해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진혁을 피해 다니지도 않았고 최대한 예전처럼 굴려고 노력했다. 진혁의 다정에 착각하는 날이면 그냥 그 착각도 좋아하기로 했다. 나만 좋으면 된다고 바보 같은 사랑을 시작했다.


*


전 사원이 다 같이 온 워크샵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이름이 워크샵이라고 해도 종일 일에 관련된 교육을 받고 밥 먹고 또 교육받고 강당에만 사람을 가둬 놓을 줄이야. 그렇게 일만하다가 워크샵 마지막 날 동기들끼리 방에서 작은 회식 자리가 열렸다. 우석은 빨리 잘 생각에 이미 주량을 넘길 만큼 술을 마셨다. 조금씩 잠기운이 들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익숙한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자! 홍보팀의 왕자님, 이진혁 팀장님 모시고 왔습니다!”


술 사러 나갔던 동기가 지나가다 만났다며 진혁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신입사원들은 이때다 싶어서 진혁을 앉혀놓고 야자타임에 진실게임까지 같이 하자며 졸랐다. 진혁은 이렇게라도 스트레스 풀라면서 흔쾌히 오케이를 하고 게임에 참여했다. 서로 진담, 반 농담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점점 짓궂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의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연애 이야기.


“자, 다음은 김우석!”

“이상한 거 물어보지 마라”

“김우석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하필 진혁이 있을 때 저런 걸 물어보다니 우석은 힐끔 진혁을 쳐다봤다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없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의 집요한 질문이 쏟아질게 뻔했기 때문에 우석은 벌주를 원샷했다. 노코멘트라는 대답에 사람들이 더 호응했지만 어찌됐든 대답했다고 하고는 넘어갔다. 그런데 벌주에 소주를 얼마나 탄 건지 속이 울렁거렸다. 고개를 숙이고 잠시 숨을 고르는데 차가운 물 한 잔이 우석의 손에 쥐어졌다. 고맙다고 말하려고 고개를 드는데 진혁이었다. 제 옆으로 자리를 옮긴 진혁이 우석에게 종이컵을 건네고서는 가볍게 등을 쓸어내렸다. 우석은 물에서도 소주 맛이 났다.


“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진혁 타임!”


어느새 한 바퀴 돈 질문이 진혁에게 다가왔다. 질문은 당연히


“이진혁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있습니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는 진혁에 방은 아수라장이 됐다.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 회사 사람이냐, 고백했냐 아니냐 집요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진혁은 더 이상은 노코멘트 하겠다며 어깨를 으쓱 거렸다. 우석은 진혁의 집에서 봤던 검정 하이힐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구토감이 몰려왔다. 벌떡 일어나서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숙소 밖까지 뛰어나와 먹은 것들을 다 게워냈다.


“젠장...”


짝사랑이 괜찮기는 개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확인 사살 당했다. 진혁의 입으로 직접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으니까 못 견딜 것 같았다. 괜찮았는데, 혼자 좋아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우석은 답답한 속을 끌어안고 숙소 앞 바닷가로 향했다. 밤바다에는 파도치는 소리만 가득했다. 우석은 쪼그려 앉아서 제 이름을 썼다. 파도가 그 이름을 지웠다. 진혁의 이름을 썼다. 파도가 그 이름을 지웠다. 마음도 이렇게 쉽게 지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석 씨 뭐해요”

“...와...진짜...”

“괜찮아요?”


언제 뒤따라 온 건지 따뜻한 꿀물을 손에 쥐어주는 진혁을 보자 우석은 짜증이 났다. 가장 마음이 약해진 순간마다 나타나는 진혁이었다. 분명 의미 없는 다정은 범죄라고 전에도 말했는데 또 이런 행동을 하다니 진짜 고소하고 싶었다. 마음이 한 번 삐딱선을 타니까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다정하지 말라니까요”

“그럼 잡아가요”

“안돼...”

“왜 안돼요?”

“팀장님 애인한테...혼나요.”


그 말을 하는데 우석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진혁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우석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톡톡 손가락으로 정수리를 건드려도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젓는 것을 보니 진혁은 웃음이 났다.


“나 애인 없는데요”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그 사람이 아직 제 애인은 아니라서요”


말장난이라도 하자는 건가 우석은 욱해서 고개를 들었다. 제 앞에서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면서 웃고 있는 진혁이 짜증나면서도 너무 좋았다. 그런 얼굴로 좋아한다고 고백만 하면 바로 애인 사이 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람.


“집에도 들르는데...애인이지 그게...”

“우리 집 와본 사람 우석씨 밖에 없는데”

“거짓말!! 집에 구두 봤는데...”

“구두?”


그제야 진혁은 우석의 빙빙 돌리며 하는 말들이 뭘 지칭하는지 알아챘다. 그 날 현관에 쪼그려 앉아서 뭔가를 골똘히 보나 했더니 구두였구나,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우석의 모든 행동들을 유추해봤을 때 이거 분명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우석도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거 진짜 욕심내도 될 만한 상황 같은데. 진혁은 우석을 놀려주고 싶었다.


“아~ 그 구두요? 그거 예쁘죠?”

“네...발도 작고...”

“맞아요. 제 이상형이 발 작은 사람이니까”

“우씨...“

“그런데... 그 구두가 우석씨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 말에 결국 우석이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렸다. 으으 소리를 꾹 참아가며 우는 우석에 더 놀란 건 진혁이었다. 놀려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울어버리다니, 너무 심했나 싶어서 진혁은 우석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놓으라고 발버둥 칠 줄 알았는데 그저 끅끅 거리며 우는 우석이어서 진혁은 더 미안해졌다. 그리고 더 좋았다.


“혹시 질투했어요?”

“으...”

“질투한 거 맞아요?”

“...”

“대답해줘요”

“싫어요...대답 안 할거에요”

“나랑 오래 같이 하고 싶다면서요”

“...네...”

“뭘 오래 같이 할 건데요?”

“그건...”


자꾸 확실히 대답 안하고 어물거리는 우석에게 한방이 필요했다. 질투에 가장 좋은 건 더 큰 질투유발.


“대답 안하면 나 그거 다른 사람이랑 할 거예요”


그건 싫어. 우석은 그 말에 단번에 진혁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진혁의 얼굴이 다가와 입이 맞닿았다. 진득하게 붙었다 떼어진 입술이 다시 한 번 천천히 부딪혔다. 말캉한 입술의 감촉이 소름끼치게 좋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우석은 진혁의 멱살을 잡던 손을 풀어 목에 둘렀고 진혁도 제 품으로 더욱 우석을 끌어당겼다. 까만 밤바다에 두 사람이 내뱉는 숨이 하얗게 안개처럼 떠다녔다. 겨울 바다의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달아오른 두 사람의 몸이 서로를 꽉 붙들었다.


“좋아해요”

“...”

“내가 좋아하는 사람 우석 씨에요”

“...거짓말”


직접적으로 말해줘도 안 믿고 행동으로 보여줘도 안 믿는 우석을 보고 진혁은 귀엽고 미안했다. 얼마나 오해를 많이 하게 했으면 이렇게 의심이 많을까. 눈물을 글썽이는 우석에게 다시 한 번 쪽 입 맞췄다. 오해는 하나씩 풀면 되지.


“구두는 집에서 하도 연애하라고 그래서 눈속임용으로 가져다 준 거”

“...”

“이상형이 여자라고 말한 적은 없고”

“...”

“내 이상형에 우석씨가 전부 해당되는 건 알죠?”

“...”

“자꾸 대답 안 할 거예요?”


진혁이 다시 한 번 우석의 입에 쪽 입 맞추자 우석이 먼저 입을 열어 혀를 섞었다. 진혁은 그게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키스했다. 진혁의 말이 다 믿기지 않아서 우석은 몇 번이나 생각하다가 이제 혼자만의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이렇게 맞닿은 품이, 숨이, 입이, 다정한 마음들이 자기 앞에 놓여진 것을 믿기로 했다.


외투도 안 입고 뛰어나온 바람에 우석은 진혁의 품에 안겨 바다를 바라봤다.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어서 진혁이 자기 양말을 벗어 신겨주기까지 했다. 뒤에서 패딩으로 제 품을 쏙 끌어안아주는 진혁이 좋아 우석은 자꾸 고개를 돌려 진혁을 바라봤다. 그 때마다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쪽쪽 입 맞춰주는 진혁이 좋았다.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는 게. 그리고 자꾸 확인 받고 싶었다.


“팀장님은...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처음에 화장실에서 봤을 때부터?”

“나 그때 완전 바보 같았는데요?”

“손 많이 가야될 것 같긴 했죠”

“그럼 귀찮잖아요”

“내가 약속했잖아요. 귀찮아하지 않기로”


처음 우석이 실수했을 때, 우리는 팀이라면서 해주던 약속이었다. 귀찮아하지 않겠다는 말, 진혁에게는 그것이 일로서도, 사람으로서도, 이렇게 애인으로서도 모두 해당하는 말이었다. 우석이 귀찮아질 일은 아마 평생 없을 거였다.


“팀장님, 내일...바쁘세요?”

“아뇨. 안 바빠요”

“그럼 팀장님 집... 가도 돼요?”


노빠꾸 직진인가 싶어서 진혁은 우석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 마음 확인했으니 직진인 것도 좋지. 진혁은 우석의 뒷목에 입술을 묻었다. 우석이 화들짝 놀라며 진혁을 밀어냈다.


“아니.. 그게 아니고 구두...”

“응?”

“그 구두 버리고...내꺼 두러 간다구요”


무슨 응큼한 생각을 하느냐고 눈을 흘기는 우석에 진혁은 바닷가가 울리도록 크게 웃었다. 자기가 헛다리짚은 것도 웃기고 구두에 아직까지 집착하는 우석이 귀여웠다. 이렇게 귀엽고 좋은데 왜 진즉 내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진혁은 우석의 턱을 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좋아해. 좋아해.


“구두도 두고, 우석씨도 두고 가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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