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시바 료타로의 <타올라라 검> 원작영화 5월 22일 공개(2)
  • 유지군(220.87)
  • 2020.01.18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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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生이 보기엔 중세부터 日本에 구축된 가면음악극인 노()의 현대판 변형에 더 가깝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다만 노가 정적인 분위기라면 낭독활극은 말 그대로 열렬한 기운이 차고 넘치는, 일례로 연기자의 인토네이션(Intonation)이 객석의 감동을 유도하는 장치인지라 가히 노와는 달리 동적의 무대라 평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한마디로 낭독활극은 전통을 매개로 한 日本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예술장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공연장도 대체로 신사나 사찰에 세워집니다. 이것도 중세 때의 노와 흡사합니다. 덧붙여 톱클래스 배우들도 참여해 왔는데요, 2009년과 2010년에는 배우 오오사와 타카오(大沢たかお)씨가 <요시쓰네義経>를 도쿄와 나라, 교토에서 공연해(역시 시바 료타로 선생의 소설이 원작입니다.)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배우 카나메 준(要潤)씨도 <타올라라 검えよ>을 성황리에 공연을 가졌습니다. 특히 2015년은 정말 대단했겠습니다.

이건 정말로 <타올라라 검えよ>을 교토에서 공연한다는 것은 현실감에 있어선 너무나 절묘한 매치라고 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신선조가 활동했던 교토에서 신선조들의 이야기 <타올라라 검えよ>의 낭독활극을 본다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도 남습니다. 아무튼 낭독활극이 힘차게 펼쳐질 정도로 日本人들의 섬세한 문화사랑은 사뭇 각별합니다.^^


각설하고, 어떻습니까? 교토를 가 보신 분들 중에는 小生의 감회에 공감하시는 분들도 계실까요? 하여 오늘은 이번 설 연휴에 교토를 방문하실 분들이 계신다면, 특히 그중에 日本역사에 관심도 많고 혹여 막부말기 풍운의 시대에 적잖은 호기심을 가지신 분들이 있다면 소개하고 싶은 곳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고엔지(光縁寺)입니다. 물론 이곳은 기요미즈테라(淸水寺)처럼 유명하지도 않아, 같은 사찰이라도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다만 막말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겐 의미가 깊을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신선조에 호기심을 가진 분들이 계신다면 의미심장한 곳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왜냐하면 야마나미 게이스케(山南敬助)가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야마나미 게이스케……?


, 히지카타 도시조, 곤도 이사미(近藤勇)와 더불어 <신선조新選組> 창립에 있어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막부를 통해 체제 내 개혁을 꿈꾸었던 지사이기도 했고요, 문화적 소양과 학문적 깊이가 남다른 무사였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매력이 넘쳐 小生 또한 히지카타 도시조와 견줄 만큼 그를 좋아합니다. 영화 <타올라라 검えよ>에선 연기자인 야스이 쥰페이(安井順平)씨가 야마나미 게이스케 역을 맡았습니다.(예전 NHK대하드라마 <신선조>에선 사카이 마사토(堺雅人)씨가 야마나미 역을 맡아 열연했습니다.)


그럼, 야마나미 게이스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신선조 이전의 미부로시(壬生浪士) 낭인조를 아이즈번(会津藩)에 연결시켜 <교토수호직京都守護職>의 휘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드는 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따라서 당시 아이즈번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번주의 후원을 받을 수 없었다면 미부의 낭인조는 '그렇고 그런 낭인조직'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양이 깊이 쌓인 야마나미 게이스케의 노력 덕분에 미부로시는 신선조로 재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야마나미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선생과 치바 도장(千葉道場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의 동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곤도 이사미(近藤勇)의 천연이심류(天然理心流) 도장 시에이칸(紫永観)의 식객이 되면서 삶이 달라졌는데, 학문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고 넉넉한 성품으로 인망이 두터워 近藤勇 역시 그를 무척이나 신뢰했다고 합니다.

그런 야마나미 게이스케였으니 만큼, 난세의 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 불운이었습니다. 시대의 광풍은 이케다야 사건(池田屋事件) 이후, 신선조의 급격히 변화되면서 그를 절망시켜 버렸거든요.

교토 방화를 통해 혁명을 일거에 달성하려 했던 지사들을 참살한 이케다야 사건은 신선조를 막부의 전위대적 존재로 급작스레 부상시켜 버렸습니다.


당연히 조직은 커졌고, 그런 만큼 경직되어 버렸습니다. 신선조 조직을 개혁의 첨병으로 만들고자 했던 야마나미로선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게다가 조직의 독선과 폭력, 전횡, 무자비한 숙청에 망연자실해지고 말았습니다. 일탈을 일삼으면서 폭주해 버린 세리자와 카모(芹沢鴨)일당을 토벌하면서까지 신선조를 올곧은 조직으로 키우고 싶었던 그로선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번뇌하던 야마나미는 신선조 총장임에도 불구하고 연인 아케사토(明里)를 데리고 탈주합니다…….


명분을 앞세워 폭주해 버린 폭력, 그 지독한 절망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선조의 폭력은 신선조를 만들었던 그의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선조 총장(新選組総長)이라는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책임감은 그를 귀환시켰습니다. 무시무시한 처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탈주한 사람은 할복이었으니까요.

야마나미 게이스케는 미부의 마에가와 저택(前川邸)에서 할복했습니다. 연인 아케사토와의 저택 창문가에서의 이별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회자되었으며,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신선조를 긍정했든, 부정했든 <야마나미 게이스케>라는 인물에 대해 '인간적으로 존경'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선 곤도 이사미와 히지카타 도시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최후까지 쫓는다. '인간 미학'의 정점을 보여 주었던 야마나미 케이스케…….


그때 꽃잎처럼 아려했던 사내들의 모습들을 '가슴'으로 느끼고 싶은 건, 인간의 아름다움을 쫓는다면 필연적 감정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 아려한 기품을 최후의 순간까지 보여 주었던 야마나미 게이스케의 흔적을 문득 찾고 싶다면, 교토를 방문할 때 고엔지를 들러 한 번쯤 그 시대의 공기를 느끼며 당대를 사색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상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의 사색은 참으로 기껍기 마련이니까요.


小生522, 교토에 들러 <타올라라 검えよ>을 보면서 히지카타 도시조와 야마나미 게이스케에 대해 서정미 넘치는 사유(思惟)로 옛 시대를 품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낭독활극(朗読活劇)의 영탄적 인토네이션이 어느새 시공을 뛰어넘은 푸른빛으로 귓가에 울려 와 여전히 감동의 한 자락을 붙잡도록 만들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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