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보디빌딩콘테스트의 심사를 하기 위해 휴양지인 오이소에 간 적이 있었다. 나도 미스터 일본의 후보로 나서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것은 도저히 이루어질수 없는 꿈으로 내 육체는 고작 심사위원석에서 어른거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근골이 우람한 청년들이 햇볕에 그을린 몸을 기름으로 번들거리며 차례로 나타난다. 여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을 여실히 느끼게끔 해주는 상쾌한 광경이다. 내가 열심히 채점하고 있으려니까,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갖고 다가와서는 이러쿵저러쿵 의견을 물은 끝에 "선생님은 저런 체격이 부럽지 않으십니까?"라고 몹시 실례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부럽지 않아요. 육체에는 개성이 중요한 법인데, 내 몸도 충분히 개성이 있으니까요."하고 애써 무뚝뚝하게 대답해주었다. 이렇게 대답한 건 공연히 심술이 나서가 아니라 요즘 들어 내가 새삼 깨달은 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엣날에는 근육질의 몸매가 부러웠고,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청년들도 처음부터 저런 몸을 가졌던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 똑같은 선망과 동경을 가지고 보디빌딩을 시작하여 성공한 것이리라. 내 경우는 성공했다고 할수는 없지만, 나는 나대로 자신감이 생겼다. 내 근육의 가능성을 시험해보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선망에서 출발하여 나름대로의 자신감에 도달한 보디빌더의 심경을 잘 알고있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심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폴로셔츠 소매 아래로 갸냘픈 팔을 늘어뜨리고도 태연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서른이 될까 말까 한 나이에 배는 올챙이처럼 볼록하고 그런데도 반성은 커녕 매일같이 맥주를 마셔대며 불룩 나온 배를 톡톡 두드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한심한 육체라도 양복으로 감싸버리고 얼굴에만 신경을 씀녀 될 거라 믿고 있는것이다. 특히 일본인 남자들 사이에서는 다른 곳이야 어떻든 페니스만 어엿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또한 여기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여자들의 남성 육체에 대한 무지이다. 술자리에서 여자들이 하는 "어머, 체격이 참 좋으시네요"와 같은 칭찬은 대개가 배나오고 뚱뚱한 데다 건강하지 못한 몸을 두고 하는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일류 보디빌더와 같은 체격을 가져야한다거나 체육전문가가 말하는 유연성 100%의 육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건 아니다. 모든 남자에게 자유자재로 공중제비를 돌 수 있는 육체가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교양이 필요한 만큼 육체적 교양도 필요하며, 또 건강하고 탄력있는 육체를 갖는 것은 사회적 예의라고 생각할 뿐이다. 세상은 정신적 교양이 모자라는 젊은이들의 폭력을 걱정하고 있지만, 지배층인 인텔리의 육체적 무교양도 퍽이나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물론 육체는 덧없다. 요즘세상에 몸은 별 가치가 없다. 돈이 되는 것은 지능이다. 게다가 지능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누적되어 가지만 몸은 30대 이후로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돈도 되고 오래가는 지능만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어쩐지 천박해 보이니, 이를 어쩐다? 그렇다면 덧없는 육체라도 좀 더 소중히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게 좋지 않을까? 인생은 하나뿐이니까 말이다.
잘 다듬어진 몸매와 발달된 근육은 과연 멋있고 듬직하지만,그 것이 인간의 존재 가운데 가장 덧없는 것을 상징한다는 데에서 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육체에 비하면 인간의 정신적 산물이나 사업이나 기술은 훨씬 더 오래간다. 그러나 짧은 일생을 오래가는 것에만 쓴다는 건 어쩐지 어리석다. 육체를 경멸하는 것은 현세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독교의 성직자들이 천박하고 추 해 보인다. 육체를 완전히 감싸버리는 검은 가운은 남자가 입을 게 못 된다. 그것은 정신적 내시가 입을 옷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홀쭉했지만 그래도 알몸뚱이였으니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스인은 참으로 위대했다. 그리스의 희극 작가인 에피카르모스는 '인생의 네 가지 소원'이라는 시에서 그중 하나는 알므다운 육체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그리스인은 자기 자신이 아름다움 그 자체이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신을 걸고 육체를 단련했다. 고대 그리스의 '체육'은 지금의 체육 이념과는 달리 아름다움을 성취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스파르타의 청년은 열흘마다 한 번씩 감독자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 보여야 했다. 비만의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한층 더 엄격한 훈련을 받았다. 군살이 조금이라도 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율중 하나였다.조금의 신체적 결함도 허락하지않았던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몸매유지를 위해 피리도 불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아테네의 청년들은 모두 그를 본받았다고한다.
지금은 이런 생각에 수긍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특히 정신분석학이라는 엉터리 학문이 나온 뒤부터 인텔리는 모두 여기에 물들어 고대 민족이 표현한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인간성을 너절한 분석 용어로 설명하고는 흐뭇해한다. 그러므로 배 나온 중년 신사가 자신의 추한 모습을 부끄러이 여기고 열심히 줄넘기며 복근운동을 하려고 하면 나이값을 못한다느니 주책이라느니 하며 비웃는다. 예술가나 학자의 세계에서는 대개 빈약한 육체를 지닌 사람이 왕좌에 앉아 있으므로 제자들은 그를 본받아 모두 병자같이 누렇게 뜬 얼굴로 원서에 매달려있다. 프랑스어 단어를 5천개나 알고있는 것과 가슴둘레가 110센티미터가 되는 것 중 어느쪽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물론 단어 5천개 쪽에 박수를 보낼것이다.
가정주부들도 그렇다. "우리 남편이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했어요."라든가 "이번에 차를 샀어요."라는 시시껄렁한 자랑만 늘어놓는다.
"우리 남편의 가슴둘레는 110센티미터나 돼요."라든가 "남편의 팔둘레는 38센티미터에요"하고 자랑하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없다. 다 여자 잘못이다. 남자는 여자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행동하게 마련이니, 가슴둘레를 10센티미터 늘리는 노력을 아껴서 과장이 되거나 자동차를 사는 일에만 열중하는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한사람의 완전한 남성을 잃게 되었다.
남자의 육체는 덧없는 것이다. 돈도 안되고, 사회적인 가치도 없고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고, 고독하고, 기껏해야 보디빌딩 콘테스트에 나와서 남들의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현대사회에서 근육이란 가련한 어릿광대에 지나지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근육에 더더욱 애착이 간다.
미시마유키오는 에세이도 잘썼다.
본문은 미시마유키오가 1958년부터 1959년까지 '주간 명성'이라는 여성잡지에 '부도덕교육강좌'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던 에세이 67편중 한편임
번역본도 나와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길 추천함
정말 제목대로 파격적인 주제들이 많다 친구를 배신해라, 거짓말을 많이해라... 미시마유키오가 뭔가 비장한 이미지의 캐릭터인데 그 책을 읽고나면 이런 유쾌한면이 있던 사람이구나 느낄수있음.
이 사람 마무리도 화려하죠
01.16 01:43오묘한 정신세계다
01.16 0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