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日本人들이 재일교포 및 이민자들과 조화를 이루는 까닭(2)
  • 유지군(220.87)
  • 2020.01.0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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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디아폴리스-이방경찰>의 이미지 컷(출처:야후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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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에 처음 요구했던 히데요시의 선도 역에 대한 진위에도 의혹을 품다가, 마침내 이판사판 대군을 출병시켰다. 임진전쟁은 이렇게 하여, 16세기 최대의 대규모 국제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피해는 조선의 백성이었다. 조선군 포로도 엄청났지만 민간인들도 상상을 초월했다.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대략 수만에서 십만 명 이상일 거라고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조선 조정은 끌려간 조선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노력했다. 종전 후, 최초의 사절단이 공식 파견된 것은 1607년이었다. 조선 조정의 위신과 전후 처리를 위해서, 사절단은 조선인들을 송환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했고 당시의 막부 또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부사 경섬이 쓴 <해사록>에는 막부 집정관 혼다 마사노부(本多政信)의 서한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일부는 이러하다.


<그 중 결혼하거나 자녀를 가진 사람들은 귀국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귀국은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 귀국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조속히 귀국시킬 수 있도록 엄명을 발한다!>


각고의 노력 끝에 1회 사절단을 따라 돌아간 조선인은 1420명이었다. 사절단은 충격 받았다. 구우일모(九牛一毛)라며 한탄했다. 어찌 수만 명 중에서 그 정도밖에. 그러나 2회 사절단은 사정이 더 딱했다. 321, 3회 사절단은 겨우 146명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사절단이 쇄환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지역에 유고문(諭告文)까지 돌리며 사절단들은 조선인들을 쇄환하기 위해 강력히 설득했다.


<지금은 너희들의 인생을 바꿀 때다. 만약 우리들이 체재하는 곳으로 와서 자신의 이름을 대며 출국하고 싶어 하는 자가 있다면 염려말라. 우리 사절단이 경비를 부담하여 도중에 힘든 일이 없도록 배려할 것이다>


이렇게 조선인들을 모집하고 백방으로 활동했는데도 조선으로 돌아간 이들은 극히 소수였다. 왜 그랬을까?

유추해 보건대, 그나마 1회 사절단이 데려간 숫자는 1420명이나 되었다. 이들에 대한 처우가 황망하지 않았다면 2회 사절단을 따라나선 조선인은 더 많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1607년 사절단과 함께 조선의 부산에 도착했던 1420명은 조정의 방치 속에 다수는 각자도생(各自圖生)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은 갈매기의 눈물처럼 현해탄을 건너 日本의 조선인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알려졌다면, 그럼, 그렇지, 하고 조선인들은 허탈해 했을 테다. 두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며 분노했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쇄환을 위한 3회 사절단이 갔을 때, 조선인들은 면담에서 자신들의 심경을 애절하게 피력했다.


<쇄환시키고는 왜 그와 같은 냉대를 하는 겁니까?>


강흥중이 쓴 <동사록東槎錄>에 따르면 이문장(李文長)이란 조선인은 모집활동을 강하게 규탄하며 이렇게 역설했다고 한다.


<조선의 법은 일본의 법보다 못하다. 생활하기 어려우며 먹고 살기가 쉽지 않다. 본국으로 돌아가도 조금도 좋은 일이 없다>


전쟁 때 日本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양반들도 있다. 강항이 대표적이다. 그는 1607년 이전에 자력 귀국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예제는 보편적으로 쓰였다. 정복전쟁 중에 포로로 잡힌 이들은 거개 노비가 되었다. 가축과 다를 바 없었다. 그게 당대의 상식이었다. 그런데 유일하게도 日本만은 달랐다…….

여기에 대해 <동사록>은 이렇게도 피력한다.


<붙잡혀 온 사람들은 맨손으로 온 후, 수년 동안 재산이 늘고 생활이 편해져 돌아갈 마음이 없어졌다. (日本)은 나라 안의 크고 작은 노역에서는 백성을 동원시키지 않고 고용한다. 그 노임 또한 충분하여 사람들은 흔쾌히 일을 하러 나선다,>


그게 현실이었다. 임진전쟁에서 日本에 끌려간 조선인들은 전역에 흩어졌고 직업을 가져 가정을 꾸렸다. 도공 이삼평(李參平)은 이름을 떨쳤다. 오가키 성주 오카다 쇼칸의 아내가 된 조선여성도 있었다. 기슈 번주의 유학 선생이 된 학자도 있었다.


조선사절단들은 자기들의 예상과 다른 쇄환 실적에 구우일모(九牛一毛)라며 애끓는 심경으로 한탄했겠지만, 돌아가지 않고 日本에 남았던 조선인들에게 그곳은 여전히 크나큰 기회의 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단적으로 日本은 예나 지금이나 기술자들을 천시하지 않았고 공동체에 적응하면 깊이 포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쟁 중에 바다를 건넜거나 포로로 끌려간 이들도 日本에 오롯이 정착한 일례는 참으로 의미심장(意味深長)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런저런 상황을 헤아리면,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된다 하더라도 치안이 악화되거나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례가 日本에선 쉽게 통용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기게 되는데요,

, 그 점을 감안해 이 작품 <디아스폴리스-이방경찰-ディアスポリス-異邦警察->을 감상해 보시면서, 이민에 대한 사색으로 한 번쯤 젖어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관점이 좀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小生<異邦警察>을 보면서 이민의 알레고리(allegory)를 가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역시 공동체의 조화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느낌이 새삼 들었답니다. 조화에는 타자에 대한 배려가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역시 배려는 조화(調和)의 시금석(試金石)입니다. 껄렁해 보여도 혁혁한 활약을 보이는 쿠보즈카 사키가 기본적으로 박애주의자이니까요. 박애(博愛)의 이성과 감성이 없었다면 쿠보즈카는 異邦都庁의 경찰이 되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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