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판의 홍위병을 읽었습니다.
션판은 지금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 중인데.. 제가 아는 바가 맞다면 미국으로 유학을 한 후 그대로 정착한 사람입니다. 사실상 망명한 거고요.
이 책은 당대 중공의 실상을 비판하고 본인과 지인의 잘못, 그리고 추악함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홍위병이었던 당사자의 회고록인데... 션판은 혁명가 집안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군 장성에 어머니도 혁명가로 인정받은 사람이죠. 지금으로 따지면 넉넉잡아도 중산층 이상인 셈이죠.
그리고 부모의 열성적인 공산당 추종에 의해 션판 역시 어릴 때 (초등학생)부터 열광적인 정치 활동을 합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집에 있는 책들을 불태우고 부르주아적인 것들을 없애려 하죠
다른 부르주아들을 습격하는 데 가담하기도 하고.. 만리장성 투쟁조라는 홍위병 조직까지 주도해서 만들고 타 홍위병 조직과 무력 충돌까지 일으킵니다.
이랬던 그가 처음으로 공산당 활동에 회의를 느낀 건 한 부르주아 습격 사건 때부터입니다
힘도 없는 소수를 무리 지어 괴롭히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자0살하거나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지요
특히 부르주아 습격 사건 때 병원 의사였던 자를 홍위병이 구금한 후 고문한 일화에 대해 다루는데..
그 자의 배를 절개한 후 내부에 간장을 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다 계단에서 굴러 머리가 깨지고 내장이 바깥으로 나온 상태로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고 하는데.. 굳이 사람을 고문하고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그인데 끔찍한 고문을 가하고 죽인 후 외부에는 자살로 알린 홍위병 조직에 대해 충격을 받았고.. 또 이 이야기는 몇몇 사람에게만 누설되었는데 이를 들은 그는 국까가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홍위병의 난동이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모택동이 나서서 결국 홍위병들을 숙청하는데.. 누구보다도 모택동에 충성하던 홍위병 지인은 반역죄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된 후 "호랑이 의자"를 받게 됩니다. 그는 결국 그로 인해 무릎과 다리 뼈가 전부 부러져 평생 절름발이로 살게 되고.. 또다른 지인은 7년의 중노동 형을 받게 되죠. 여기에서부터 션판은 공산당에 대한 미련을 점점 버리게 됩니다.
*참고: 호랑의 의자: 다리와 무릎을 결박한 후 발뒤꿈치에 벽돌을 점점 높게 집어넣어서 무릎과 다리를 부러뜨리는 고문법
골때리는 건..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죄가 있음을 시인하라고 심문자가 유도했을 때.. 자백을 하면 죄를 인정해 버리는 셈이 되어 형을 받고,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이 계속되거나 죄를 부정했다는 이유로 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임기응변가 좋아야 하고 뒷배가 든든해야 그나마 멀쩡하게 풀려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상당히 전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션판은 둘 다 갖춘 사람이었죠. 그래서 매 위기를 벗어납니다.
하나 일화가 있는데.. 어린 나이에 모택동 찬양시의 마지막 구절에 "모택동 주석, 만세 (萬歲)"라는 혁명 구호를 실수로 "모택동 주석, 무세 (無歲)"라고 적는 바람에 다른 이가 이를 공산당 조직에 고발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당자가 션판 친구의 아버지라서 훈방조치로 끝나게 됩니다. 뒷배가 없었다면 무시무시한 결말을 맞을 수도 있었던 사건이라고 합니다.
이런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홍위병이 점거한 도서 창고에서 책을 훔치는 식으로 션판은 지식을 늘려나갑니다. 중국의 고대와 중세의 책, 서양 서적을 읽으며 션판은 확고한 국까가 되지요.
그 후 션판 역시 숙청되어 샨시의 낙후된 지역으로 이동하여 농민으로 살아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평생 농민으로 살다 죽어야 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탈출 의지와 운을 잡는 능력으로 인해 겨우 벗어나 조립공장으로 이전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공장 역시 정치적인 압력과 불가사의한 환경으로 인해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갑니다. 한 달에 사망자가 한 명 이상은 되는.. 의문사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죠
그는 이러한 환경에 증오와 염증을 느끼고 첫 대학입시에 응모하여 란저우 대학에 합격합니다. 그리고 대학 진학을 통해 그 공장을 탈출하게 되지요.
그 후에도 그는 미국인 교수인 재클린과 불륜 비슷한 관계가 되는데, 이를 간첩 행위로 판단한 비밀경찰에 의해 심문을 당하게 되지만 지인의 도움으로 풀려납니다.
베이징의 봄.. 중국 자유화 시기가 닥쳐올 즈음에 그는 이미 자유주의적으로 변해 있었고 자체 조직된 학생회의 후보를 적극 지지하기도 했지만 결국 전부 숙청되면서 그 역시 몸을 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들로 인해 그는 소위 찍힌 사람이 되고.. 대학 졸업 후 식수가 오염된 '탕구'라는 지역에서 근무해야 하는 신세가 됩니다.
여기서 오래 산 사람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가 전부 썩거나 빠지게 됩니다. 잇몸은 갈색으로 변하게 되고요. 그리고 그는 여기서도 탈출에 성공하고 미국 유학까지 지원하여 가는 것으로 책이 마무리됩니다.
(탈출 방법은 모든 관료들에게 일 주일에 한 번씩 가정 방문하여 시간을 뺏고 진상을 부리는 거였습니다. 이 짓을 장장 6개월 가량 했다더군요).
전반적인 것만 말씀드렸는데 상당히 재밌고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 1
탕구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션판은 그 오염된 지역을 벗어나기 위해 계속 전출 신청을 합니다. 하지만 그를 누구보다도 붙잡고 괴롭히려 했던 건 그 지역에 속한 같은 동료들었습니다. 이것을 보며 징븅도 제대로 개선, 폐지 못하고 반대하는 한남들이 떠오르더군요.
"다른 직원들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누구든 전출을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화를 내고 비난하며 더 이상 한 마디도 못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노여워하는 사람이 바로 내 직속상관이자 학과장인 가오 (高) 선생이라고 했다.
학과에서 그는 '약탕관'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체격도 왜소한데다가 일년 내내 기침 감기를 달고사는 탓에 늘 한약이 든 잔을 들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그 한약 냄새는 교정 반대편에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불쾌했다.
약탕관은 전출되었으면 한다는 내 말을 듣기가 무섭게 비난하는 말투로 돌변했다. "전출을 원한다고? 대단한 일이군. 아무도 여길 떠나지 못해. 난 1960년에 이곳으로 배치된 후 22년 동안 전출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어. 내가 기억하는 한 아무도 나가지 못했지. 여기서 전출되는 건 혼자 힘으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것과 다름없을걸." 그는 검은 한약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금니 사이로 말을 뱉어냈다.
"일단 내 허락을 얻어야 하네. 하지만 내 대답은 항상 똑같을 거야." 약탕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덧붙였다. "그런 일을 꿈도 꾸지 말라는 거지."
약탕관이 그토록 커다란 증오를 드러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치적 유형이나 다름없는 22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한때 건강하던 상하이 토박이가 해골이나 다름없는 몰골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1950년대 말 공산당으로부터 반동으로 분류되어 당시 광활한 황무지에 불과했던 탕구로 보내졌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마지막 한 방울의 희망까지 다 말라버리고 만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일찌감치 접어버린 그에게 이제 남은 즐거움이란 자신과 함께 탕구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비웃고 괴롭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사람이 약탕관 혼자만은 아니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탕구에서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 중 하나였던 것이다."
-"홍위병: 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 이상원 역, 황소자리, p365-p366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 2
국까로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재밌어서 기억에 남는 건데... 션판 역시 잭 런던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더군요. 잭 런던의 문학에 심취하면서 그 역시 의지가 더 강해지고, 또 위기가 닥치고 그 위기를 넘길 때마다 잭 런던의 문학과 접점을 가지게 됩니다.
아아... 잭 런던 센세...
"서양문학 중에서는 스탕달과 잭 런던이 좋았다. '서유기'가 내 저항정신을 자극했다면 스탕달과 잭 런던은 '야망'이라는 위험스러운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것은 혁명가에게는 있을 수 없는, 발각되었다가는 영원한 파멸을 가져올 씨앗이었다.
스탕달의 '적과 흑' 그리고 잭 런던의 '마틴 에덴'은 내게 비슷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열정과 인내심을 지닌 인물들이 꿈을 추구하며 주어진 운명을 넘어서는 이야기였다. 절대 가서는 안 될 길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다.
특히 마틴 에덴이라는 주인공이 마음에 들었고 나도 그렇게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 결국은 성공하는 인물이 되고 싶었다."
-동서, p98-p99
그리고 탕구 지역에서 탈출을 기도할 때 그의 룸메이트인 '책벌레'는 그를 지지하고 응원했습니다. 책벌레는 외과 의사 출신이지만 '백가쟁명' (모택동의 제한적 언론 자유화 조치) 당시 공산당에 대한 비판 의견을 내놓았다가 뒤이어 발생한 반우파 투쟁으로 인해 탄압받고 탕구로 전출된 인물입니다.
정작 션판이 탕구에서의 탈출이 성공한 후 떠날 때는 인사도 하지 않아서 션판은 서운하게 생각했지만, 그는 션판에게 감동적이게도 마지막 선물을 몰래 줍니다.
"책이나 읽자는 생각에 나는 몸을 굽혀 의자 아래 가방에 손을 집어넣었다. 검은 가죽 표지에 싸인 얇은 책 한 권이 잡혀 올라왔다. 짐을 쌀 때는 없었던 책이었다. 하도 낡아 누렇게 변색된 종이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듯했고 표지에 찍힌 제목은 알아볼 수도 없었다. 속표지를 펼치자 잭 런던의 '인생애(Love of Life)' 라고 씌인 글씨가 보였다. 누가 그 귀중한 선물을 주었는지는 분명했다."
-동서, p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