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키가하라>의 포스터(출처:야후재팬)
재작년 여름 끝물에 산큐패스로 규슈의 후쿠오카, 나가사키, 사가, 후루야 등을 다니며 한껏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는데, 우연찮게 복합쇼핑몰에서 본 영화 포스터 하나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바로 『세키가하라関ヶ原』다.
위대한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선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다, 우아한 여배우 아리무라 카스미有村架純가 지부노소유治部小輔 연인 역으로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단아한 명우 오카다 준이치(岡田准一)가 이시다 지부 역으로 열연을 한다 하니 이거야말로 입안에 침이 고이고 눈이 형형해지고도 남을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이후의 일정에 시간을 빼기가 여의치 않아 서운한 마음을 달래며 걸음을 돌려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대형 스크린에서 감상할 시간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세키가하라에는 명분과 실리라는 두 명제 앞에서 드러나는 군상들의 면면이 강렬해, 당대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는 알레고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대형스크린에서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기꺼운 일인가.^^)
특히 감성적으로 세키가하라에 출전한 서군 진영의 장수들에게 매우 끌리기도 하는데,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불태운 장려한 투혼이 그야말로 ‘벚꽃 비’(花の雨) 같은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아, <벚꽃 비>이란 표현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면, 일시에 벚꽃잎이 질 때를 상상해 보면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이와이 슌지 監督의 『4월 이야기四月物語』를 본 분이라면 오프닝 신에서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게 벚꽃비다.(4월이야기는 지금 봐도 영상이 신선하고 아름답다. 풋풋한 사랑의 향기가 집 안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처럼 삶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듯싶다. 특히 日本映画는 시정잡배의 욕설이 난무하지 않아 보기에 기껍다.)
아무튼 벚꽃이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에선 속절없이 그 장려한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마는데, 수십 번을 봐도, 질릴 수 없는 그 도도한 아름다움. 정직히 말한다면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소양을 갖추었다는 점에 대해 자긍심도 조금은 느낀다. 아름다움을 수용하고 향유하는 것도 일정 정도의 소양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이것을 모노노아와레라고 한다.)
각설하고, 세기의 전투 세키가하라에서 서군 진영의 장수들 중 이시다 지부의 친구였던 오타니 교부大谷刑部를 비롯해 벚꽃 비처럼 장려하게 산화한 인물들이 적지 않은데(시바 료타로 선생의 소설은 지부의 가신 시마 사콘島左近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중 戦国時代를 극적으로 살다간 영웅 중의 한 사람인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1539-1600)도 손꼽을 수 있겠다. 벚꽃 비의 장려한 아름다움에 삶이 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도 벚꽃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하의 향방을 가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최후까지 다이곤겐사마大權現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분연히 항전했다.
유군幼君을 받들고 지키려는 이시다 지부노소유 미쓰나리石田治部小輔三成의 명분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세키가하라 결전 이후의 모리 가문이 천하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거대한 야망을 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다만 그 야망은 도쿠가와처럼 도요토미 가문을 배제하려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모리 가문의 한 축이었던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를 설득했고 서군 참여로 가문의 전체 동력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물론 깃카와는 실리를 내세워 여기에 반대했다. 에케이는 단호한 논지로 이를 반박했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는 우리 모리 가문이 어느 쪽에 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야. 지주(侍従 깃카와 히로이에의 관직명), 우리가 유군 쪽으로 힘을 모으면 나이후(内府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함)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것일세. 이것으로 천하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이야!”
당시 모리 가문은 120만석의 대다이묘였다. 도쿠가와 가의 250만석에 미치지 못하지만 모리 가문이 이시다 쪽으로 돌아서면 전력은 확실히 서군이 우세해지는 것이고 불패의 관건이 되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모리 가의 수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조차 에케이의 명분에 입각한 주전론에 감복, 참전을 결심한 상황이었다. 물론 나이후 이에야스의 힘은 막강했고 휘하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은혜를 입은 다이묘들도 즐비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는 오사카에 있었다.
예컨대 모리 가의 수장 데루모토가 오사카 성에 입성해 유군幼君 히데요리를 알현했을 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는데, 어린 주군의 한마디에 그만 저도 모르게 울컥한 것이었다.
“모리 주나곤(中納言데루모토의 관직명), 짐을 부탁하오.”
그 눈물은 당시 오사카 성에도 화제가 되었고, 그 눈물은 120만 석의 눈물로 불렸다.
에케이는 그 아름다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승려로서, 무사로서, 다이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삶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그것을 명분에 눈 먼 ‘감성팔이’라 보고 계략을 획책, 비밀리에 도쿠가와 쪽과 내통해 버렸다. 깃카와는 자신이 분전奮戦하면 천하의 형세가 반드시 바뀔 수 있다는 강력한 의지와 안목이 없었다. 깃카와는 눈앞의 이익을 놓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었다.
결전의 그날 오후, 세키가하라에는 비가 내렸다. 누군가에겐 그 비는 그저 길을 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비에 불과했고, 누군가에게 그 비는 花の雨처럼 뜨거운 감동으로 젖어들 수도 있었다.
따라서 세키가하라에 국한해 말한다면, 그날 승려이자, 무사이자, 다이묘이자, 인간이었던 안코쿠지 에케이는 천하를 걸고 벚꽃 비처럼 미련 없이 싸웠던 것이다.
역사상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승려로서 다이묘가 되었던 인물. 영화 『세키가하라関ヶ原』에는 그러한 이색적 인물들의 참전 전말도 담겨 있어 세키가하라 전투에 흥미나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흡족히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참, NHK대하드라마에도 세키가하라를 다룬 작품들이 많은데 <사나다마루>나 <천지인> <공명의 갈림길>을 감상해도 세기의 결전을 구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