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드라마 <화려한 눈매의 요리코씨>의 이미지 컷(출처:네이버검색)
「小生은 日本여행이 취미 중의 하나입니다. 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를 다녀봤는데, 가장 좋아하는 도시를 들라고 하면 주저 없이 교토(京都)를 얘기합니다. 아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사랑하는 도시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적을 불문하고 교토를 좋아하는 분들도 많은 듯하다.
일단 국내의 여행 서적을 살펴봐도 교토에 관한 책들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그중에 임경선 작가의 <교토에 다녀왔습니다>가 재미있습니다. 추천.」
작년 여름 교토를 방문했을 때 넘쳐나는 세계인들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한편으론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을 걱정할 정도였다.
일례로 버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평일인데도 버스들이 관광객들로 늘 만원이라면 현지인들 입장에서는 여간 힘들지 않을 테다. 짜증이 난다 하더라도 무리도 아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현지인들은 친절하다. 천년고도(千年古都)의 시민들이란 자부심의 토대에서 형성된 기품과 품격이 없었다면 구현되지 않을 몸가짐이다.
아무튼 교토를 사랑하는 小生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京都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을 즐기곤 하는데, 최근에는 유키 사이토(齊藤勇貴) 감독의 영화 <고도古都>와 드라마 <화려한 눈매의 요리코씨はんなりギロリの頼子さん>가 인상 깊었다.
특히 <화려한 눈매의 요리코씨>는 헤이세이(平成) 30년(2018년)에 방영된 작품으로 간결한 내러티브와 더불어 요리코, 라는 캐릭터를 통해 교토 사람들의 에토스(ethos)를 적절히 묘사해 흥미를 배가시키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교토에 호기심이 있거나 알고 싶은 분이라면 아려한 천년고도 배경의 이 작품을 보면 꽤나 즐거울 것이라 생각된다. 강력 추천한다.
「사실 교토 사람들의 에토스는 日本 내에서도 까다롭고 복잡하기로 정평(定評)이 나 있습니다. 이 점을 고깝게 여기는 분들도 없지는 않을 텐데요, 관습 또한 문화를 형성하는 매개 중의 하나라는 관점을 가진 小生으로선 기껍기 이를 데 없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고도>도 사색의 여지를 열어 놓습니다. 가업을 잇느냐, 잇지 않느냐로 고민하는 젊은 교토인을 다룬 작품이라 감흥이 높습니다.」
그러면 교토 사람의 에토스가 무엇이냐고 묻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드라마는 일례로 <집 앞 청소>의 시퀀스를 등장시켜 교토 사람들만의 독특한 에토스를 표현한다. 뭐, 청소? 그게 무슨 대수, 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자, 그러니까 이런 경우다. 어떤 사람이 집 앞을 청소한다고 치자. 하다 보니까 옆집 앞도 내친 김에 싹 해 버리면 옆집 사람은 좋아할까?
언뜻 생각하면 고마운 일 같다. 자기 집 앞 청소를 해 줬는데 감사하지 않으면 오히려 무례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드라마에서도 도쿄(東京)에서 교토로 전근 온 야마다 유이치(山田優一)가 내친 김에 옆집 대문 앞을 청소한다.
교토에선 다르다. 그건 옆집 사람의 자존감을 건드리는 행위가 된다.
“내가 집 앞 청소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입니까?” 이렇게 나오면 小生이라도 멋쩍을 수밖에 없겠다.^^
그렇다고 자기 집 앞만 청소하는 것도 옆집에 대한 배려가 없어 꼴불견이 된다. 균형을 맞춰 경계선 넘어 조금 정도를 청소해 주는 게 가장 적절하다. 그게 배려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워? 맞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만큼 엄격하다.
그러나 그것이 에토스라면 왜 그런지 이해해야 소통할 수 있을 게다. 무엇보다 교토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하거나 교토에 살게 되는 분들이라면 이웃들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그들의 에토스를 이해할 필요는 있겠다.
드라마의 야마다도 그 점을 절감한다. <알고 이해하여 소통한다.>
그러면 교토 사람들의 에토스를 구현시킨 자존감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여기엔 천년고도의 주민이라는 자긍심에서 우러나온 성찰도 한몫한다. 자신이 어떤 위치인지 성찰하면 까다로운 예법이나 복잡한 격식을 소화해, 기품과 품격을 구현시킬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엄격하면 타인을 배려하는 공간은 커지기 마련이다. 옆집 사람의 자존감을 헤아려 경계선 너머 일정한 정도만 청소해 주는 <섬세한 안목이 생성>되는 것이다.
물론 천년고도의 주민이란 자긍심의 근저에 구현되어 있는 건 일종의 <화이관(華夷觀)>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사실 화이관은 지나인(중국인)에게만 구축되어 있는 게 아니다. 日本人도 고래로부터 구현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고로 日本 국적이 아닌 분들이 日本人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화이관이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하겠다. 이웃과의 원활한 소통은 <앎과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려운 법이다.
「화이관은 단적으로 말해 세계의 중심은 자기들이라는 가치관을 말하는데요, 여기서 성찰력이 없다면 안하무인으로 귀결되기 십상입니다. 그건 그렇고 지나는 기원 전 주(周)나라 때부터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하면 日本은 언제일까? 공식적으로 보면 수양제(隋煬帝)에게 <해 뜨는 곳의 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편지를 보내오>라는 국서를 보낸 60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겠다.
즉 고대부터 규모 면에서 열세라 하더라도, 지나가 형성한 국제질서와 맞서는 日本의 국제질서가 엄정히 존재해 평행선을 달렸다는 얘기다.
도대체 자기들의 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기에 화이관을 형성, 발현시킬 수 있지? 그렇게 묻는다면 답은 이것이다.
예컨대 다이코 히데요시 시대에 공표된 선교사 추방령 1조를 보면 日本人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나라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극명히 드러난다.
<日本은 고래로부터 神国이기 때문에 기리시탄의 나라에서 온 신부들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다!>
이렇게 日本人은 자신들의 나라를 고대부터 공식적으로 神国이라 인식한다. 그래서 황제도 天皇인 것이다.
신도(神道)가 고대의 건국신화부터 시작되어 불교 전파 후에는 신불습합(神仏習合)의 형태로 뿌리 깊이 사민들에게도 깊이 뻗어 내렸으니, 神国이란 인식은 日本人의 가치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어 있다 하겠다.
이를테면 신불습합의 형태도 이렇게 발전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