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승욱 도쿄총국장
대학원생이던 1963년 세계여행을 떠나며 그는 미국의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에게 편지로 면회를 신청했다. 그런데 케네디는 이름도 모르는 청년 오부치를 20분이나 만나줬다. “정치인이 돼 워싱턴에서 다시 만나자”는 덕담까지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오부치는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몸을 낮추고 누구와도 대화하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현직 총리가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프로그램에 깜짝 출연하기도 했고, 신문 독자 투고란에 글이 실린 일반인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식은 피자처럼 우유부단하다”고 자신을 비판하는 기자들에게 피자를 배달시킬 정도의 풍류도 있었다.
‘한·일관계의 교과서’로 불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탄생엔 항상 귀를 열고 소통하는 두 정상의 열린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글로벌 아이 12/13
이런 남 대사에 대해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서도 할 말은 꼭 한다. 약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김상훈 공사참사관 등 실무팀장급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의지가 보인다”는 평가가 있다.
일본 외무성의 한국 담당 직원들까지도 ‘한국 대사관’이라면 치를 떨었던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물론 아직도 “30분을 만나면 28분 동안 자기 말만 한다”고 지적받는 이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의 생명 연장, 12월 말 양국 정상회담의 성사엔 이렇게 쌓인 작은 변화들이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징용문제든, 수출규제든 양국 간 현안 해결의 열쇠는 상대 목소리에도 귀를 여는 외교의 기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