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의 수도인 도쿄(東京)를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도시이니까요.
사실 도쿄는 경제력에다 인구 숫자, 문화 영향력을 보더라도 이미 세계 최대 도시로 인정받고 있답니다. 도쿄 도 GDP는 1.5조억불인데, 이것은 한국 전체의 GDP랑 맞먹을 정도예요.
도시 하나의 총생산량이 세계 GDP 11위인 나라 전체와 비슷하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이해가 되지요? 인구만 하더라도 1천 3백만이 도쿄 도에 거주하고 있답니다.
거기에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가장 많은 도시도 도쿄랍니다.(포춘지 선정 글로벌 기업 5백여 개 중에서 51개 다국적 기업의 본사가 있음) 그러니 日本의 정치 경제뿐만 아니라 세계의 경제, 문화, 첨단산업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흔히 뉴욕, 런던과 더불어 세계 3대 도시 혹은 세계 3대 문화 수도로 불리기도 하지요.
참고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슐랭가이드에서 별 3개를 준 레스토랑의 숫자가 미각의 도시로 알려진 파리보다 더 많아 도쿄는 명실상부한 최고 미각의 도시로 이미 정착되어 있기도 해요. 맛있는 요리를 찾아 먹는 미식가라면 도쿄는 정말이지 빼놓을 수 없는 도시이지요.
자, 그러면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 도쿄의 옛날 모습은 어떨까요?
도쿄의 옛 이름은 에도(江戶)랍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에서 막부를 열어 ‘에도 막부(江戶幕府)’라는 역사 용어가 있기도 합니다.
여하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를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을 때가 1590년이었어요. 그 전에는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었어요. 게다가 에도는 태반이 습지대였던지라 갈대밭과 억새만 무성한 황무지나 다름없었답니다. 그런 곳이었지만 다이곤겐사마 이에야스는 오히려 개척의 기백을 품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간토 평야를 등진 에도를 비옥한 곡창지대로 만들기 위해 그는 물길을 만들고 저지대를 매립해 농경지로 일궈냈을 뿐만 아니라 산을 허물고 강 입구를 파내어 새로운 시가지도 건설시켰지요. 물론 에도를 도시로서의 면모를 굳건히 갖추기 위한 대대적인 개발 사업은 토쿠가와 이에야스 당대만이 아니라 후대로도 이어집니다.
그렇게 에도를 조성해 나가던 중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어 마침내 에도에 막부를 열게 되었지요.
그때까지는 일개 영주에 지나지 않던 그가 바야흐로 일본을 통치하는 장군이 됨으로써 에도는 일거에 일본의 중심이 되고 말았답니다. 물론 수도는 천황의 황궁이 있는 교토(京都)였지만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을 에도가 맡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 의미는 아주 깊을 수밖에 없답니다. 왜냐하면 모든 물자의 유통이 장군이 거주하는 에도를 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물자가 몰리면 사람들도 들끓는 법이라 에도의 도시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급속히 빨라졌지요.
거기에다 참근교대(参勤交代) 제도가 1635년에 의무화되었는데, 이것이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에도를 어마어마하고 대단한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일단 인구 숫자부터 타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왜냐고요? 참근교대란 일본 각지의 영주들이 1년 걸러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오가야 했던 제도이니까요. 그러니까 영주들은 1년은 자신의 영지에 그 다음 해는 에도에서 1년을 거주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영주의 가족은 아예 에도에서 상주해야 되었고요.
이것은 막부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영주들을 감시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도가 에도를 언제나 활력 넘치는 거대도시로 만들어 버린 셈입니다.
일본의 에도시대는 막부와 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막부 아래 자그마치 260여 번이나 있었으니 한 번 생각해 보세요. 260여 번의 영주들이 수백의 수행원들을 이끌고 에도로 와서 1년씩 생활해야 되었기에 각 번의 저택들은 즐비할 수밖에 없게 되잖아요? 물자도 끊임없이 유통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고요. 무사들에게 물건을 팔 상인들도 득시글거렸으며, 수많은 저택의 신축과 증축을 위해선 토목공사도 흔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를테면 1657년 ‘메이레키 대화제(明暦の大火)’라고 불리는 큰 불이 에도에서 일어난 후, 그 복구사업에 전국 각지의 직공들이 몰려들었는데 돈이 마구, 마구 시중에 도는 건 당연했겠지요? 그야말로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이렇게 각계각층의 인구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집중되다 보니, 에도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는 인구수가 이미 1백만을 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영국의 런던이나 프랑스의 파리가 약 40만 명의 도시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때 에도는 벌써 세계 최대의 도시로 등극해 버렸습니다.
그것은 곧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사실 말이 쉬워 1백만이지, 1백만이 떠들썩하게 지내는 도시라면 갖가지 진풍경이 연출되기 마련인데요. 우선 그중의 하나가 먹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홀몸의 무사나 직공들이 많다 보니 가볍게 먹는 패스트푸드가 탄생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테면 소바와 스시 그리고 튀김은 현재 일본의 대표 요리들 중의 하나잖아요? 그런데 그것들이 그 당시에는 복구사업에 뛰어든 직공들이 흔히 먹는 포장마차 요리들에 불과했답니다.
이거 놀랍지 않나요? 지금은 세계인들이 미식의 대명사처럼 선호하는 스시가 그때는 단지 상인이나 직공들의 패스트푸드라니!
결국 참근교대에 따른 무사들의 거주나 직공들의 무더기 유입은 실제로 포장마차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성황도 불러왔는데요, 1660년 에도의 아사쿠사에 본격적인 대중식당이 개업한 이래, 당대의 사료(寬天見聞記 1806년)에 따르면 에도에만 식당이 자그마치 6,165개소나 활발히 영업을 했답니다.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숫자입니다!
하기야 이 정도의 식당이 포진하지 않는다면 어찌 1백만의 인구가 먹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니 음식 문화가 일찍부터 발전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요리책인 『요리 이야기(料理物語)』가 1643년 출간된 이후부터 음식의 레시피를 다룬 책들도 다수 쏟아져 나왔으니 당대 에도 사람들의 식도락은 오늘날 못지않게 대단했을 것 같아요. 그 점이 바로 현재의 도쿄를 세계 최고의 미식가 도시로 만들어 놓게 한 저력이 아니겠어요?
자, 그러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인 배설물은 어떻게 처리를 했을까요? 1백만이 사는 도시의 배설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당연히 식수가 오염되거나 악취가 들끓기 마련인데, 실제로 19세기의 런던은 템스 강이 오염되어 큰 골칫거리가 되었답니다. 인구는 증가하는데 하수도 정비가 따라가지 못하니 위생이 응당 형편없게 된 거지요. 하지만 런던보다 인구가 더 많은 대도시 에도는 처음부터 달랐답니다. 사람이 먹고 난 다음에 배설하는 분뇨를 정화해 비료로 활용했던 겁니다.
즉 인분뇨를 재활용하는 시스템으로 1백만 인구의 배설물 문제를 처리했던 셈인데 그야말로 선 순환형 도시로서의 기능을 구축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의 에도에서는 인분뇨를 ‘금비(金肥)’라 불렸으며 농민들이 돈을 주고 샀는데, 거름도매상이 등장해 무사와 상인, 직공들의 인분뇨를 사서 농민들에게 되파는 중개업도 성업했답니다. 사실 인분뇨는 훌륭한 비료의 역할을 다하고 있으므로 에도 근교의 농민들 입장에서는 금비라고 부를 만했지요.
이렇게 에도는 뭐든지 재활용해 순환시키는 슬로 시티(slowcity) 같은 도시의 몫을 담당하며 양적 팽창과 질적 심화를 거듭해 오늘날에 이르러 세계 최고, 최대의 도시로 우뚝 섰는데요, 어때요,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미래로 향하는 열정의 도시인 도쿄에서 미스터리 소설을 읽으며 망중한을 보내는 것도 꽤나 근사한 연말 여행이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