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갤러 여러분들, 오늘도 잭 런던의 영혼이 빙의했나요? 저는 본 지면에서 나름 긴 시간 동안 퇴고하며 한국의 민족사회주의의 기원을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국의 민족사회주의가 어디서 기원했다고 추측하시나요? 한국인의 미개함에서? 아니면 이승만과 박정희가 기원일까요?
이러한 대답은 유감스럽게도 근원이 아닌 결과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박정희 집권 전에는 장면 정권이 있었고, 장면 정권 전에는 이승만 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민족사회주의를 직접 세뇌시키기에는 반이승만 세력, 그리고 내각제 찬성파 등에 의해 내부적인 지지가 취약해서 그럴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 취약한 내부적인 기반을 대중적인 인기로 극복하려 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엄밀하게 말해 이승만 자신은 한국의 민족사회주의에 대해 사상적으로 토대를 세우고 이를 전파할 여유조차 없었다는 뜻이지요.
서론이 길었는데,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한국 민족사회주의의 원흉은 바로 한국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글에서 안호상에 대해 졸필로 기술하고 그에 대해 한번 과감하게 평가해보려고 합니다.
근갤에 자료보관소도 개설된 만큼, 양질의 역사정보글들이 앞으로도 많이 올라오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자료보관소 개설 최초로 제가 떨리는 손으로 타이핑을 하며 과감하게 자료를 만들어보고자 하는 것이고요. 양질이 아닐까봐 조금 두렵습니다만, 그래도 어떻습니까? 제가 쓴 글에 대한 비판을 달게 감수하면 되는 것이지요. 학자로써의 자세를 견지하며, 그간 자주 써 온 글과는 달리 좀 더 진지하게 본 게시물을 작성합니다. ㅎㅎ.. 자.. 그러면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참고: 일민주의 관련 서적들
한국의 민족사회주의는 안호상의 일민주의에서 직접적으로 기원합니다. 그는 앞서 제가 언급했듯이 이승만 정부의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영역에서 일민주의를 보급하는 데 힘쓴 인물이고요.
그렇다면 "일민주의가 무엇이길래, 이게 현재 한국의 민족사회주의의 근원이라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겠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일민주의에 대해 설명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일민주의 (一民主義)는 '한백성주의'입니다. 처음 보면 좀 생소한 개념인 것 같지만, 결국 민족주의 (民族主義)입니다. 이를 대변하듯 안호상은 그의 저서에서 "세계 인류는 한얼님(하느님)의 자손으로서 세계 한백성 (世界一民)"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류는 하나의 뿌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한국인에 대해 정의하는데, 그의 저서인 "한백성주의의 역사와 본바탕"에서 "배달 한배임 (倍達桓因)과 배달 한배웅 (倍達桓雄)과 단군한배검 (檀君王檢)의 자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논리죠? 예, 맞습니다. '국뽕'과 '환뽕'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거지요. 사실상 동류라고 해도 무방하고요. 그래서 제가 매번 국뽕들이 환뽕을 비난하는 것을 조롱했던 거지요. 정작 본인의 뿌리는 망각한 상태이면서 동류가 동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비난하는 것 아닙니까? 국뽕들의 "아따, 우덜은 다르당게! 우덜은 비판적으로 민족주의를 수용한당게!"라는 소리는 공허한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참고: 안호상 사진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ㅎㅎ 아무튼, 안호상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류는 결국 하나였고, 한국인은 그 중에서도 환인, 환웅, 단군의 자손이 됩니다. 이는 결국 혈연이 동일하다는 논리로 이어지는데, 이 점에서 안호상은 민족을 동일한 혈연의 집합체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들 이해되셨으리라 믿고, 안호상의 논리를 계속해서 전개해 나가겠습니다. 그는 특히 "한민족은 같은 한 조상의 한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조상의 핏줄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들은 같은 한 민족이 될 수 없다"라고 주장합니다. 즉, 언어나 종교, 문화 등 민족을 구성하는 기타 요소들이 아무리 많이 합치되어도, 혈연이 다르면 같은 민족이 아니라는 논리가 성립하는 겁니다. 한국인들이 다 같은 혈연인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단히 파시즘적인 성향을 일민주의가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게다가 그는 그의 저서인 "청년과 민족통일"에서 "겨레와 한백성은 한 핏줄이다. 한백성으로 되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의 요소들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와 또 쉽게 되는 것은 그 자연적 요소인 핏줄이다"라고 합니다.
즉, 근원적 동일성을 지향하며 한국인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기에 당파나 계급을 초월하여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서구의 민주주의가 아닌 일민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이는 이후 박정희가 "한국적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주장할 때 일민주의의 영향이 일부 내용에 반영될 정도로 그 전파력이 막강해집니다.
혈연에 기반만 민족주의를 역설하고 있기에 특히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성질을 지닌 사상이 일민주의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는 그가 믿던 대종교 (본래의 종교명: 단군교)의 신인 단군까지 결합시켜 본인의 사상을 일종의 신앙으로 승화시킵니다. 그는 그의 논문인 "배달겨레의 고유한 종교와 철학"에서 "배달겨레의 고유한 종교는 대종교"라고 밝히면서 그 역사를 설명합니다. 대종교에서는 단군을 단순히 신화적 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닌, 민족 국가를 창건한 역사적 존재로 인정한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의 일민주의에 대한 이해가 더 빨라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안호상의 일민주의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개인을 집단에 강제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에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안호상의 저서인 "나라역사 육천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혹 개인주의가 어떠할까 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 주의가 서양 여러 나라들에서 상당히 발전하였으며, 또 지금도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각 개인이 잘 살기 위하여 개인주의를 가진다면 각 개인은 오직 이기주의적일 것이며, 한 겨레는 단지 한 사람 표준주의와 한 사람 중심주의가 되어 버려, 결국은 한 겨레와 또 그로 말미암아 개인까지 불행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필연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그는 다시 그의 저서인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얼"에서 개인주의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초래했다면서 비난합니다. 이러한 안호상의 성향은 그가 독일에서 예나대학을 다니던 유학 시기에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대해 목도하고 깊은 감명을 받은 것에서 기원한다고 추측됩니다. 자유가 풍족한 재산을 지닌 자들을 위해서 제공되는 것 역시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공산주의 치하의 자유 역시 그는 거부합니다. 대신 그는 일민주의에서의 자유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위해 개개인이 사욕에서 벗어나야 하며 외적 강제력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안호상 스스로가 자유에 대해 고심하고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개인의 사욕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본인이 주장하는 자유의 폭이 좁다는 것을 은연 중에 인정하는 셈입니다. 즉, 개인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한 자유입니다. 여기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뒤섞인 민족사회주의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요.
참고: 전체주의 관련 사진
사실 안호상은 집단에서 개인을 바라보기에 자유에 대해서도 역시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그가 자유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으나, 그가 주장하는 자유의 허용 범주가 대단히 작다는 점을 놓칠 수 없습니다. 즉, 유기적인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유기체가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것으로 인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의 "우리는 언제나 나 한사람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 한백성을 생각하자. 우리 한겨레와 한백성이 잘못 살고, 나 한 사람만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론으로서나 사실로서나 도저히 맞지 아니한다"라는 주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아래와 같은 그의 발언에서 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조선에 와서 내가 느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내가 본 독일과 같은 감을 느꼈다. 오늘의 조선도 해방이 되어 민주주의니 무엇이니 하지만, 나치스 같은 정치체제가 아니면 도저히 구해낼 길이 없다. 조선 청년들은 멋도 모르고 나치를 싫어하지만.."
그는 그의 일민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1949년 '일민주의보급회'를 결성한 후 해당 협회를 통해 일민주의를 확산시킵니다. 또한 같은 연도에 학도호국단을 건립하는데, 이승만이 일민주의 관련 연설을 하는 시기가 같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1949년 4월 20일 이승만이 서울 중앙방송국을 통해 "일민주의와 민족운동"이라는 연설방송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듯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제창하며 국시로 삼았기에 일민주의는 정권초기의 이념으로 작용합니다. 다들 짐작 가능하시겠지만 일민주의는 이름만 바뀐 채 이후에도 끝까지 생존하게 되고, 박정희 정권 때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강력하게 그 영향력을 유지하게 됩니다.
또한 안호상은 조선민족청년단 (이하 족청)의 이범석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족청 훈련소에서 정신교육을 실시합니다. 여기서 독일 나치 정권과 관련된 교육도 실시하면서, 독일민족이 청년을 조직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유일한 국민이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 마찬가지로 김두한의 대한민주청년연맹에서도 민족지상 및 국가지상과 관련된 강의를 실시하였고, 대한청년단을 맡으면서 김두한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민주의가 이승만에게 수용되었던 이유는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으로 인한 혼란이 결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민주의는 언제나 하나가 되어야 하는 통합적 민족의 가치에 입각하여, 여순사건이 표출하는 이념 대결 및 정치적 분열을 부당한 것이라고 역설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후 그는 1994년 3월 대종교 총전교의 자격으로 조선천도교의 중앙지도위원인 류미영과 접촉하고, 1995년 4월에는 북한을 방문하여 단군릉을 참배하고 돌아옵니다. 이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 단군을 숭배하고 민족의 주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북한 정권의 정통성 인정과 주체사상의 묵인이기도 했습니다. 민족이라는 프리즘으로 북한을 보면 결국 북한 역시 같은 혈육이기에, 그의 시각에서는 북한이 적이기 이전에 동포였던 겁니다. 안호상은 '돌아온 탕아'를 대하듯 민족의 소중함과 단군의 위대함을 자각한 김일성 부자를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는 국조(國祖, 역: 단군을 의미)의 성릉(聖陵)을 복원한 것으로 증명된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안정적 통치를 위해서, 박정희는 일사불란한 동원 체제 정립을 위해서 민족사회주의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들이 민족사회주의의 근원이라고는 할 수가 없지요.
이들을 위한 곤봉을 만든 것은 명백히 안호상이었고, 그 곤봉이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이제는 탈민족주의자들을 구타하는 무기가 된 셈이죠. 물론 한국 정부로부터 하사받은 곤봉을 멋모르고 휘둘러 대는 한국인들 스스로의 자아비판이 부족한 것 역시 문제이고요.
저는 곤봉과 휘두르는 사람 중 어느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인가와 같은 지극히 소모적인 논쟁은 거부하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지요.
그 곤봉은 자유를 탄압하는 무기를 넘어 남한을 곤죽으로 만드는 데 아주 강력하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 말입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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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인, 하상복, "안호상의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전체와 동일성의 절대화", 인간·환경·미래(10), 2013.4, 119-149.
은희녕, "안호상의 국가지상주의와 '민주적 민족교육론'", 중앙사론(43), 2016.6, 10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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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호상, "국학의 기본학, 철학(13), 1979.6, 127-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