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와 뼈>의 한 장면(출처:야후재팬)
「부산국제영화제(釜山國際映畵祭)가 매년 성황리에 마치는 걸 보면, 映畵의 애호가들 중에선 이런 이벤트를 활용하는 분들이 꽤나 많은 듯합니다. 사실 영화제의 매력은 평소 극장가에서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작품들이 상영된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小生도 그래서 영화제를 선호합니다만.」
2018년에 열렸던 제 19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만 해도 그러하다.
<야키니쿠 드래곤焼肉ドラゴン>이란 작품인데, 그땐 일정을 도무지 맞추지 못해 보지 못하였는데, 지금도 서운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아직 보지 못했다. 아쉽게도 한국에선 일반 개봉되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도 개봉할지는 알 수 없다.
「정식 개봉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야…… 영화의 팬들이라면 소생의 마음과 비슷하겠지요.^^」
<야키니쿠 드래곤>, 정말 보고 싶은 작품 중의 하나다. 뭐니 뭐니 해도 감독이 小生의 시야를 금각사(金閣寺)처럼 환기시킨다.
누구냐고? 日本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재일교포 정의신(鄭義信)이다. 작품의 배경도 1969년(昭和44년) 오사카이며, 재일교포의 애환을 다루었다고 한다. 허나 이 정도의 소개만으로도 小生의 마음을 움켜잡기에 충분하다. 「예, 정의신 감독…… 小生에겐 더없이 매력적입니다.」
정의신은 원래 뛰어난 극작가이며, 연극 연출가다. 2008년(平成20년)에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으로 이미 제 12회 쓰루야 난보쿠 희곡상(鶴屋南北戯曲賞)을 수상한 이력도 가지고 있다.
물론 영화의 각본상도 여럿 받았다.
「다만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이라 <焼肉ドラゴン>은 데뷔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연극으로는 상연되었는데요, 쓰루야 난보쿠 희곡상만이 아니라 그해 문부과학대신상(芸術選奨文部科学大臣賞)까지 거머쥐었습니다. 당연히 작품성의 검증은 몇 번이고 이루어진 셈입니다. 그러니 어찌 <焼肉ドラゴン>을 감상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각설하고, 여러 영화의 각본상 중에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피와 뼈血と骨>라고 소생은 생각합니다만, 日本의 영화인들도 小生과 비슷한 비평 인식인지, 그는 <血と骨> 각본으로 2004년에 제 78회(2004年)키네마준보 베스트 텐 각본상(キネマ旬報ベスト・テン脚本賞)을 수상하는 쾌거도 달성했습니다.」
가히 그럴 만하다. <피와 뼈>가 어디 보통 작품이던가.
민족이란 관점에서 그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망나니 김준평(金俊平기타노 다케시北野武 역)을 보곤, 조선인을 괴물로 그렸다며 분통을 터뜨리기 십상이겠지만, 미안하게도 이분법적으로 단언하기에는 바다처럼 작품성이 깊다. 거대하고 깊은 심연은 단견으로 헤아리긴 어렵다.
거기에다 감독이 재일교포 최양일(崔洋一)이고, 원작 또한 재일교포 작가 양석일(梁石日)이다. 日本人 감독과 원작, 각본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런데도 민족으로서의 인간 전형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았다. 조선인 김준평이 아니라, 인간 金俊平에게 카메라의 앵글이 다가갔다.
그리하여 어떤 환경 속이든 간에, 운명의 격류와 맞선 인간을 카메라는 보편의 관점으로 통찰할 따름이다. 이분법 따위가 감히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할 만치, 영화는 일체의 편견을 배격시킨다. 김준평을 비롯한 각각의 인물군상들을 관찰하고, 사색하며, 그들의 민낯에 대해 지독스레 천착한다.
그런고로 <피와 뼈>의 충격은 성역을 해체하여 드러난 민낯을 보는 것처럼 가차없다.
보고 나면 자리에서 금방 일어설 수 없도록 할 만큼, 사색의 여지를 넓힌다. 협량한 시각으로 해부될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 <피와 뼈>의 각본을 정의신이 썼다. 그렇다고 <야키니쿠 도라곤>도 <피와 뼈>처럼 살벌한 내러티브로 쇼와 40년대를 관통하는 소시민들의 삶을 다루지는 않았을 게다.
연극으로 오랫동안 상연되어 많은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던 전력을 생각해 보면, 거시적 일상보다는 미시적 일상으로 삶을 파고들어 그 본질을 통찰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小生의 추론(推論)입니다만.^^」
참고로 <血と骨>에서 小生을 전율시킨 시퀀스는 여러 있는데, 그중에서 자식마저 수단으로 여겼던 김준평이 어처구니없게도 지상천국이라는 선동에 속아 북송선을 타는 결말 부분에서 보여준, 북조선에서의 참혹한 생활 속에서 절망하는 김준평의 눈빛은 정말이지 두고두고 생각난다.
기타노 다케시라는 걸출한 배우가 아니라면 도무지 소화시킬 수 없는 눈빛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이지 그 자체만으로도 형형한 알레고리로 강력히 기능될 수밖에 없다.
예전, 이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김준평이란 인간형에 대해 쉰 음식을 앞에 둔 것처럼 역겨웠다. 마초(macho)이며, 구제받을 수 없을 만큼 본능적인데다, 자기중심적 행각을 피도 눈물도 없이 일삼으니, 도무지 정을 붙일 구석이라곤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정치 이념적 기준으로 언뜻 보면 영락없는 우파 같은데, 자식을 데리고 북조선으로 훌쩍 건너가는 결단도 서슴지 않았으니, 단순히 좌우파라는 이분법적 척도로 가늠하기 힘든 인물로도 보였다.
도대체 이런 인물형이 세상 어디에 있나? 아니, 있다.
어떤 사안이든 이분법으로 나누어 대중을 선동하려는 일부 분들의 가치관처럼 세계는 좁지 않다.
세계는 크고 깊고 넒다. 그런 만큼, 이쪽 관점으로 살피고, 저쪽 관점으로도 헤아려야 한다. 열린 해석이 가능한 인물형. 계속 곱씹어볼수록 의미심장한 인간형이란 것을 두세 번 보고 나서 깨달았다.
새삼 짧은 식견이나 편견으론 한 인간을 제대로 해석해 낼 순 없다는 점을 실감시킨다.
하긴 그것이 어디 김준평만인가. 인간은 무릇 입체적이다. 전후좌우를 구비해 있다.
상투적 관점으로 쉬이 판단될 순 없다. 인간에 대한 통찰(洞察)은 그래서 어렵다.(계속)
피와뼈 지금나이에 봤는데도 개충격이였지
12.09 1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