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되찾은 이름 ‘청목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12**번지. 고된 장사 생활 15년 만에 쌀 17가마니를 주고 산, 한국 땅에서 아오키가 소유한 첫 번째 집이 됐다. 그 집에서 작은아들이 술만 먹으면 남편 점암처럼 폭력을 행사했다. 가게에서 술 항아리를 깨부수고, 몇 십 통 떼어다 놓은 수박을 집어 던지곤 했다.
“술이라면 정말 지긋지긋 해.”
한국에 남은 이유였던 아들 때문에 예순을 넘긴 나이에 아오키는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했다. 자식이라 어디 말할 데도 없이 아오키는 홀로 속앓이를 했다.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1980년대 서울 변두리엔 판자촌이 즐비했다. 아오키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은 미아리 산 중턱의 초가집이었다. 바느질, 인형 만들기, 청소도우미 등 아오키는 생계를 위해 어떠한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외롭고 고단한 삶에 한줄기 위안은 있었다. ‘부용회’. 아오키와 같은 재한일본인 처들의 모임이었다. 아오키가 1960년대 초 부산에 살 때 부용회 부산지부가 수정동에 있었다. 부용회를 찾아간 그가 일본 가는 방법을 물었을 때 “합의 이혼을 해서 호적을 정리해야 일본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행은 무산됐지만 진안에 돌아갔을 때 부용회 전주지부에서 잠시 활동했었다. 아오키가 본격적으로 부용회 활동을 한 건 서울살이 때부터였다. 1970년대 말 그가 처음 서울 부용회에 갔을 때만 해도 50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부용회는 유일하게 아오키를 반기는 ‘집’이었다.
동네 친구로 가족처럼 정을 나누던 가츠라상, 사람 좋기로 소문난 나가시마상, ‘한 성깔’ 하던 마츠모토상, 잘 웃던 고마다상…. 서울 부용회 마지막 회장인 구마다 가츠코는 어려운 살림의 아오키를 챙겼다. 일본대사관은 일본 국적의 재한일본인 처에게 소정의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으나, 아오키는 한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받지 못했다. 구마다는 아오키에게 생활보조금 지원을 해달라고 일본대사관에 요청했다. 아오키가 자원해 매달 부용회 식구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수고를 보상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서울 부용회 건물이 노량진동에서 대방동으로 이동하고 회원들이 하나둘 세상을 달리해 문을 닫기까지 아오키는 개근 회원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재한일본인 처 지원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건 한일 국교정상화(1965) 이후인 1969년이었다. 한일 정부는 일본인 처들을 일본으로 송환하기 위한 계획에 합의했고, 일본 정부는 ‘재한일본인의 보호대책비’ 명목으로 1억3000만엔(13억원)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1960년대 한국에 머물러 있던 일본인 처의 절반 이상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길 희망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인의 반일감정과 궁핍한 생활 때문이었다.
국내 유일의 재한일본인 처 복지시설인 경주 나자레원(원장 송미호)은 일본인 처 147명의 일본 귀국을 도왔다. 나자레원은 한국 국적을 가진 일본인 처들도 돌아가길 희망하면 호적 정리를 통해 귀국 절차를 밟도록 지원했다. 아오키는 그 정보를 접하지 못했다. 40여년 전은 지금처럼 정보가 빠르게 공유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된 아오키는 아들을 피해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아이고, 그냥, (귀국한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대신 아오키는 ‘고향 방문’(단기 비자) 목적으로 일본을 꾸준히 찾았다. 아오키가 일본의 가족을 다시 만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재한일본인처 고향방문 후원> 프로젝트(한국인 단체인 ‘부용회 후원회’ 지원)로 아오키는 한국에 온 지 30여년 만에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안동으로 시집온 둘째 언니와 함께였다.
“버선발로 뛰어오시는 아버지를 보는데, 내가 일본말을 잊은 거야.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렸잖아.”
그날은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었다. 연신 고개만 끄덕이며 울었다.
아오키 츠네의 한국 이름은 ‘청목항’(靑木恒)이었다. 츠네를 한국식으로 표기했다. 1985년 이후에야 아오키는 ‘복순이’ 대신 ‘청목항’을 얻을 수 있었다. 1984년 12월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이 비준되어 이듬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호적법이 개정되었다. 이때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도 고유의 성과 본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되었다.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
서울에서 경주는 고속열차로 2시간15분이 걸렸다. 아오키는 자리에 앉아 선물 꾸러미와 가방을 창 쪽 벽에 가지런히 뒀다. 그는 잠도 청하지 않고 창문 밖 풍경만 바라봤다. 신경주역을 빠져나왔을 때는 흐린 하늘에서 부슬비가 흩날렸다.
아오키가 90살이 된 지금 서울 부용회(‘부용회 본부’ 역할을 해온 부산지부도 이름만 유지될 뿐 사실상 활동 중단)는 사라졌다. 2004년까지만 해도 12명에 달했던 회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 중에서도 다리가 불편한 가츠라 시즈에는 5년 전 나자레원에 들어갔다. 가츠라는 나자레원으로 가기 전까지만 해도 아오키의 반려견 ‘삐삐’와 ‘딱지’를 돌봐준 유일한 동네 친구였다. 두 사람은 서울시 월곡동에서 10m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짙은 청색 기와지붕을 얹은 나자레원으로 들어갔을 때 가츠라가 휠체어를 타고 아오키를 맞았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만나자마자 얼굴을 부비며 가츠라는 아오키 걱정부터 했다.
“난 괜찮아요. 언니는?”
“2년만 있으면 100살이야. 나 예쁘지?”
5년 만에 만난 두 친구는 서로를 깊이 끌어안았다. 아오키가 차고 있던 하얀 진주 팔찌를 풀어 가츠라 손목에 채웠다. 건물 밖에서 벚꽃이 지고 있었다.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7163.html
< 요약 >
1. 일본통치시대 당시 많은 일본인 여성이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다. 특히 북해도 도쿄 등 징용공들이 많았던 지역에서
2. 이들은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뒤 조선반도로 이주하는데, 남편의 가정폭력, 반일감정 등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다. 본문에서 언급했지만 폭행, 성폭력을 당한 적도 있었다.
3. 이들중 상당수가 귀국했지만, 귀국을 포기하고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도 몇천명이 이르렀다. 이들은 '부용회'라는 재한일본인 처(妻)들의 모임을 만든다.
ㅜㅜ
11.13 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