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키 츠네(90)가 서울역 안내센터 앞 의자에 손깍지를 끼고 앉아 있었다. 수요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서울역은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오키는 가만히 앉아 왼손에 낀 반지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빨간색 점퍼를 입고 알록달록한 번짐 무늬가 새겨진 하얀 스카프를 맸다. 5년 동안 보지 못한 친구, 가츠라 시즈에(97)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아오키 오른발 옆 종이가방에는 친구에게 줄 선물이 한가득이었다. 점심 식사도 잊고 오후 1시 경주행 케이티엑스(KTX)를 기다렸다. 지난 4월4일, 일기예보는 전국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서울 하늘은 아직 맑았다.
“광복절만 되면 아들이 나 보고 공원도 나가지 말라고 해. 엄마 돌 맞을까봐….”
아오키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투리를 섞어 말했고, 가끔 경상도 억양으로 발음하는 단어들도 있었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아오키는 전북 진안과 대전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부산과 경남 김해에서도 10년 정도 머물렀다. 그는 ‘재한일본인 처’라고 불리며 한국에서 70년 넘게 살았다.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
재한일본인 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과 결혼해 살다가 광복 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정착한 일본 여성들이다. 이들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조국 대신 사랑을 선택했지만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조선인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한일 양국에서 외면 받았다.
현재 재한일본인 처의 수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파악이 어렵다. 논문 ‘재한일본인 처의 생활사’(1999년 김응렬)에 따르면 1977년 771명, 1991년 744명이 ‘부용회’(재한일본인 처 모임) 부산·영남지부에 가입해 있었다. 같은 논문에선 부용회 임원의 말을 인용해 전국 회원을 1983년 1500여명, 1996년 1천여명으로 추산했다. 차별을 피하기 위해 출신을 숨겼거나, 부용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오키는 1928년 1월16일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고향 야쿠모는 섬의 잘록한 서남단 지역에 위치했고, 서쪽과 동쪽 모두 바다를 접했다. 그는 고향을 “눈이 많이 오는 곳”으로 기억했다. 자기 어깨 언저리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그만큼 눈이 왔다고 알려줬다.
“대나무가 있으면 끄트머리만 조금 나올 정도로 눈이 높이 쌓였어. 그래서 스키 파는 장수가 있었어. 나무로 만든 스키 사서 고거 타고 학교 댕겼잖아. 그 눈이 4월이나 돼야 녹았어. 요즘 눈은 눈도 아니야.”
어린 시절 아오키의 주특기는 ‘스키점프’였다.
아오키가 고등학생이던 1940년대 초, 탄광과 공장 사이에 있던 그의 집에는 20여명의 조선인 하숙생이 있었다. 그들 대개는 전쟁 중인 일본의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러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아오키의 남편 남점암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조선에서 농부였던 점암은 일본에서 탄광 광부로 일했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서 하급 노동자로 전락했다. 1939년 이후에는 강제 징병에 따른 이주도 급격히 증가했다. 1945년 5월 기준으로 일본에 머물렀던 조선인은 210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수 유학생을 제외한 대다수가 가난한 노동자였다. 1945년 3월 일본 탄광 노동자 41만여 명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는 30%에 달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조선인 노동자가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아오키의 고향 홋카이도가 대표적이었다.
점암은 아오키 집에서 가장 오래 하숙한 사람이었다. 3년 정도 함께 생활했다. 가끔 저녁에 시간이 나면 두 사람은 ‘조선말’을 공부했다.
“사람이 순진하고 참 좋았어요. 우리집 농사일, 가축 기르는 일도 많이 거들어 줬어.”
아오키는 조선 사람이 낯설지 않았다. 둘째 언니도 조선인과 결혼했다. 둘째 형부는 경북 안동에 살던 양반댁 자제였다. 아오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점암과의 혼인 이야기가 오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공장과 탄광 지대에서는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결혼이 자연스러웠다. 일본 내무성 기관지 <특고월보>에 실린 집계에 따르면, 1939년 12월 말 일본 전국 47개 지역 중 조선-일본인 부부가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은 도쿄와 홋카이도였다.
아오키의 부모는 혼사를 서둘렀다. 남성 대다수가 전쟁에 징집된 1940년대 일본에서 여성들은 결혼 상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모는 점암이 아오키보다 10살 많았지만, 오랫동안 하숙집에 함께 살아 식구 같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오키의 아버지는 결혼을 앞두고 점암의 고향 전북 진안에 편지를 보내 그의 호적을 확인하기도 했다. 한국에 본처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으나 점암은 미혼이었다. 아오키는 1944년 겨울에 점암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통이라 혼례는 일본 전통식으로 간단하게 치렀다. 아오키는 기모노를 입고 머리 모양을 내기 위해 가발을 썼다.
결혼 뒤 1년도 지나지 않은 1945년 조선은 식민지배에서 놓여났다. 아오키는 첫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조선의 광복 소식을 들었다. 점암은 아오키에게 조선으로 가자고 했다. 점암은 조선에 가도 “목욕탕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다 있다”며 아오키를 설득했다. 아오키가 어머니에게 조선에 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반대했다.
“혼자 가라고 하고 너는 여기서 살아라. 아이 키우면서 새로 시집가면 된다.”
1945년 10월14일 아오키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자식 걱정이 앞섰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낮잡아 ‘한토진(반도인, 半島人)’이라고 불렀다. 자신은 이혼하고 살 수 있어도 아이가 한토진 소리를 들으며 자랄 게 걱정됐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을 따라 아이와 함께 조선으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남자와 결혼한
일본인 아내들의 고단한 한국살이
광복 뒤 남편 따라 5천여명 한국행
한국에선 일본인이란 이유로 외면
일본선 한국인과 결혼했다며 외면
40년대 홋카이도 고향집 하숙생이던
조선인 광부와 혼인한 아오키 츠네
아이 ‘한토진’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한국 생활 시작해 남편 호적 입적
6·25때 핏덩이 막내 잃고 직접 매장
1945년 12월, 눈 내리는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항에서 출항한 조선행 배가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보름이 걸려 부산항에 도착했다. 갓난아이를 안은 17살의 앳된 아오키와 남편 점암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광복 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혼란스러운 부산항을 강력히 단속했다. 낯선 조선 땅을 밟은 아오키를 가장 처음 맞은 건 덩치 크고 파란 눈을 가진 미국인이었다.
“미국 사람을 그때 처음 봤어.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나를 번쩍 들어 올려서 빙그르르 도는 거야.”
160㎝도 안 되는 작은 체구의 아오키는 낯선 이의 무례한 행동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쟁통에 남편 폭력 피해 도망
남편을 따라 하얀 눈을 맞으며 부산에서 전주를 거쳐 전북 진안의 시댁에 이르는 고단한 여정을 아오키는 묵묵히 견뎠다. 흩날리는 눈발을 피해 아기에게 젖을 물리려 잠시 들어간 주막 안에서 처음 만난 할머니 대여섯 명이 신기한 눈으로 기모노 입은 아오키의 손을 잡았다가, 아기 물린 가슴을 찔러보고, 얼굴도 쓰다듬었다.
고생 끝에 도착한 곳은 시집이 아닌 남편의 외숙모 집이었다. 점암은 아오키와 갓난아기를 2~3일간 외숙모에게 부탁하고, 자신의 집을 수리하러 다녀왔다. 일본의 아오키 집과 비교하면 한국에 있는 점암의 집은 변소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곳이었다. 점암은 집 주변 울을 다시 치고, 변소의 나무판자도 새로 깔았다. 남편없이 외숙모 집에 남겨진 아오키는 예상보다 더 열악한 한국 상황, 낯선 음식과 문화 때문에 입국을 후회했다. 점암의 외숙모가 밥상에 올린 검은 밥에선 알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팥을 넣어 지은 밥 냄새가 익숙지 않았다. 조선간장은 너무 짰다. 배가 고팠지만, 동치미 국물을 조금 마실 수 있을 뿐이었다. 밤에는 어디선가 기어 나온 빈대가 아오키와 겨우 잠든 아이를 물어뜯으며 괴롭혔다.
아오키는 남편 점암의 아내로 혼인신고를 해 남편의 호적에 입적됐다. 광복 전 한일 관계상 ‘동일국가’ 내에서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아오키의 일본 국적은 유지된 상태였다. 아오키는 결혼 생활 6년 동안 아이 셋을 얻었다. 낯선 땅 조선에서 기댈 사람은 남편 점암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큰형님 등 대가족이 한 집에 살았다. 낮에 작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아오키는 이웃들이 흉보는 것도 몰랐다. 아기가 죽으면 작은 돌무더기를 쌓아 무덤을 만든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려줬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 발발 뒤 진안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22일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피난길에 오르며 뿔뿔이 흩어졌다. 아오키 부부는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설 수 없어 진안군 주천면 일대를 전전했다.
“전쟁 때는 니꺼 내꺼 없잖아. 아무 빈집이나 막 들어가서 살았어. 인민군도 농사짓는 사람 해코지는 안 했어. 먹을 거랑 옷, 이불을 다 빼앗아가서 고생했지만.”
피난 생활 중에 아직 핏덩이였던 막내아들을 잃었다.
“죽은 막내를 내가 파묻고 왔지. 눈이 많이 오는 날이었는데, 군용 담요에 싸서 그냥….”
아오키는 한 손엔 죽은 아이를 안고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들고 눈 덮인 산으로 올라갔다.
“파고 보니까 조금 깊이가 모지래(얕아). 그래서 다시 꺼내 가지고 더 파서 다시 묻고 그랬어. 가(막내)가 살았으면 지금 예순여덟인가 아홉인가.”
엄마 아오키는 아흔이 넘어서도 죽은 막내 나이를 헤아렸다.
전쟁 중 장티푸스가 유행했다. 점암이 장티푸스에 걸리자 가족 모두가 병에 옮았다. 점잖고 성실했던 점암이 돌변했던 것도 이때였다. 그는 술독에 빠져 지내며 걸핏하면 아오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나무 베개 있잖아. 그걸로 그 새끼는 얼굴만 때렸어. 하도 맞아서 코가 없어졌어. 맞아서 피투성이가 됐어.”
아오키는 목침으로 얼굴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코가 깨졌다. 눈이 퉁퉁 부어 손으로 눈꺼풀을 벌려야 겨우 앞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한창이었지만 점암의 폭력을 피해 금산까지 50여㎞를 걸어서 도망쳤다. 도망 길에 어린 아들 둘을 데려갈 순 없었다.
재한일본인 처들 대부분은 한국에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일본 외무성 관료였던 모리타 요시오의 <전쟁 중 재일조선인의 인구 통계(1968)>를 보면,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5242명이다. 그 중에서 5천여명의 여성이 1946년 3월까지 남편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자식을 빼앗기고 내쫓겼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무작정 도망 나온 아오키는 금산을 거쳐 대전에 닿았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할 돈이 없었던 아오키는 대전의 한 이발소에서 3년 간 머물며 일을 돕고 잠자리를 해결했다. 이발소 주인 할머니는 조용하고 성실한 아오키에게 바닥 쓸고 닦는 일과 머리 감기는 일을 맡겼다. 하루는 이발소에 평소 왕래가 잦아 안면을 튼 ‘보이’(심부름하는 소년)가 와서 아오키를 찾았다.
“누님, 일본 무역회사 사장이 있는데 누님이 가서 말 좀 해주실라요?”
아오키는 일본인 무역회사 사장의 통역을 도와주고 일본에 있는 큰언니 아오키 스우에게 보낼 편지를 부탁했다.
“남편한테서 도망 나왔다고는 말 못하고, 남편이 죽었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