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마피아의 도덕관道德觀
마피아에게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이 아니라 시칠리아에서 볼 수 있는 강철처럼 확고한 고유의 도덕이 존재한다. 마피아는 조직의 단원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지만 그 대신 어떤 경우에도 그들을 보호한다. 이 강력한 보호의 그물은 외국으로 이민 간 시칠리아 이주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법칙은 원시시대 족장의 통제에 복종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부족의 율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피아의 수령首領Capo은 자신을 부하의 행복을 염려하는 입법자로 생각한다. 즉 견습수도자를 지도하는 수도원장과 같은 열성을 가지고 유망한 젊은 조직원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다.
조직원으로서 죄를 범한 자에게는 대개 한 번의 경고를 준다. 그래도 시정되지 않을 때는 오직 하나의 형벌을 내린다. 그것은 죽음이다. 수령은 항상 올바르며 그것을 정당화할 온갖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도저히 다스릴 길이 없기 때문에 지워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체는 향료로 썩지 않도록 한 다음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줬지. 그 자의 가족은 가난하고 헐벗은 신세였지. 그래서 시체의 손가락에는 관을 열면 곧바로 눈에 띠는 큰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줬지. 우리는 올바른 일을 한 거야. 그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아마 전기의자나 가스실에서 죽었을 거야. 그렇게 되면 가족들은 그의 시체를 볼 수도 없었을 거야.’미국 마피아의 수령인 니콜라 젠틸레Nicola Gentile(1885-?)의 말. 이 마피아 보스는 미국에서는 닉Nick로 시칠리아에서는 Zucola(콜라 아저씨)로 알려져 있다. 1963년 그는 회고록 Vita Di Capomafia를 출판하였다.
마피아는 명예를 보통 인간적인 성실성誠實性보다 우선한다. 이 명예에 관련된 유명한 사건이 시칠리아의 팔레르모Palermo 주의 바게리아Bagheria와 몽레아레Monreale 사이에서 1872년부터 78년 사이에 일어났다. 이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프라투치Fratucci 가문과 스토파리에리Stuppagghieri 가문은 자주 충돌을 일으켰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로 싸움은 크게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1872년 프라투치 가문의 주세페 라파엘레Giuseppe Raffaele 라는 자가 스토파리에리 가문의 한 조직원을 경찰에 밀고한 사건이 일어났다. 밀고는 마피아에게 가장 수치스럽고 파렴치한 행위였다. 스토파리에리 가문에서는 프라투치 가문에 사자를 보내 마피아의 법에 따라 주세페를 처형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프라투치 가문에서 이 요구를 묵살함으로서 두 가문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으로 제일 먼저 이 전쟁의 원인이 된 조직원의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이 살해되었다. 그 다음에는 먼 친척이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나중에는 두 가문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위험성이 있는 혈연관계를 가진 자들까지도 제거대상의 범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전쟁의 집요함은 1878년 한 생존자에게 얼굴을 가린 노파가 찾아와 나는 일족一族의 여자들 가운데 최연장자인데 오늘부터 당신이 우리 일족의 최고 가장家長이 되었다고 하면서 미국으로 피신한 사촌과 힘을 합해 일족의 복수를 하라고 부추겼다. 이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이 가문의 전쟁기간 동안 이 지역의 인구수가 감소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 싸움의 마지막 장은 마피아 방식으로 종결되었다.
프라투치 가문의 생존자로 가족을 다 잃은 살바토레 다미코Salvatore D'Amico가 경찰에 출두하여 스토파리에 가문의 비리를 모조리 고발하였다. 이에 프라투치 가문은 밀고자인 살바토레 다미코를 처형한 다음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그의 시체를 내걸었다. 다미코의 몸에는 프라투치 가문의 표식을 붙여 놓았다. 프라투치 가문의 마피아식 방식에 스토파리에 가문도 수긍하였기에 양 가문의 전쟁은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마피아식 명예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교도소에서도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한 예로 복수를 위해 다섯 명을 살해한 다고스티노D'Agostino라는 시칠리아인은 교도소에서 죄수들로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이탈리아 형법에서 명예살인-복수-은 최고 십 년 형이었으므로 다고스티노는 도합 오십 년 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였다. 하지만 교도소에서 다고스티노는 일반적인 호칭인 2인칭 ‘투tu'가 아니라 3인칭 단수형의 경칭敬稱인 ’레이lei‘로 불리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고스티노를 면담한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범죄를 또 다시 저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혹은 저렇게 선택의 여지가 나에게 있었다고 생각하오. 명예는 명예 복수는 복수라오. 운명의 신이 엄지손가락을 내 목에 대고 딱정벌레 죽이듯 찍어 누른 것이라오.’
시칠리아 마피아의 복수에 대한 경고의 방식은 사르디니아Sardinia나 코르시카Corsica 저 멀리 아프리카의 말리Mali에서 행하는 의식과 유사하다는 점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장례식 때 곡을 하는 남자들은 살인자의 신원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면서 살인을 고발하고, 살해된 사람의 가족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여자가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의 남자에게 복수를 위임하고, 시신에 입맞춤하거나 시신의 상처를 빠는 행동을 한 다음 ‘이렇게 나는 당신을 죽인 사나이의 피를 빨겠습니다’라는 의식적인 말을 하는 것을 종교적 의식과 같은 형태로 한다는 점이다.
시칠리아에서 명예살인 혹은 사적 복수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현실의 반영이었다. 시칠리아는 역사 이래 온갖 민족이 거쳐 가면서 착취를 당한 섬이었다. 로마는 시칠리아의 노예가 재배한 밀로 만든 빵을 먹으며 온 세상을 정복하러 다녔다. 중세시대 시칠리아는 노예들에 의해 로마 교황의 부富의 3/4를 제공하였다. 시칠리아는 노르만, 게르만, 프랑스, 아라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에게 착취를 당하였다. 이들 착취자들은 하나같이 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부터의 지배였고 착취였다. 이들 지배자들은 해 마다 시칠리아의 항구에서 밀을 가득 실은 배가 출항하기만 한다면 섬의 내정內政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시칠리아는 이들에게 ‘빵 바구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하나 마피아였다. 그래서 모든 반역자, 희생자, 피해자들이 마피아에 의지하기 위해 앞을 다투어 달려갔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피아의 단원들은 기다림이란 수련修鍊을 받았다. 즉 무관심을 가장한 복수를 행하기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올 때까지는 결코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결과 시칠리아의 마피아 단원들은 서구인들에게는 드믄 자제심을 기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피아는 정말로 명예로운 사람은 분노忿怒를 터뜨리거나 공포심恐怖心을 드러내 자신의 입장을 약화시키거나 적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갖게 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마피아 단원은 중대한 모욕이나 위해危害를 당했을 때는 표면적으로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한 평생의 절반이라도 참고 참으면서 복수의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게다가 자신이 살해할 상대자에게 표면적으로 친밀감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내심이 없는 사람들이 마피아에서 배운 비밀스러움과 조심성을 던져 버리고 복수를 하려다 실패한 경우에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시칠리아의 험준한 산 속으로 도피逃避하는 길 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시칠리아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산적이 들끓었다. 실제로 이차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도 시칠리아의 험준한 산 속에는 독립적인 30여 무장집단-산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1962년에도 시칠리아의 고속도로에서는 무장 강도가 나타났다.
시칠리아의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백여 년 전에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에서는 ‘무장대武裝隊’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 조직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은 냉혹冷酷과 잔인殘忍함만 가지고 있으면 되었다. 결국 이 무장대는 극악한 범죄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악랄함은 이후 시칠리아 인들이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기에 시칠리아에서 어떤 범죄가 발생하였을 때 공권력이 개입하여 사건을 해결하려 하면 모든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부 관리가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 이런 상투적인 말을 듣게 마련이었다. ‘내가 죽으면 하느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 때문에 나에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을 용서할 것이요. 그러나 만약 내가 살아난다면 그때는 내 자신이 결말을 지을 것이요.’
이것이 그 유명한 시칠리아의 ‘오메르타Omertà’이다.이탈리아 남부-시칠리아, 칼라브리아, 아플리아, 캄파니아-에서 지켜지는 명예의 규약이다. 일명 ‘침묵의 규약’이라고도 한다.이 단어는 스페인어 옴브레다드hombredad에서 온 말로 ‘남자다음’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후에 시칠리아 어에서 남자를 뜻하는 omu로 변현되었다. 이 단어는 라틴어 humilitas와 구분되어야 한다. 겸손을 뜻하는 후밀리타스는 그리스도교인의 미덕이다. 하지만 이 단어와 오메르타는 비슷하기 때문에 문맹文盲이 많은 시칠리아에 이 두 단어는 혼용되었다. 이 남자다움과 겸손이 혼용되면서 시칠리아 인들의 도의심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시칠리아 인에게 훌륭한 사람이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마피아에게는 ‘남자다움’이었고, 그리스도교인에게는 ‘겸손함’이었다. 자기 문제를 자기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로 ‘오메르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문제에 참견하는 것은 명예와 존경을 상실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시칠리아에서 범죄에 얽힌 증언을 받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다.
⑵차별화差別化
스페인이 유럽이 아닌 것처럼 시칠리아도 이탈리아가 아니다. 시칠리아는 예로부터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여 왔다. 이 섬은 현재에도 고대古代의 기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농촌에 거주하지 않는다. 거의 다 조그만 도시에 거주한다. 1960년대 시칠리아에서 인구 1천 명 이하의 마을이 단 하나였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다른 지중해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런 기현상이 시칠리아에서는 일상적인 것은 고대부터 기승을 부린 ‘산적山賊’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시칠리아에서는 새벽 일찍 나귀를 타고 자신의 경작지로 나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시간을 대부분 소비한다. 시칠리아에서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무장병력이 방어하는 장원의 사무소나 창고 뿐이다. 농민들은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는 행위를 고대부터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런 번거로움은 농번기에 잠시 멈춘다. 이때는 농민들이 파리아이오Paliaio라고 부르는 오두막 비슷한 곳에 농기구를 보관하고 잠을 잔다. 그런데 이 오두막을 전문으로 도둑질하는 부류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마피아에 의해 살해된다. ‘명예로운 자’들은 규모가 작고 조직되지 않은 범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좀도둑의 천국이란 오명을 쓰고 있지만 시칠리아에서만은 예외이다. 이곳을 지배하는 ‘명예로운 자’들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간 큰 좀도둑은 없기 때문이다.
시칠리아의 시간은 지루함이며 우울함이다. 이곳은 동맥의 흐름처럼 모든 것이 느림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물결에는 오직 침묵만이 존재한다. 간간히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만이 이 침묵을 흔들 뿐이다. 그들 주변을 감싸고 있는 현대의 이기는 이들의 전체를 지배하는 고대적인 것을 파괴시키지 못한다. 시칠리아는 20세기 속에 존재하지만 영원히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북부 프랑스의 노르만 인들이 이 섬을 점령했을 때 아직도 로마나 비잔틴 시대에 밀을 생산하던 대장원大莊園이 남아 있었다. 노르만 정복자들은 깊은 생각 없이 대장원을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 부하들은 대장원의 영주로서 자신들의 영지에서 세금이 들어오고 소요만 없다면 간섭하지 않고 토착 귀족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 문제는 이 토착 귀족들이 시칠리아에 부재한다는 것이었다. 설사 섬에 정착하고 있다하더라도 자신이 위임받은 장원이 아니라 팔레르모Palermo에 거주하였다. 이 결과 시골의 장원은 처음에는 부재 귀족들의 대리인인 집사執事들이 관리하였다. 이 집사들은 시칠리아의 농민들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수탈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집사들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사병私兵을 양성하고, 개인 법정에서 농민들을 재판하였다. 이런 억압이 문제가 되자 그 다음으로 나타난 것이이 가벨로티Gabelloti이다.
이 이탈리아어의 뜻은 징세인徵稅人이지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재 지주인 귀족들이 집사를 통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부재 귀족들은 토지의 권리를 일정 연한年限을 정해 그 기간 동안 입찰入札을 통해 매각하였다. 이 일정 기간 동안의 토지권한을 매입한 자들이 가벨로티였다. 이들은 대부분 마피아였다. 이들은 매각한 토지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 소작인들에게 대부貸付한 다음 자신들의 마름을 시켜 토지를 감독하고 무장경비원을 고용하여 경비하게 하였다. 이는 가장 원시적이고 단순한 봉건제도였다. 하지만 이 제도의 맹점은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벨로티들은 그 몇 년을 위해 장원을 개선하거나 개량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오직 임차해준 토지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뽑아내려 하였을 뿐이다.가벨로티들은 소작인과 가혹한 계약을 맺었고, 소작인들 역시 날품팔이 노동자에게 가혹한 대우를 하였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가해지는 압박에 의해 시칠라아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산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시칠리아에서는 보통 한 세기에 2-3번의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이런 수치는 프랑스, 독일, 잉글랜드에 비하면 아주 빈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피아들은 이런 순차적 압박의 제도가 나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농민들이 일으키는 폭동을 막아주는 자신들이야 말로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결과 마피아가 중심이 된 가벨로티들이 부재 귀족들을 몰아내려 하였다. 이를 위해 부재 귀족들이 더 이상 경영할 수 없는 장원을 경매에 내놓으면 마피아들이 입찰에 나섰다. 물론 입찰자는 마피아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의 장원을 헐값으로 매입하면서 마피아는 시칠리아의 실제적인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시칠리아에서 이런 상황은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마피아들은 무솔리니의 등장을 조용히 관찰하였다. 무솔리니가 사회주의와 선을 그은 것은 마피아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중앙통제형태의 정치를 주장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1922년 10월 27일, 무솔리니는 역사적인 ‘로마 진군’을 결행하였다. 검은 셔츠단으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과 함께 로마로 진군한 무솔리니는 10월 28일 국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로부터 권력획득을 인정받았다. 무솔리니는 군부, 기업가, 우익의 지지로 총리가 되었다. 마피아는 무솔리니의 정부와 충돌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는 판단에서 일단은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무솔리니 역시 마피아들이 지금은 혁명정권을 지지하지만 종국에는 자신의 등을 찌를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여 마피아를 손보는 것을 일시적으로 유예하였다. 무솔리니와 마피아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일시 소강상태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양쪽 다 상대의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무솔리니는 시칠리아에 즉시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파시스트의 행정관行政官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했다. 시칠리아의 파시스트의 법정에서는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었다. 무솔리니의 획일화된 통일성과 규율은 이탈리아 반도에서나 통하였지 시칠리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팔레르모에서는 파시스트 당원이 백주 대낮에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총격을 받고 살해되었지만 아무도 총소리를 들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효과적이었던 곤봉과 피마자 기름을 사용하는 방법은 침묵과 복수라는 규율이 지배하는 시칠리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시칠리아의 한 경찰관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하였다. ‘이 섬에는 두 종류의 목격자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범죄가 일어난 현장 가까이 살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총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용의자의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이들은 총이 발사되었을 때 창밖을 보니 용의자가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발코니에 한가하게 서 있다고 진술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부가 시칠리아의 마피아 활동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나는 마피아가 시칠리아의 선거조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마피아의 도움으로 의회에 진출한 의원들이 이 ‘명예로운 사회’가 일으킨 범죄수사를 저지시키고, 마피아라는 조직이 절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열심히 알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을 당시 시칠리아의 범죄 발생율은 본토보다 10배 이상이나 높았다. 그러나 재판에 회부되는 범죄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시칠리아의 파바라라는 소도시에서 1년 간 마피아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150명인데 반하여, 과거 10년 동안 이 도시에서 병이나 노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단 1명뿐이었다.
무솔리니가 마피아를 박멸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1924년 시칠리아를 방문하였을 때였다. 무솔리니는 팔레르모에서 미리 짜여진 열광적인 환영식이 끝난 다음 근방의 피아나 데이 그레치Piana dei Greci라는 소읍을 방문하려 하였다. 이곳은 오래 전 오토만 터키의 박해를 피해 알바니아에서 피난해온 그리스 정교회가 있는 시칠리아의 유일한 읍이었다.정식 명칭은 Piana degli Albanesi이다.하지만 이 읍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경비상의 문제가 존재했다. 팔레르모에서는 무솔리니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피아나 데이 그레치에서는 위험성이 존재했다. 이 읍은 1890년대 반정부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읍의 읍장인 돈 치치오 쿠치아Francesco Cuccia가 마피아였다.무솔리니가 마피아와의 전쟁을 결심하도록 불을 당긴 인물이다. 돈 치치오 쿠치아는 아주 교활하면서 세속적 허영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무솔리니보다 3년 전에 국왕 빅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가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알바니아 민속무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국왕은 돈 치치오에 의해 어느 틈에 성당으로 안내되고 있었다. 성당 안에서는 그리스 정교의 세례의식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국왕은 나가려고 했지만 교묘하게 경호원들과 격리되어 있던 국왕은 세례반洗禮盤 앞으로 인도되었고, 그에게 한 아기가 안겨졌다. 엉겁결에 아이를 안은 국왕은 돈 치치오의 아들의 대부代父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돈 치치오는 이탈리아 사보이 왕가의 기사십자장騎士十字章을 받을 수 있었다. 돈 치치오는 이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무솔리니를 최대한 이용하려 하였다.
피아자 읍에 도착한 무솔리니를 경호하는 경관들은 무솔리니에게 안전을 위해 읍 밖으로 나갈 때는 돈 치치오의 차를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진언하였다. 읍장의 옆 자리에 앉아 읍을 돌아보려 하자 경찰 오토바이가 차 주위를 에워싸고 경호를 시작하려 하였다. 이에 돈 치치오는 불쾌한 표정으로 ‘이 거리에서 내 명령을 안 듣는 자는 하나도 없다’고 소리쳤다. 이때 무솔리니는 비로소 시칠리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시칠리아에서는 자신이 임명한 경찰장관조차도 자신을 마피아의 보호 밑에 두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무솔리니는 호위를 없애라는 돈 치치오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무솔리니의 이런 행위는 마피아에게 ‘존경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돈 치치오는 무솔리니가 읍의 광장에서 연설할 때 자신의 방식대로 응수하였다. 3년 전 임마누엘레 국왕은 돈 치치오의 무뢰에 그대로 따랐지만 무솔리니는 달랐다. 광장 발코니에 나타난 무솔리니를 환영한 것은 돈 치치오가 특별히 선발한 20여 명의 백치, 장애자, 구두닦이, 복권판매자였다. 무솔리니는 이들을 보자 즉시 턱을 앞으로 내미는 행동을 취하였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앞으로 무솔리니가 턱을 앞으로 내밀 때는 상대방에 대한 위협신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었다. 이 광장에서 무솔리니는 마피아를 박멸하겠다는 의지를 토해냈다.
무솔리니의 이런 의지를 대변한 인물은 체사레 모리Cesare Mori였다.1871-1942. 시칠리아에서 마피아 소탕에 진력한 경력으로 철의 장관Prefetto di Ferro이란 별명으로 불렸다.무솔리니는 모리를 시칠리아의 최고 책임자-장관-로 임명하여 마피아를 근절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모리는 일개 순경으로부터 시칠리아의 최고 책임자에 오른 인물로 순경근성이 온 몸에 밴 인물이었다. 그는 성공이란 범죄자의 체포 숫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 인물이었다. 그의 부임과 함께 시칠리아에서는 공포정치가 행해졌고, 수 천 명의 범죄자들이 영장없이 체포되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마피아는 모리의 이런 성격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마피아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적이나, 사업의 적수를 말살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모리는 종교재판에서 쓰던 심문방식-고문-을 다시 도입하였다. 고문은 이미 1세기 전에 위법으로 되어 있었지만 경찰서의 지하 심문실에서는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다. 모리는 카세타caseta라는 고문도구를 부활시켰다.모리는 이 형틀에서 행해지는 고문방식을 표준화 시켰다. 우선 심문자를 벌거벗긴 다음 온 몸에 소금을 뿌리고 채찍질을 하였다. 다음 단계로는 손톱을 뽑고, 피부를 벗기고 생식기를 비틀거나 찍어 누르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모리는 이 과정에다 전기고문방법을 도입하여 중세적인 방식에 근대적인 방법을 접목시켰다. 카세타에서 고문을 당한 사람은 일생 불구가 되었다.이것은 높이 90cm, 폭 60cm, 길이 45cm되는 상자로 피의자를 여기에 묶어 놓고 고문하는 도구였다. 모리는 소심하고 허영심이 강하며 변덕이 심했다. 그래서 시칠리아에서 시행되는 포고문은 모순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한 예로 사람들이 찌르거나 자르는 흉기-칼-을 소지하면 장기형長期刑에 처한다고 하면서 목동들에게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도끼를 소지해도 좋다고 함으로서 시칠리아에서는 목동용 호신무기에 의한 살인이 급증하기도 하였다.
1927년 무솔리니는 모리에 의해 시칠리아의 마피아가 근절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무솔리니는 모리가 ‘파시스트의 정의正義를 대표하는 순수한 불꽃’이라고 추켜세웠다. 이탈리아의 신문들은 일제히 무솔리니의 업적을 보도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기사화하였다. 그러나 모리의 업적은 도살용 칼로 외과수술을 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모리의 무식한 효과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다. 마피아는 근절된 것이 아니라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었다. 모리는 잡초밭의 무성한 잡초들의 머리만을 쳐냈을 뿐이었다. 그 깔끔하게 보이는 벌판의 토양 깊숙한 곳에는 아직도 잡초의 뿌리가 굳건히 다시 자랄 날을 기다리며 지하의 토양에서 양분을 흡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는 잡초의 머리가 아니라 그 잡초를 자라게 하는 토양과 기후를 바꿨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실패한 것이다. 이러한 대대적인 박해가 지나간 다음 마피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들 마피아들은 현명하게도 파시스트당에 입당하였던 것이다. 이들 범죄자들은 파시스트의 당원이 됨으로서 무솔리니 정권의 박해에서 교묘하게 벗어났다. 그리고 일군의 무리들은 시칠리아를 떠나 기회의 땅인 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이 박해의 기간 동안 형무소에 들어간 자들은 ‘명예로운 사회’의 졸병卒兵들뿐이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마피아는 더 이상 시칠리아에서 봉건적 특권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부터 1943년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할 때까지 시칠리아의 농민들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농민들은 불구가 되거나 살해될 염려 없이 지주들과 계약조건을 교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는 마피아 내부에서 일어났다. 모리의 탄압으로 시칠리아 마피아의 대수령Capo di tutti capi 혹은 보스 가운데 보스capo dei capi 인 돈 비토 카시오페를로Don Vito Cascioferro무솔리니에게 체포되어 1945년 감옥에서 사망할 때까지 수감되어 있었다. 카시오페를로를 유명하게 한 것은 1909년 3월 12일 뉴욕 경찰청의 이탈리아 전담팀의 수장인 조 페트로시노Joe Petrosino를 팔레르모에서 암살한 사건이다.를 체포하였기 때문이다. 돈 비토는 젊은 시절 마피아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유괴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살았다. 형기를 마치고 1901년 아메리카로 건너가 소일하다 1904년 시칠리아로 귀국하였다. 이후 그의 삶은 변모한다. 그는 상류사회의 삶을 모방하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20건의 살인사건과 69건의 범죄혐의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단 1건의 살인사건은 인정하고 자랑하기 까지 하였다. 그가 시인한 살인사건이 바로 뉴욕의 마피아 담당 최고 우두머리인 조 페트로시노Joe Petrosino 살해 사건이었다. 조 페트로시노는 카시오페를로-보통 돈 비토라고 부른다-가 미국에 있을 때 관여한 범죄조직블랙핸드Blackhand라는 단체로 여기의 구성원은 마피아나 나폴리의 카모라, 칼라브리아의 범죄조직에서 탈락한 자들이 아메리카에서 결성한 결사조직이다.과 마피아 사이의 연결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시칠리아를 방문했다가 돈 비토에게 암살당하였다. 당시 돈 비토는 시칠리아 출신의 국회의원과 만찬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만찬 도중에 양해를 구하고 나와 팔레르모의 마리나 광장에서 페트로시노를 저격한 뒤 돌아와 국회의원과 만찬을 계속하였다. 이 국회의원은 나중에 돈 비토의 재판에서 법정에 자진 출두하여 살인사건이 발생한 그날 밤 돈 비토는 자기와 함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돈 비토가 법망에 걸린 것은 순전히 마피아의 두목 중의 두목인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마피아의 최고 두목은 어떤 경우에도 위엄을 잃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그가 가벼운 밀수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돈 비토의 변호인이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을 때 돈 비토는 변호사가 ‘나의 주의에 어긋나며 나의 권위를 손상한다’고 화를 냈다. 결국 돈 비토는 이 위엄을 지킨 댓가로 유죄선고를 받고 팔레르모의 우찰도네Ucciardone 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돈 비토는 감옥에서도 열성적으로 움직였다. 그는 감옥에서 마피아 단원들을 위한 복지계획을 구상하여 실행하도록 하였다. 즉 밖에서 활동하는 조직원들은 감옥에 있는 조직원들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기부금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으로 복역하는 단원의 딸들이 시집갈 때 지참금을 내도록 조치하였다. 감옥에서 돈 비토는 최고의 두목다운 면모를 보였다. 함께 복역하는 죄수들이 매일 그의 독방을 청소하였고, 그의 눈에 밉보인 간수는 형무소장에게 돈 비토가 한마디만 하면 그날로 파면될 정도였다. 문맹이었던 돈 비토는 글을 아는 수감자에게 형무소의 복도 벽에 자신이 생각한 바를 시칠리아 사투리로 적게 하였다. ‘Vicaria malalia e nicisitati, si vidi lu cori dil'amicu. 감옥의 질병과 부자유 속에서 사람은 그 친구의 진심을 알게 된다.’
⑶부활復活
1943년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한지 나흘째 되던 날인 7월 14일 아침 미군의 정찰기 한 대가 날아와 비얄바Villalba로 날아와 저공으로 선회한 다음 소포 하나를 교회 마당에 떨어뜨렸다. 투하물에는 노란깃발에 검정색으로 L이라고 적혀있었다. 이 소포는 즉각 회수되어 경찰서로 보내졌다. 다음날 비행기가 다시 와서 이번에는 이 도시의 유력자인 돈 칼로제로 비찌니Don Calogero Vizzini의 마당에 투하되었다. 비찌니의 고용인이 이를 회수하여 돈 칼로 Don Calò에게 전해 주었다. 그 소포에는 L이라는 이니셜이 새겨진 노란 손수건이 들어있었다. 돈 칼로는 푸근한 아저씨같은 외양과 달리 시칠리아 섬을 총괄하는 마피아의 보스 중의 보스였다. 돈 칼로에게는 두 형제가 있는데 둘 다 사제司祭의 길을 택하였다. 이 가운데 쥬세페 비찌니Giuseppe Vizzini는 후일 노토Noto의 주교가 되었다. 돈 칼로는 우찰도네에서 심장마빌고 사망한 돈 비토의 뒤를 이어 마피아를 관리하였다. 돈 칼로에 의해 마피아는 부흥하게 된다.
이튿날 비얄바Villalba에서 말을 탄 전령이 이웃 도시인 무쏘메리Mussomeri로 향하였다. 이 전령은 무쏘메리에 거주하는 돈 칼로 다음 지위에 있는 쥬세페 젠코 루쏘Giuseppe Genco Russo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마피아 특유의 언어로 작성된 이 편지의 내용은 7월 20일 투우리라는 마피아의 수령이 비얄바를 출발하여 젤라Gela까지 미군 기갑사단과 동행하고, 자신도 미군과 동행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떠나있는 동안 미군의 안전을 위해 만전을 기해달라는 것이었다. 7월 20일 L자 이니셜이 적힌 노란 깃발을 단 미군의 선발대가 탱크와 함께 비얄바에 도착하였다. 탱크에 다가간 돈 칼로 역시 비행기에서 투하한 노란 손수건을 내밀었다. 미군 선발대와 만난 돈 칼로는 아무말없이 탱크에 올라타고 출발하였다. 그 다음날 카마라타Camarata 산에 포진해 있던 이탈리아 군의 2/3가 탈하였다. 탈주한 병사들에 따르면 전날 밤에 마피아의 밀사가 와서 전투가 절망적이란 사실을 말하고 병사들이 탈주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돈 칼로의 도움으로 카타마라 전투에서 손쉽게 승리한 미군은 돈 칼로를 ‘마피아 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사실 무솔리니의 박해로 인해 마피아 조직은 엄청난 타격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마피아의 가장 우수한 단원들이 파시스트 당에 입당하였고, 그렇지 않은 단원들은 감옥에 있었다. 이런 틈을 타고 몇몇 마피아 수령Capo들이 독립하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돈 칼로는 미군에게 협조하는 ‘존경받는 일’로 그의 위신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시칠리아 서부 전역戰域을 담당한 미군은 돈 칼로의 협조로 손쉽게 종결되었다. 하지만 시칠리아 동부 전역戰域을 담당한 영국과 캐나다 혼성군은 에트나Etna 산 주변에서 고전을 계속하며 메시나에 다다를 때까지 3주간 더 고생해야 했다.
시칠리아 서부 전선에서 위력을 발휘한 노란 손수건은 마피아 단원들 사이에서 상대를 확인할 때 흔히 하는 신호와 같은 것이었다. 돈 칼로는 이 방법을 이미 1922년 사용한 바 있다. 1922년 비얄바에 거주하는 마피아 준단원準團員이 돌발적인 살인을 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준단원은 그 살인을 은폐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체포되면 유죄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준단원의 이런 무모한 용기는 마피아의 규율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규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준단원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명예로운 자’를 죽이는 것은 마피아의 위신과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돈 칼로 자신에게도 중대한 ‘존경의 상실’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돈 칼로는 이 준단원을 미치광이로 가장시켜 마피아의 힘이 미치는 범죄자 수용 정신병원-바르셀로나-에 입원시키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준단원은 곧바로 사망하였다. 준단원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 준비된 관에 시신을 넣어 정신병원 밖으로 반출하였다. 물론 관에는 공기구멍이 뚫려있었다. 준단원은 곧 위조신분증을 가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였다. 뉴욕에 도착한 준단원은 미리 통지를 받고 기다리던 단원들이 마중을 나왔다. 이때 준단원은 돈 칼로에게서 받은 C자 이니셜이 적힌 노란 손수건을 내보였다.
시칠리아 침공 작전인 연합군의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에 사용된 L자가 새겨진 노란 손수건은 ‘루치아노Salvatore Lucania’ 혹은 ‘럭키 루치아노Lucky Luciano’를 뜻하는 암호였다. 루치아노는 비얄바와 팔레르모 사이의 평범한 도시인 레르카다 프리디Lercara Friddi에서 태어났다. 그는 30년대 미국 범죄조직-마피아 혹은 코사노스트라-의 최고 우두머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시칠리아의 마피아와 정기적인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의 최고는 시칠리아의 최고와 접촉해야만 했다. 하지만 루치아노는 1943년 강제매춘 62건에 대한 범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30년에서 50년에 이르는 형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미군이 시칠리아를 침공하기 5개월 전에 루치아노는 ‘국가에 이바지한 공로’를 이유로 감형을 탄원하였다. 그리고 시칠리아 침공이 성공하였다. 루치아노는 이런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1945년 석방되어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돈 칼로가 미군에 협력한 뒤에 처음으로 한 일은 1924년 무솔리니에게 빼앗긴 무장호위대武裝扈衛隊를 다시 갖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돈 칼로는 미 점령군에게 자신들을 ‘파시즘의 희생자’로 소개하면서 ‘파시스트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방책’으로 무장을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군은 돈 칼로의 이런 요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리하여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다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미군은 돈 칼로의 협조에 부응하여 그를 비얄바의 시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서부 시칠리아의 각 읍과 도시의 시장후보자를 자신이 명단을 작성하여 미군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 인해 얼마 뒤에 시칠리아의 각 도시의 절반은 마피아나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시장이나 읍장이 되었다. 돈 칼로에 의해 자행된 이 비극은 아직도 시칠리아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 마피아는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 시장과 읍장을 뒤에서 간접 조종하면서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돈 칼로의 노력으로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20여 년 간 파시즘으로 받은 타격을 며칠 내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정부부재政府不在인 시칠리아에서 마피아는 미군의 협조자로 등장하면서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된 것이다.
돈 칼로가 시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합군 당국에서 이탈리아군의 버려진 트럭 2대와 트렉터 1대를 시청으로 보내왔다. 이 소문이 퍼지자 시칠리아 각처에서 비얄바의 시청으로 선물이 쇄도했다. 밀가루, 치즈, 파스타, 군에서 훔친 장물 등등. 돈 칼로는 그 옛날 시칠리아의 위대한 왕이었던 루이제로 2세와 같은 봉건적 지배자가 된 것이다. 시청 광장으로 쇄도하는 선물은 그를 군주로 바라보는 신민臣民들이 바치는 공물貢物인 셈이었다. 시칠리아의 마피아는 돈 칼로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던 것이다.
⑷산적山賊
시칠리아는 11세기 노르만 인들이 아랍인들을 내쫓고 북방 유럽의 봉건제를 도입하였다. 그 이전에 섬을 지배하였던 아랍인들은 소작농제도와 과학적인 관개법灌漑法을 발전시켰다. 이런 아랍인들의 지배는 시칠리아 인들에게 그 이전과 그 이후에 경험하지 못한 너그러운 것이었다. 아랍인들이 노르만 인들에게 쫓겨나지 않았다면 시칠리아는 스페인에 버금가는 번영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르만 인들은 일순간에 이 섬을 점령하여 봉건제도의 어둠 속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어둠 속에서 시칠리아 인들은 농노가 되거나 압제로부터 도망쳐 산적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1943년 8월 시칠리아는 연합군의 손에 점령되었고, 시칠리아 인들은 표면적으로는 파시즘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모든 산업과 상업이 마비된 시칠리아에서 일주일 간 뼈 빠지게 일해야 그 돈으로 담배 두 갑을 살 수 있을 뿐이었다. 일이 없는 남성들은 하릴없이 길가에 앉아 공허한 시간을 보내야 했고, 여성들은 이런 남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연합군 병사를 상대로 매춘賣春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치안이 붕괴되어 30여 개의 산적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산적들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시칠리아의 교도소에 탈출한 죄수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흉악한 범죄로 인해 종신형을 선고받은 자들이었다. 이들에 가세하여 읍의 경찰서 유치장에서 탈출한 자들이 가세하면서 세를 점차 불리고 있었다. 이들은 시칠리아의 모든 곳에서 약탈, 방화, 유괴를 일삼으며 행세하고 있었다. 일부 귀족들은 이들과 타협하여 자신들의 장원에 은신하거나 곳간이나 창고를 본부로 사용하는 것을 허가할 정도였다. 마피아는 원래 통제받지 않는 범죄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 말기의 이 혼란을 마피아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부 조직의 문제가 산적문제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마피아는 산적들을 당분간 방관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 무질서한 무장조직을 조만간 누군가는 이용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1945년 9월 팔레르모 교외에서 시칠리아 분리 독립을 위한 임시회의가 열리면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Sicilian Independence Movement-Movimento Indipendentista Siciliano, MIS-시칠리아 독립 운동. 1941면부터 1951년까지 지속되었던 시칠리아 분리운동이다. 살바토레 줄리아노가 시칠리아 독립 의용군 EVIS (Esercito Volontario per l'Indipendenza della Sicilia, Volunteer Army for the Independence of Sicily의 대장을 맡으면서 이 분리운동과 연결된다.이 회의에는 많은 귀족들이 참석하였고, 시칠리아가 이탈리아로부터 분리하여 군주제를 실행할 경우 이 섬의 왕이 되기로 한 칼카치 공작Guglielmo Paterno Castello duca di Carcaci도 참석하였다. 여기에는 돈 칼로도 참석하였다. 이 회의의 목적은 시칠리아의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 계획을 수정하기 위해서였다. 분리운동의 핵심인 군사책임자인 안토니오 카네파Antonio Canepa가 경찰에 의해 7월에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카네파의 죽음은 정치적인 암살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카네파가 공산당의 비밀당원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의 공산주의 이력이 어떻게 드러났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혼란 속에서 이해관계가 대립된 계파들에 의해 폭로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칠리아 분리를 열망하는 귀족계층에서 카네파를 암살하기로 결정하였다.카네파는 시칠리아 구석 구석에 세포를 조직하여 봉기가 일어났을 때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때 카네파가 살해됨으로서 시칠리아의 분리운동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카네파가 있었다면 봉기는 성공’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카네파 이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필요하였다.
시칠리아의 분리운동도 다른 혁명조직과 마찬가지로 불가사의한 결합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시칠리아 분리 독립의 표면에는 칼카치 공작과 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중세로의 복귀를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로부터 시칠리아를 구하는 길은 이탈리아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귀족들의 뒤에는 마피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마피아는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할 때까지는 절대로 머리를 드러내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분리주의에는 이상주의자와 모험주의자들이 설쳐대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를 불신하면서 시칠리아의 분리가 실현되면 자신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부류이기도 하였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카네파 대신 법률가이며 시칠리아 동부의 소지주인 콘체토 갈로Concetto Gallo를 뽑았다. 그는 카네파의 무장세력이 소멸된 빈 자리를 서부의 유명한 산적 살바토레 줄리아노Salvatore Giuliano와 동부의 잡다한 산적들을 끌어 모아 시칠리아의 분리를 저지하기 위해 주둔한 이탈리아 군과 투쟁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카체로의 이런 생각은 고상한 귀족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이때 분리당의 부당수인 루치오 타스카Lucio Tasca가 일어나 ‘가리발디 조차도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일시적으로 당시의 무법자無法者들과 손을 잡았다’는 말을 하였고, 돈 칼로는 이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타스카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사실 타스카는 마피아 단원이었다. 그는 시장에 취임하여 연합군 수뇌부에게 마피아의 존재와 시칠리아의 분리 독립에 대해 확신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 칼로는 카네파와 같은 대중적인 혁명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1943년 시칠리아가 연합군에게 해방되었을 때에 이미 분리독립의 희망은 사라졌다. 미국과 영국은 시칠리아 독립을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의 승낙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1943년 12월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안드레이 비신스키Andrei Visinsky가 비밀리에 시칠리아를 방문하여 시칠리아의 공산당 지도자 쥬세페 몬탈바노Guiseppe Montalbano를 만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시칠리아의 분리독립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미국과 영국은 시칠리아의 분리독립에 미온적이었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반대하면서 시칠리아의 분리독립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일반 대중들은 분리독립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이를 위해 줄리아노를 영웅시하고 도와주었던 것이다. 마피아는 이런 전후 사정을 알고 줄리아노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대신 자신이 산적들의 통제를 담당하겠다는 보증을 하였다. 돈 칼로는 어중이떠중이 혁명가이네 하는 부류보다는 산적이 더 효과적으로 이탈리아 군을 괴롭힐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이 회합이 있은 뒤에 칼카치 공작은 산적 줄리아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줄리아노는 ‘나는 아스팔트는 미끄러워 걷지 못한다’는 다소 현학적인 답장을 공작에게 보냈다. 할 수 없이 공작은 줄리아노를 만나기 위해 몬테레프레Montelepre로 가야만 했다. 산채山寨에서 회동하면서 분리당의 콘체토 카체로는 서부 지역의 군사권을 줄리아노에게 인계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줄리아노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사면과 새로 태어날 국가에서의 지위를 약속받고 이를 수락하였다. 이로서 시칠리아에 새로운 신화가 탄생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시칠리아에서 마피아와 산적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 유사했다. 마피아는 산적들을 저지하지 않았지만 엄격하게 통제하여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조종하였다. 하지만 이런 관계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20여 년을 통치하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어느 정도 마피아는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새로 생겨나 젊은 산적들은 이전의 산적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마피아가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명예로운 사회’의 전통적인 방식을 이용하는 길 밖에 없었다. 즉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난 산적들을 제거하는데 공권력이 아니라 자신들의 힘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마피아의 방식이 더 확실하게 시칠리아에서는 먹혀들었다는 점이다.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이탈리아의 사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당시 연합군이 취한 정책 가운데 가장 최악은 모든 물가를 군정이 실시된 시점에서 동결한 것이었다. 이 불합리한 조치로 리라화의 가치는 파운드나 달러의 1/4로 폭락하였다. 이 결과 이탈리아나 시칠리아에서는 리라화貨 대신에 연합군의 군표가 범람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마피아에게 호기好機로 이용되었다. 시칠리아의 돈 칼로는 올리브기름을 매입할 때 생산자에게서 1리터에 25리라라는 연합군 군정부의 공식가격으로 강제 매입한 다음 나폴리나 본토의 암시장에는 1리터에 500리라를 받고 팔 수 있었다. 올리브기름의 주산지인 시칠리아의 대부 돈 칼로는 결국 이런 수법으로 이탈리아 올리브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런 돈 칼로의 독점에 대해 정부 관리가 시칠리아로 파견되어 올리브기름의 판매를 정부의 공동판매에 위임해 달라고 사정해야만 했다. 하지만 돈 칼로는 ‘로마사람들이 만든 법률은 로마사람들이나 지키라고 하지. 여기에는 다른 율법이 있어’라고 응수하였다. 이탈리아에서 공산주의자의 준동을 막을 세력으로 무능한 정부보다는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마피아를 더 신뢰한 연합군정부는 시칠리아의 돈 칼로에게 무제한의 협조를 하였다. 이 결과 시칠리아에서 공산주의자의 준동은 제압되었지만 마피아의 세력을 신장시키는데 연합군 자신도 협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연합군의 군정부에서 비공식적인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던 사람은 비토 제노베제Viti Genovese였다.후일 아메리카의 마피아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의 5대 가문 가운데 하나인 제노베제 가문을 세우고 코사 노스트라의 최고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1969년 연방교도소에서 복역 중 사망하였다.돈 칼로는 제노베제와 협력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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