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 ‘야담(野談)과 실화(實話)’라는 잡지(雜誌)에 실렸던 그 시절 사연들을 소개한다.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그때는 고려(高麗)가 오랑캐 국가인 몽고(蒙古)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몽고군의 침략은 근 30 여 년에 이르는 대전란으로써
당시의 임금은 왕궁을 강화(江華)로 옮기고 장기간 항전하였으나,
본토(本土)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의 임금이 몽고와 강화조약을 맺고 나서야 겨우 개경(開京)으로 환도하기는 했지만,
이때부터 고려는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가혹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일제 36년의 세 배에 달하는 무려 100년간이었다.
일제 36년 동안은 그래도 노골적인 부녀자 겁탈을 삼갔다.
그러나 몽고군은 단순히 고려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혈통(血統)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혈통 말리기' 지배를 강요했었다.
고려 임금은 ‘원(元)’나라의 황실여인과 결혼을 해야 했고,
백성들은 ‘원’나라 군인이나 관리들의 종자(種子 ; 정액)를 받아
몽고와 혈통을 같이하는 민족 대혼합의 역사를 창조한다면서
몽고군의 고려 여성에 대한 겁탈을 공식화하는 정책을 감행했었다.
그리고 이 치욕적인 식민지정책은 몽고군(蒙古軍)도 아닌
우리나라(고려) 왕의 칙령으로 반포되었다.
몽고군의 창검 앞에 더러운 목숨을 부지하고자 '꼭두각시' 노릇을 한 것이다.
어쨌든 이 치욕의 세월은 고려 제31대 공민왕(恭愍王)때 까지
자그마치 약 100 년에 걸쳐 실행 되었다.
당시에는 온 나라 군인이 거의다 몽고군(蒙古軍)들 뿐이었다.
고려조(高麗朝)의 군인들은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강제로 무장해제(武裝解除)를 당해서
군인으로써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 전체는 몽고군(蒙古軍)들의 세상이 된 셈이다.
여기에다 몽고군들은 전쟁(戰爭)을 하는 동안 자기네 나라에서 수만리 떨어진 타국(他國)에 와서
수년간이나 걸쳐 목숨을 걸고 싸워서 승리를 하는 동안 그들은 모두가
여자에 대해서 굶주릴 대로 굶주린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몽고군(蒙古軍)들은 지나가는 여자가 되었든, 여염집에 들어앉아 있는 여자가 되었든
여자만 보게 되면 닥치는 대로 노소(老少)를 가리지 않고 겁탈을 하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몽고군들의 행패를 항의하거나 시비하는 사람도 없었고,
또 겁탈을 당한 여자도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놈들에게 겁탈(劫奪)을 당하지 않으려고
입고 있는 치마 속에다 ‘단속곳’이라고 하는 두툼한 옷을 몇 겹씩 껴입고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몽고군들은 여자를 잡아 눕혀놓고 겁탈을 하려고 해도
속옷이 걸려서 쉽게 일을 치를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여자들이 반항을 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낭패를 당하는 일이 잦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낭패를 당하게 되자 성질 급한 몽고군(蒙古軍)들의 행패로
수많은 우리나라 여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를 기화로 한 엉뚱한 인명피해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어리석고 못난 우리나라 군왕(君王)은 결국 몽고와 강화조약(江華條約)을 맺으면서
세상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민족말살(民族抹殺)정책인 칙령(勅令)을 반포하게 되었다.
"모든 고려의 여인들은 이후부터 치마 아래에 ‘단속곳’을 입으면 안 된다.
그리고 고려 여인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몽고군(蒙古軍)이 원하기만 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즉석에서 그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도록 항상 속옷의 밑이 타진 ‘고쟁이’만 입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역사(歷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막힌 칙령(勅令)이 공포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굴욕적인 칙령으로 ‘고쟁이’라는 우리나라 여성만의 속옷이 태어나게 되었다.
아무리 무능한 군주라 하더라도 어떻게 금수보다 못한 적국의 군병들이
자신의 백성인 부녀자(婦女子)들을 겁탈하기에 편하도록 옷의 구조까지 바꾸어 입으라고
명(命)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이때 태어난 ‘고쟁이’라는 옷은 앞서 소개한 대로 여인들이 입는 치마 아래에
받쳐 입는 바지 옷으로서 가랑이 쪽 밑이 타져서 여자가 앉거나 쪼그리기만 해도
그 아래가 훤히 보이도록 뚫어져 있게 만든 옷이다.
흔히들 '고쟁이'가 밑이 터져 있어 용변을 쉽게 볼 수 있는 기능적(機能的)인 속옷이라고
찬사(讚辭)를 보내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그런 기능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몽고군(蒙古軍)의 욕정을 쉽게 채울 수 있게 하는 기능(機能)에 불과했었다.
앉거나 누우면 직접 속살이 바깥으로 나오고,
그 속살들을 아무 때나 몽고군들이 쉽게 만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해서 고안(考案)된 옷이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성질 급한 몽고군들이 아무 데서나,
또 아무 때나 우리나라 부녀자(婦女子)를 겁탈하기 쉽고,
편하게 욕심을 채울 수 있도록 마련한 조치(措置)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때문에 이때부터 고려(高麗)의 여인들은 치마 밑에는 홑 속치마를 입어야 했고,
그 아래에 ‘고쟁이’를 입음으로써 아무 데서나 몽고군(蒙古軍)의 욕정을 처리해주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우리나라 임금에 의해 그런 칙령(勅令)이 공포되고 나서부터는
몽고군(蒙古軍)들이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고쟁이’를 입고 있나, 안 입었나를 조사한답시고,
여인들의 치마를 들어 올리게 하고 엎드려서 아래쪽을 들여다보는 등
기가막힌 풍경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고려(高麗)의 높은 벼슬을 하는 재상(宰相)이
그의 안방에서 자기아내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다가도
지나가던 몽고군(蒙古軍)이 안방에 들어오면 부리나케 재상인 남편은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
그리고 재상의 아내는 예의 그 ‘고쟁이’를 찾아 입고 칙령(勅令)을 어기지 않았다는 표시로
그 몽고군(蒙古軍) 앞에서 치마를 걷어 부친 채 ‘고쟁이’ 아래 타 진 곳 안의
부끄러운 속살을 보여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밤이 새도록 또는 며칠이고 간에 그 몽고군(蒙古軍)이 돌아 갈 때까지
몽고와 고려의 인종교배(人種交配) 행사를 한답시고,
안방마님을 비롯하여 며느리까지 불러놓고, 한방에서 놈들의 씨앗을 받아서
수태(受胎)가 될 때까지 봉사를 해야만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소위 권력(權力)을 가졌다는 벼슬아치들까지 이 꼴을 당했으니,
하물며 일반 서민이나 상민(常民)의 집안에서는 어떠했겠는가.
문제는 이런 제도 하에서 무려 100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자
고려여인들의 성(性)에 대한 풍습조차 너무나 문란(紊亂)하게 바뀌어 사회기강이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어느 때에 이르러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몽고족(蒙古族) 남자들에게 자청하여 수청을 들기도 했다.
심지어는 몽고군(蒙古軍)의 씨를 받아서 수태를 하는 경우, 경사(慶事)가 났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종국(終局)에는 여인들 간에도 몽고족(蒙古族) 남자들에게 몇 번
또는 몇 명의 몽고 남자와 관계를 갖고 있느냐가 상류사회(上流社會) 여인으로써
행세를 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으로까지 발전되었다. 갈데까지 가버린 것이다.
사회의 풍토와 유행이 이토록 변해가자 백성들의 복장(服裝)까지도 몽고족(蒙古族) 흉내를 내어서
몽고 복장의 옷들을 뻔뻔스럽게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미풍양속(美風良俗)까지 사라져 버렸다.
그 후 공민왕(恭愍王) 대에 이르러 국권을 다시 찾고 몽고(蒙古) 놈들을 몰아내기까지
100 여 년에 걸쳐 그들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로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그마치 100년간의 몽고군(蒙古軍) 통치가 끝난 후 우리나라 국민의 혈통(血統) 속에는
모두가 몽고족(蒙古族)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자조적 한탄이 창궐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의 역사학자들과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
몽고(蒙古)가 정복한 지역은 부녀자들에 대한 겁탈이 극심했다는 동서양 사서기록을 토대로 하면,
금수(禽獸)보다 못한 몽고군(蒙古軍)들이 무려 100년간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반응도 있다.
조선조 당시 인조(仁祖)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청(淸)나라에 끌려가
청군(淸軍)의 노리개가 된 부녀자들이 무려 50만 명이나 된 것에 비추어보면,
그보다 몇 배나 더 야만적인 몽고군(蒙古軍)들이 무려 100년 동안 이 나라를 짓밟고 다니면서
무슨 짓인들 안했겠는가를 생각하면 일응 수긍(首肯)이 가기도 하고,
그 피해여성이 수백만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침략 당시의 수많은 성인여성과 100년 동안 태어난 여아(女兒)들이 성장하는 대로 능욕(凌辱)했다면,
그 수가 수백만에 이를 것이라는 계산을 부정(否定)할 다른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김치년들이 못생긴 이유는 다 이유가 있는것
2013.12.29 14:20러시아도 타타르의 멍에
2013.12.29 14:21근데 러시아는 별로 안섞인듯?
2013.12.29 14:21선진 DNA를 물려준 갓몽골에 감사해야한다
2013.12.29 14:24근데 막상 몽골유전자는 검출안된다던데 얼굴만 비슷하지
2013.12.29 14:25다시말하지만
2013.12.29 14:26몽골 유전자가 열성 유전자라
2013.12.29 14:26고려의 우성 유전자가 이긴듯..
2013.12.29 14:26다만 .. 이렇게 거대한 유전자 공격을 한번 받고나서
2013.12.29 14:27고려의 우성 유전자는 열성 유전자로 열등해짐
2013.12.29 14:27그리고 열등한 조센이 탄생
2013.12.29 14:27김치남 김치녀가 좆미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군 ㅎㅎㅎ
2013.12.29 18:55ㅋ 센센징어 이놈은 야설 나부랑이를 즐겨읽은 모질인가 보넹~ 야담과 실화라는 잡지는 그당시의 야설일 뿐이야. 이름도 없는 애가 배설해 놓은 잡글일 뿐이지
2014.05.17 07:06고쟁이같은 단속곳이 몽골의 복식영향을 받은 것 뿐이다. 고려의 복식이 몽골에서 유행하기도 했었고. 몽골군대의 강간합법화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고려 어느 임금의 어떤 칙령이 몽골주둔군의 합법적인 강간칙령이라더냐? 센센징어 이 병신은 뇌만 없는게 아니고 쓸개도 없는 놈일세 ㅋㅋㅋ
2014.05.17 07:12eqe/ 생각없이 세상을 보는 니가 좆미개한 이유는 뭐냐?
2014.05.17 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