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찢어지고 광대 튀어나오고 아시아인 치곤 체격 좀 있어보여서 힘 좀 쓸줄 알았는데 존나 약골이라서 다 놀랐단 기록
출처 Korea from its capital, George W Gilmore
이괄의 난 당시 이괄이 가장 신뢰하던 부대도 항왜 150명으로 구성된 정예 부대였는데, 사무라이도 아닌 아시가루임에도 태생적으로 날붙이 등의 냉병기를 잘 다루는 일본인들인지라 조선에서는 일당백을 재현해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전투력이 막강함을 알고는 동래 왜1인들을 1천명 정도 고용하여 막게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왜1인을 왜1인으로 막는다는 것은 잘못된 계책이라며[2] 반대가 심해 무산되었다. 이원익은 "걔네들에게 1천명만 보내라고 하면 과연 1천명만 보내겠습니까? 그리고 더 많이 오기라도 하면 임진왜란 꼴 나지 말라는 보장 있습니까?"라고 주장하면서 반대론의 선봉에 섰고 처음엔 하도 다급해서 에라 모르겠다 청하고 봅시다!라던 여론이 즉각 반대로 선회했다. 참고로 동래 왜1인들은 대부분 군인이나 무사도 아닌 상인들이었다. 실록을 읽어보면 '너네끼리 죽어라'는 발상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다급한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당시 조선에선 일본인병사가 전투종족으로 보인 모양이다.
이괄의 난과 이후 병자호란 당시에도 투입되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60대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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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1만여 명의 조선인 군인들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2009-10-20?임진왜란 참상이 생생히… 정경운의 ‘고대일록’ 완역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sec&sid1=103&oid=022&aid=0002082887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류희춘의 ‘미암일기’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대표적인 일기체 기록물로 평가받는 고대(孤臺) 정경운(1556∼?)의 ‘고대일록’이 5년여의 작업 끝에 완역됐다.
네이버 백과사전 '고대일록' 항목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6542&cid=40942&categoryId=32892
이 책에는 선조대 후반에서 광해군대 초반까지의 정치상황과 사회제도에 관한 기록들이 있어 임진왜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http://www.yes24.com/24/goods/3591007?scode=032&OzSrank=1
yes24 책소개
이 책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고대일록 세트는 원문을 담은 『고대일록』과 『역주 고대일록』상·하의 세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