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치어댄스>의 포스터(출처:야후재팬)
「요즘 즐겁게 읽고 있는 책이 『古本道場』입니다. 『종이달紙の月』의 작가 가쿠타 미쓰요(角田光代)씨가 오카자키 다케시(岡崎武志)씨와 공저(共著)한 에세이인데요,
현재 한국의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아주 오래된 서점』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내용은 한마디로 헌책방 순례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재미가 철철 넘칩니다.
소설가인 가쿠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서평가(書評家)인 오카자키씨의 구수하고 재치 넘치는 필력은 읽는 재미를 한껏 끌어올리고 있답니다.
고서점(古書店)을 비롯해 앤티크 소품(antique小品)에 정감을 느끼시는, 빈티지(vintage)한 정서의 소유자라면 거의 필독서(必読書)라 해도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그런데 가볍게 읽기에 그만인데도 제법 의미심장한 문장들이 때때로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강렬히 쏟아져 나온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이다.
<만약 내가 시부야 구에 살아서 그런 헌책방밖에 몰랐다면, 진보초나 주오센 근처의 노포 헌책방을 보았을 때 같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걷지 않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는구나.>
<방금 둘러 본 두 가게는 나의 바깥쪽 세계에 있었다. 세계가 갑자기 넓어진 느낌이다.>
“걷지 않으면 세계는 넓어지지 않는구나.” 옳은 얘기다. 마음에 든다. 小生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달은 <진리真理>가 하나 있다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넓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언제나 자신을 성찰하기 위해 노력한다.
관점을 보다 크고 넓고 깊게 체득하기 위해 짬나는 시간마다 독서와 여행, 학습을 토대로 한 사색(思索)에 힘을 기울인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다. 다만 그 점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우물 안 개구리보다는 자신을 성찰하려는 능력을 조금 더 갖췄다고 조심스레 자족(自足)한다.
그렇다고 우물 안 개구리의 삶이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다. 어떤 형태의 삶이든, 살아가는 방식은 누구라도 그 자신이 선택할 문제다. 타인에게 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상관할 바는 아니겠다.
허나 우물 안 개구리는 세계가 넓은 줄 몰라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은 협소해지기 마련이고 관조(観照)보다는 격정(激情)으로 사안을 대하기 마련이다. 성찰이나 통찰이 부재해 버리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자(富者)를 대하는 자세를 보면 쉽게 실감할 수 있을 테다. 누구는 부자를 보고 시기하고 분노하면서 격정적 태도를 보인다고 하자.
또 누구는 富者를 보면서 왜 부자가 되었는지 헤아리고 자신을 성찰한다 치자. 과연 둘 중에서 누가 우물 안 개구리일까? 누가 좀더 건설적인 마인드의 소유자일까? 조금만 헤아려도 답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두말할 것도 없이 小生은 후자의 태도에 방점을 직고 있다만, 가쿠타 미쓰요씨도 그런 모양이다.
이런 문장도 『古本道場』에 덧붙인다.
<내가 책 쇼핑을 하는 사이에 백발에 은테 안경을 낀 할아버지가 유리 케이스에 진열되어 있던 『노라쿠로』 전권을 사들였다. 이야, 굉장한 구매 방식이다. 곁눈으로 관찰했더니 아멕스 골드 카드로 책값을 지불했다. 나도 나이를 먹으면 『유리가면』 전권이나 『더 파이팅』 전권을 무 사듯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쿠타씨는 부자를 보면서 분노나 시기하지 않았다. 부럽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나이가 들면 그러고 싶다고 말했다. 즉 자신도 부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은연중 비친 것이다.
小生도 가쿠타씨와 진배없는 마음이다. 하면 우물 안 개구리는 어떨까? 추측컨대 시기하면서 퉁명스러운 눈길로 노려봤을 테다.
「뭐, 모든 우물 안 개구리가 다 시기하진 않겠지요? 가쿠타씨 같은 마음과 태도를 비칠 분들도 더러는 있을 거라 믿습니다. 참고로 『노라쿠로のらくろ』는 타가와 스이호(田河水泡 1899-1989)선생께서 1931년(昭和 6년)부터 10년간 인기잡지인 『소년구락부少年倶楽部』에 연재했던 만화입니다.
검은 들개가 군인이 되어 병영에서 지내는 에피소드를 그렸지요. 백발의 신사는 상당한 거금을 들였을 겁니다.^^」
분노하고 시기하는 건 필연코 분쟁을 불러온다. 부럽고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은 단언컨대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불러들인다. 그래서 마인드(mind)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어떤 마인드를 갖추느냐에 따라 이후의 행동패턴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노라쿠라』 전권을 구입한 백발의 할아버지는 그것을 읽으면서 예술을 향유하는 즐거움을 누릴 것이 틀림없다. 그럴 때마다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 행복을 느끼는 삶은 풍요로운 법이다.
풍요로운 삶에는 우물 안 개구리들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안정과 균형감이 구현되어 있다.
안정과 균형이 체득된 이들은 언제든 어떤 분야이든, 그 분야에 있어서의 <정상頂上>이 되기 위해 노력(一生懸命)하기 미련이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이 다르다는 것을 통찰하고 있기에 그런 노력이 가능하다.
예컨대 라면집(ラーメン屋) 하나를 경영하더라도 라면 맛을 최고의 정상으로 끌어올리려 혼신(渾身)의 전력을 다한다. 이때 라면집의 오너는 장인(匠人)이라 불리고 명인(名人)이라 평가받는다.
어떤 분야든지 거기서 <정상>이 된다는 것은 물질을 축적하는 차원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거시적(巨視的) 명분에 쉽사리 좌우되는 성격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성찰과 통찰의 토대 위에 빚어진 안정과 균형 감각이 끌어나가는 불굴의 투지 같은 것이다.
조금 과하게 비유하자면 자력신앙(自力信仰)과도 비슷한 원리다.
왜냐하면 명인이란 <자기의 성찰과 타자의 통탈>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상이 되려는 노력을 一生懸命의 경지로 나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一生懸命는 누구든지 그 분야의 匠人으로 끌어올리는 관건(關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