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칸베에>의 포스터(출처:야후재팬)
16세기, 日本의 한 단면.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주라쿠 다이(聚楽第)에서 다이코(太閤)를 알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때 내린 추방령 중 1조는 이런 내용이었다.
<日本은 고래로부터 神国이기 때문에 기리시탄의 나라에서 온 신부들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다!>
그때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대단히 호화로운 선물들을 다이코에게 바치며 진땀을 뺐다고 한다.
「그런 정경들을 상상하면 여러 해석을 첨가시킬 수도 있어서 적잖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컨대 야스케를 통해서도 당대 日本이 타자(他者)와의 관계 맺음에서 어떻게 자신을 규정시키고 성찰했는지도 유추할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오다 노부나가 이래, 日本은 쇄국 정책을 폈었던 에도시대(江戸時代)에서도 오란다(オランダ)를 통해, 서구 제국(諸國)을 상대화(相對化)시켜 상정(想定)해 놓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는 애기이지요.^^」
그렇다면 江戸時代에는 과연 日本人이 자신과 타자인 서구 諸國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견해를 풀어보는 것도 제법 재미있겠다 싶어 몇 마디 덧붙인다.
그때 말이다, 벌써 一國적 이해를 벗어나 글로벌리즘(globalism)적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봤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타자를 상대화시켜 관계를 정립(定立)시키려는 흐름만은 있었다.
「흐음,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거 의외이겠지만 국학파(国学派) 얘기이거든요.」
흔히 국학 하면 쇄국과 국수주의적 이미지가 강한데,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 지향점이 ‘日本적인 것의 완성을 통해 세계로 웅비’하는 것이라고 해도 크게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는 단적으로 “태양신은 전 세계를 비추는 것이지 日本만 비추는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했고, 메이지 유신 세력에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아이자와 세이시사이(會澤正志齊 1782-1863)는 시대를 이끈 역작 <新論>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우리의 신국 日本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 원초적인 에너지가 비롯되는 곳이다. 이는 위대한 태양신의 후손들이 태초부터 변함없이 만세일계의 황통을 이어받아왔기 때문이다. 日本은 세계의 머리에 해당되므로 만방의 기준이 되는 나라이다.
그리하여 日本은 세계 곳곳에 그 빛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며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이라……중략……황덕(皇德)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고 아시아를 침탈하려는 서구열강들을 향해선 이렇게 평했다.
<기껏해야 세계의 발과 다리에 불과한 서양 오랑캐들이 오늘날 바다를 가로질러 몰려들어 다른 나라들을 발밑에 짓밟고, 가늘게 뜬 눈과 절름대는 다리로 감히 고귀한 나라들을 유린하고 있으니, 이 어찌 오만함의 극치가 아니랴!>
자국의 자존감과 힘없는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엿보이는 이 문장들이, 당대 유신세력들에겐 상당한 감동도 주고도 남았을 테다.
요컨대 16세기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경탄했던 日本人들의 저력은 이렇게 시대가 흘러가도 중첩되어 타자와의 관계를 설정, 定立해 왔음을 강조시킨다 할 수 있겠다.
즉 국학파조차도 눈앞의 세계에 서구를 외면하지 않고 상정해 놓았다는 요지(要旨)다.
「참고로 일개인도 그러합니다. 사회생활이란 결국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아니겠습니까? 사회성이 높다는 의의(意義)는 자신과 타자와의 소통이 잘되는 것을 뜻하고, 소통이 잘된다는 것은 성찰과 통찰이 일개인 그 자신에게 구현되어 있다는 방증(傍証)이니까요.」
이를테면 알레산드로 발리냐노가 日本과의 관계 맺음에서 냉철한 이성이 작용되지 않았다면, 그는 구태여 『예법편람』을 저술하진 않았을 테다. 성찰과 통찰이 구현된 일례라 할 수 있겠다.
마찬가지다. 오다 우후 또한 편견에만 휩싸인 인물이라면 선교사가 노예로 부린 흑인을 결코 자신의 直参으로 삼진 않았을 터다.
그런고로 일개인들에게 있어서 성찰과 통찰의 체화는 성숙으로 가는 첩경(捷径)이라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척도는 공동체를 이룬 국가에도 적용되기 마련이다. 국가를 대표하는 정권 담당자들에게 성찰과 통찰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면 국제관계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엉망이 되는 건 주지의 일이다.
자기를 성찰하지 않는 것들은 타자를 제대로 통찰해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들은 결단코 바다가 넓은 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관계란 타자와의 관계 맺음의 연장선상인데도, 삼척동자(三尺童子)처럼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해 버린다.
정말이지 이런 것들을 보면 기가 찬다.
『예법편람』을 쓴 알레산드로나 야스케를 무사로 격상시킨 오다 우후은 자기중심적 유형의 인간이라 할 순 없다. 그들의 시야는 넓었고 관점은 깊고 컸다. 그래서 타자를 상대화시켜 자기를 냉철히 성숙시킬 수 있었다.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있어서 진보(進步)다. 진보는 냉철한 이성의 토대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흑인사무라이 야스케가 탄생되긴 어렵다. 시사(示唆)하는 바가 무척 크다는 얘기다.
「세계를 보다 나은 상태로 진보시키는 것은 일방의 격정적 선동보다는 쌍방의 냉철한 대화가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점을 감안해 지난 역사나 현실의 세태를 살피면 합리적인 해석이 나오지 않을까, 라고 小生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음, 그나저나 <군사 칸베에軍師官兵衛>에는 야스케의 등장 신이 짧지만, 당대를 두루 헤아려 살필 수 있는 드라마이므로 감상하시면 시대극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느끼면서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그러다 보면 곧 흑인사무라이 <야스케>가 개봉되겠지요. 그야말로 기대가 옛날 교토(京都) 방문 첫날 때처럼 큽니다.^^」
주말입니다. 이곳을 찾는 모든 분들 오늘도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도 가지시고요..^^
09.28 17:07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小生 역시 <오늘밤은 달이 참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ㅎㅎ.^^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선생이 "I love you"를 "달이 참 아름답네요."로 의역한 일화는 유명하니까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요?
小生은 이것이 격정을 배제한 차분한 감성과 이성의 절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시킨 근사한 은유의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일방적 직설은 많은 문제점을 구미호의 여우처럼 달고 오지만. 차분한 감성의 절제는 오히려 사랑의 의미를 깊게 하여, 쌍방을 깊은 소통으로 이어지게 하는 첩경이라 믿습니다. 타자와의 관계도 매한가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것들만 모르고 있을 따름이지요.
09.28 17:07하여 小生은 오늘밤 이 말을 사랑하는 이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달이 참 아름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