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노사이드 게임>에서 열연하는 오오이즈미 요씨(출처:네이버검색)
업종이나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샐러리맨들은 슈트(suit)에 익숙할 것이다. 특히 정장(正装)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무래도 많은 영업부라면 거의 필수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고로 슈트에 시큰둥한 이가 영업부라면 상당히 곤혹스럽겠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선생이 만약에 샐러리맨이었다면 여간 난감하지 않았을 것 같다. 무라카미 선생이 보기와는 달리 슈트에 시큰둥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빙성(信憑性) 있는 말이다.
선생이 서른 중반일 무렵에 발표한 에세이 <다크블루 슈트>가 그 근거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바 있습니다. 2012년,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펴냈는데요,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이란 에세이 모음집입니다. <다크블루 슈트>는 거기에 수록된 작품이고, 에세이 걸작선이란 모토로 발간된 책답게 에세이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습니다. 강추합니다.^^」
그런데 <다크블루 슈트>에서 “살면서 그렇게 성가신 옷은 가능하면 입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라고 했던 선생이 이런 결론도 동시에 내린다.
「나 자신은 거의 양복을 안 입지만,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을 보는 것은 나름대로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역시 연륜이 쌓여야 하고 철학도 필요할 것이다.」
흐음, 처음 그 문장을 읽었을 때 小生은 특히 연륜(年輪)이 쌓여야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을 수 있다는 견해에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고 말았다. 당시 小生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배우 오오이즈미 요(大泉洋)씨가 그러한 사례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昭和 48년생(1973년)이라 현재 46세다. 얼굴은 미안하지만 꽃미남이라 평할 순 없겠다. 서민적인 용모(容貌)와 선한 분위기가 인상적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현재 방영되고 있는 TBS 일요극장(日曜劇場) <노사이드 게임ノーサイド・ゲーム>에서 꽃미남 뺨칠 정도로 슈트를 입은 모습이 꽤나 근사하게 나온다. 정말이지 유능하면서도 공동체의 조화에 전력을 다하는 샐러리맨 키미시마 하야토(君嶋隼人)라는 캐릭터와 위화감 없이 매치되어 있다. 보고 있노라면 참 즐겁다.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성찰은 물론이고, 상대를 통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니 개인 너머 국가, 혹은 회사라는 조직도 매한가지일 테다. 곁에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겠다. 무라카미 선생 말마따나 <보는 것만으로도 꽤 기분 좋은 일이다.^^>
「그래도 小生의 말에 실감이 가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한 번 생각해 보셔요. 정직히 말해서 성찰과 통찰은 성숙된 정신세계가 내면에 구현되어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숙된 이는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가 자연스럽기 마련이지요. 슈트를 완벽히 소화시킬 수 있는 연륜과 철학도 거기서 나온다고 봅니다.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
당연히 떼를 잘 쓰는 떼쟁이들은 대체로 성숙하지 않은 부류들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모든 사안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에 내면의 성찰이나 통찰은 존재조차 하지 못해, 배려와 절제는 저기 강 건너로 쌩하고 달려가 있을 거라고 유추됩니다. 하면, 이런 작자들이 슈트를 멋지게 차려입는다? 누구 말마따나 삶은 소대가리가 피식, 하고 웃지 않을까요? 슈트를 소화시킬 리 만무하니까요. 국가도 매한가지예요. 배려와 절제가 없는 국가들은 늘 말썽을 일으키잖습니까? 그것들은 슈트를 입을 자격도 없답니다. 뭐, 小生의 견해는 이렇습니다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슈트는 격식이나 품격의 몬즈키하오리하카마(紋付羽織袴)에 버금갈 만큼, 정장을 요구하는 자리에 적절한 차림새다. <노사이드 게임>의 키미시마 하야토를 연기하는 오오이즈미 요씨의 연륜이 드러나는 슈트 차림새야말로 그래서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연륜이 쌓인다는 의의(意義)는 生理的으로 나이만 먹는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40대라도 떼쟁이라면 연륜이 쌓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25살이라도 성찰과 통찰이 기능된다면 그는 40대보다 연륜이 깊다고 평해도 무리가 아니다.
더 나아가 집단지성(集団知性)의 발현인 민도(民度)로도 국가나 회사가 얼마나 연륜을 쌓아놓았는지 판별할 수 있기 마련이다. 일개인이나 공동체나 성찰과 통찰이 얼마만큼 구현되어 있는지가 이른바 문명의 척도라는 얘기다.
즉, 문명국과 문명인이라 불리려면 성찰과 통찰의 <자기 절제와 타자 배려>의 태도가 우선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금석(試金石)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