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금주령 어긴 자는 처형하고 자신은 술을 마셨다
등극한 지 만 2년째 되던 서기 1726년 10월 13일, 조선 21대 왕 영조가 종묘에 행차했다. 선왕 경종 삼년상을 마치고 신위를 종묘에 모신 영조는 이날 오후 창덕궁 인정전에서 3대 국정지표를 발표했다.(1726년 10월 13일 '영조실록') 좌의정 홍치중(洪致中)이 대독한 국정지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계붕당(戒朋黨)이다. 편가르기 때려치우고 정치 똑바로 하라는 주문이다. 둘째는 계사치(戒奢侈)다. "금과 옥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으니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아끼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계숭음(戒崇飮)이다. "술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광약(狂藥)이니 엄금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이날부터 1776년 영조가 죽을 때까지 50년 동안 조선은 화합의 정치와 검소한 도덕적 삶과 주정뱅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럴 리가 없었다. 문제는 입으로 내뱉은 도덕률 뒤에 숨은 위선(僞善)이었다.
...중략...
1755년 9월 영조는 "식혜를 예주(醴酒)라 하니 이 또한 술이다. 제사상에 술 대신 올리라"며 제수용 술을 금지했다. 대신 영조는 술 대신 송절차(松節茶)를 즐겼다. "고금(古今)에 어찌 송절차의 잔치가 있겠는가?"라며 금주를 실천하는 모습을 스스로 대견해할 정도였다.(1766년 8월 16일 '영조실록')
그런데 이 송절차가 정체불명이었다. 차를 마시면 왕이 이상해지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홍건이라는 종9품 무관이 강론에 참석했다. 왕이 그에게 물었다. "'정흉모(丁胸矛)'라는 창을 아느냐." 홍건이 머뭇대자 영조는 병조판서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곤장을 거의 반쯤 쳤을 때에도 묵묵무답이었다. 영조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요상한 놈이다. 내가 직접 심문해 혼내 주겠다." 옆에 모시던 사람들이 새파랗게 질렸다. 홍건이 천천히 아뢰었다. "성상 말씀이 평소 알고 있던 것과 달라 즉시 대답하지 못했나이다." 의외로 홍건은 정흉모라는 무기에 대해 해박하게 답했다. 영조는 급히 그를 서천현감에 임용했다.'(성대중, '청성잡기'4 '성언·醒言', '초관 홍건의 기개와 영조')
말단 무관에게 화를 내고 평소와 달리 행동하더니 종9품 말직을 종6품 현감으로 즉석에서 인사 조치하는 기행. 그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해 '청성잡기'에는 '영조가 마침 송절차를 마신 터라 약간 취한 채 말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술이었다.
신하들에게 송절차를 권하며 "취해서 쓰러지더라도 허물 삼지 않겠다"고 한 사람도 영조였고(1769년 2월 26일 '영조실록'), "전에는 탁했으나 지금은 맑고, 물을 많이 섞으니 담백하다[釀法勝前 昔濁今淸 則取多和水 故其味猶淡]"고 한 사람도 영조였다.(1769년 6월 12일 '승정원일기') "법은 만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서릿발처럼 선언한 사람도, 개혁 군주 영조였다. 만인 속에 본인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