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실록 연합적군과 미야모토 겐지(1)
  • 유지군(211.251)
  • 2019.08.17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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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연합적군>의 포스터(출처:네이버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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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라는 분이 있습니다. 日本共産党의 대부로 불렸는데, 헤이세이(平成) 19(2007)에 작고했습니다.

향년 99세였으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산주의자로서 海千山千하여 共産党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赤門(도쿄대) 출신으로 재학 때 문예평론가로 문단에 데뷔했던 麒麟児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 후 日共에 합류하여 情熱的인 활동을 펼쳤는데, 고도성장(高度成長) 시대라 할 수 있는, 終戦 후 쇼와33(1958쇼와레트로昭和レトロ를 얘기할 때 거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라고 평가해도 무방하겠네요.)에 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日本이 눈부시게 高度成長을 하고 있을 때 국제파의 리더답게 의회주의 노선을 확립시키고,

<볼세비키(Bol’sheviki)의 기동전(機動戦)> 같은 전술을 파기시켜, 日共을 명실공히 대중정당으로서의 노선을 걷게 했으며 그것을 見地해 냈다. 이른바 <진지전(陣地戦)> 전술을 확립해 대중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도 치명적인 과거가 있었으니, 소위 <붉은색 린치 사건(日本共産党スパイ査問事件)>이 그것이다.


<붉은색 린치 사건(赤色リンチ事件)>이란 쇼와 812월부터 쇼와 91월에 걸쳐 발생한 日本共産党 린치 사건을 당시 언론이 그렇게 별칭을 붙여 대서특필한 것을 말한다.

그때 日共 중앙상임위원이었던 미야모토 겐지가 주도, 중앙위원 두 사람을 일경(日警)의 스파이로 지목해 가혹한 고문을 자행, 한 사람을 절명시켰고 또 한 사람에게는 스스로 죽는 것을 강요하다가 경찰에 의해 발각되었던,

그야말로 日本共産党의 정당성에 치명타를 가한, 만행이라고 불릴 만한 사건이었다.


日本共産党에게 있어선 '암흑의 역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하면 東大 출신에다 문예평론가이며 戦後 共産党을 대중정당으로 구축시키는데 혁혁한 기여를 했던 미야모토 겐지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건에 연루되었을까?

그것은 당대 共産党의 폐쇄성에 있다고 본다. 조직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이 지나쳐, 왜곡된 純血主義적 마인드가 단죄라는 명분에 휩싸인 공산당원들을 집단적으로 광기의 격류 속에 몰아넣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다 자신들과 맞서는 상대를 악마화(悪魔化)시켜 자신들의 증오를 스스로 확대 재생산했기에 잔혹한 행위도 서슴지 않게 저지를 수 있었을 테다.

이를테면 경찰을 타도시켜야 될 국가권력의 주구(走狗)로 봤으니, 경찰의 스파이라면 동지라도 응징받아 마땅하다는 심리 상태에서 허우적거렸을 거라는 얘기다. 심히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겠다.

아마도 미야모토 겐지도 이때의 사건을 종전 후에는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자책감에도 깊이 빠졌을 테다. 그것이 후일 당의 노선을 의회주의로 확고히 정립시키는데 상당히 일조하지 않았겠나 싶다.


물론 조직을 길게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閉鎖性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극으로 치닫게 되면 다양한 견해는 모조리 무시되기 일쑤이고 심지어 극단의 행동까지도 마다하지 않기 마련이다. 당대 日本共産党 린치 사건이야말로 이 점을 극명히 웅변시키고도 남는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폐쇄적 성향에 의해 증오에 함몰된 부류들은 똑같은 짓거리를 쉽게 반복해 버린다.


훗날 거짓말처럼, 60년대와 70년대를 관통해 日本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학생운동(学生運動)의 한 분파, 연합적군파(連合赤軍派)가 이것을 어처구니없게 답습하여 무시무시한 린치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른바 <산악베이스 사건(山岳ベース事件)>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힌 사건인데, 간단한 개요는 이러하다.

당시 적군파(赤軍派)와 혁명좌파(革命左派) 조직원들이 세계공산주의 혁명 달성이라는 거창한 목적 아래, 함께 뭉쳐 연합적군(連合赤軍)을 결성한다.

그들은 총기로 무장(武裝)한 채 산악에서 합동군사훈련(合同軍事訓練)에 임하다가, 자아비판의 일종인 <총괄総括> 의식을 치르게 된다.

총괄은 하루가 다르게 과격해져, 당시 군사훈련에 참여한 29(이중 여성은 10) 중 다수가 일부의 동료들에게 린치를 무참히 자행, 자그마치 12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나중에 경찰에 붙잡힌 이후에야, 자신들의 행위가 살인이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는데,

그러니까 내부 린치 도중 이들은 누구도 자신들의 잔악무도한 행위를 범죄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광기에 휩싸이지 않았다면 이런 정신 상태에 사로잡힐 수는 없었을 테다.

물론 그 광기(狂氣)에 똬리를 틀고 앉은 것의 정체는 세계를 선악(善惡)으로 나누어 자신들은 민중을 해방시키려는 선이고 국가권력과 자본가들은 악이라는 '가치체계(価値体系)'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 따라 성전(聖戦)인 무장투쟁에 나서는 전사(戦士)가 자본주의적 악마의 습성에 빠져 있는 것은 용납될 수 없으니 자아비판을 통해 자신을 각성시켜야 한다는 것이 <총괄>의 논지였다.

이때 동료에게 가하는 린치야말로 동지의 혁명적 성숙을 돕는 '혁명적 행위'라는 얼토당토않는 논리애 가해자들이 빠져들어 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하면 가당찮는 이 논지(論旨)가 산악베이스에 모인 연합적군 29명에게 통용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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