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이 글은 육군본부가 1956년에 발간한 『후방전사(인사편)』에 기록된 군위AN대에 대한 사실을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 북파공작원들, 민간인들, 피해 여성들의 증언, 예비역 장성의 회고록과 증언 등의 1차 자료를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아직 군관계 자료가 보충되어야 하고 피해 여성들의 증언과 책임 있는 군인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아가 미국내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관계 자료들을 발굴하여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
아래에서는 한국전쟁 시기 군위AN부를 문제 제기하고 군위AN부와 군위AN소 실태를 대략적이나마 밝히고 쟁점과 과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2. 본문
한국전쟁 당시 공식, 비공식적 위AN부의 규모는 얼마나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다만 전쟁 직전 사창의 규모를 능가할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1947년 미군정 당시 공창을 폐지하기 직전 공창의 규모는 2,124명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2월 미군정청의 공창폐지령이 발효된 후, 1948년 10월말경이 되면 사창이 5만여명으로 급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성매매를 하는 여성은 30여만명으로 늘어났다.
성매매 여성이 늘어난 데에는 생활고뿐만 아니라 1945년 종전 이후 수천 명의 일본군 위AN부들이 해방 이후 고국에 들어와 생계를 잇지 못해 창기로 전직했던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또한 위의 경우처럼 민간 여성들이 납치와 강제의 형태로 위AN부가 되었던 여성들도 있었다.
그 실체를 밝힐 수 있는 자료는 있을까? 아직은 몇 가지 자료만을 발굴했을 뿐인데, 육군본부가 1956년에 편찬한 『후방전사(인사편)』가 지금까지는 유일한 문서 자료이다. 자료와 증언, 회고록 등에 따르면 군위AN소는 대개 군인들이 찾아가는 고정식 위AN소와 군인들을 찾아다니는 이동식 위AN소의 이중 체계로 운영되었던 듯하다.
이 책의 '제3장 1절 3항 특수위AN활동 사항'의 기록을 통해 군위AN소의 실태에 근접해보기로 한다.
(1) 고정식 위AN소 : 특수위AN대
군위AN소를 육군은 '특수위AN대'라고 불렀다. 그 자료에 따라 특수위AN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설치 목적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위AN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2) 설치 운영 시기 설치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1951년 이후로 추정된다. 폐쇄된 것은 1954년 3월경이다. "휴전에 따라 이러한 시설의 설치목적이 해소됨에 이르러 공창 폐지의 조류에 순명하여 단기 4287(서기 1954)년 3월 이를 일제히 폐쇄하였다."
3) 위AN대 설치 장소 ① 서울지구 제1소대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 4가 148번지 제2소대 서울특별시 중구 초동 105번지 제3소대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 236번지 ② 강릉지구 제1소대 강릉군 성덕면 노암리 ③ 기타--춘천, 원주, 속초 등지 일부 부대의 요청에 의하여 출동위AN을 행하며, 소재지 내에서도 출입하는 장병에 한하여 위AN행위를 당하였다.
4) 위AN대 규모(통계가 나온 곳 중심) 위AN대는 소대형식으로 편재되었다. 군위AN부는 "서울지구 제1소대에 19명, 강릉 제2소대에 31명, 제8소대에 8명, 강릉 제1소대에 21명으로 계 79명"으로 운영. ※ 예비역 장군, 채명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AN부대를 서너개 운용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니, 60명 1개 중대가 3, 4개가 있었다면 대략 군위AN부의 수는 180∼240명 전후였다고 할 수 있다.
5) 특수위AN대 실적 통계표 1952년 한 해 동안 부대별 특수위AN대에 종사한 위AN부수와 피위AN 군인의 수의 다음 표와 같다. 다른 해의 실적도 52년과 비슷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실적은 상기 4개 위AN대에 출입한 군인들만의 통계인지, 위AN대가 전선 부대에 이동하여 이용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하는 지는 불명확하다. 1952년 특수 위AN대 실적 통계표 ※ 비고--틀린 계산으로서 실제는 다음과 같다. *1)=17,430 *2)=19,040 *3)=204,440 *4)1인당하루평균은 필자 자신의 계산임 위의 실적표에 따르면 한 위AN부가 하루에 6회 이상의 위AN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6) 위생검사 위AN부는 일주에 2회, 군무관의 협조로 군의관의 엄격한 검진을 받고 성병에 대하여는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고 한다.
(2) 이동식 위AN소
고정식 위AN소와 위AN부 관련 자료는 희소하나마 이상과 같은 분명한 근거 자료가 있음으로하여 한국전쟁 당시 위AN소와 위AN부의 실체를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숱한 사람들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 부대내 여성 위AN부들이 있었다고 증언했고 장교를 상대하는 여성과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이 따로 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동해 다니던 위AN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증언이 나온다.
그런데 그런 이동식 위AN소와 관련된 공식 자료는 아직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이동식 위AN소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한 자료는 극소수 군인출신의 회고록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채명신의 회고록 『사선을 넘고넘어』중에서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AN부대를 서너개 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예비부대로 빠지기만 하면 사단 요청에 의해 모든 부대는 위AN부대를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니 5연대도 예외는 아니었고, 예비대로 빠지기도 전부터 장병들의 화재는 모두 위AN부대 건이었다.
차규헌의 회고록 『전투』중에서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하듯 쌀쌀했다. (……) 잔적을 완전히 소탕한 후 예비대가 되어 부대정비를 실시하고 있을 때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위AN대가 부대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중대병사들간에는 전장에서 여자와 가까이하면 불길한 액운이 따른다는 소문이 퍼져 대부분의 병사들은 선뜻 나서지 않아 위AN목적 달성에 큰 도움을 준 것 같지는 않았다.
김희오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 자유민주/대공투쟁과 함께한 인생역정』중에서
(강원도)수도고지 전투도 잊혀지고 도망병 발생도 진정되어 갔다. 이제 FTX에 본격 돌입하기 위해 소화기 및 장비 점검, 보급품 정비 등이 한창 진행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연대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군 보급품은 1∼4종밖에 없었음)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AN부가 배정되어 왔다. 이는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러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백주에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줄을 서서 분대천막을 이용하는 것이라던가 또 도덕적으로나 양심상 어정쩡하기도 해서 썩 내키지가 않았다. 먼저 소대에 2명이 할당되고 그 중 1명이 먼저 소대장 천막으로 배정되어 왔다. 나는 출신환경 등 몇 마디 대화만 나누고 별로 도와줄 방법이 없어 그 동안 모아놓았던 건빵 한 보따리를 싸서 선임하사관에게 인계하였다.
위의 예비역 장군들의 증언에 따르면 군 부대에 소위 '제5종 보급품'이라는 이름으로 위AN부들이 배정되어왔고 이동식 천막이 위AN소로서 가설(차규헌 회고록)되거나 분대 막사를 대용하였다. 이용하는 시간은 최전선에서 교전과 대치 후, 후방으로 휴식하러 왔을 때 군위AN대를 배정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일정한 이용시간을 정해놓고 운영되었던 듯이 보인다.
운영 방식은 증언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채명신의 회고록에 따르면 전선에서 위AN부대 출입은 '티켓제'로 운용토록 하였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티켓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눠준다. 물론 훈장을 받았다면 당연히 우선권이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다.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숫자는 달라진다고 한다.
그 가운데 어떤 예비역 장군의 증언은 이와 다르다. 일선에 군위AN부의 등장은 일회적인 사건이었는데, 1952년 전쟁이 소강에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연대장의 명령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여성 30명 정도가 군용트럭을 타고 연대에 들어왔고 한 개 중대에 5, 6명 정도 배정이 되어 주어진 약 8시간 동안 중대원들은 이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티켓 같은 것은 없었고, 희망하는 군인들이 무료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특히 사관급 하급장교들이 많이 이용했다.
여성들은 대개 서울의 사창가에서 사들여 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대부분 가난한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에 대한 대가는 연대 인사처나 사단 휼병부에서 지출했다. 예비역 장군의 증언에서 분명한 것은 전시하에 특별위AN대를 이용하는 것 외에도 전방의 부대들은 필요시 군위AN부를 채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아직 이동식 군위AN소를 누가 최종 기획하여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여성들은 누구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4. 한국전쟁 시기 군위AN부 문제를 둘러싼 쟁점
이상의 글을 통해 한국전쟁 시기 군위AN부의 실체를 밝혀냈다기 보다는 실체의 작은 한 조각을 찾아낸 것에 불과하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전쟁시기 한국군이 운영한 군위AN부가 일본군 위AN부 제도와 얼마나 다른가에 맞춰지고 있다. 가장 분명한 차이의 하나는 한국군, 특히 육군은 군의 전사(戰史)에 특별위AN대 운영을 기록함으로써 군에 의한 운영을 시인한 데 있다.
한국전쟁 당시 위AN대가 설치된 지역은 대개 전방이거나 준전방에 속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는 사실상 군부가 정권의 주체이니 만큼 전시하의 군은 초국가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군에 의해 일반 민간인을 제2국민병,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 KSC)에 충원하는 데에도 군은 절대권한을 가졌다. 전시 군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는 사실상의 국가이다.
그러한 사실로서 육군에 의한 군위AN소의 설립 및 운영의 문제에서 그 주체가 육군, 즉 전시 국가였음을 군부 스스로 시인했다는 점이 일본군 위AN부 문제와의 가장 뚜렷한 차이이다.
또한 일본군위AN부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제기되는 쟁점 중 하나는 강제적 동원과 조직적 운영에 있다. 조직적 운영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앞의 장에서 설명한 바로 미루어 나름대로 군에 의한 조직적 체계를 갖추고 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강제적 동원의 문제는 아직은 추론 수준에서 있을 뿐 충분한 대답은 찾지 못한 상태이다. 아래 쟁점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그 외의 문제로서 군위AN소의 형태나 종류, 규모 등과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 자체를 비교해야 하는 큰 문제가 걸리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이제 한국군위AN부 문제에 집중해 볼 때 그와 관련된 글쓴이의 문제 의식과 연구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전쟁 당시 군위AN소를 설치한 주체는 누구인가? 위의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군위AN소, 즉 '특수위AN대'는 육군에 의해 설치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 군대의 작전 체계상 군위AN대의 설치 및 관리문제에 대해 위로는 유엔군의 최종승인하에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래로는 육군 '특수위AN대' 대장의 책임하에 총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자료를 찾는 것이 제일의 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군위AN소를 기획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는 우문(愚問)일지도 모르겠다. 1948년 창설된 대한민국 창군 인맥의 원조는 일본군, 관동군 출신자들이라는 점을 조금만 고려한다면 그 기획자에 대해서는 물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희오의 증언에서 그 대답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에서 군위AN부 창설의 기획자가 분명 일본군출신자이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자로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구체적으로 그는 누구인가?
둘째, 특수위AN대의 성격은 무엇인가? 군이 운영한 위AN소는 다름아닌 사실상의 '공창'이었다. 위의 특수위AN대 내용 중에서 해체 시기를 언급하던 중 '공창 폐지의 조류'라는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이라는 비상시기에 군부 스스로 이미 1947년 11월 11일 공포된 '공창폐지령'(법률 제7호)을 위배하고 공창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앞으로 심화된 연구에서 특수위AN대가 어떤 법적·제도적 절차에 따라 설치되었는가 규명되어야 한다.
셋째, 군위AN부는 누구인가? 기존의 자료 어디에도 위AN부의 정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앞에서 인용했던 몇몇 문헌에서는 적지 않은 귀환 일제 군위AN부들이 한국전쟁 당시 성매매업으로 흘러들어갔으리라는 경험적 진술에 따른 추정만 있을 뿐, 일제 군위AN부 중 한국전쟁 당시의 그러한 경험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 북파공작원 1은 군위AN부들은 직업적으로 몸을 파는 여성들이었다고 일축했다. 북파공작원 2도 이에 동의했다. 그런데 북파공작원 1이나 2가 있던 원산 앞 섬에 위AN부로 온 여성은 '그 섬에 와 군인들 밥하고 빨래해주면 한 밑천 장만할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 왔다고 공작원 2는 엇갈리는 증언을 했다.
전쟁 미망인으로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 일종의 '군노무자'가 된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고 하더라도 군위AN부가 된 것은 거절할 수 없는 강제적인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더욱이 납치된 여성들에게 선택권이나 거절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만일 한 발 양보하여 군위AN부가 과거 공, 사창 출신이었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 전전 5만여명의 공, 사창이 전후 30여만명으로 늘어난 문제와 관련지어 볼 때 설명되지 않는다.
일제 시대와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당시에도 설령 전쟁과부나 여자 고아 등 수많은 기민이 발생했으나 그런 사람이 자발적으로 사창이 되었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군위AN부가 어떻게 동원되었으며 그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 현재로서는 확실히 규명할 수는 없더라도 아직도 한국전쟁 당시 군부 책임을 맡았던 자나 증언할 수 있는 자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정부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진상 규명할 책임이 있다.
넷째, 군위AN부에게 어떠한 보상이 주어졌던가?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되었듯이 군인들은 공훈이나 전투에 대한 포상처럼 '보급품'으로 '배당'되어졌다. 군인은 티켓을 갖고 이용했다. 그렇다면 그 티켓은 일본군이 사용하였던 '군표'와 같은 것으로서 대용화폐로서 기능했는가? 김희오의 언급에서는 '후생비를 들인다'는 말에서 후생비가 군위AN부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는 것인가?
한국전쟁 당시 군위AN부에 군표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현금이 대가로 지불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입증할 만한 증거나 증언이 없다. 사실상의 군위AN부를 했던 문씨의 불행한 삶을 보건대, 전후에 그에게 주어졌던 것은 가난과 (남성으로부터의) 버려짐뿐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군 당국이나 정부의 책임은 없는 것인가?
다섯째, 군위AN대는 언제 설립되어 언제 해소되었는가?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인사편)』에는 해소일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1954년 3월로 명명하고 있지만, 설립일은 밝혀두고 있지 않다. 군위AN대 창설 시기는 전선이 교착되기 시작한 1951년 여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앞의 이씨의 경험이나 국군출신으로 인민군 '해방전사'가 된, 비전향장기수 양정호씨나 다른 국군출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유엔군이나 국군의 민간 여성 겁탈 문제는 1950년에도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좌익의 부역혐의가 있는 젊은 여성에 대해서는 강간은 (실제 및 가상) 적에 대한 통제 및 순치 방식의 하나였다. 앞의 김씨의 증언에서처럼 비공식적으로 1950년에도 군위AN부나 군위AN대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군의 풍기문란을 우려하여 1951년 이후 군위AN대를 공식 창설했고 일선 군부대에서도 비정기적으로 군위AN부를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군위AN대의 해소 문제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군부대가 공식 운영했던 공창으로서의 위AN대는 1954년 3월에 소멸했는지 모르지만, 북파공작원의 증언에서는 사실상의 위AN대가 존재하고 있다. 그 위AN대는 사창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군부대가 공식적인 '후생비'의 명목으로 지출하고 북파공작원에 대한 포상의 형태로 존재해 왔던 것 같다. 그래서 군인과 군위AN부의 긴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종선의 소설, 『북파공작원 HID』에서도 북파공작원과 위AN부의 공식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여섯째, 한국의 뿌리 깊은 가부장제도와 가부장적 이중 성문화로 인해 한국전쟁으로 파생된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군위AN부와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공·사창 문제가 여성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사회문제로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앞의 문씨나 이씨와 같은 여성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철저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피해 사실을 현재에도 누군가가 알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적잖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군위AN부들도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상과 같이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와 왜곡된 한국의 현대 사회의 구조에 의해 억압된 기억, 한국전쟁 당시의 군위AN부와 군위AN소 문제를 제기하고 진상을 규명하고 문제점을 해결해야 할 또하나의 시대적 과제를 제출하고자 한다.
[출처] 한국전쟁과 여성 : 군위AN부와 군위AN소를 중심으로|김귀옥 경남대 북한대학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