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령 인도는 다른 무엇보다 토지 세입에 의존했다. 동인도 회사는 배후에서 토후를 감독하는 관료에 의존했다. 1880년대까지도 영국령 인도에서 유럽인 관료와 인도인 인구의 비율은 1명 대 25만명 이하였다.
19세기 초엽에 인도에 관한 영국의 사고는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사고, 즉 인도를 한때 위했으나 이제는 퇴락한 문명으로 보는 관점이었다. 브라만 계급은 자신들이 유서 깊은 지혜와 유럽의 보고로서 하층 카스트들에 대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함으로써 영국을 자기들에게 이롭게 조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인도 사회는 종전보다 더욱 가부장적인 사회가 되었다.
오늘날의 카스트 개념은 브라만이 영국을 이용한 산물일 공산이 크다. 군사면에서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에 계속 의존했다. 1805년까지 세포이 수는 약 15만명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인도의 사티 풍습에 경악했고, 다른 관습들도 너무 야만적으로 보였다. 영국 관료들과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인도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야만적으로 보였다.
영국의 통치는 인도에 자본주의를 체계적으로 들여오려는 시도를 의미하지 않았다. 영국은 단지 자민다르들이 농민 생산자들로부터 세입을 징수하여 그중 일부를 동인도 회사에 보내는 세습권을 가지고 있었다. 세입 징수는 동인도 회사 치하에서 주권의 이중 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중층적인 과정이었다. 영국령 인도는 중개인을 통해 조세의 대부분을 농민층으로부터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동안 동인도 회사는 영국에서 저가로 대량생산되는 의류의 수입을 장려했고, 이는 인도의 섬유공업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다.
세포이 폭동 이후 영국은 인도를 더욱 신중하게 통치했다. 이를테면 토지세를 낮추었고, 토지를 양도할 때 주의했다. 영국 정부는 세포이 반란에 가담한 국가들을 빼고는 어떤 국가도 합병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결국 600여개의 토후국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동안 외면해왔던 인도의 근대화를 약속했다.
하지만 영국이 인도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부설한 철도망은 인도를 전례 없이 결속했고, 모든 지역의 중간계급 인도인들은 장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가능성이 생겼다. 인도 행정청은 통일된 조직이었으며, 이 조직에 속한 인도인들은 징세원가 인구조사원으로서 인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영국의 인도총독 조지커즌은 인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인도의 주인들은 세계 절반의 지배자들이었다. 알렉산드로스, 티무르, 바부르 그리고 나를 동양의 중재자로 만들었다. 인도는 오늘날에도 북방 대국 러시아의 야심을 자극하고 영국의 맥박을 빨리 뛰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