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근대화 이전에도 조선을 앞서 있었다는 것에 대해선 그럴 만하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일본이 淸보다도 앞서 있었다고 하면 예외 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반응을 보인다. (아마도 일본인 자신들도 고개를 저을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다. 우선 일감으로 덩치에서부터 비교가 안 되지 않나?
대청제국은 중국 역사상 최대 판도를 영유했다. (원나라는 몰라도 몽골제국은 중국사의 맥락에 위치시킬 수 없다.) 당연히 인구 규모도 가장 컸다. 19세기 초 대청제국은 인구는 전 세계의 3분의 1, 경제규모로는 세계 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에 비하자면 일본은 그야말로 손바닥만한 섬나라다. 인구에서나 경제규모에서 대청제국에 비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닌가? 맞다. 일본이 종합적인 면에서 청을 능가하는 규모였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재정규모에 있어서만큼은 일본은 청나라를 앞서 있었다.
근대 시기, 일본 중국 조선, 동양 삼국의 격차는 결코 서구 열강의 도래로 갑작스럽게 초래된 게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크게 벌어져 있었다. 경제사학자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는 『근대 동아시아 경제의 역사적 구조』(2007, 일조각)에 게재한 권두 논문 <동북아시아 경제의 근세와 근대, 1600~1900>에서 그 점에 관해 소상히 지적하고 있다.
“3국의 차이는 19세기 전반, 다시 말해 구미 특히 영국 주도의 세계자본주의에 이 지역이 잠식당하기 이전에 생기기 시작했으며, 주로 국내적인 조건으로 인해 생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생긴 차이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대응의 차이를 낳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다음은 당시 3국의 재정규모에 대한 나카무라 사토루의 설명이다.
재정규모
“일본의 에도시대는 총생산량으로 볼 때, 중앙정부인 막부가 전국의 약 4분의 1(약 700만~750만 석)을 영유했고, 게다가 그중 대부분을 직속 가신(하타모토:旗本)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막부 직할령은 약 420만 석이었다. 나머지 4분의 3은 약 260여 다이묘가 영유하면서 독자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에, 전국의 공조액을 알 수 있는 것은 메이지유신 이후 다이묘의 영지가 폐지되고 중앙정부의 지배가 완성되는 1871년부터이다.
1871년의 전국 공조액은 1255만 석이었으며, 에도시대는 이보다 약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는 부가세나 마을의 경비를 포함하지 않은 액수이다. 정부가 파악한 공식적 수확량이 3220만 석이었으므로 공식적 공조율은 39%였다. 실제 수확고는 4681만 석이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이것 역시 30% 정도 과소평가된 것이므로 대략적인 수확고는 6000만 석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면 공조율은 약 21%가 된다. 1870년의 인구는 3440만 명으로 1인당 공조액은 0.365석이었다.
중국은 1812년에 세입액이 4014만 냥(지세 인두세 잡세 염세 관세의 합계)이었고, 미가가 1석에 2냥 정도였으며 중국 석은 일본 석의 거의 절반이었으므로, 일본 석으로는 약 1000만 석이었다. 인구는 1811년에 3억 5860만 명, 1인당 부담액 0.028석으로 일본의 13분의 1이었다. 농업생산액은 일본만큼 정확하지 않지만 우청밍(吳承明)의 추정에 따르면 지주 지대수입과 농민 수입 합계는 가내 부업을 포함해 19세기 전반에 18~19억 냥이었으므로 세입액이 농업생산액의 약 2.1%였다.
조선은 18 19세기 국가세입이 쌀로 환산해 192만 석<지세 46%, 환곡이자 36%, 신역(身役) 대가 16%>이었다. 조선 석은 일본 석의 절반이었으므로 일본 석으로는 96만 석이다. 1800년의 추계인구가 1650만 명이므로 1인당 0.058석이며 중국의 2배였고, 일본의 6분의 1을 웃도는 정도였으며, 19세기 중엽의 추계 총생산 2564만 석의 3.7%였다.
단순한 양적 비교지만 일본의 과중한 세금이 눈에 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 살펴보겠지만, 일본의 세입은 중국 조선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과 비교해도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영국의 1850년 세입은, 5700만 파운드, GNP 5억 3600만 파운드로 세입은 GNP의 10.6%이며 관세와 소비세가 60% 이상으로 직접세는 낮았다.“ (나카무라 사토루의 논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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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무렵 동양 삼국의 재정수입 규모는 미곡 기준으로, 일본이 1,255만석, 청나라가 약 1,000만 석, 조선이 96만 석이다. (석은 일본 석 기준) 조선은 일본의 10분의 1에도 못 미쳐 비교가 큰 의미가 없다. 그런데 어쨌든 일본은 재정수입 규모가 청나라에 앞서 있다.
이것이 일본이 모든 면에서 청을 앞서 있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구규모가 청의 10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세입이 어쨌든 조금이라도 앞섰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나카무라는 이와 관련 다음과 같이 견해를 제시한다.
“18~19세기, 특히 19세기 전기의 차이는 중국의 정체, 일본의 발전, 조선의 후퇴·위기로 개괄할 수 있다.”
“일본의 에도시대는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경제사회로 발전했으나, 중국과 조선은 여전히 자급경제 중심이었다.”
다음은 나카무라 사토루가 삼국의 경제발전 정도를 몇 가지 점에서 살핀 내용이다.
시장, 도시
“일본 에도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는 도시의 급속한 발전이다. 여기에는 병사와 농민의 분리, 조카마치(城下町) 건설, 참근교대(參勤交代), 교통운송과 상업의 발달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인구가 전체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600년에 일본 4.4%, 중국 4.0%였지만, 1820년에는 일본 12.3%, 중국 3.8%였다. 또한 서유럽은 각각 7.8%, 12.3%였다.
조선의 도시인구는 서울이 1428년 10만여 명, 1669년 19만여 명, 19세기 말에 25만 명이었다. 1876년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인구 1만 명 이상인 도시의 인구는 약 40만 명으로 총인구의 2.5%, 5,000이상의 도시까지 합하면 3.4% 정도였다. 평양과 개성이 3~4만 명, 대구 전주 통영 해주 함흥이 1만 명 정도였다.
일본의 도시인구는 18세기에 에도가 100만~110만 명, 오사카(大阪) 교토(京都)가 40여 만 명이었다. 에도는 중앙정부인 막부의 소재지로 정치의 중심, 오사카는 경제의 중심, 교토는 고대부터 수도였으며 문화와 수공업의 중심이었다. 그 외에 조카마치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조카마치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나고야(名古屋)와 가나자와(金澤)의 인구는 10만 명 전후였다. 조카마치에는 무사와 상인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다이묘가 거주하는 성과 그 조카마치 건설은 선진적인 기술 문화를 전국에 보급시켰으며, 토목 건설기술을 발달시켜 농업 광산 항만 등의 발달도 촉진했다.
정기시(定期市)는 중세부터 전국에서 열렸는데, 선진지역에서는 15세기부터 상설점포화가 진행되었고, 기내(畿內, 대체로 현재의 오사카 부, 교토 부, 효고 현)에는 15세기 말부터 16세기에 걸쳐 많은 소도시가 2~3km 간격으로 산재했으며, 오와리(尾張, 현재의 아이치 현 서부)에도 20개 가까운 소도시가 4~6km 간격으로 분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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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도시의 발전은 경제발전 수준, 나아가 전체적인 국력과 문명 발전 수준의 바로미터다. 에도시대 일본의 발전은 조선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며, 청나라에는 물론 서구에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상품 유통, 이자
“일본에서는 근세에 도시와 함께 전국적인 상업 상품유통이 발달했다. 그 중심은 에도 오사카 교토였으며, 에도는 50만 명을 넘는 무사 인구(그중에서도 쇼군 다이묘를 비롯한 상급 무사가 많았다)가 거주했고, 가장 규모가 큰 소비도시로서 매우 많은 소비재가 모여들었고 소비되었다. 오사카 교토가 상업 수공업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에도로 엄청난 상품을 운송했다.
(…)
중국의 明淸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재정적 물류가 축소되어 각 성에서 베이징정부에 보내는 연간 300~400만 석(중국의 1석은 일본의 1석의 약 2분의 1)의 쌀이 전부였다. 선진지대인 강남에서 화베이(華北) 둥베이(東北) 지역으로 면이나 견을 비롯한 상품을 보냈고, 그 지역에서 콩 콩깻묵 등 농산물과 그 가공품을 강남으로 보내는 등 원격지 유통이 발달했다. (…) 도매 중매 소매의 분화는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다.
조선은 재정적 물류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고 상업적 물류는 부차적이었다. 국지적 시장은 농촌의 정기시와 그곳을 순회하는 행상(보부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원격지 유통은 강이나 연해지역의 배를 이용한 운반을 통해 남부 연안 낙동강과 경상도 연안, 남부 연안과 서울을 잇는 유통이 중심이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전라도 행상(海商)도 자기 상품을 자기 배로 운반했고, 거래도 당사자 간의 직접 거래였다. 18세기 말에 서울과 가까운 한강 포구를 비롯한 주요 포구에 중매상인 객주가 성립했다. 중국 원격지 상업에서 나타나는 아인(牙人), 객상(客商)형태의 유통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발달하지 못한 채 중앙정부의 왕족 관료에게 독점되면서 해체되어갔다.
일본은 17세기부터, 오사카 교토 등의 중앙 대도시에 수수료를 받고 지방상인의 거래를 중개하는 니우케돈야(荷受問屋)가 성립했다. 이들은 중국의 아인, 조선의 객주에 가까운 형태였다. 이들은 자기 자금으로 상품을 매입하여 중앙도시와 지방산지 소비지를 연결했는데 위험부담이 있는 반면 이익도 많아, 17세기의 경제발전을 타고 자본을 축적했고 17세기 후반에 중앙 대도시로 진출해 매입돈야(자기 자금으로 자기 상품을 움직이는 도매상)가 되었다.
이어서 도시 내부에서 중매 소매 등의 유통체계가 성립했다. 지방에도 중앙 도매상과 거래하는 생산지 도매상 중매상 생산자에게서 상품을 매집하는 소중매의 계열이 생겼다. 중앙 도매상에 집결된 상품은 소비지 도매 중매 소매의 계통을 거쳐 소비자 손에 들어갔다. 중앙 도매상의 자금이 상품을 구입할 때 가불이나 상품을 판매할 때 후불(외상) 등의 유통신용을 지탱했고, 그 중앙 도매상에게 오사카의 금융업자(거대 환전상)가 융자했다.
일본에서는 법제도 정비 도량형 통일 유통기구 운송제도의 발달과 안정에 힘입어 거래비용이 낮아지고 경쟁이 촉진되어 자본 수익률이 상당히 낮아졌다. 오사카와 에도의 거대상업자본의 매출액 대비 수익률은 18세기 초 15% 정도, 18세기 말 7~8%, 19세기 전기 5% 정도였으며, 미쓰이 고노이케 같은 거대 환전상의 대부이자율(실제로 받은 이자)은 1721~1740년 미쓰이 4.9%, 고노이케 6.3%, 그 후 점차 낮아져 1781~1800년 미쓰이 1.7%, 고노이케 3.821~1840년 미쓰이 1.9% 고노이케 3.4%였다.
농촌의 이자율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오사카 근교의 한 선진 농촌의 지주 쓰쓰이(筒井)가의 대부이자는 토지를 담보했을 때 1728~1758년에 18.6%, 1771~1778년에 14.289~1800년에 14.201~1824년에 12.4%, 1845~1859년에 10.7%였으며, 1세기 동안 8% 정도 낮아졌다.“
(…)
중국에서는 상업 자본에 대한 대부이자율이 일반적으로 월 1%, 연 10~20%였다고 한다. 농민에 대한 대부이자율은 그보다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이자율은 중국보다도 훨씬 높았다. 상호부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일반 대부보다 저리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족계(族契) 동계(洞契)의 경우, 경상도 경주에서는 17세기 말부터 1910년까지 50%를 유지했고, 전라도 영암에서는 1740년대부터 40%, 18세기 말에 30%, 1810년대에 20%였고, 이후 이자율이 올라가 19세기 중엽에 35~40%였으며, 이후 1910년대까지 이 수준이 유지되었다. 18세기 이후의 이자율 저하는 계원의 경제상태 악화 때문에 상호부조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1890~1907년에 서울의 금융업자가 상인에게 대부한 장부를 분석한 이영훈 조영준의 연구에서는 평균 이자율이 연 83%에 이른다. 조선 정부는 1744년에 공정 이자율을 20%로 정했으나(<속대전 續大典>), 실효성이 전혀 없었다. 조선 후기에 왜 이처럼 고금리가 일반적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앞으로 실증연구를 더 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중국과 조선은 18~19세기에 이자율의 변동, 특히 이자율이 낮아지는 경향은 없었으나, 일본은 18세기부터 19세기 전반에 이자율이 상당히 낮아졌다. 17세기 중국과 일본은 이자율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19세기 전반에 일본은 중국의 절반 정도로 이자율이 낮아졌다. 조선은 중국과 비교해도 상당히 높았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이자율은 경제발전 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개 경제규모가 작고 발전 정도가 낮을수록 이자율이 높다. 다른 한편 조선의 고리대에는 ‘특권층’의 문제가 있었다. 같은 책의 두 번째 논문인 “18세기 조선왕조의 경제체제”(이영훈 박이택)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749년 왕실과 중앙의 각 아문 군영이 농촌에서 개별적으로 행하던 일체의 대부업이 금지되었다. 그런데 왕실과 아문의 대부업은 16세기부터 줄곧 있어온 것이었다.”
농민에게 세금을 받고 군포를 받으면서 또 돈놀이까지 했다는 것인데, 어쨌든 조선은 고리대를 없애는데도 실패했다.
근대 시기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그 일본이 19세기 중엽 무렵에 이르면 대청제국보다 재정수입이 앞설 정도가 되었다. 일본이 여전히 ‘왜놈’이라 느껴지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