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세상에서 가장 밥을 빨리 먹는 국가는?' 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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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5.0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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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밥을 빨리 먹는 국가는?'

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전 영남대 교수

 

정확히 언제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의 밥 먹는 습관과 관련하여 늘 잊혀지지 않는 통계자료가 있다. 아마 일본의 어떤 조사자에 의한 것이라고 기억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밥을 가장 빨리 먹는 사람들은 한국인이고, 그 반대로 가장 느리게 먹는 사람들은 이태리인이라는 것이다.

 

이태리인의 평균 식사시간이 45분인데 비해 한국인의 그것은 8분으로 조사되었다. 이런 종류의 조사가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진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고, 또 거의 모든 사회조사가 갖는 근본문제, 즉 조사자나 조사의뢰인의 숨겨진 의도에 따라서 조사결과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런 조사의 결과를 놓고 지나치게 심각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대개 극히 단시간 내에 밥을 먹어치운다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숨길 수 없는 일상적인 체험이다. 어쩌면 8분도 매우 긴 시간이라고 느끼는 한국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나이나 신체조건 그리고 개인 습관에 따른 차이는 당연히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평균 식사시간이 그 정도로 조사되었다는 것은 대체로 수긍할 만한 결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좀 색다른 느낌을 받는 게 있다면 한국인의 식사속도가 세계의 민족 중에서 제일 빠르다는 사실의 확인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오늘날 거의 누구나 인정하는 한국인의 유명한 조급성이 밥 먹는 일에서도 스스로 의식하든 못하든, 관철되고 있었다는 얘기인 것이다.

 

우리는 왜 밥을 빨리 먹어치우는 습관을 갖게 되었을까? 여러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해명이 불가능한 문제인지 모른다. 이런 문제에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내놓는 대답, 즉 우리가 오랜 세월 가난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결국 상투적인 답변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설명이 진실한 해명에서 거리가 멀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예컨대 보릿고개 시절에 비해서 지금은 더 천천히 밥을 먹고 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을 면할수록 우리의 먹는 모양은 더욱 다급하고 게걸스러워졌다고 하는 게 진실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주위에 비만한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먹을 것이 많아졌음이 분명하고, 많이 먹으면 뚱뚱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비만은 단순한 영양상태의 개선의 결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병리적인 증상이며, 그 병리 현상이 무엇보다도 빠른 식사습관에 크게 기인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밥을 천천히 먹으면 소량섭취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만감을 느끼지만, 급히 먹을 때는 꽤 많은 식사량으로도 충족감을 느끼기 힘든 것이다.

 

이태리인들이 항상 포도주가 곁들인 식사를 거의 매일 잔치처럼 푸근한 분위기에서 즐기고 있을 때 우리는 게눈 감추듯이 국밥을 말아먹고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결과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기적을 이루게 되었다는 설명도 물론 틀린 설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경제발전이란 것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경제발전인가 하는 것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임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경제의 향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밥 먹는 속도에 별다른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 점점 더 무반성적인 것으로 되어간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앞으로 앞으로만 내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땅도 망가지고,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건과 권력에 대한 우리의 탐욕은 멈출 줄 모르고, 우리들 대부분은 온갖 이기적인 욕망과 망상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인간 생존의 사회적, 자연적 토대가 급속도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 세상에서 소득이 높아지고, 재화와 서비스가 많아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좀더 시간을 들여 천천히 밥을 먹어야 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생명의 영위에 불가결한 밥이 대체 어떻게 어떤 경로를 거쳐서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인가를 기억하는 습관이 되살려져야 하고, 그 습관은 우리의 밥 먹는 행위 자체에 표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정말 인간다워지려면, 수퍼마켓에서 휴지를 사듯이 쌀을 사들이고, 휴지를 버리듯이 밥을 먹어치울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옛날 사람들처럼 추수감사제를 지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한끼 한끼의 밥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우리 각자의 생명과 삶이 우리의 한정된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근원적인 우주적 힘의 신비로운 원천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겸허한 자각에 도달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의 문화와 사회적 삶 전체가 좀더 영성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되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밥의 출처를 기억하지 못하는 문화는 근본적으로 병들거나 죽은 문화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 속에서는 어떠한 물질적 성취를 가지고도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도 내면적 기쁨을 누릴 수도 없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끼니마다의 밥 먹는 일 자체가 본질적으로는 작은 잔치, 제사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밥을 통해서 가족과 이웃간의 우애와 협동을 확인하고 하늘의 은혜를 느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밥 먹는 순간은 거룩한 시간일 수밖에 없다. 식사행위를 단순히 굶주린 배를 채우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누추하고 야만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가 인간적으로 존엄한 삶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밥을 천천히 먹는 일은 단순히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만 좋은 일은 아니다. 온 마음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밥을 먹는다는 것은 밥에 대하여 그리고 밥을 존재하게 한 온갖 인연에 대하여 공경심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공경심의 습관적인 함양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좁은 개인주의적 자아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좀더 온전하고 근원적인 존재 앞에 겸허해지는 기쁨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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