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이토히로부미를 죽이고 당시 이토를 죽인 이유로 내세웠던 15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지금의 조선사이트들에도 떠돌아다니며 안중근이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
과연 그 15가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민비를 시해한 죄
2. 1905년 11월에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 죄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
3.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제3차한일협약)'을 맺은 죄
4. 고종을 퇴위시킨 죄
5.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죄없는 사람을 학살한 죄
7. 조선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조선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조선인들이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0.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한 죄
11. 조선이 3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
13.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조선인들은 안중근이 내세운 이 조항들을 예로 들며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라며 추앙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측에선 이미 다 반박이 끝난 얘기이며 하나하나 반박해보면 죄다 이상한 소리다.
=-=-=-=-=-=-=-=-=-
1. 민비를 시해한 죄
민비 살해 사건(1895년 10월 8일)인데, 그때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정부가 직접 관여했다는 자료는 없다. 사건 직후에 있었던 조선 국내의 재판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사건의 주모자로 하는 조선왕조내의 권력투쟁으로서의 판결이 나와 있다. 조선의 재판에서는 "왕비 살해를 이번 계획한 것은 저예요."라고 증언한 '이주회(前 군부 협변=차관)'를 비롯한 '박선(일본 공사관 통역)', '윤석우(친위대副尉)'등의 3명과 그 가족을 그 해 10월 19일에 처형했다.
일본 공사·미우라 고로 등의 주도에 의한 친러파의 민비를 배제하기 위한 쿠데타라고 하는 설이 일본의 역사 연구의 대부분에서 채택되고 있다는 견해가 있고, 역사 사전의 대부분이 이 설을 명기하고 있다.미우라를 비롯해 사건에 관여한 혐의가 있는 외교관, 군인들에게는 귀조(歸朝) 명령이, 일본인 민간인은 퇴한(退韓)을 명령받았다. 군인 8명은 제5사단의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미우라들 48명은 살인죄 등으로 기소되어 히로시마 감옥에 미결(未決)로 수감됐지만 민비의 살해에 관해서 증거 불충분으로 면소(免訴)가 되어 풀려났다.
2. 1905년 11월에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한 죄 (을사조약)
한일보호조약(을사조약)은 러일전쟁 강화조약(포츠머스조약)에서 "일본은 조선을 지도, 보호, 감독할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에 근거한다. 포츠머스조약에서 이 조약이 생긴 계기는, 조선이 1895년에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독립했으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1896년 6월 3일에 '제1차 러청밀약'등에서 러시아쪽에 바짝 붙는 등 이같은 조선의 행동으로 동북아 정세가 혼란을 겪고 조선의 보전 때문에 이 보호조약은 필요한 것이었다.
3. 1907년 7월에 '정미7조약'을 맺은 죄
고종은 제2차한일협약(을사조약)을 무시하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고 한일보호조약의 무효를 호소했다. 고종의 국제조약을 무시한 행위로 체결국인 일본은 체면이 손상됐고, 이 사건으로 화가 난 이토히로부미는 고종을 알현해 전보의 사본을 보여주며 "이러한 음엄한 수단으로 일본의 보호권을 거부할 거면 차라리 일본에 당당하게 선전포고해라"라고 한다.
제3차 한일협약의 제4조 : 고급 관리의 임면권(任免權)을 한국통감(당시는 이토히로부미)가 장악한 것.
제3차 한일협약의 제5조 : 한국정부의 관리로 일본인을 등용할 수 있는 것.
국제 룰을 지키고, 국가간의 매너에 따라 행동하고 있던 것은 일본국이며 이토히로부미다.
4. 고종을 퇴위시킨 죄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때는 조선의 농상공부대신인 송병준이, 고종의 양위(왕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줌)를 전개했고, 그것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고종이 퇴위된 것이다. 퇴위를 가장 강하게 압박한 것은 송병준이며, 황제인 고종을 호통쳤다고 한다.
5.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관련한 조서를 낸 것은 순종황제(고종의 아들)이었다. 이유는, 양반제도가 남아있던 당시 조선의 군대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산시킨 것. 당시 양반은 책보다 무거운 물건을 들려하지 않고 땀 흘리는 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평을 들었고 당시 조선군대는 내부적으로 낡은 신분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도 양반 출신.
6. 죄없는 사람을 학살한 죄
고종의 퇴위와 군대 해산에 대해 궐귀한 의병을 일본군이 죽인 것에 대한 죄라고 하는데, 그 의병들은 정규협약에 의거한 조선주둔 일본군을 덮치기도 하고, 이를 진압하는 것은 자위권으로서 당연한 행위다. 게다가 그 의병들은 이유도 없이 조선 민중, 일본인, 지나인들을 덮쳐서 약탈을 반복해왔다. 무고한 사람을 학살한 것은 한국의 의병들 쪽이다.
7. 조선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당시 조선은 자립적인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니 외교권을 갖지 못한 보호국이 되어버린다). 세계에서 가장 낙후된 후진국이었고, 민생을 살피지도 않고, 왕조의 권력투쟁을 거듭하며 스스로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조선은 일본의 강한 지지로 1894~1895년에 갑오개혁을 실시한다. 1895~1896년 을미개혁도 마찬가지다. 1894년 7월 27일에 개혁의 중심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설치해서 다음과 같은 개혁이 진행됐다.
1: 중국식 연호 사용 금지, 2 : 궁내부와 의정부의 분리, 3 : 육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8아문(내무, 외무, 도지[재무], 군무, 법무, 학무, 공무, 농상무)로 재편, 4: 과거 폐지, 5:. 봉건적 신분제 폐지, 6: 노비제 폐지, 7: 인신 매매 금지, 8: 고문 폐지, 9: 죄인 연좌법 폐지, 10: 조혼 금지, 11: 과부의 재혼을 허락, 12: 재정개혁, 13: 조세의 금납화, 14: 화폐의 은본위제, 15: 도량형의 통일
근데 이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가 내무장관이 되어 다음과 같은 개혁이 진행됐다.
1 : 의정부를 내각으로서 근대적인 내각 제도를 도입.
2 : 홍범 14조의 공포.
3 : 팔도를 이십삼부로 바꾸어 지방 제도 개혁.
4 : 세제 제도 개혁.
5 : 근대적인 경찰·군사 제도의 확립.
6 : 사법 제도의 근대화.
그런데 1895년 5월 정권내부의 대립에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한다. 박영효는 다음 박정양내각에서도 내무대신이 되지만, 삼국간섭의 결과,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왕비인 민비를 중심으로 친러파의 힘이 강해졌다. 박영효는 8월 모반혐의를 받고 일본에 망명한다. 그 후는 친러파의 내각이 생겨나 개혁은 정체하게 되었다.
봉건적 신분제의 폐지, 노비제 폐지, 인신매매 금지, 고문 폐지, 죄인 연좌법 폐지, 조혼금지, 과부의 재혼허락... 본 제도에서 하급층 차별을 없앤 것을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이라고 할 셈인가?
8. 조선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조선인들이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일본의 후원으로 갑오개혁을 진행했지만, 개혁으로 기득권익을 잃는 것은 지배자 계급의 '양반'이다. 1~7의 이유로 보호국으로 되어 버려 '반일'활동으로 저항했던 것이 양반이다. 이들이 반일적 배타적 교과서나 반일선동신문에서 반일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것을 단속하고 개혁을 진행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10. 일본의 제일은행권을 강제적으로 사용하게 한 죄
제일은행권의 발행은 1905년으로, 이토히로부미가 취임하기 이전(1906~1909년)이다. 즉, 관련이 없다. 게다가 그 이전의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통화의 발행권이 없고, 정액 동전만 있는 상태로, 지폐는커녕 화폐 경제 이전의 상태였다.
11. 조선이 3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근거없는 억지다. 아관파천에서 고종이 러시아 공관에서 정무를 할때, 러시아에 팔아치운 조선의 광산채굴권, 어업권, 산림벌채권, 철도부설권, 경남 마산포의 사용권등을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돌려받을때 쓴 돈은 바로 일본인들의 세금이었다.
12. 동양의 평화를 깨트린 죄
고종은 러일전쟁 중에 러시아랑 내통하고, 외국인 기자를 매수해서 일본군의 철도와 전신국을 파괴할 것을 은밀히 명하기도 했다. 이건 명백한 일본에 대한 적대적 배신 행위다. 안중근은 당시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에서 식민지의 국왕이 고종과 같은 짓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거 같다.
13.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이것도 1~12까지의 일에 대한 말도 안되는 오해.
14. 일본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고메이 천황의 암살입니다만, 고메이천황의 승하는 1866년 12월 25일로, 당시 이토히로부미는 일본 조슈의 미타지리에 있었고 당시만 해도 궁중에 들어갈만한 신분은 아니었다.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국제사회에 대한제국은 무사하다고 선전했음을 말하는 거 같은데, 당시 조선은 세계 최빈국으로, 청나라의 속국(식민지)에다가, 왕조는 권력투쟁만 일삼았고, 그런 왕조 밑에서 양반들은 횡포만 부리고 있었고 뇌물, 인신매매, 도적이 들끓었던, 정상적인 나라라고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조선이라는 나라를 일본이 보호국으로 하는 것으로 치안이 확립되었고, 조선인들의 생활은 개선되었다. 당연히 이를 가리켜 일본이 국제사회에 한국은 무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
=-=-=-=-=-=-=-=-=-
위 일본측 반박글 원문 링크 : https://hinode.8718.jp/japanese_ito_hirobumi_assassination_reason.html
결론 : 안중근은 또라이 테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