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보관소] 조선인들의 식인 열풍
  • 대동아공영
  • 2019.04.2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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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보관소] 조선인들의 식인 열풍

ㅇㅇ(125.181) 2017-10-27 23: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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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4권, 명종 1년 11월 25일 무인 3번째기사 



한성부(漢城府)가 아뢰기를,


"남부(南部) 명철방(明哲坊)의 전 영춘 현감(永春縣監) 이성(李誠)의 계집종이 3살된 아이를 이달 9일 진시(辰時)에 잃어버렸다가 미시(未時)에 남학동(南學洞) 소나무 밑에서 찾았는데, 오른손 손가락 두 개가 칼에 잘려졌다 합니다. 오작인(仵作人)258) 등이 악질(惡疾) 걸린 자에게 후한 뇌물을 받고 아이들을 유인하여 쓸개를 빼가고 손가락을 잘라 가는 자는 법에 마땅히 참수형에 처해야 하고, 체포하고 신고한 자는 상을 주어야 합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끝까지 추적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매우 경악할 일이다. 형조에서 승전을 받들어 기필코 체포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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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0권, 명종 19년 10월 15일 갑신 1번째기사 



경상도 관찰사 이우민(李友閔)의 계본 【상주(尙州)에 사는 정은춘(鄭銀春)이 한동네 사는 나이 7∼8세 되는 아이를 꾀어 산속에 들어가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내놓고 살점을 베어내 구워 먹으려다가 사건이 발각되어 갇혀 있으니 그를 추국하기를 치계(馳啓)한 것이었다.】 을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이 계본을 살펴보건대 참혹스럽기 그지없다. 자세히 살펴 치죄(治罪)할 것을 형조에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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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32권, 명종 21년 2월 29일 신묘 1번째기사



이때에 경중에는 사람을 죽여 그 쓸개를 취하는 자가 자못 많았는데 혹 잡혀서 죄를 받은 자도 있었다. 이때 사서(士庶)들이 주색(酒色)을 좋아하다가 음창(淫瘡)에 걸린 자가 많았다. 한 의관이 이르기를 ‘사람의 쓸개를 가져 치료하면 그 병이 즉시 낫는다.’ 하므로, 많은 재물로 사람을 사서 사람을 죽이고 그 쓸개를 취하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중의 동활인서(東活人署)·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 및 종루(鐘樓) 등처에 걸인들이 많이 모여 떨어진 옷을 입고 바가지를 들고 가두에 걸식하는 자가 누누이 있었는데, 4∼5년 이래 노중(路中)에 한 명의 걸인도 없었다. 

이는 대개 쓸개를 취하는 자에게 죄다 살해되어서이니 걸인들을 살해하기는 매우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이 다 없어지자 다시 평민에게 손을 뻗쳤기 때문에 여염 사이에 아이를 잃은 자가 자못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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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0권, 선조 9년 6월 26일 정해 1번째기사 



전교하였다.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사로 만들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경연관의 아룀에 의한 것이다. 이 때 경외의 사람들이 인육(人肉)과 사람의 간담(肝膽)을 창질(瘡疾)을 치료하는 약으로 쓰기 때문에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었는데, 이는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의 나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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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 5월 7일 기사 3번째기사 



헌부가 아뢰기를,


"인심이 패악하여 도둑이 사람을 죽여 쓸개를 빼내간다는 말이 떠들썩하게 중외에 퍼졌으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길에 사람들이 감히 혼자서는 다니지 못하고 반드시 무리를 지은 후에야 다니는데, 이는 필시 말을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려는 자의 소행인 듯합니다마는 혹 병을 치료해주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그런 짓을 한 자가 전에도 붙잡혀 죄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 지금도 그런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좌우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계책을 세워 잡게 하고, 경기 방어사에게도 열읍(列邑)에 알려 조치하여 잡게 하도록 하유하소서. 


【비단 경기뿐만이 아니라 사방이 더욱 심하다. 와전된 말에 스스로 놀라 도로(道路)를 가득히 메운 부인(婦人)과 사족(士族)들이 모두 산으로 올라가 골짜기를 넘어다니며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농사를 모두 폐하였다.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이 사람을 미혹시킴이 이에 이르렀으니, 백성들에게 정해진 뜻이 없어 나라의 근본이 쉽게 흔들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보성 군수(寶城郡守) 이충선(李忠善)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위임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그 폐해를 받고 있습니다. 쇠잔한 고을을 소생시키고 번잡한 업무를 다스리는 일을 이런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 김귀상(金龜祥)은 서얼이어서 사대부(士大夫)의 반열에 맞지 않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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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 5월 12일 갑술 3번째기사 



비망기로 일렀다.


"사람이 사람의 쓸개를 빼낸다는 일은 천하 고금에 듣지 못한 바이다. 짐승같은 오랑캐들이 사는 곳이라 하더라도 이런 풍속이 있겠는가? 인심이 흉악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포도 대장은 오래도록 잡지 않았으니 마땅히 하옥하여 무겁게 다스려야지 파직에 그쳐서는 안 된다. 평소 경연에서 일찍이 우리 나라의 간세(奸細)한 무리들이 사람의 쓸개를 몰래 중국에 판다는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하였는데, 지금 그런 폐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형조에 말하여 온갖 방법으로 조치하여 잡되, 잡은 사람에게는 특별히 중한 상을 주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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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 5월 13일 을해 2번째기사



간원이 말하기를,


"말세의 인심이 패악하여 말을 만들어 대중을 현혹시키는 자가 더러 있습니다. 이번 사람을 죽여 쓸개를 뺀다는 말이 중외에 전파되고 있는데, 이도 혹 무뢰배들이 만들어낸 거짓말이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보고 듣는 사람을 혹란시킨 소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하고 있으니 시변이 놀랄 만합니다. 그러니 유사(有司)는 와언이라 하여 즉시 계획을 세워 체포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도 영이 내린 지 여러 날이 되도록 심상하게 방치하여 끝까지 잡을 뜻이 없으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만 추고에만 그치겠습니까. 좌우 포도 대장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사람의 쓸개를 빼내 중국에 팔아 이익을 취한 자가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 비록 한두 간세한 무리가 흉악한 일을 자행했다 하더라도 어찌 이처럼 와전됨이 심하겠습니까. 부연하여 전파해서 인심을 어지럽힌 자가 혹 있을 것입니다. 난언(亂言)의 죄는 나라에 상형(常刑)이 있으니, 역시 해관(該官)으로 하여금 갖가지 방법으로 잡아서 그 죄를 바루어 인심을 진정시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추고하였으니 다시 조처하여 잡는지의 여부를 보아가며 처치하겠다. 잡는 일은 윤허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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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11권, 선조 40년 5월 13일 을해 3번째기사 



비망기로 동부승지 이유홍(李惟弘)에게 전교하였다.


"사람을 죽여 쓸개를 빼낸 사람을 포도청으로 하여금 잡게 하였으나, 별도로 조치해 잡고 엄히 독려해 잡도록 해야 될 듯하니, 진고인(進告人) 및 포착인(捕捉人)은 각별히 중한 상을 주거나 혹은 승직시키거나 면천(免賤)하는 등의 일을 마련하여 효유(曉諭)할 것을 상의, 시행할 것을 형조에 말하라."








조선 명종 이전부터 인심이 안좋아지더니 명종때 급속도로 더 안좋아지며 임꺽정같은 산적떼들이 생기고 온갖 흉악 범죄들이 들끓었다.


조선은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식인풍습과 보양식에 대한 집착 등이 민간에 생겨났는데 사람의 피와 고기가 병에 좋다는 헛소문이 많이 퍼졌었다.


그때문에 악질(문둥병같은 피부병)에 걸린 사람들이 자신들의 병을 낫게 하려고 아이를 납치하거나 유괴하는 일이 매우 잦았다. 


힘없는 아이들을 강제로 납치하거나 어리숙한 아이들을 거짓으로 꾀어서 유괴하여 손가락을 자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심지어는 배를 갈라 죽여서 쓸개를 빼먹는 일도 많았다.


이런 흉악한 일들이 조선에 사회 문제가 될정도로 많이 일어나자 결국 왕에게 상소가 올려지고 국가적인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을 뿐이다.


명종 1년과 19년 기사에는 어린애에 대한 기사만 적혀있다가 21년에는 어른들도 피해를 입는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아마 이 흉악한 풍습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심각해진것 같다.


처음에는 악질에 걸린 사람들이 어린아이의 손가락을 자르는 등 흉악범죄를 저지르다가 나중에는 사람을 시켜서 조직적으로 애, 어른 할것없이 빈틈만 보이면 납치해버려 살해하기까지 이른다.


때문에 어른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길을 걸으면 붙잡혀서 산으로 납치당해 배가 갈리고 쓸개가 빼내어졌고 산에는 배를 가르기 위해 묶어놓은 시체가 너무 많아서 나무하러 갈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거지들 천국이었던 조선에 4~5년동안 거지가 한명도 보이지 않을정도로 인신매매, 유괴, 납치의 사례가 엄청나게 많았다.


사람을 납치해서 죽이고 쓸개를 빼내면 비싼값에 팔리니 너나할것없이 쓸개를 얻으려고 환장하였고 조정의 왕과 관료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이 풍습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이 흉악한 풍습은 명종 1년부터 선조 40년까지 걸쳐 기록되었는데 기간만해도 무려 61년이나 된다. 61년동안 온국민이 광기에 사로잡혀서 식인을 하려고 사람을 납치하고 속이고 속는 추악한 축생도를 펼친것이다.


결국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고 일본의 임진왜란, 청나라의 병자호란에 의해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고 사라지면서 이 악한 풍습도 같이 사라지게 된다.


아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없었다면 조선의 호환처럼 조선이 멸망할때까지 범죄조직이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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